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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이병기[李秉岐]의 문학세계 ***
이병기 [李秉岐 , 1891.3.5~1968.11.29]
시조시인·국문학자.
호 : 가람(嘉藍)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전북 익산(益山)
주요저서 : 《한중록주해(恨中錄註解)》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
한성사범(漢城師範)학교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고문헌(古文獻) 수집과 시조연구에 몰두,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지에 《한강(漢江)을 지나며》를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조시인으로 출발했다. 한편 한국고전(韓國古典)에 대한 주석 및 연구논문을 발표하여, 국문학자로서의 자리도 굳혔다. 1926년 최초로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고 《시조란 무엇인가》 《율격(律格)과 시조》 《시조와 그 연구》 등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이 되고 1939년에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을 발간, 《문장(文章)》지 창간호부터 《한중록주해(恨中錄註解)》를 발표하는 등 고전연구에 정진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피검, 함흥(咸興) 형무소에 수감되어 l년 가까이 복역하다 1943년 가을에 기소유예로 출감한 후 귀향하여 농사와 고문헌연구에 몰두했다. 광복 후 상경, 미군정청 편찬과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고 각 대학에서 국학을 강의했다. 1948년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 《근조내간집(近朝內簡集)》 등을 역주(譯註) 간행했고, 1954년 학술원회원이 되었으며, 이 해 백철(白鐵)과 공저로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를 발간, 국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 분석했다. 시조시인으로서 현대적인 시풍을 확립하였고, 국문학자로서는 수많은 고전을 발굴하고 주해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 난초(蘭草) ***
1
한 손에 책(冊)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2
새로 난 난초 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볕이 발틈에 비쳐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3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孤寂)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 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4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르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 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淨)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 이해와 감상 **
이 작품은 자연의 생생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청신(淸新)한 감각으로써 현대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가람의 시조 정신이 잘 드러난다.
섬세한 감각과 절제된 언어로'난초'의 고결한 외모와 세속을 초월한 본성의 아름다움을 신비롭게 형상화하고 있다. 의인화 수법을 통해 난초와 독자가 동일화되는 경지까지 유도한다. 이 시조는 고결하게 살고자 하는 지은이의 소망을 드러내며 현대 문명 속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이 지향해야 할 삶의 자세를 일깨워 주는 난초의 고결한 삶에 대해 예찬하고 있다.
1)에서는 난초가 개화하는 순간을 나타내고 있다. 2)에서는 난초의 새로 나온 잎과 바람을 대비시켜 표현하고 있으며 '아침볕'이란 시각적 이미지와 '난초 향기'라는 후각적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다. 3)에서는 난초와 화자의 마음의 교감이 잘 이루어져 있으며, 4)에서는 난초의 외양과 내면 세계가 잘 묘사되어 있다.
※ 난초를 소재로 한 4편 7수의 연시조로, 난초가 지닌 청아한 모습과 맑고 고결한 성품을 예찬하고 있다. 난초를 깊은 애정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 작품은, 작가가 추구하는 고결한 삶의 방식을 통해 현대인이 지향해야 할 삶의 자세를 제시해 준다.
※ 난초의 청신(淸新)한 외모와 고결한 내적 품성( 외유내강 )을 예찬한 작품으로 난초를 의인화하여 노래한 작품이다. 고결하게 살고자 하는 시인의 소망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지향점을 일깨워 주고 있다.
** 가람과 난초 **
가람 이병기는 그의 생활과 작품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가람이 그의 생애에 걸쳐 술과 난초와 책을 얼마나 사랑하였는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술이 그의 호방하고도 거리낌 없는 기절을, 책에 대한 학자로써의 열정을 나타낸 것이라면, 난초에 대한 사랑은 고아한 풍경 속에서 새로운 향기를 찾으려 했던 시조 시인으로써의 노력과 그 뜻을 같이 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난초가 가람의 작품 세계를 해명하는 상징물로서 등장한 것은 결코 범상한 인연이 아니다. 난초 이외에도 매화, 수선화는 가람의 대표적인 소재이다. 이것들은 어렵고 각박한 고난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꿋꿋한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이니, 가람의 삶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곧 가람 자신의 마음과 표상을 난초의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 풍란(風蘭) ***
본문
나는 난(蘭)을 기른 지 20여 년 20여 종으로 30여 분(盆)까지 두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의 집을 화초집이라고도 하고, 난초 병원이라 기도 하였다. 화초 가운에 난이 가장 기르기 어렵다. 난을 달라는 이는 많으나, 잘 기르는 이는 드물다. 난을 나누어 가면 죽이지 않으면 병을 내는 것이다. 난은 모래와 물로 산다. 거름을 잘못하면 죽든지 병이 나든지 한다. 그리고 볕도 아침저녁 외에는 아니 쬐어야 한다. 적어도 10년 이상 길러 보고야 그 미립이 난다 하는 건, 첫째 물 줄 줄을 알고, 둘째 거름 줄 줄을 알고, 셋째 위치를 막아 줄 줄을 알아야 한다. 조금만 촉랭(觸冷)해도 감기가 들고 뿌리가 얼면 바로 죽는다.
