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子貢曰 如有博施於民 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자공이 말하기를, “만일 백성들에게 널리 은혜를 베풀고, 백성을 구제해 줄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인(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인(仁)이라고만 하겠는가. 반드시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요임금이나 순임금도 오히려 그렇게 못한 것을 마음 아파하였다. 博廣也 仁以理言 通乎上下 聖以地言 則造其極之名也 乎者疑而未定之辭 病心有所不足也 言此何止於仁 必也聖人能之乎 則雖堯舜之聖 其心猶有所不足於此也 以是求仁 愈難而愈遠矣 博은 넓다는 것이다. 仁은 이치로써 말한 것이니 상하에 통용되는 것이고, 聖은 경지로 말한 것이니 그 지극한 곳에 나아간 것의 이름이다. 乎라는 것은 의심하면서 아직 확정하지는 않는 말이다. 病이란 마음에 부족하게 여기는 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인에만 그치겠는가? 반드시 성인이라야만 능히 할 수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비록 요순 같은 성인일지라도 그 마음속에는 아직 여기에 부족하다고 여기는 바가 있었으니, 이것으로 인을 구한다면, 더욱 어렵고 더욱 멀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新安陳氏曰 玩文意 當是博施於民而又能所濟者衆 蓋博施自我之施恩澤而言 濟衆自衆人之被吾恩澤者而言 濟衆難於博施 是進步說 有雖博施而衆不皆被其澤者 신안진씨가 말하길, “글의 뜻을 잘 음미해보면, 당연히 백성에게 널리 베풀고 또한 구제받는 자가 많다는 것인데, 대체로 널리 베푼다는 것은 내가 은택을 베푸는 입장에서 말한 것이고,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것은 여러 사람이 내 은택을 입는다는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濟衆이 博施보다 어렵다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한 것이다. 비록 널리 베풀더라도, 여러 사람이 모두 그 은택을 입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仁是通上下而言 有聖人之仁 有賢人之仁 有衆人之仁 一事之仁也是仁 全體之仁也是仁 仁字直 聖字橫 주자가 말하길, “仁은 상하를 통하여 말한 것이니, 성인의 仁도 있고, 현인의 仁도 있으며, 衆人의 仁도 있다. 일 하나의 仁도 역시 仁이고, 온전한 體의 仁도 역시 仁이니, 仁자는 從적이고, 聖자는 橫적이다.”라고 하였다. 仁以道理言 是箇徹頭徹尾物事 聖以地位言也 不是離了仁而爲聖 聖只是行仁到那極處 仁便是這理 聖便是充這理到極處 不是仁上面更有箇聖 仁은 도리로써 말한 것으로, 철두철미하게 하나의 사물이다. 聖이란 경지로써 말한 것이지, 仁을 떠나서 聖이 되는 것이 아니다. 聖은 그저 仁을 저 지극한 곳까지 행하는 것일 뿐이다. 仁이 곧 이러한 이치라면, 聖은 곧 이러한 이치를 지극한 곳까지 확충하는 것이지, 仁 위에 다시 무슨 聖이 있는 것이 아니다. 仁就心上說 聖却是積累得到這田地 索性仁了 仁이란 마음 위로 나아가 말한 것이고, 聖은 도리어 쌓고 쌓아서 이러한 경지에 이른 것이니, 아예 仁인 것이다. 乎字以含下一句意 乎자는 이로써 아래 한 구절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朱子曰 言博施濟衆之事 何止於仁 必是行仁極致之人 亦有不能盡 堯舜也做不了 蓋仁者之心 雖無窮 而仁者之事 則有限 自是無可了之理 주자가 말하길, “널리 베풀고 많이 구제하는 일이 어찌 仁에 그치겠는가? 반드시 仁을 극치까지 행하는 사람일지라도, 또한 다할 수 없음이 있으니, 요순임금도 역시 다해낼 수는 없었다. 대체로 어진 사람의 마음이 비록 끝이 없다 할지라도, 어진 사람의 일에는 한계가 있으니, 다 해낼 수 있는 이치가 저절로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博施濟衆 此固是仁 然不是人人皆能做底事 必有聖人之德 又有天子之位而後 可以當此 若必以爲聖人能之 則堯舜亦尙以此爲病 此非言堯舜不能盡仁 蓋勢有所不能耳 博施濟衆 이것은 본래 仁이지만, 사람마다 모두 능히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반드시 성인의 덕을 갖고 있어야 하고, 또한 천자의 지위를 갖게 된 이후에, 비로소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반드시 성인만이 해낼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고 해도, 요순임금도 역시 여전히 이것을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요순임금이 仁을 다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형세상 해낼 수 없는 바가 있었을 따름이다. 