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들도
새벽이면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지
작은 잎들까지도
이슬을 맑게 밀어내며
긴장을 풀어내곤 한다
그런 날
여지없이 여기저기서
어린 풀들
쑥쑥 머리를 내밀고
손을 들어
저요, 저요 한다
그중에 튼튼한 녀석
하나와 단단하게
접붙고 싶다.
씨앗론
/이승희
1
꽃이 피거나
열매 맺는 일이란 습성이나
본성이 아닌 거야
검은 흙 속을
아주 오래 무던히 걸어 온 시간들이
단단하게 뭉쳐 있다가
풀려지는 일이야
감자꽃이 피는 것은
하얗게 피어 말하는 것은
땅 속에 말 못할 그리움이
생겨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지
2
그래도 한번 더 생각해봐. 저 들판, 저 강가, 네가 발 딛고 선 이 언 땅 속 어디에든 바람이 숨겨 둔 풀씨들이 발꼬락을 움직여 무엇으로 일어서려 하는지. 한 때 그것들은 서로 다른 날개의 길이로, 그 불균형으로 바람을 타고 올랐을 것이고, 혹은 가능한 멀리로 자신을 뱉어 내는 그 모든 세상에서 밀려나 아주 쓸슬한 저녁을 맞았을지도 모르지. 잘 보면 네가 가고 싶은 곳은 분명히 보일 거야. 바로 네가 발 딛고 선 그 자리일지도 몰라. 네가 가둔 것들, 네가 끝끝내 손에 쥔 그것들을 놓아봐.
■ 동아일보
흑백사진
/최경민
그가 문을 열었을 때
새들은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석양쪽으로 날아가고 있었지
붉게 꽃핀 담장 너머
멀리 공장의 굴뚝 다섯, 하늘을 이고 있었네
그는 손을 들어
잘린 손가락을 들여다 보네
짧게 잘린 마디는 마치 촛농으로 덮어씌운 듯 했지
상처만이 고통을 기억하고 있네
더 이상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남아 있는 손가락을 천천히 세어보네
사진 속 친구들의 얼굴도 들여다 보네
붉은 철근 더미 위에 앉아
한순간 웃던 얼굴들이 사진 속에선 영원히 웃고 있네
또한 영원히 울고도 있네
눈을 들었을 때
키 큰 순서부터 공장의 굴뚝들은
어둠에 허리를 짤리우고 있었지
이제 그는 창문을 닫네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
빈 새장 속으로 걸어들어가 보네
누군가 와서
그를 잊지 않았다고
모이를 주고 물을 주면,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석양의 집으로 날아갈 수 있을 텐데
부리를 다친 새처럼 그는
가슴에 얼굴을 묻네
문은 밖으로 잠겨 있네.
■ 세계일보
만월
/정지완
그날 밤 송암동 버스종점 마을은 가로등 불빛 대신 달빛이 수상했네 달빛은 마을을 감싸던 안개를 가르며 조심조심 지붕 위를 걸어다녔네 달빛이 삭은 스레트를 밟느라 하수도 물 위에는 몇 줌 떨어뜨린 금종이 부스러기들로 번들거렸네 감나무집 담장 밑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담장 밑 하수물에는 꽃이 자란다고 생각했을 것이네 호박꽃은 감나무집 지붕위에 내려온 별 몇 개와 쑥덕거리고 있었는데
보름달이다 보름달이다, 버스기사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밖을 내다보던 가게 주인도 보름달이다, 주뼛하여 불을 끄고, 누렁이는 버스 밑에 숨어서 킁킁거릴 뿐 도둑고양이들도 폐차 속으로 달려가 시퍼렇게 뜬 눈을 감아버렸네
감나무집 지붕 밑, 깻잎들 소소소 잠을 깨고 바람에 밀리는 꼬소한 냄새 호박꽃 잎을 흔들었네 배짱 좋은 호박꽃 몇이 별과 헤어져 지붕을 내려갔네 호박꽃은 발개한 입술 사이로 단물을 흘리며 흠뻑 창문을 더듬었네 핼쑥한 형광등 불빛! 꿀꺽, 침을 삼켰네
거구의 사내가 종이새를 접고 있다 아
방충망을 헤집는 더듬이들,
호박꽃잎은 그만 터질 것 같네
툭!
부실한 푸른 감 하나
지붕 위에 떨어지고
보름밤 감나무집 지붕 위, 새까만 호박 몇이 사생아 같았네 무슨 날짐승 소리 들리는 듯도 했는데, 달빛이 안개에 젖은 빨래를 말리고 있었네
■ 조선일보
빛을 기억하라고
/손필영
1
소백산 양지 자락에서 가을까지 벌을 모으다 윙윙 거리며 돌아온 벌통집 산 5-707호.