이전 서울 계동(桂洞) 홍술햇골에서 살 때 일이었다. 휘문 중학교의 교편을 잡고, 독서(讀書), 작시(作詩)도 하고, 고서(古書)도 사들이고, 그 틈으로써 난을 길렀던 것이다. 한가롭고 자유로운 맛은 몹시 바쁜 가운데에서 깨닫는 것이다. 원고를 쓰다가 밤을 새우기도 왕왕 하였다.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난의 위안이 더 필요하였다. 그 푸른 잎을 보고 방렬(芳烈)한 향을 맡을 순간엔, 문득 환희의 별유 세계(別有世界)에 들어 무아무상(無我無想)의 경지(境地)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어 학회 사건에 피검되어 홍원·함흥서 2년 만에 돌아와 보니 난은 반수 이상이 죽었다. 그 해 여산(礪山)으로 돌아와서 십여 분을 간신히 살렸다. 갑자기 8·15 광복이 되자 나는 서울로 또 가 있었다. 한겨울을 지내고 와 보니 난은 모두 죽었고, 겨우 뿌리만 성한 것이 두어 개 있었다. 그걸 서울로 가지고 가 또 살려 잎이 돋아나게 하였다. 건란(建蘭)과 춘란(春蘭)이다. 춘란은 중국 춘란이 진기한 것이다. 꽃이나 보려 하던 것이, 또 6·25 전쟁으로 피난하였다가 그 다음 해 여름에 가 보니, 장독대 옆 풀섶 속에 그 고해(枯骸)만 엉성하게 남아 있었다.
그 후 전주로 와 양사재(養士齋)에 있으매, 소공(素空)이 건란 한 분(盆)을 주었고, 고경선(高敬善) 군이 제주서 풍란 한 등걸을 가지고 왔다. 풍란에 웅란(雄蘭)·자란(雌蘭) 두 가지가 있는데, 자란은 이왕 안서(岸曙) 집에서 보던 그것으로서 잎이 넓죽하고, 웅란은 잎이 좁고 빼어났다. 물을 자주 주고, 겨울에는 특히 옹호하여, 자란은 네 잎이 돋고 웅란은 다복 다복하게 길었다. 벌써 네 해가 되었다.
십여 일 전 나는 바닷게를 먹고 중독되어 곽란( 亂)이 났다. 5, 6일 동안 미음만 마시고 인삼 몇 뿌리 달여 먹고 나았으되, 그래도 병석에 누워 더 조리 하였다. 책도 보고, 시도 생각해 보았다. 풍란은 곁에 두었다. 하이얀 꽃이 몇 송이 벌었다. 방렬·청상(淸爽)한 향이 움직이고 있다. 나는 밤에도 자다가 깨었다. 그 향을 맡으며 이렇게 생각을 하여 등불을 켜고 노트에 적었다.
잎이 빳빳하고도 오히려 영롱(玲瓏)하다.
썩은 향나무 껍질에 옥(玉) 같은 뿌리를 서려 두고,
청량(淸凉)한 물기를 머금고 바람으로 사노니.
꽃은 하이하고도 여린 자연(紫烟) 빛이다.
높고 조촐한 그 품(品)이며 그 향(香)을,
숲 속에 숨겨 있어도 아는 이는 아노니.
완당(阮堂) 선생이 한묵연(翰墨緣)이 있다 듯이 나는 난연(蘭緣)이 있고 난복(蘭福)이 있다. 당귀자·계수나무도 있으나, 이 웅란에는 백중(伯仲)할 수 없다. 이 웅란은 난 가운데에서도 가장 진귀(珍貴)하다.
'간죽향수문주인(看竹向須問主人)'이라 하는 시구가 있다. 그도 그럴 듯하다. 나는 어느 집에 가 그 난을 보면,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겠다. 고서(古書)도 없고, 난(蘭)도 없이 되잖은 서화(書畵)나 붙여 논 방은, 비록 화려 광활하다 하더라도 그건 한 요릿집에 불과하다. 두실와옥(斗室蝸屋)이라도 고서 몇 권, 난 두어 분, 그리고 그 사이 술이나 한 병을 두었다면 삼공(三公)을 바꾸지 않을 것 아닌가! 빵은 육체나 기를 따름이지만 난은 정신을 기르지 않는가!