或問必聖人而後能之乎 曰 此正謂 雖聖人亦有所不能耳 必也聖乎 蓋以起下文堯舜猶病之意 혹자가 묻기를, “반드시 성인인 연후에 해낼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이것은 바로 ‘비록 성인일지라도 역시 해낼 수 없는 바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반드시 聖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이 말은 이로써 아랫글의 ‘요순임금도 여전히 그것을 근심하였다’는 뜻을 유발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博施濟衆 如何分別 曰 博施是施之多施之厚 濟衆是及之廣 누군가 묻기를, “博施와 濟衆은 어떻게 분별합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널리 베푼다는 것은 베품이 많고 베품이 두텁다는 것이고,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것은 미침이 넓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博施濟衆 固仁之極功 譬如東大洋海 固是水 但不必以東大洋海之水 方爲水 只甁中傾出來底 亦便是水 博施濟衆 固是仁 但那見孺子將入井時 有怵慽惻隱之心 亦便是仁 此處最好看 널리 베풀고 많이 구제한다는 것은 본래 仁의 지극한 공효이니, 비유하자면 동대양해가 본래 물이지만, 그러나 반드시 동대양해의 물이어야만 비로소 물로 여기지는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저 병 속에서 흘러나온 것도 역시 곧 물이다. 博施濟衆이 본래 仁이지만, 어린아이가 장차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았을 때 두려워하고 측은해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또한 바로 仁이니, 이곳에서 제일 잘 살펴볼 수가 있다.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此兩句 當連看 蓋云便是聖人 也有做不得處 且云堯舜雖曰比屋可封 然在朝亦有四凶之惡 又如孔子設敎 從游者甚衆 孔子豈不欲人人至於聖賢之極 然而人人亦各自皆有病痛 반드시 聖의 경지일 것이니, 요순임금도 오히려 그것이 부족할까 근심하셨다! 이 두 구절은 마땅히 연결시켜 살펴보아야 한다. 대체로 이르길, 설령 성인일지라도 역시 해낼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한 것이다. 또한 이르길, 요순임금에게는 비록 집집마다 封할만큼 덕이 높고 현명한 사람이 많았다고 하였지만, 그러나 조정에 역시 四凶의 악인이 있었고, 또한 공자님께서 가르침을 베풀 적에 따라다니며 배운 사람이 대단히 많았는데, 공자님이 어찌 사람마다 성현의 지극한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지 않았겠는가마는, 그러나 사람마다 또한 각자 모두 병통을 갖고 있었다고 한 것이다. |
| 3 |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가까운 곳에서 비유를 취할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인(仁)을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셨다. 譬喩也 方術也 近取諸身 以己所欲 譬之他人 知其所欲亦猶是也 然後推其所欲 以及於人 則恕之事而仁之術也 於此勉焉 則有以勝其人欲之私 而全其天理之公矣 譬는 비유하는 것이다. 方은 방책이다. 가까이에 제 몸에서 취하여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로써 그것을 타인에게 비유한다면, 그가 하고자 하는 바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후에 그가 하고자 하는 바를 미루어서 남에게 미치게 한다면, 이는 恕의 일이자 인을 행하는 방법이다. 여기에 힘쓴다면, 곧 그 인욕의 사사로움을 이길 수 있고, 그 天理의 공정함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朱子曰 夫子分明說 夫仁者則是言仁之道如此 可謂仁之方則是言求仁當如此 夫仁者與可謂仁之方 正相對說 주자가 말하길, “공자께서는 구분하여 명확하게 말씀하셨는데, ‘夫仁者’는 곧 仁의 도가 이러하다고 말한 것이고, ‘可謂仁之方’은 곧 仁을 구하려면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夫仁者와 可謂仁之方은 바로 서로 대비하여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此章是三節 前面說 仁之功用 中間說 仁之體 後面說 仁之方 이 장은 3절인데, 앞에서는 仁의 공용을 말하였고, 중간에서는 仁의 體를 말하였으며, 뒤에서는 仁의 실행방법을 말하였다. 