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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오픈은
서울에서 비행기로 12시간 거리에 있는 프랑스 파리에선 해마다 5월말에 테니스 파티가 열린다. 전세계 테니스 선수들은 한달 전부터 유럽 전역에서 열리는 클레이코트 대회에 출전해 기량을 점검하고 코트 적응에 들어간다. 목적은 단 한가지. 거액의 상금이 걸린 프랑스오픈에서 우승하는 것이다.
우승 상금 10억 원도 선수들의 구미를 당기는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선수들을 자극하는 것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전세계 최고의 클레이코트 대회를 밟아 보는 로망이 테니스 선수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회를 우리나라에서 보통 프랑스오픈으로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Internationaux de France de Roland Garros(프랑스 롤랑가로스 국제대회)’다. 롤랑가로스 스타디움(Stade de Roland Garros)에서 열리는 국제 테니스대회라는 의미다. 프랑스에선 이 대회를 롤랑가로스로 부른다. 롤랑가로스는 파리의 상징 에펠탑이 보이는 포르트 도테이(Porte d'Auteil) 구역에 자리 잡고 있다.
1968년부터 아마추어와 프로가 함께 출전하게 된 최초의 그랜드슬램인 프랑스오픈은 1891년에 출범되어 1924년까지는 프랑스 거주자만 참가하는 클럽멤버대회로 열리다가 1925년부터 프랑스 오픈이 시작되면서 외국선수들에게도 개방되었다. 오늘날 남녀 단식과 복식, 주니어 단식과 복식 그리고 혼합복식, 역대 스타들의 레전드, 남녀 휠체어 단식과 복식 부문에서 경기가 열린다.
이 대회 초대 챔피언은 프랑스의 전설적인 스타이자 끈질긴 경기로 악어라는 별명을 지닌 르네 라코스테. 그는 이후 4년간 대회 결승전에 진출해 1927년과 1929년에 두 번 더 정상에 올랐으며 오늘날 라코스테라는 의류 브랜드의 성공으로 사업가로 더 큰 명성을 쌓았다.
롤랑가로스
역사와 전통의 대회 '롤랑 가로스'는 클레이 코트에서 열린다. 사진 : 테니스코리아 |
1928년 현재 테니스장이 위치한 스타디움(프랑스 레이싱 클럽과 프랑스 테니스 클럽이 공동으로 사용)이 프랑스 테니스협회에 스타디움의 일부를 내놓으면서 스타디움의 클럽 회원이자 10년 전에 작고한 비행사 롤랑 가로스라는 이름을 스타디움에 붙이게 되어었다. 롤랑 가로스는 1913년에 처음으로 지중해를 횡단했던 비행사로 프랑스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4총사
무스끄떼르 광장에 세워진 프랑스 테니스 영웅 4인의 동상. 사진 : 테니스코리아 |
경기장 이름은 롤랑가로스가 붙여졌지만 경기장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프랑스 테니스 영웅 4총사에서 비롯됐다.
롤랑가로스 심장부에 있는 무스끄떼르 광장 네 귀퉁이에는 동상의 세워져 있다. 동상의 주인공은 쟈끄 ‘토토' 브뤼(Jacques 'Toto' Brugnon) 장 보로토라(Jean Borotora) 앙리 코쉐(Henri Cochet)와 르네 라코스테(René Lacoste)다. 이들 4총사(Les Quatre Mousquetaires)는 1927년 테니스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 결승에서 미국을 꺾고 조국 프랑스에 우승컵을 안겼다.
당시 프랑스 전역을 흔드는 일대 대 사건이었다. 이들의 데이비스컵 우승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테니스협회가 스타디움측으로부터 3헥타아르의 땅을 무상으로 받아 1928년 5월 테니스장을 만들었고 이름을 롤랑가로스라 붙여 대회를 확대해 열었다.
