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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5일 아산 UBF 주일메시지 누가복음 제 27 강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
말씀 / 누가복음 15 : 1~32
요절 / 누가복음 15 :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일반적으로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을 박사라고 부릅니다. ‘척척박사’, ‘만물박사’... 박사들은 박사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면, ‘내가 정말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뭐 좀 안다’고 여기는 박사가 있는데 그런 박사를 B급 박사라고 합니다. 한편, ‘내가 뭘 모른다’고 여기는 박사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실력없고 진짜 아는 것 없는 박사라서 ‘내가 뭘 모른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고 워낙 공부를 많이 해보니 지식의 세계가 대단히 넓다는 것을 실감하고 겸손하여 ‘내가 아는 것이 없다’고 하는 성숙한 박사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안다고 생각할수록 사람을 판단하였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말씀을 읽을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가 많이 안다고 자부심이 높았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신학적 지식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을 하시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도 영적인 인식이 조금 확장된다 싶으면 ‘나는 남이 모르는 것을 안다’ 여기며 오만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의 감동을 받으면 사람들에게 달려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만 깨달은 영적 비밀을 가지고 빨리 어리석은 애들을 가르치고 뜯어 고치려고...’ 자기가 안다고 생각한 순간 말이 많아지는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알되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잃은 자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동참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세리는 남자 중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죄인'은 유흥업소 여자 접대부를 칭합니다.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나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비참함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선택과 잘못된 삶의 행적으로 인하여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아주 많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 입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인지하고 그것이 죄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결단한 것을 일컬어 '회개'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 중에는 친구 따라 나온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러 온 세리와 죄인들은 회개한 사람이거나 회개하려고 하는 사람들 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세리와 죄인들에 대하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관점은 예수님과 달랐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회개하였든지, 회개하려고 하든지 아무 관심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점은 '한 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죄인들은 접촉 하지 말아야 할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식사하는 예수님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거룩한 분이라면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식사하는 일을 할 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알기 쉬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었습니다. 들에서 풀을 뜯기다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세어 보니 한 마리가 없었습니다.
양 치던 목자는 잃은 양 한 마리를 간절하게 찾아 다녔습니다. 찾고 찾다가 찾았을 때 목자는 너무 좋아서 양을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모아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유대에서 양은 가족과 같았습니다. 주인들은 양 하나 하나 이름을 붙여서 대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은 양이 아예 집안에 들어와 사람과 같이 잤습니다. 양 한 마리를 찾아 다니느라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목자에게 있어서 양은 물질적인 계량으로 판단하는 그 이상이었습니다.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사람을 두고 말씀 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유대인들이 양 한 마리를 산과 골짜기로 찾아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는 세리와 죄인들이 그와 같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잃은 양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원래 하나님 안에 있었으나 길을 잃고 나가 돌아 다닌 잃은 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을 잃은 양이라고 하십니다. 간절하게 찾아야 하고 우리에 다시 들어와야 하는 양으로 보셨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드라크마는 그리스 동전입니다. 성경에서 세겔, 달란트는 유대화폐입니다. 데나리온, 앗사리온, 고트란트는 로마화폐입니다. 드라크마와 렙돈은 헬라 화폐입니다. 당시 유대에서 로마, 헬라 화폐가 모두 사용되었습니다. 1 드라크마는 1 데나리온과 같았습니다. 당시 유대 풍습으로 약혼 할 때 신랑이 드라크마 열 개를 한 세트로 하여 신부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여자들은 신랑이 준 이 드라크마 열개를 줄에 엮어서 머리에 장식으로 하고 다녔습니다. '나 이제 임자 있어요' ‘나 이제 약혼했어요’ 하는 의미였습니다. 열 개 한 세트여야 했는데, 만약 한 개가 없으면 나머지 아홉 개로는 하지 못하였습니다. 문제는 이 열 고드란트 머리 장식없이 밖에 나갔다가 그 모습을 남편이 보거나 시댁 식구, 남편 친구가 보았을 경우 큰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새로운 애인 구함) 열 드라크마 한 세트에서 하나가 없으면 큰일인 것입니다. 드라크마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강조하는 것은 잃은 하나는 그 하나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잃은 세리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은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드라크마를 찾아야 나머지 아홉 개도 한 세트를 이룰 수 있듯이 세리와 죄인들이 돌아와야 하나님께서 보실 때 유대 커뮤니티도 온전하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관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죄인을 영원한 죄인으로 대하였습니다. 