或問凡己之欲卽以及人 不待推而譬彼而後施之者 仁也 以己之欲譬之於人 知其亦必欲此而後施之者 恕也 此其從容勉强 固不同矣 혹문에, “무릇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으로써 남에게 미치게 하되, 저 사람에게 미루어 비교함을 기다리지 않고서 베푸는 것은 仁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으로써 남에게 비교하여, 그도 역시 반드시 이것을 하고 싶어함을 안 뒤에 베푸는 것은 恕다. 여기서 그 조용하게 행하는 것과 억지로 애써서 하는 것은 본래부터 같지 아니한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新安陳氏曰 博施濟衆 聖人所難能也 立人達人 仁也 安行此仁 學者未易能也 能近取譬 恕也 强恕求仁 學者所可能也 子貢以聖人所難能者爲仁 愈難而愈遠 夫子敎其以學者所可能者求仁 切近而可進 신안진씨가 말하길, “博施濟衆은 성인께서도 해내기가 어려운 바이다. 남을 세워주고 남을 이르게 해주는 것은 仁이다. 이러한 仁을 편안하게 행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이 아직 쉽게 해낼 수 없는 것이다. 자기 몸에서 가까이 취하여 미루어감은 恕다. 恕에 힘써서 仁을 구하는 것은 배우는 자도 해낼 수 있는 바이다. 자공은 성인께서도 해내기 어려운 것을 仁으로 여겼는데, 갈수록 어렵고 더욱 멀어졌다. 이에 공자께서는 그에게 배우는 자도 해낼 수 있는 것으로 仁을 추구하여, 절실하고 가까운 것으로써 나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 程子曰 醫書 以手足痿痺爲不仁 此言最善名狀 仁者以天地萬物爲一體 莫非己也 認得爲己 何所不至 若不屬己 自與己不相干 如手足之不仁 氣已不貫 皆不屬己 故博施濟衆 乃聖人之功用 仁至難言 故止曰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欲令如是觀仁 可以得仁之體 又曰 論語 言堯舜其猶病諸者二 夫博施者 豈非聖人之所欲 然必五十乃衣帛 七十乃食肉 聖人之心 非不欲少者亦衣帛食肉也 顧其養有所不贍爾 此病其施之不博也 濟衆者 豈非聖人之所欲 然治不過九州 聖人非不欲四海之外亦兼濟也 顧其治有所不及爾 此病其濟之不衆也 推此以求 修己以安百姓則爲病 可知 苟以吾治已足 則便不是聖人 呂氏曰 子貢有志於仁 徒事高遠 未知其方 孔子敎以於己取之 庶近而可入 是乃爲仁之方 雖博施濟衆 亦由此進 정자가 말했다. “의서에 손과 발이 위축되어 마비가 된 것을 不仁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제일 잘 형용하여 이름 지은 것이다. 仁이라는 것은 천지만물을 나와 일체로 삼는 것이니 내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것이 나 자신임을 알게 된다면, 어떤 것엔들 이르지 않겠는가? 만약 나에게 속하지 않다면 저절로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니, 마치 손과 발이 마비된 것처럼 기운이 이미 관통하지 않아 모두 나에게 속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널리 은혜를 베풀고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은 곧 성인의 공효와 작용이다. 仁은 말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고, 자신이 영달하고 싶으면 남을 영달시켜주어야 하니, 가까이에서 취하여 비유해 나간다면 이것이 바로 인을 행하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에 그친 것이다. 자공으로 하여금 이와 같이 인을 살펴서 인의 본체를 터득할 수 있기를 바라신 것이다. 또 말하길, 논어에서 요순이 오히려 부족하다고 근심한 것이 둘이라고 말하였는데, 무릇 은혜를 널리 베푸는 것이 어찌 성인이 하고자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반드시 나이가 50이어야 비단옷을 입고, 70이어야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한 것은, 성인의 마음이 젊은 사람도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도록 바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을 다 기르기에는 부족한 것이 있었을 따름이니, 이것은 그 베풂이 넓지 못한 것을 부족하다고 근심하신 것이다. 뭇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 어찌 성인이 바라신 바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다스림이 구주에 불과한 것은 성인이 사해 밖도 아울러 다스리기를 바라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다만 그 다스림이 미치지 못한 바가 있었을 따름이니, 이것은 그 구제한 사람이 많지 않음을 부족하다고 근심하신 것이다. 