예술의 본고장다운 우승컵과 포스터
2010 롤랑가로스의 포스터. |
아름다운 경기장을 만든 프랑스인들은 다음 순서로 우승컵과 포스터에 심혈을 기울였다. 남자 단식 우승자에게 수여되는 무스끄떼르컵은 1981년에 만들어졌는데 큰 로렐 잎사귀가 새겨진 원통에 백조의 목 모양으로 만들어진 2개의 손잡이가 달려있는 순은 제품이다. 남자 단식외 다른 5개 부문 우승자에게주는 5개의 트로피는 파리 제일의 보석상인 멜레리오의 작품이다.
결승전에서 시선이 우승컵에 쏠린다면 대회 기간 내내 ‘참 잘 만들었다’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해마다 산뜻한 디자인으로 전세계 테니스마니아를 매료시키는 대회 공식 포스터다. 1980년부터 갤러리 를롱이 전세계 현대 미술가의 작품을 공모해 선정하는데 2010년 프랑스오픈 공식 포스터로 인도의 여성 작가 날리니 말라니의 것이 채택됐다.
앙투카
빨간 벽돌가루로 만든 롤랑가로스 코트의 흙. 사진 : 테니스코리아 |
프랑스오픈의 특징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테니스코트다. 코트는 빨간 벽돌가루로 만들었는데 앙투카 코트(En-tout-cas Court)로 불린다. 앙투카는 프랑스어로 '어떤 경우에도'라는 뜻으로 비 그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트에 내린 비는 배수가 싹 되어 경기를 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벽돌을 갈아서 그것을 바닥에 깐 코트로 수분이 빨리 건조된다. 그리고 볼의 움직임이 다른 하드 코트에 비하여 느린 앙투카는 랠리 가 긴 선수들로 인해 흙이 잠시도 쉴 틈이 없다.
프랑스의 국가 스포츠, 테니스
프랑스에서 큰 테니스 파티가 열리는 것은 테니스의 국력이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테니스는 축구에 이어 프랑스인들이 두 번째로 열광하는 스포츠다. 2009년 기준으로 37만2434명이 테니스 선수로 등록되어 있고 각자 랭킹을 갖고 있다. 이들은 1년에 1만 449대회에 출전해 195만 448 공식 경기를 한다. 큰 대회와 좋은 인프라 그리고 좋은 테니스 시스템은 남녀 톱50안에 10%인 10명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롤랑가로스 최고의 영웅' 나달 vs 페더러
21세기 최고의 영웅이자, 최고의 라이벌인 나달-페더러. 사진 : 테니스코리아 |
영웅은 역사를 만들고 역사는 영웅을 원한다. 119년 역사의 프랑스오픈도 예외는 아니다. 코트에서 숱한 테니스 영웅들이 서사시를 써내려갔다. 프랑스오픈은 영웅을 배출했고 영웅은 프랑스오픈을 세계에 알렸다.
그 가운데 스페인의 라파엘 나달은 21세기 프랑스오픈이 낳은 최대 스타다. 나달은 프랑스오픈에 다섯번 출전해 네번씩 우승하는 불멸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클레이 천재.
금세기 최고의 테니스 테크니션인 황제 로저 페더러(스위스)도 프랑스오픈의 나달 앞에서는 한낱 평범한 테니스 선수에 불과했다. 페더러는 지난해 프랑스오픈에서 우승해 4대 그랜드슬램을 모두 정복한 커리어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불행하게도 나달이 8강전에서 탈락해 결승 진출을 못한 틈을 타 벌어진 일이다. 나달과의 정면 승부로 일궈낸 우승이 아니란 뜻이다. 올해 역시 최대의 관심사는 나달의 다섯번째 우승이냐 아니면 페더러의 대회 2연패이냐다.
그동안 두 선수는 프랑스오픈 결승에서만 세번 맞붙었다. 2006년부터 내리 3년간 맞붙은 결과는 나달의 3-0 완승. 나달은 2006년에만 엎치락 뒤치락하는 풀세트 접전을 벌였을 뿐 2007년 3-1승, 2008년엔 페더러에게 단 네게임만 내주고 완벽한 3-0 스트레이트승을 거뒀다. 다른 대회를 포함해도 나달은 페더러에게 14승 7패라는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유독 프랑스오픈에선 나달이 일방적인 우세를 유지했다. 페더러는 나달만 만나면 ‘고양이 앞의 쥐’ 신세를 면치 못했다. 나달-페더러가 펼치는 세번의 결승 대결에서 롤랑가로스 센터코트인 필립 샤트리에 코트에서 페더러를 응원하는 관중들의 한숨은 페더러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한다.