** 이해와 감상 **
가람 이병기에게 난은 그의 정신세계이자, 고결한 인간적 면모를 지닌 대상으로 존재한다. 이 글은 난의 일반적인 생태를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난의 아름다움, 특히 방향을 가장 절실하게 느꼈던 순간을 무아 무상의 별유세계(別有世界)라하여 자신의 생활과 난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난을 돌볼 수 없었던 시기의 역사적 사건들을 기술하여 개인사의 시련과 고통을 난의 시련과 일치시키고 있다. 이러한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작자는 난이 지닌 기품과 방렬(芳烈)한 향(香)을 담담하게 기술한다.
이 글에서 지은이는 고달픈 생활에 여념이 없을 때 난을 통해 정신적 위안을 얻었고, 역사적·개인사적 시련기에 처했을 때는 난도 역시 고해(枯骸)만 남게 되어 자신과 난과의 인연은 고결한 인간의 정신적 세계를 표상한다. 난의 이러한 속성은 비록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어도 나타나며, 기품과 향기가 동일한 깊이를 지닌 사람은 난초의 품과 향을 안다고 하면서 정신적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글에서 작자는 난초에 대해서 인격적 친화감을 가질 정도로 오랫동안 난을 가까이해 왔음을 고백하고 있다. 난초라는 자연물을 통해 지은이가 드러내려는 관조의 세계는 지극히 고상하고 해맑은 성정의 세계이다. 부질없는 속물 근성을 경계하면서 높고 청아(淸雅)한 경지를 난과의 인연에서 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수필이 인격의 표백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감상해 보고, 법정 스님이 '무소유'라는 글을 읽고 법정이 난에게 가졌던 관점과 가람을 비교하면서 글을 읽으면 보다 의미가 있으리라고 생각을 한다.
*** 오동꽃 ***
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한두 개 소리 없이 나려지는 오동(梧桐)꽃을
가랴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이 시조는 달밤에 오동꽃이 지는 정취를 선경후정(先景後情)식 구성으로 노래한 것이다. 시적 자아의 시선 이동에 따라 시상을 전개하여 마음 속에 떠오르는 미묘한 정서의 파동을 그리고 있다. 달밤의 정취와 오동꽃의 지는 모습을 한 폭의 수묵화를 보듯이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회화적 심상으로 형상화]. 전체 구성은 시적 자아의 시선 이동에 따르되 선경후정(先景後情)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 시조를 혁신하자--이병기(李秉岐) ***
1932년 1월 23일부터 2월 4일까지 11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1925년경부터 10년간은 프로파와 민족파가 우리 문단을 할거하였다. 이 시기에 민족파에서는 시조의 부흥을 꾀하였으나 그 작품과 이론의 수준이 프로파의 주장에 비하여 열세를 면치 못하였고, 그 결과 시조의 존립의의에 대한 찬부(贊否)양론이 엇갈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해보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집필된 것이 이 논문이다. 시조는 정형이며 고전적이면서도 오히려 시조의 존립의의는 그 정형과 고전적임에 있다고 설파하면서 명료하고 평이한 대중문학, 진실하고 신선한 사실문학(寫實文學)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시조가 혁신되어야 할 점으로, ① 실감실정(實感實情)을 표현하자. ② 취재(取材)의 범위를 확장하자. ③ 용어의 수삼(數三 : 선택) ④ 격조(格調)의 변화 ⑤ 연작하자 ⑥ 쓰는 법, 읽는 법 등 여섯 가지를 들었다. 종래의 투어(套語)나 인습적인 작법에서 벗어나자는 것, 취재의 범위를 넓혀 자기류의 작풍(作風)을 수립하자는 것, 부르는 시조보다도 짓는 시조, 읽는 시조로 발전시키자는 것이 중심골자였다. 특히 격조에 대하여 "격조는 그 말과 소리와 합치한 그것에 있다"고 함으로써 양자의 결합관계로 고찰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발전적인 사고였다. 그러나 짓는 시조 읽는 시조를 강조한 나머지 부르는 시조와의 화해를 전연 고려하지 않은 태도는 온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시조의 과거가 창(唱)의 흐름이었다는 관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연작의 문제인데, 과거의 것은 각수(各首)가 독립된 상태였던 것을 제목의 기능을 살리고 현대시작법을 도입하여 여러 수가 서로 의존하면서 전개, 통일되도록 짓자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창작으로 실천하여 완성한 이가 이병기 자신이었고, 오늘날 형태의 발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엄격히 보면 시조의 전통적 연작법으로서는 어긋나는 것이다.<자료출처 : 똥침 국어교실>
*** 매화 Ⅱ ***
더딘 이 가을도 어느덧 다 지나고
울 밑에 시든 국화 캐어 다시 옮겨 두고
호올로 술을 대하다 두루 생각나외다. //
뜨다 지는 달이 숲 속에 어른거리고
가는 별똥이 번개처럼 빗 날리고
두어 집 외딴 마을에 밤은 고요 하외다. //
자주 된서리 치고 찬바람 닥쳐오고
여윈 귀뚜리 점점 소리도 얼고
더져 둔 매화 한 등걸 저나 봄을 아외다.