이것을 미루어 구한다면, 자신을 닦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것은 요순도 부족하다고 근심한 것으로 삼았다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진실로 내 다스림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곧 성인이 아니다.” 여씨가 말하길, “자공은 인에 뜻을 두었지만 헛되이 고원한 것만 일삼아 그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공자는 자기에게서 그것을 취하라고 가르쳤고, 자공은 거의 가까운 데에서 들어갈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인을 행하는 방법이며, 비록 널리 은혜를 베풀고 많은 백성을 구제하는 것일지라도 역시 이것을 말미암아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痿於危反 痹音卑 冷濕病也 痿는 발음이 위고, 痺는 발음이 비이며, 냉습병이다. 新安陳氏曰 仁者之心 視人物卽己身也 體認得人物皆爲己 則此心之仁 周流貫通 何所往而不至乎 신안진씨가 말하길, “어진 사람의 마음은 남과 외물이 곧 자기의 몸이라고 보는 법이다. 남과 외물이 모두 자신이 된다는 것을 체득하여 인정한다면, 이러한 마음의 仁은 두루 흘러 관통하니, 어디에 간들 이르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又反言之 若是人物爲人物 而不屬於己 自不相干 신안진씨가 말하길, “다시 거꾸로 말한 것이다. 만약 남과 외물이 남과 외물이 되어서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면, 저절로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雖是己身 然其氣旣不周流貫通 則手足亦自不屬己矣 신안진씨가 말하길, “비록 자기의 몸일지라도 그러나 그 氣가 이미 두루 흘러 관통하지 않게 되었다면, 손과 발은 또한 저절로 나에게 속하지 않은 것이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程子作一統說 集註作三段說 是如何 朱子曰 程子之說如大屋一般 某說如在大屋下分別廳堂房室一般 누군가 묻기를, “정자는 하나로 통합하여 말하였지만, 집주는 삼단으로 나누어 말하였는데,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정자의 말은 큰 집과 같은 것이고, 나의 말은 마치 큰 집 아래에다 廳과 堂과 房室을 나누어 구별한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程子合而言之 上下似不相應 不若分兩截看 惟仁者之心如此 故求仁之術 必如此也 정자는 합하여 말을 하였지만, 위아래가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 같으니, 둘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만 못하다. 오직 어진 사람의 마음이 이와 같기 때문에, 仁을 구하는 방술도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勉齋黃氏曰 或以爲痿痺者不識痛痒之謂也 如此則覺者爲仁 仁其可以覺言乎 曰 所謂仁者 當於氣已不貫上求之 면재황씨가 말하길, “혹자는 마비라는 것이 아픔과 가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와 같다면 느끼는 것이 仁이니, 仁을 느낀다는 것으로써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이른바 仁이라는 것은 마땅히 氣가 이미 통하지 않는다는 것 위에서 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齊氏曰 手足不屬己 氣之不貫也 天地萬物不屬己 心之不貫也 身與手足一體也 外邪間之 故與氣不相貫 己與天地萬物一體也 人欲間之 故與心不相貫通 身與手足之間者 醫必有方通 我與天地萬物之間者 聖人亦必有方 然則 恕者 聖人示學者以去間之方也 제씨가 말하길, “수족이 나에게 속하지 않는 것은 氣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지만물이 나에게 속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과 수족은 일체이지만 외부의 간사함이 끼어들기 때문에 氣와 더불어 서로 관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와 천지만물은 일체이지만, 인욕이 끼어들기 때문에, 마음과 더불어 서로 관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몸과 수족에 끼어든 것은 의사는 반드시 처방을 갖고 있어서 통하게 할 것이다. 