특히 2008년에는 황제의 위용은 한없이 무너지고 클레이 황제 라파엘 나달은 마치 앙투카를 위해 태어난 선수로 각인되었다. 지난해 8강전에서 스웨덴의 로빈 소더링에게 패해 중도 탈락해야 했던 나달은 올해 프랑스오픈 전에 몬테카를로, 로마, 마드리드에서 열린 클레이코트 3대 마스터스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며 프랑스오픈 우승을 향한 의지를 불태웠다. 프랑스오픈 직전에 나달은 조국에서 열리는 바르셀로나오픈 6연패를 마다하고 휴식과 훈련을 병행하며 프랑스오픈 우승 담금질에 들어갔다.
이에 반해 지난해 프랑스오픈 우승자임에도 올시즌 클레이대회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이는 황제 페더러는 "프랑스오픈에서 우승한 경험을 바탕으로 나달과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고 롤랑가로스 왕좌 수성에 자신감을 드러냈다.
테니스 최고의 그림인 나달과 페더러의 프랑스오픈 결승 맞대결성사 여부는 대회 기간 내내 최대 관전 포인트로 자리잡을 것이다.
한국 테니스와 프랑스오픈 그리고 이형택
나달 페더러 두 테니스 영웅들이 초미의 관심사로 수년째 프랑스오픈을 달구는 가운데 우리나라 선수들도 프랑스오픈에 30년 전부터 출전해왔다.
우리나라 선수가 프랑스오픈에 처음 출전한 것은 80년이었다. 당시 한국여자테니스의 간판이며 유일하게 투어 무대를 돌았던 이덕희 선수다. (테니스에 종사하는 관계자들은 이덕희라는 이름을 알고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편이다. 이덕희 선수는 은퇴한 뒤 사업가로 성공해 10년 전부터 이덕희배 국제 주니어 대회를 열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프랑스 오픈에 출전한 이덕희. 사진 : 테니스코리아 |
이덕희 선수가 1980년 5월 26일부터 6월 8일에 열린 프랑스오픈에 참가한 것이 우리나라 선수로서는 처음이다. 세계 64명이 겨루는 프랑스오픈 1회전에서 이덕희는 독일의 클라우디아 코데-킬쉬(슈테피 그라프와 함께 88년 서울올림픽에서 복식 동메달리스트)를 맞아 6-3 7-5로 이겨 프랑스오픈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 출전해 첫 승이라는 대단한 기록을 남겼다.
이덕희는 2회전에서 스위스의 페트라델헤스 야우흐에게는 1-6 2-6으로 패해 승수를 이어가지 못했다. 이후 이덕희는 1983년 한차례 더 이기고 그녀의 나이 만 30살에 은퇴해 롤랑가로스와의 인연을 더 이어가지 못했다.
이덕희의 은퇴로 1983년 이후 롤랑가로스에 한국 선수의 모습이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12년만인 95년 5월에 74년생으로 당시 21살인 박성희가 롤랑가로스를 밟았다. 박성희는 ‘클레이 코트의 여우’라고 불리우는 스페인의 세계적인 스타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에게 1-6 0-6으로 패했지만 이듬해인 96년에 일본의 엔도 마나(Endo Mana)에 5-7 6-1 6-3의 역전승을 거두고 2회전에 진출하였다. 박성희의 프랑스오픈 첫 승이고 한국선수로는 83년 이덕희의 1회전 통과 이후 13년만의 승리다. 98년에도 박성희는 한차례 승리를 하고 은퇴했다.
한국 테니스의 간판 이형택은 프랑스 오픈에 6년간 출전했다. 사진 : 테니스코리아 |
이덕희·박성희에 이어 프랑스오픈 승리의 바통을 이어 받은 것은 한국 테니스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2000년 US오픈 16강의 주인공 이형택이었다.