회개하였어도 죄인으로 대하였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내면이 변화되었어도 죄인으로 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도 은혜로운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의 회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한 가지 비유를 더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둘째가 하루는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물려 줄 재산 중에서 자기 분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재산을 관리해본 적도 없고 관리할 능력도 없으면서 돈 부터 달라고 할 때 덥썩 돈 내주는 부모 없습니다. 부모님들이 보기에 돈 버리고 자식도 버릴 것이라 걱정 됩니다. 괘씸한 것은 유산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받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유산부터 달라고 하는 것은 불효막심한 요구입니다. 말씀의 아버지는 괘씸한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걱정 되는 바가 없지 않았지만 둘째가 달라는 대로 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돈 보다 아들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13~16절을 보십시오. 둘째 아들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날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재산 관리를 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많은 재산을 쉽게 썼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큰 불황이 겹쳤습니다. 돈 빌릴 곳도 없고 일할 곳도 없었습니다. 그는 아주 궁핍하여졌습니다. 가장 불결하게 여기는 동물 돼지를 쳤다는 것은 매우 비천해 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너무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그것조차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준 것을 다 소비하고 극한 궁핍에 도달하고 말았습니다.
17~20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둘째아들은 자신의 비참함을 깨달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그나마 잘한 것은 아버지 집을 생각한 것입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는 이 비참함에 이른 것이 자신이 아버지를 떠난 것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받아 줄 것이라고 신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집으로 가기만 하면 지금의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의 비천함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원하는 대로 살았으며 그것이 자신들을 비참한 상태로 이르게 하였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가면 자신들의 비참함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비천함을 깨달았다고 해도 혼자 절망하기만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고 결단한 둘째아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결단한 세리와 죄인들의 결단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20절 후반절에서 24절을 보십시오. 둘째 아들이 결단하고 그대로 실행하여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겼습니다. 아버지는 달려가 그를 안고 입을 맞추며 아들을 맞아 주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아들은 아버지께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며 자신의 선택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 온 둘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힌 것은 영광을 입혀 준 것이며, 가락지를 끼운 것은 그의 소속이 회복되었음을 알려 줍니다. 노예는 신을 신지 않았는데, 신을 신겨주신 것은 그에게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 온 것에 대해서 아버지는 큰 기쁨을 나타냅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버지는 아들이 재산 어떻게 했는지 따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기쁨은 나갔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 온 기쁨이 너무 큰 나머지 기뻐서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25~30절을 보십시오. 이때 밭에서 일하던 큰 아들이 돌아옵니다. 큰아들이 집에 오니 풍악이 울리고 춤추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 물어 보았더니 한 종이 당신의 동생이 건강하게 돌아 온 것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알려주었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났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왜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를 환영하고 잔치하는 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기쁨을 모르고 화 내는 큰아들의 모습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입니다.
31, 3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내것이 다 네것이다’ 큰아들도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 안에 있습니다. 그가 실감하지 못하였을 뿐,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듬뿍 받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학생들도 많이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목자님들은 여름수양회 주제강의로 듣거나 수양회의 아침이나 저녁 메시지로도 들었을 것입니다. 탕자와 같이 살았던 죄인으로 자기를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잔치를 벌이며 기뻐하시는 아버지를 주제로 이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주십니까? 세리와 죄인들에게 들으라고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라는 대상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도록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29절과 30절 말씀이 큰아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입장입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큰아들은 첫째로 자신이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겼다고 자부합니다. 아버지의 명을 어긴 일이 없다고 밝힙니다.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이 충만합니다. 큰아들의 두 번째 견해는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입니다. 그는 돌아온 동생을 ‘허랑방탕하다 돌아온 아들’이라 단정합니다. 세 번째는 자기에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친구들과 즐기게 한 일 없으면서 동생에게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자기 중심의 비교입니다.