나와 천지만물에 끼어든 것에 대해서, 성인께서도 또한 반드시 처방을 갖고 있으니, 그렇다면 恕라는 것은 성인께서 배우는 사람에게 보여주어, 이로써 끼어든 것을 제거하게 하는 처방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仁之功用無窮 聖人之心 亦與之相爲無窮 신안진씨가 말하길, “仁의 공용은 무궁하니, 성인의 마음 또한 그와 더불어서 서로 무궁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呂說欠就取譬上說恕字分曉 신안진씨가 말하길, “여씨의 말은 取譬(가까운 데에서 취하여 미루어감) 위로 나아가 恕자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는 것이 부족하다.”라고 하였다. 程子曰 聖則無大小 至於仁 兼上下大小而言之 博施濟衆 亦仁也 愛人亦仁也 堯舜其猶病諸者 猶難之也 博則廣而無極 衆則多而無窮 聖人必欲使天下無一人之惡 無一物不得其所 然亦不能 故曰 病諸 정자가 말하길, “聖에는 크고 작음이 없지만, 仁에 이르면 상하와 대소를 겸하여 말하는 것이다. 博施濟衆 역시 仁이고, 남을 사랑하는 것도 역시 仁이다. 요순임금께서도 오히려 그것을 부족하다고 근심하였다는 것은 그것을 어렵다고 여기신 것과 같다. 博은 곧 넓고 끝이 없는 것이고, 衆은 곧 많고도 끝이 없는 것이다. 성인은 반드시 천하에 한 사람의 악이라도 없게 하고 사물 하나라도 제 자리를 얻지 못함이 없게 하고자 하실 것이지만, 그러나 또한 이렇게 해낼 수 없기 때문에 ‘病諸’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仁與聖何以異 曰 人只見孔子言 何事於仁 必也聖乎 便謂仁小而聖大 殊不知 此言是孔子見子貢問博施濟衆 問得來事大 故曰 何止於仁 必也聖乎 蓋仁可以通上下言之 聖則其極也 聖人人倫之至倫理也 旣通人理之極 更不可以有加 若今人或一事是仁 亦可謂之仁 至於盡仁道亦謂之仁 此通上下言之也 如曰 若聖與仁 則吾豈敢 此又却仁與聖俱大也 大抵盡仁道者 卽是聖人 非聖人 則不能盡得仁道 又曰此子貢未識仁 故測度而設問也 惟聖人爲能盡仁 然仁在事 不可以爲聖 又問堯舜其猶病諸 果乎 曰 誠然也 聖人惟恐 所及不遠不廣 四海之治也 孰若兼四海之外 亦治乎 是嘗以爲病也 博施濟衆 事大 故仁不足以名之 博施濟衆 非聖不能 何曾干仁事 故特曰 夫仁者 立人達人 取譬可謂仁之方而已 使人求之 自反便見得也 雖然聖人未有不盡仁 然敎人不得如此指殺 누군가 묻길, “仁과 聖이 어떻게 다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사람들이 그저 공자가 ‘何事於仁 必也聖乎’라고 말씀하신 것만 보고서 곧바로 仁이 작고 聖은 크다고 말하는데, 이는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 말은 공자께서 자공이 博施濟衆을 묻는 것을 보고서, 물어보는 일이 컸기 때문에 ‘어찌 仁에만 그치겠느냐? 반드시 聖의 경지일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대체로 仁은 상하의 경지를 통틀어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聖의 경우에는 그 중에서 제일 지극한 것이다. 성인은 인륜의 지극한 윤리로서, 이미 사람의 이치의 지극한 곳에 통하였으니, 더이상 더할 것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지금 사람에게 혹시라도 하나의 일이 仁할지라도, 역시 이를 일컬어 仁이라고 말할 수 있고, 仁道를 극진히 함에 이르러도 역시 이를 일컬어 仁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위아래를 통하여 말한 것이다. 예컨대 ‘만약 聖과 仁이라면 내가 어찌 감히 감당하겠는가?’라고 말한 경우, 여기에서는 또한 오히려 仁과 聖 모두 큰 것이다. 대저 仁道를 극진히 한다는 것은 곧 성인이니, 성인이 아니라면 仁道를 극진히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이것은 자공이 仁을 미처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헤아려서 가정하여 말한 것이다. 오직 성인만이 仁을 극진히 할 수 있지만, 그러나 仁은 일에 있어서는, 聖의 경지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묻기를, “요순임금도 오히려 그것을 부족하다고 근심하셨다는 것이 과연 그러하였습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정말로 그러하였다. 성인께서는 오직 미치는 바가 멀지 않고 넓지 않음을 두려워하였으니, 사해를 잘 다스리는 것이 어찌 사해의 밖까지 겸해서 또한 잘 다스리는 것만 하겠는가? 이것은 일찍이 병통으로 삼았던 것이다. 博施濟衆은 일이 너무 크기 때문에, 仁으로는 그것을 命名하기가 부족한 것이다. 博施濟衆은 성인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찍이 仁을 구하는 일이었겠는가? 그래서 다만 ‘무릇 仁이라는 것은 남을 세워주고 남을 이르게 해주는 것이고, 제 몸 가까이에서 취하여 미루어가는 것이 仁의 실행방법’이라고 말하였을 뿐이다. 