가람 이병기는 고시조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성격을 탈피하기 위해 실생활에서 느낀 감정을 표현해 사실성을 획득하고 있으며, 창(唱)으로 불려지던 시조에서 벗어나 읽히는 시조로의 전환을 꾀하였다. 또 하나의 연으로 끝나던 고시조의 관습에서 연작 형태의 시조를 실험하기도 하였다.
한편, 난초, 수선화, 그리고 매화는 이른바 가람 이병기 시조의 3재(三材)라 일컬어지는데, 이들 소재를 통해 어렵고 혼란스러운 사회와 허망하고 이지러진 삶 속에서도 의기를 상실하지 않는 지사의 고결한 인품과 삶의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매화는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면서도 자신의 향기를 아무에게나 팔지 않는다. 서리 속에서 고독한 절개를 자랑하던 국화마저 시든 겨울 밤, 외딴 마을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화자는 외롭고 적막한 주변 풍경을 관조적으로 묘사하다가 마지막 연에 가서 봄을 기약하는 매화의 모습을 통해 조국의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된서리 치고 찬바람 불어오면서 귀뚜리 소리마저 얼어붙는 삭막한 겨울에 아무렇게나 버려 둔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며 봄을 예고하는 것을 보고 생명의 소생에 대한 환희를 느낌과 아울러 조국 광복에의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조의 주제는 3연에서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생명의 소생에 대한 환희 또는 조국 광복에 대한 신뢰라는 이중적 의미로 읽힌다.
그리고 이 시조는 고답적(高踏的)인 정서의 답습(踏襲)을 거부하고 신선하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제재를 형상화하고 있는 바, 2연의 중장의 '별똥이 번개처럼 빗 날리고', 3연 중장의 '여윈 귀뚜리 점점 소리도 얼고' 등과 같은 표현이 그 좋은 예이다. 특히 3연의 중장은 귀뚜라미 소리(청각)을 얼음의 촉각적 심상과 연결하여 공감각적 심상의 효과를 얻어 내고 있다.
*** 저무는 가을 ***
들마다 늦은 가을 찬바람이 움직이네
벼이삭 수수이삭 으슬으슬 속살이고
밭머리 해 그림자도 바쁜 듯이 가누나
무 배추 밭머리에 바구니 던져두고
젖 먹는 어린아이 안고 앉은 어미 마음
늦가을 저문 날에도 바쁜 줄을 모르네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 이해와 감상 **
늦가을의 농촌 풍경을 그린 연시조. 첫 수에서는 화면을 크게 잡아 찬바람이 불고 일손이 바빠지는 늦 가을날 오후 무렵의 농촌 들판을 그렸고, 둘째 수에서는 시선을 좀 더 가깝게 이동하여 밭머리에 앉아 있는 시골 아낙네와 아이의 모습을 포착했다.
그러면서 첫 연과 둘째 연 사이에는 약간의 의미상 긴장이 있다. 첫 연에 나타난 풍경은 늦가을의 하루가 저물면서 날씨가 차가워지고 일손이 바쁜 상황인데, 둘째 연의 아낙네는 어린아이를 안고 앉아 바쁜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 관계에서 중심에 놓이는 것은 물론 둘째 연이다. 즉, 늦가을의 쓸쓸하고 스산한 들판에서도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앉아 다급해하지 않는 어머니의 따뜻한 모정(母情)과 마음의 여유가 주체적 중심이 되는 것이다.
시조라는 옛 형식을 빌렸으되 관습화된 시상(詩想)에 빠지지 않고 생활 속의 정경과 실감을 포착한 점도 이 작품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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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람 이병기[李秉岐] ***
가람 이병기[李秉岐](1891∼1968),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 이론과 창작으로 20세기 시조 중흥에 기여하였으며 국문학의 올과 날을 세움.