큰 아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의롭고 성실한 사람으로, 동생에 대해서는 허랑방탕한 죄인으로, 아버지에 대해서는 인색함과 허비하는 것에서 균형감 없는 불공평한 분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의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여러 가지가 아닙니다. 바탕에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근본문제 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기에 관점이 삐뚤어져 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아버지께 더 큰 유익을 드리지 못하는 자신을 안타깝고 부족하다 여길 것입니다.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내가 잘했다는 의로움은 없습니다. 또한,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자기도 기뻐합니다. 아버지의 기쁨이 잃은 동생을 다시 찾아서 라는 것을 알고 기쁨에 동참하였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였다면 아버지가 자기에게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물려 주시는 사랑과 은혜가 많은 분임을 신뢰하면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자신에게 집착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에 집착하느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동생을 위한 잔치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죄인과 의인을 골고루 사랑하시는 그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러가지 문제가 있고 과제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기초해 볼 때 우리도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우리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생활과 삶에서 말씀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싫은 말을 왜 반복하여 하는지 자책하기보다 먼저 삶에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자 방향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를 열망할 때, 머리에 떠오르는 말을 스스로 검증할 수 있고 마음에 일어나는 충동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돈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근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확신이 없고 그러니 돈을 의지하려 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헛된 열정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입니다. 나는 어떻게 될까? 나의 장래가 망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불안과 염려도 하나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물러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에 모든 해결이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핵심이라고 성경을 통하여 많이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오만한 자기의, 딱딱하게 사랑없음, 어리석은 불평에 들지 않는 비결임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배웁니다.
예전에 저의 할머니가 저에게 ‘미안하다’ 하신 적 있습니다. 고모 고모부들에게 저의 허물을 한 번 이야기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 왜 미안하냐고 대답하였습니다. 할머니가 이미 나에에게 준 것이 얼마나 많은데 미안하냐고 반문하였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많이 사랑하였는데, 그런데 미안하다고 합니다. 더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하고 더 아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저에게는 대구에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와 사촌들이 삽니다. 작은 집의 기조는 남에게 폐 안 끼치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에게 간섭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구로 우리가 가지 않습니다. 관계가 냉랭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저의 사촌동생을 아끼고 사랑합니다.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께도 자주 전화합니다. 그 분들이 저에게 잘해주어서가 아닙니다. 할머니가 그들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할머니께 감사하여서 할머니가 긍휼히 여긴 작은 아버지와 그 아들을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사람들에게 자기 존재감을 늘 확인하려고 사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입증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산다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돈을 의지하는 사람도 같습니다. 장래가 불안하고 미래에 대한 염려가 있는 사람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과도하게 자기에게 집착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캠퍼스에 올라가지 않는 사람, 양들을 위하여 눈물로 중보기도 할 줄 모르는 사람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는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다시금 깊이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그 사랑의 힘이 너무 커서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여서 말을 스스로 제어할 힘을 얻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비호감 주는 일방적인 사람 대하는 습관을 이겨낼 힘 얻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람 도우라고 하면 부담부터 느끼고 두려움부터 찾아오는 것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뛰어넘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은 사랑함으로써 배우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근사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온전히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지극하신 사랑을 알면 우리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큰아들 같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왜 소중한 영혼의 존재인지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사람들 앞에서 존경받는 것을 너무 좋아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받은 사랑으로 다른 인생, 다른 영혼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산 형제들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역사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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