새우잡이 떠난 아버지를 기다리며 멍텅구리 배에 떠있는 708호.
하루종일 방에 들어앉아 감감 무소식을 감감 희소식으로 바꾸고 수틀마다 물소리에 야생화를 촘촘히 벼랑 끝에 자리잡는 710호, 711호.
2
東大問에서 東小問으로 가시는 길을 아시나요. 뒷길로 벼랑을 끼고 몸하나 간신히 빠져나가는 돌동네로 오시면 거기서 가깝습니다. 마주오는 사람끼리 비켜서지 않고 서로 스며들면 바로 거기가 東小問洞이지요. 그곳은 해가 동네사람 하나 하나를 다 거쳐야 산을 넘어갑니다.
제가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는 東小問을 들어가지 못하고 그 문전에서 어른거렸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계란 아저씨와 야쿠르트 아주머니는 서로 스며 東小問에 들어섰습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자전거는 아래로 내려가고 아주머니는 언덕을 올라가고.
두부 할아버지가 종소리를 앞세워 저쪽 골목 끝에서 오고 있습니다. 모판에 그대로 핀 서광꽃도 종소리에 맞춰 일렁거리고, 나도 그 소리에 맞춰 마주걸어갑니다. 할아버지와 내가 서로 스며들다 보니 할아버니의 왼쪽 가슴이 무척 밝았습니다. 아직 해를 품고 계시군요. 어느새 나도 東小問洞 주민이 될 것일까요. 가늘게 뻗쳐오는 황금빛 한줄기.
3
잠들어도 시간에 쫓기는
나는 709호에 살고 있네요
구민회관 옆 넓은 마당을 좁게 걸어돌아오면
706-7-8호로 기울던 해가 710-11호로 줄지어 넘어가네요
709호는 거치지 않네요. 빛을 기억하라고. 빛을 내라고?
■ 중앙일보
어랴! 햐!
/이희철
어디보자, 이게 피라민가 빙언가 속이 보여야 빙어이제. 어디 보자. 자리를 벌리고 비집고 들어와 냅다 겨울 햇빛 한 조각을 집어 들던 사람. 빵모자를 눌러쓰고 초집장에 한 번 찍어 소주잔을 걸치고 입술을 쓰윽 쓰다듬던 사람 어라! 햐!
그 겨울이 그립네. 겨울의 깊이를 웅크리고 웅크려서 얼음의 두께로 한 겨울을 보여주던 저수지. 손도끼로 곡괭이 내리쳐야 닿던 완강한 겨울의 복판. 마른 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고 얼음을 깨어내 내부로 닿던 적막. 속이 투명한 빙어가 어라! 햐! 얼음빛을 닮아 빛나고 있네.
얼음 밖이 딴 세상이라, 얼음 밑이 딴 세상이라 조심조심 겁 많은 사람에게 아무 말도 않다가 안심이다 정말 안심이다 마음놓을 때 쩡쩡 갈라지며 울음 울던 물의 소리 저 검푸른 빛 구들장만하게 떼 오고 싶었네, 몸으로 뗄 수가 없어 엎드려 어쩔 줄 모르던, 어라! 햐! 그래서 더욱 첩첩 산중이던 상주 어디쯤에 아직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그리운 사람.
■ 한국일보
실업
/여림
즐거운 나날이었다 가끔 공원에서 비둘기 떼와
낮술을 마시기도 하고 정오 무렵 비둘기 떼가 역으로
교회로 가방을 챙겨 떠나고 나면 나는 오후내내
순환선 열차에 고개를 꾸벅이며 제자리 걸음을 했다
가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산으로도 가고 강으로도
가고 아버지 산소 앞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저녁이면 친구들을 만나 여느 날의 퇴근길처럼
포장마차에 들러 하루 분의 끼니를 해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과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름다웠다 아내와
아이들의 성적 문제로 조금 실랑이질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어서는 다음 날 해야 할 일들로
가슴이 벅차 오히려 잠을 설쳐야 했다
이력서를 쓰기에도 이력이 난 나이
출근 길마다 나는 호출기에 메시지를 남긴다
[지금 나의 삶은 부재중이오니 희망을
알려 주시면 어디로든 곧장 달려가겠습니다.]
■ 대한매일
어달리의 새벽
/정영주
묵호는 검은 고래다
새벽마다 허옇게
바다를 벗겨내는 어부들이
선창가에 비릿한 욕지거리를 잔뜩 풀어 놓으면
고래입같은 아가리 배에서는
온통 욕지기질로 헐떡이는 생선들
경매가 시작되면
선창가는 거대한 고래 뱃속이다
부시시 무너지는 어둠 속에서
퍼덕거리다 뒤로 나자빠지는 그네들의 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