가람 이병기는 국문학자 또는 시조시인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지칭만으로는 무엇인가 아쉽다는 생각이다. 물론 가람은 우리 국문학 연구의 초창기에 올과 날을 챙겨 세운 학자요, 쇠퇴 일로에 있던 우리 시조시를 부흥·발전시킨 시인이었다. 이 두 가지 면에서의 업적만으로도 가람은 우리 문학사와 더불어 길이 그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학자·시인의 지칭만으로 아쉽다는 것은 워낙 가람에겐 독보적인 분야가 많았기 때문이다. 교육자·한글운동가·애란가·애주가로서의 가람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렇다.
가람은 16세까지 고향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결혼까지 한 후, 학교공부를 생각하여 전주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학을 하였고, 서울의 관립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할 때의 나이는 20세였다. 가람의 학력은 이것이 전부였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사범학교 재학 중 매주 일요일 2시간씩 '조선어강습원'에 나가 주시경의 조선어 강의를 청강하였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가람은 거의 독학으로 국문학연구와 시조시 창작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가람의 좌우명은‘후회를 하지 말고 실행을 하자’는 것이었다. 가람이 50여년간 꾸준히 《일기》를 쓴 것도, 78세 생애에 언제나 떳떳하여 흠결을 남기지 않은 것도 이 좌우명을 실행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 식민지시대에 있어서의 가람의 행적을 보아서도 그렇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어야 했고, 이른바 '창씨개명'에도 응하지 않았다. 임종국의《친일문학론》에 의하면 가람은 일제시대에 쓴 '시와 수필의 어느 한 편에서도 친일문장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얼굴'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맹자는 백세지사(百世之師)를 말한 바 있다. 백대의 후세까지도 사표가 될 사람을 일컬음이다. 이러한 사람의 학풍이나 풍도를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사람을 본떠 분발하고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도 했다. 가람 이병기의 한 생을 살피는 동안 줄곧 따라온 낱말의 하나가 바로 이 '백세지사(百世之師)'였다. 21세기에도 가람은 겨레의 스승으로 우러름을 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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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람시조집 [嘉藍時調集] ***
요약
가람 이병기(李秉岐)의 시조집.
구분 시조집
저자 이병기
시대 1939년
본문
A5판. 한지철. 104면. 1939년 8월, 저자의 초기 작품 71편 193수를 모아 5장(章)에 나누어 엮어서 발행하였다.
〈계곡〉 〈대성암(大聖庵)〉 〈도봉(道峯)〉 등 수록된 작품은 우리 고유의 정서를 정형시로 형상화하였으며, 고루한 재래 시조의 탈을 벗고 소재를 생동감 있게 사실적으로 다루어, 현대시조 문학의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광복 후인 1947년 9월에 중간(重刊)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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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李秉岐]의 연보 ***
1891년 3월 5일,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진사동) 570번지 수우재守愚齋에서 변호사 이채의 장남으로 출생.
* 원수리(진사동), 가람 이병기의 생가는 초가 네 채로 지방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어 있고, 사랑채에는 수우재守愚齋, 진수당鎭壽堂 등의 편액과 주련柱聯이 걸려있다. 생가 앞에는 너른 들, 뒤에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안채 뜰에는 고풍스런 맷돌, 절구통 등이 놓여 있고 마루에는 뒤주가 놓여지고 벽에는 시렁이 매여져 있다. 가람은 생전에 스스로 三福 곧 술복, 글복, 제자복을 타고났다고 자랑삼아 하였다.
* 아호는 嘉藍 (이밖에 친구들이 부른 별칭으로 임당任堂, 가남柯南이 있음)
1898년∼1908, 고향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
1906년 3월 5일,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은동)의 광산김씨문의 규수와 결혼.
1908년 7월 10일, 장녀 순희 탄생.
1909년 4월 13일, 일기쓰기 시작.
1910년 3월, 전주공립보통학교 졸업.
4월, 관립한성사범학교 입학.
1912년 10월, [조선어강습원] 1년 수료,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문법 강의를 들음.
# 10월에 일본으로 수학여행.
1913년 3월 23일, 관립한성사범학교 졸업.
# 남양, 전주제2, 여산 보통공립학교, 훈도 하며 국어, 국문학, 국사학에 관련된 문헌을 수집하며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 또는 산문학을 연구 창작함.
1921년 2월 26일, 권덕규, 임영재, 선생들과 [조선어연구회]를 발기함.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를 조직 간사에 피임.
1922년 4월, 동광, 휘문, 보고 교원.
1924년 3월 16일, 장녀 순희 신왕균에게 출가(충남 아산군 영안면).