만약 사람들이 그것을 구하여 스스로 돌이켜본다면,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다고는 할지라도, 성인께서는 仁을 극진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이렇게 해서는 안 되니, 가리키는 바를 줄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語仁而曰可謂仁之方也已者 蓋若便以爲仁 則反使不識仁 只以所言爲仁也 故但曰 仁之方 則使自得之以爲仁也 仁을 말하면서 ‘仁의 실행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 것은 대체로 만약 곧바로 仁이라고 한다면, 도리어 仁을 알지 못하게 할 것이고, 그저 말한 바를 仁으로 삼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지 仁의 방법만을 말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그것을 터득하게 하여 仁을 행하도록 한 것이다. 朱子曰 子貢所問爲仁便使中天下而立 定四海之民 如堯舜也做不得 何況蓽門圭竇之士 聖人所以提起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正指仁之本體 蓋己欲立則思處置他人也立 己欲達則思處置他人也達 放開眼目 推廣心胸 此是甚氣象 如此 安得不謂仁之本體 若能近取譬者 以我之欲立而知人之亦欲立 以己之欲達而知人之亦欲達 如此則止謂之仁之方而已 此爲仁則同 但己欲立而立人 欲達而達人 是已到底 能近取譬 是未到底 其次第如此 주자가 말하길, “자공이 물은 바는 仁이었으니, 만약 천하의 가운데에 서서 사해의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라면, 요순임금 같은 분이라도 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하물며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선비임에야! 성인께서 ‘무릇 仁이라는 것은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이르고 싶으면 남을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제기한 것은 바로 仁의 本體를 가리킨 것이다. 대체로 자기가 서고 싶다면, 생각하는 부분을 타인도 역시 세운다는 것에 두고, 자신이 이르고 싶다면 생각하는 부분을 타인도 역시 이르게 한다는 것에 두고서, 안목을 활짝 열고 마음을 미루어 넓힌다면, 이는 도대체 어떤 기상이란 말인가? 이와 같다면, 어찌 仁의 本體라고 일컫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내 몸에서 가까이 취하여 미루어나가는 것이라면, 내가 서고 싶은 것으로써 남도 역시 서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내가 이르고 싶은 것으로써 남도 역시 이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니, 이와 같다면, 이를 일컬어 仁의 실행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에 그칠 따름이다. 이것들이 仁이 되는 것은 똑같지만, 그러나 자신이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주고 이르고자 하면 남을 이르게 해주는 것은 이미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것이고, 능히 내 몸에서 가까이 취하여 미루어가는 것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니, 그 순서가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博施濟衆 這箇是盡人之道 極人之功 非聖人不能 然聖人亦有所不足 在仁固能博施濟衆 然必得時得位 方做得這事 然堯舜雖得時得位 亦有所不足 博施濟衆, 이것은 사람의 도를 다하고 사람의 공을 지극히 하는 것이니, 성인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라 할지라도 역시 부족한 바가 있는 것이다. 仁에 입각해서는 본래 博施濟衆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반드시 때를 얻고 지위를 얻어야만 비로소 이러한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순임금이 비록 때를 얻고 지위를 얻었을지라도 또한 부족한 바가 있었다. 何事於仁 必也聖乎 不是聖大似於仁 仁只是一條正路 聖是行到盡處 欲立欲達 是仁者之心如此 能近取譬 是學做仁底如此 深淺不同 但克去己私復得天理 便是仁 何必博施而後爲仁 若必待如此 則有終身不得仁者矣 孔顔不得位 不成做不得仁 欲立欲達 卽絜矩之義 子貢凡三問仁 聖人三告之以推己度物 想得子貢高明 於推己處有所未盡 어찌 仁에만 일이 되겠는가? 반드시 聖의 경지일 것이다! 이 말은 聖이 仁보다 큰 것 같다는 것이 아니다. 