이형택은 US오픈 예선전을 거치면서 체력이 바닥 나 있는 상태에서 통해 본선에서 3명의 세계적 선수들을 연파하며 메이저 대회 16강을 달성했다. 한국 남자선수로서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이형택의 이러한 여세는 다음해인 2001년 4대 그랜드슬램 출전권을 확보하게 됐다.
2001년 5월에 프랑스오픈에 처음 본선 대진표에 들어간 이형택은 1회전 상대로 러시아의 전세계랭킹 1위 예프게니 카펠니코프(Yevgeny Kafelnikof)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연습 중 입은 복부 근육 부상이 악화되어 기권하였다. 아쉽게도 이형택의 프랑스오픈 출전은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2005년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출전해 2004년과 2005년에 2년 연속 3회전에 진출했다. 2009년에 은퇴한 이형택은 프랑스오픈에 6년간 출전해 11전 5승6패다. 역대 우리나라 선수가운데 최대 출전이고 최다승 기록이다.
이형택은 2004년 대회에서 지난해 준우승자인 소더링을 꺽기도 했다. 사진 : 테니스코리아 |
현재 강원도 춘천에서 테니스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 재단 이사장을 맡은 이형택 이사장은 프랑스오픈 출전에 대한 추억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프랑스오픈 하면 코트가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앙투카 코트 표면에서 경기를 하면 공이 생각보다 빠르게 튀지 않아 좋았다. 해마다 재미있게 경기를 한 기억이 있다. 그랜드슬램 가운데 32강에 두 번을 간 프랑스에선 마음이 편안해 성적이 좋았다.
보통 선수들이 대회장마다 편안한 곳이 있고 그렇지 못한 곳이 있는데 본인의 경우 4대 그랜드슬램 가운데 US오픈 다음으로 프랑스오픈 코트에서 경기를 하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2004년 2회전에서 당시 34위인 로빈 소더링(스웨덴)에게 세트스코어 0-2로 지고 있다가 3-2로 역전한 경험이 있다. 그런까닭에 프랑스오픈은 기억이 남는 대회다.
그렇다고 좋았던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01년 프랑스오픈 본선 대진표에 처음으로 들어갔다. 2001년부터 4대 그랜드슬램을 모두 출전하게 되었다. 2001년 호주오픈에 이어 두번째로 출전한 그랜드슬램인지라 잘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연습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본선 경기가 열리는 당일 날 재채기를 하다 복부 근육 경련이 있어 경기 출전을 포기했다. 아쉽지만 다음 대회를 기약했다.
2008년에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출시가 안되는 특정사 라켓을 오랫동안 사용하다 국산 브랜드인 파마 라켓을 들고 출전했다. 라켓 바꾸는 것에 매우 예민했지만 프랑스오픈을 앞두고 올림픽공원에서 연습할 때 파마 라켓이 생각보다 잘 맞아 사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행히 1회전에서 요나스 비요크만(스웨덴)을 3-0으로 이기고 2회전에서도 좋은 경기를 했다. 이것이 프랑스오픈에 출전한 마지막 경기였다"
이형택 이후 프랑스오픈 본선에 출전한 선수는 남녀 통틀어 한 명도 없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임규태(삼성증권) 이예라(한솔제지) 등이 예선에 출전해 프랑스오픈 본선 무대를 부지런히 두드려 왔고, 주니어대회에서도 조숭재(명지대)가 단식 8강 성적을 내는 등 낯선 땅, 롤랑가로스를 부지런히 밟아 정상에 서는 그날을 기약하고 있다. 한국테니스가 롤랑가로스를 정복하며 세계 테니스 주류에 편입될 날이 멀지 않았다.
글 | 박원식 테니스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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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일부터 메이저대회중 하나인 프랑스오픈이 열리네여...당구두 중계를 잘안하지만 테니스두 중계를 보기가 힘드네여...비인기종목이라서...재미삼아 함들 읽어보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