4월 14일, 장남 동희 출생(1945년 학도병으로 나가 실종).
8월 25일, [동아일보]에 시조 <제주ㅅ길에>를 발표함으로 작품활동시작.
1925년, [조선문단]에 시조<한강을 지나며>를 발표.
<한강을 지나며>
어머님 가시던 날이 오늘밤 같았으면
저 좋은 달 아래서 이 강을 건너시련만
그 밤은 모진 물결에 등불조차 없었어라.
1926년 4월 16일, 차녀 한희 출생.
9월 17일, 영도사에서 [시조회]를 발기.
10월∼11월, [동아리보]에 <시조란 무엇인고>를 연재.
12월 2일, 수필 <그리운 가을밤>을 발표.
1928년 9월 2일, [시조회]를 [가요연구회]로 개칭, 연구조직을 확립함.
12월 30일, 천도교강당에서 <시조의 사적 발전과 문학의 지위>로 강연.
12월 30일, [학생]에 <시조와 그 연구>를 발표.
1929년 1월 14∼15일, 안국동 예배당에서 개최된 [한글강습회] 강사로 <한글과 시조>에 대하여 강연.
2월 19일∼20일, [연동청년면려회]에서 <한글과 고가요>에 대하여 강연.
4월, [신생]에 <시조의 현재와 장래>를, [삼천리]에 <도봉산행>을 발표.
6월, [신생]에 기행문 <낙화암을 찾는 길에>를 발표.
7월, 차남 경희 출생.
10월, [신생]에 기행문 <내장산의 단풍>을 발표.
12월, [신생]에 수필 <세모감>을, [신생]에 <주시경 선생 배상전>을 발표.
1930년 [학생] -문예강좌 란에 <시조와 그 연구>를 연재.
5월, [학생]에 기행문 <광주, 남한산성>을 발표.
12월, [신생]에 기행문 <경주의 달밤>을 발표.
12월 13일,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1931년 7월∼8월, 삼남 각 지방을 순회 <한글과 우리문학>에 대하여 강연을 하며, 각 지방의 방언. 민속. 민요. 고문헌을 수집.
1932년 4월 21일, 삼남 종희 출생.
5월, [신생]에 수필 <경무대>를 발표.
7월, [한글]에 <한글의 경과>를 발표.
11월, [동아일보]에 <시조는 혁신하자>를 발표.
12월, [신생]에 수필 <소춘>을 발표.
1933년 7월 25일∼29일, 화계사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개정안을 토의.
8월, [신동아]에 기행문 <마한고도 익산, 후백제 고도 전주>를 발표, [휘문]에 기행문 <박연행>을 발표.
1934년 3월, 수필 <가람의 출전과 그 유래>를 발표.
9월, [진학단보]에 <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을 발표.
10월 25일, [동아일보]에 <시조의 기원과 그 형태>를 연재.
1935년 1월 2일, <조선어표준어> 사정위원.
3월, [휘문]에 수필 <서사정과 범양정>을 발표.
9월 4일, [동아일보]에 기행문 <해산유기>를 연재.
12월, [한글]에 <세종대왕과 한글>을 발표.
1936년 2월 10일, [진학단보]에 <송강가사의 연구>를, [삼천리]에 <시조의 감상과 작법>을 발표.
1937년 3월, 구왕궁 아악부, 경복, 덕수상업 강사.
1938년 4월 8일, 연희전문학교 강사, <조선문학>을 강의.
7월, [시학]에 <시와 시조>를 발표.
9월, [박문]에 <약간어제에 대하여> 발표, [동아일보]에 <시조모집고선후> 발표.
1939년 1월, [문장]에 <한중록주해>를 연재.
8월 10일, [조선농업]에 <십혜록>을 연재.
8월 26일, [동아일보] 학예면의 시조란을 담당. 독자들의 시조창작을 지도.
9월, [한글]에 <말모르는 작가들>을 발표, [동아일보]에 <역사문학과 정사>를 발표, [농업조선]에 <전원시조감상>을 발표, [조선일보]에 <시조감상법>을 발표.
1940년 1월, [박문]에 수필<독서>를 발표.
10월 [박문]에 <시화>를 발표.
10월, 보성전문학교에서 <종래의 가악>에 대하여 특강.
1941년 1월, [농업조선]에 <역대의 농정고>를 발표.
10월, [춘추]에 수필<독서와 서지>를 발표.
1942년 10월 22일, 휘문고보 교원을 사임.
#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피검.
1943년 9월 18일, 기소유예로 출감, 귀장서적을 가지고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며 우리 어문학을 연구.