仁은 그저 하나의 바른 길일 따름이고, 聖은 그 길을 걸어가서 지극한 곳에 이른 것이다.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고 이르고 싶으면 남을 이르게 해주는 것은 어진 사람의 마음이 이렇다는 것이고, 능히 제 몸에서 가까이 취하여 미루는 것은 仁을 행하는 것을 배우기가 이와 같다는 것으로서, 그 깊고 얕음이 똑같지 않은 것이다. 다만 자기의 사사로움을 이기고 제거하여 다시 天理를 얻는다면, 이것이 바로 仁이니, 어찌 반드시 널리 베푼 후에라야 仁이 되겠는가? 만약 반드시 이처럼 하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면, 죽을 때까지 仁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공자나 안자는 천자의 지위를 얻지 못하였지만, 仁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 될 수 없다. 남을 세워주고 이르게 해줌은 곧 법도로써 헤아리는 합당함이다. 자공이 모두 세 번 仁을 물었고, 성인께서는 세 번 나를 미루어 남을 헤아림으로써 알려주었으니, 생각해보면, 자공이 고명하였지만, 자신을 미루는 부분에 있어서는 미진한 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問博施濟衆 恐是子貢見孔子說仁多端 又不曾許一箇人是仁 故揀箇大底來說否 曰 然 然而夫子答子貢曰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至於答顔子 則曰 克己復禮爲仁 分明一箇仁說兩般諸公 試說 這兩般說是如何 或曰 一爲心之德 一爲愛之理 曰 是如此 但只是一箇物事 有時說這一面 又有時說那一面 人但要認得是一箇物事(一云 孔子向顔子說 則以克己爲仁 此處又以立人達人爲仁 一自己上說 一自人上說 須於這裏看得一般 方可) 如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便有那克己復禮底意思 克己復禮 便包那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底意思 只要人自分別而已 然此亦是因子貢所問而說 누군가 묻기를, “博施濟衆은 아마도 자공이 공자님께서 仁을 다양하게 말씀하시고, 또한 일찍이 한 사람도 仁하다고 인정해주신 적이 없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 큰 것을 골라내서 말한 것이 아닐까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러하다. 그러나 공자께서 자공에게 답하여 말씀하시길,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이르고 싶으면 남을 이르게 해주어라.’라고 하셨고, 안자에게 대답함에 이르러서는 곧 ‘克己復禮하면 仁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분명히 하나의 仁인데, 두 종류로 말씀하셨으니, 여러분들도 이 두 종류의 말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 한 번씩 말해보시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하나는 마음의 덕이고, 또 하나는 사랑의 이치입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과연 이와 같다. 그러나 그저 하나의 사물일 뿐이니, 어떤 때에는 이쪽 한 면을 말하다가도, 또한 저쪽 한 면을 말할 때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만 이것이 하나의 사물이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하나는 공자께서 안자에게 말한 것으로서 곧 克己復禮가 仁이라고 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또 남을 세워주고 이르게 해주는 것이 仁이라고 하였으니, 하나는 자기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고, 또 하나는 남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반드시 여기에서 한 종류라는 것을 보아서 터득해야만 비로소 옳은 것이다). 예컨대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이르고 싶으면 남을 이르게 해주는 것에는 곧바로 저 克己復禮의 의미가 들어 있고, 克己復禮는 곧바로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이르고 싶으면 남을 이르게 해준다는 저 뜻을 포함하고 있으니, 그저 사람들이 스스로 분별해야 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 역시 자공이 물은 것에 기인하여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立人達人 則子貢所謂欲無加諸人 仁之事也 能近取譬 求仁之方 則孔子所謂勿施於人 恕之事也 博施濟衆之問 與無加諸人之說 其先後不可考 疑却因能近取譬之言 用力有功而後 有無加諸人之說也 남을 세워주고 남을 이르게 해주는 것은 자공이 말한 이른바 ‘남에게 더함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으로서 仁의 일이다. 능히 제 몸에서 가까이 취하여 미루어가는 것이 仁을 구하는 방도라는 것은 공자께서 말씀하신 이른바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으로서 恕의 일이다. 博施濟衆의 질문과 無加諸人의 말 중에서 그 선후는 상고할 수 없지만, 도리어 能近取譬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힘을 써서 그 공효가 생긴 연후에 비로소 無加諸人의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問博施濟衆 與修己以安百姓 乃堯舜儘做得底 夫子猶以爲病 如何 潛室陳氏曰 堯舜在上保得天下無窮民否 天地之大人 猶有所憾 見得道理無盡期 聖賢亦未有盡處 安得不反躬自責 누군가 묻기를, “자신을 수양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함은 곧 요순께서 다 해내셨던 것인데, 공자께서는 도리어 부족하다 여기셨다고 하셨으니,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잠실진씨가 말하길, “요순임금께서 위에 계시면서 천하를 보호하여 빈궁한 백성을 없게 할 수 있었는가? 천지의 大人일지라도 여전히 한스러워할 바가 있고, 이치를 보아 터득함에 있어 다 기약할 수는 없어서, 성현일지라도 또한 다 기약할 수 있는 곳은 아직 없으니, 어찌 자신에게 돌이켜서 스스로를 나무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覺軒蔡氏曰 謂此章論仁 子貢是就仁之功效及人處說 夫子是就仁之本體心上說 就功效及人上說 則仁之名雖大而脈絡不貫 就本體心上說 則仁之實雖小而周流莫禦 故子貢問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功效普博如此而後 可以謂之仁乎 夫子答 此何但是仁 必也聖人方能之乎 然聖如堯舜 猶且病諸 夫仁者 只就己上發出 己欲立卽立人 己欲達卽達人 此仁者之事也 若未能便至於仁而能近取譬 以己之欲立 譬之他人亦欲立而立之 以己之欲達 譬之他人亦欲達而達之 如此則雖未卽至於仁 而亦可謂求仁之方也已 夫旣以仁之本體告之 又以求仁之方術告之 庶乎學者循序而得夫用工之要 回視子貢功效籠罩之說 茫乎無所措手 苟志於仁者 是可不深思而靜體之哉 각헌채씨가 말하길, “이 장에서 仁을 논함에 있어, 자공은 仁의 공효가 사람에 미치는 부분에 나아가 말한 것이고, 공자는 仁의 본래 體와 心 위로 나아가 말한 것으로 생각한다(謂). 공효가 사람에게 미치는 것 위로 나아가 말한다면, 仁의 명목은 비록 클지라도 맥락은 관통되지 않는다. 본래의 體와 心 위로 나아가 말한다면, 仁의 실질은 비록 작을지라도 두루 흘러 막힘이 없으니, 고로 자공이 ‘만약 백성에게 널리 베풀어 능히 많이 구제할 수 있어서 그 공효가 널리 미치기가 이와 같이 된 연후에 이를 일컬어 仁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공자께서 대답하시길, ‘이것이 어찌 그저 仁일 뿐이겠는가? 반드시 성인이어야만 비로소 해낼 수 있을 것이리라! 그러나 성스럽기가 요순임금과 같은 분이라도 오히려 이를 부족하다고 여기셨다.’고 하셨던 것이다. 무릇 仁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자기 위로 나아가 발현해낼 뿐으로서,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이르고 싶으면 곧 남을 이르게 해주는 것이니, 이는 仁者의 일이다. 만약 미처 곧장 仁에 이를 수 없어서 능히 제 몸 가까이에서 취하여 미루어가는 것은 자기가 서고 싶은 것으로써 타인도 역시 서고 싶다는 것을 미루어서 그를 세워주고, 자기가 이르고 싶은 것으로써 타인도 역시 이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미루어서 그를 이르게 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다면, 비록 아직 곧장 仁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또한 仁을 구하는 방도일 뿐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무릇 이미 仁의 본체로써 알려주고서, 다시 仁을 구하는 방술로써 알려주었으니, 배우는 자는 순서에 따라서 저 힘쓰는 요체를 거의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功效가 자욱한 자공의 말을 돌이켜보면, 너무 망망하여 손을 댈 곳이 없지만, 만약 仁에 뜻을 둔 자라면,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고요히 체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