1945년 8월 15일, 해방직후 상경하여 군정청 편수관에 임함.
9월, [진단학회]연구발표회에서 <우리 가요>의 여음에 대하여 발표.
1946년 5월, 군정청 편찬과장에 임함.
9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 국문학과 교수.
1947년 4월 20일, [민중이보]에 <고전문학에 나타난 향토성>을 발표.
7월, 군정청 편선과장을 사임,
7월 20일, [대학신문]에 수필<산유화>를 발표.
12월, [중학생]에 <우리말공부>를 발표.
# 단국대학, 신문학원, 예술대학 강사.
1948년 4월, 동국대학, 국민대학, 숙명여자대학교, 세종중등교원양성소, 의대예과강사.
9월, [새교육]에 <해방후 국어교육>을 발표.
1949년 3월, [새교육]에 <고전과 국어교육>을 발표.
3월 10일, 차녀 한희, 충청남도 공주읍의 송석일과 결혼.
5월 18일, [국도신문]에 <고전의 삼폐>를 발표.
9월 25일∼27일, [경향신문]에 수필<해방전후기>를 발표.
10월 1일, [민성]에 <불우한 문일평군>을 발표.
10월, [신천지]에 수필<유행과 습관>을 발표.
12월 16일∼17일, [서울신문]에 <고전위작>을 연재.
12월, [조선일보]에 <민요와 시조>를 발표, [민성]에 <국학의 세 거인>을 발표.
1951년 1월 3일, 차남 경희,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유재희와 결혼.
2월, [신문화]에 <우리국민>을 발표.
3월, 전주 명륜대학교수, 전북 전시연합대학교수,
11월,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임시관리책임자로 피선.
12월, [학호]에 <국문학연구 -학도에게>를 발표, [지리산]에 <지리산가와 춘향전>을 발표.
1952년, [국어문학]에 <감상력을 주로 한 국어문학연구>를 발표, [국어문학]에 <청구영언과 해동가요>를 발표.
9월 5일, 전북대학교 문리대학 학장.
10월 10일, 삼남 종희, 충청남도 공주읍 윤옥병과 결혼.
1953년 1월, [시조연구]에 <역대시조의 몇몇 작품>을 발표.
4월, [호남절의사]에 <임진왜란과 의병의 궐기와 그 전국추이의 대개>를 발표, [국어문학]에 <시가문학>을 발표, [국어문학]에 <정읍사의 고찰>을 발표.
1954년 2월 16일, [전북대학보]에 수필<삼관여록>을 발표.
3월 22일, [전북대학보]에 <서동요와 설화>를 발표.
4월 6일, 학술원회원.
5월 26일, [전북대학보]에 <속단>을 발표.
5월∼9월, [불교]에 <불교와 국문학>을 발표.
7월 15일, [전북대학보]에 <적성가>와 <시가문학의 본질, 종류, 어원형태규정>을 발표.
8월, [삼남일보]에 <세종대왕의 국문학>을 발표, [단광문화]에 수필<풍란>을 발표.
12월, [전북대학보]에 수필<덕진호반>을 발표, [국어문학]에 <동동과 달거리>를 발표.
1955년 1월 1일, [삼남일보]에 <을미년에 사적 고찰>을 발표.
1월 10일, [삼남일보]에 수필<매화>를 발표.
1월 31일, [전북대학보]에 수필<촛불>을 발표.
1월, [한글]에 <시용향악보의 한 고찰>을 발표.
3월 24일, [전북대학보]에 <극가와 소설>을 발표.
4월 25일, [전북대학보]에 <골계문학>을 발표.
5월 25일, [전북대학보]에 <한자음독>을 발표.
6월 22일, [전북대학보]에 <전원의 노래>를 발표.
7월 10일, [전북대학보]에 수필<난초>를 발표.
10월 9일, [전북대학보]에 <세종대왕의 독서와 창작>을 발표.
10월 11일, [전북대학보]에 <한글과 한글날>을 발표.
11월 30일, [전북대학보]에 <오공즙>을 발표.
# 중앙대학교 문리대 교수.
1956년 1월 1일, [전북일보]에 수필<매란과 새해>를 발표.
2월 5일, [전북일보]에 <구·율·우·송의 교분>을 발표.
3월, [학도주보]에 <시조의 혁신>을 발표.
4월 1일, 중앙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5월 1일, 서울대학교 대학원강의.
5월 24일, 학술원주최 <우리 고전문학에 나타난 국민사상>을 시공관에서 학술강연.
6월 30일, [동아일보]에 수필<백련>을 발표.
8월 13일, 정년으로 전북대하교 제반직을 퇴임.
8월 15일, [전북일보]에 <향토와 문학>을 발표.
10월 10일, [삼남일보]에 <우리 문화의 성조 세종대왕>을 발표.
12월, [국어국문학]에 <별사미인곡과 속사미인곡>을 발표.
1957년 4월, 학술원 추천회원.
7월, [사상계]에 수필<누가 판단자이며 누가 애국자인가>를 발표.
9월 14일, [한국일보]에 수필<가을과 독서>를 발표.
# [일석회갑논문집]에 <시조창작론>을 발표.
# [현대]에 <시조창작과 창>을 발표.
# [동방학지]에 <한국서지의 연구 上>을 발표.
10월 9일, 한글날 기념행사 후 귀가도중 뇌일혈로 와병, 한때 언어기능마비였으나 차츰 회복.
1958년 3월 31일, 강단직을 사임하고 생가 수우재守愚齋가 있는 익산으로귀향.
8월, [동방학지]에 <한국서지의 연구 下>를 발표.
1960년 8월 2일, 학술원 임명회원.
1961년 6월 8일, 전북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음.
1963년 5월, 갑오동학혁명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1968년 11월 29일, 향년 77세로 새벽 3시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 生家에서 별세함.
1979년 6월, [가람시조문학상]제정.
3. 묘 소 : 전북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 가람의 生家 뒷산 선영에 있으며, 봉분이 따로 없고 묘비 밑이 묘로 되어 있다. 생가 앞에는 차량 20여 대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4. 가람시비 :
* 여산남초등학교교정 시비
생가로부터 멀지 않은 여산남초등학교 교정에는 가람의 족각상과 함께 <별>이 새겨진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별>
바람이 소슬하여 뜰 앞에 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 익산군 여산남초등학교교정의 시비에 새긴 가람의 시조)
* 전주시 다가공원 시비
전주시 다가공원에는 가람 서거 1주기인 1969. 11. 30에 호국영령탑을 마주한 곳에 시비를 세워 두었는데, 일제 암흑기에 쓰여 진 시조 <시름>을 서예가 강암 송성용의 글씨로 새겨 두었다.
<시름>
그대로 괴로운 숨지고 이어 가랴하니
좁은 가슴 안에 나날이 돋는 시름
회도는 실꾸리같이 감기기만 하여라
아아 슬프단 말 차라리 말을 마라
물도 아니고 돌도 또한 아닌 몸이
웃음을 잊어 버리고 눈물마저 모르겠다
쌀쌀한 되 바람이 이따끔 불어온다.
실낱만치도 볕은 아니 비쳐든다
친구들 외로이 앉아 못내 초조 하노라
(*전주 다가공원 시비에 새겨진 가람의 대표작 시조)
5. 저 서 :
[가람시조집], 1939년 8월 16일, 문장사 刊.
[역대시조선], 1940년 3월 25일, 문서관 刊.
[인현왕후전], 1940년 11월, 박문서관 刊.
[지나명시선], 1944년, 박종화와 共編.
[의유당일기 意幽堂日記], 1948년 5월, 백양당 刊
[근조내간집近朝內簡集], 1948년 1월, 국제문화관 刊.
[요로원야화기], 1949년 5월, 을유문화사 刊.
[가루지기타령], 1949년, 국제문화관 刊.
[역대 조선여류문집], 1950년 1월, 이병주박사와 共編.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 1957년 6월, 백철박사와 共著, 신구문화사 刊.
[현대시조선총], 1958년 4월, 이태극 共編, 새글사 刊.
[국문학개설], 1961년 4월, 일지사 刊.
[가람문선], 1966년 5월 30일, 신구문화사 刊.
[가람 이병기박사 송수논문집], 1966년 11월, 삼화출판사 刊.
6. 상 훈 :
1960년 7월 17일, 학술원공로상을 받음.
1962년 8월 15일, 문화포장을 받음.
※ 참 고 :
* 1975. 3. 15. <新韓國文學全集·35 -詩全集 1>, 語文閣 刊.
* 1991. 11. 15. <난초> 이병기, 미래사 刊.
* 1995. 8. 10. <이병기 -그 난초 같은 삶과 문화>, 김제현, 건국대학교 출판부 刊.
* 1996. 5. 27, [경향신문] 문학의 해 특집기사 <우리문화유산을 찾아 -전북 익산 여산면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생가> 趙雲贊기자의 글.
* 1996. 11. 13. <한국문학지도 (下)>, 한국문학연구소, 계몽사 刊.
* 1997. 1. 17. <문학비 답사기>, 함동선, 앞선책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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