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RPG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이를 통해 불쾌감을 느끼게 할 의도가 일절 없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 RPG에서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명, 국가, 회사 또는 단체, 그 밖에 모든 명칭, 사건과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예가 있더라도 이는 해당 사건이나 인물 등을 비하하거나 정치적으로 가치판단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이 RPG는 허구적 창작물로서 특정한 사상, 이념, 정치체제, 인권 탄압과 폭압적 정치질서를 옹호, 미화하거나 찬양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당시 우익 진영 인사들의 완고하고 고루한 생각은 좌익계 투사들의 과격한 소아병적 사상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으며, 따라서 이들 양자가 화합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였다고 할 수 있다. (…) 이들 서로 사이의 불신과 혐오는 그렇듯 강하였기 때문에 양쪽의 원만한 제휴와 합작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 이동화(건국동맹원, 건준 서기국원), 1978년 저서 ”몽양 여운형의 정치활동“에서
1. 네다바이ねたばい
1945년 8월 18일, 경성 시내는 해방의 환희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전날부터 이어진 대규모 석방 조치와 태극기, 적기를 나란히 들고 나온 인민들의 함성은 마치 식민지 조선의 마지막 흔적을 지워내려는 듯한 기세였습니다. 그러나 그 열기 뒤편에서는 또 다른 종류의 움직임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이 괴한에게 테러를 당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여운형의 측근들이자 건준의 중간 간부로 활동하고 있던 주아문, 박현우, 신지훈, 권가연, 허경훈 등은 이 급보를 듣고 곧장 그의 자택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한 일행이 마주한 여운형은 전혀 다친 기색이 없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이었습니다. 테러는 일종의 연막이자 경고였고, 여운형은 이를 오히려 역이용하려는 듯 보였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부재 중 역할을 분담하며, 인물들에게 각기 다른 임무를 지시했습니다.
박현우와 허경훈은 테러범의 배후를 추적하기 위해 종로 일대로 향했습니다. 해가 지기 시작한 거리엔 여전히 사람들의 함성이 남아 있었지만, 경찰이나 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김필중과 함께한 이들은 조선 경찰이 사실상 두문불출한 상태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건준의 방송 지시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가 없었고, 경성은 무력의 공백 속에 방치되고 있었습니다.
총독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박현우와 허경훈은 박석윤을 찾아갔습니다. 박석윤은 한때 만주 민생단의 기획자였고, 현재는 건준과 총독부 사이의 은밀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설명은 복잡한 상황을 단숨에 정리해주었습니다.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조선인 치안담당권을 넘기며, 실질적으로는 일제의 철수까지의 시간벌기를 꾀했습니다. 그러나 여운형이 이 기회를 ‘정치적 주권’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자, 총독부 —특히 니시히로 경무국장— 는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박석윤은 테러의 배후로 니시히로를 지목하면서도, 총독부가 일제히 내지인의 철수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사실상 조선의 권력 공백 속에서 한반도를 ‘적당히 정리된 상태’로 넘기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고, 여운형의 적극적 행보는 그 계획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총독부에 당장 무력으로 대응할 수는 없어도 끄나풀을 심어둘 필요는 있다는 김필중의 말에, 박현우는 전주 교회를 통해 최율이라는 휘문중 학생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던 광산재벌 최민환의 아들이었으며, 해방 이후 전주신흥학교에 거액을 기부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박현우는 목사의 신분을 이용해 최민환에게 접근했고, 결국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주는 조건으로 유용한 정보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중 하나는 8월 16일과 17일 사이 적기를 휘날리며 벌어진 ‘소련군 진주 소동’이 총독부가 조직한 여론몰이용 기획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며칠 뒤의 일이었지만 미군과 소련군이 38도선을 경계로 점령지를 양분한다는 중요한 정보도 입수할 수 있었죠.
한편 주아문, 신지훈, 권가연은 우익 세력의 동향을 파악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조사 초반부터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경성의 우익 진영은 실체가 거의 없는 상태였고, 대부분의 ‘명망가’들은 친일 경력이 있거나 일본의 통치를 암묵적으로 용인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건준을 ‘소련의 괴뢰’로 간주하며,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봉대를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익의 논리는 단순했습니다. 건준이 미군정이나 소련군에 의해 무력화되거나 무시당하고, 김구가 귀국했을 때야말로 ‘정통성’이 회복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장 협력하지 않고 ‘시간을 버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권가연은 한 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영수회담’이라는 키워드를 활용해 우익 인사들에게 접촉을 유도할 수 있는 선전벽보를 제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권가연의 제안은 즉시 실행되었고, 주아문은 조직망을 활용해 김준연 측 인사들의 동선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김준연이 김약수, 유진희와 자주 회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들 모두 과거 좌익 계열에 속했던 인물들이었고, 최근 중도 또는 우익 세력으로의 전향 움직임이 있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이후 ‘자유조선건국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벽보가 주요 대로와 골목마다 붙기 시작하면서, 경성 시내의 민심은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조직은 명확히 좌익도 아니고, 친일 우익도 아닌 ‘제3세력’으로 보였으며, 이로 인해 정치적 회색지대에 있던 다수의 중도 인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원세훈, 장덕수, 김약수, 유진희 등은 곧장 ‘민족민주연맹’이라는 이름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창당했고, 이들은 건준과의 협력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이 무렵 허경훈은 여운형의 자택을 다시 찾아가 그간의 조사 결과를 정리해 보고했습니다. 테러의 배후에는 총독부의 그림자가 있으며, 이는 단순한 폭력 행위가 아니라 건준의 분열을 유도하려는 정치적 공작이라는 점, 김준연이 주도하고 있는 전국유지자대회 구상이 단순한 타협이 아닌, 건준의 정치적 주도권을 구조적으로 해체하려는 시도임을 강조하며 경고했습니다. 또한 건준이 우익에게 양보만 계속할 경우 오히려 테러를 당한 입장인 여운형이 우익에게 잡아먹히게 될 것이라는 뼈있는 말도 남겼죠.
여운형은 허경훈의 말을 조용히 들은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는 지금 벌어지는 모든 움직임이 단순한 파벌 싸움이 아니라, 조선의 미래를 결정짓는 ‘초기의 방향 설정’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권력을 지니기 전까지 일종의 ‘줄타기‘는 반드시 필요했고, 우익에게 지나치게 양보하지 않되 건준 내의 좌익맹동적 경향에 의해 돌발상황이 벌어져서는 곤란했습니다. 여운형은 허경훈에게 집안, 즉 조선공산당 내 분란을 단속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여운형의 말대로, 건준을 해체하고 우익과 좌익이 동등하게 대의원을 파견해 ‘전국유지자대회’를 구성하자는 송진우의 무리한 제안은 보기좋게 거절당했습니다. 이는 명목상으로는 좌우합작의 형식을 갖춘 듯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건준의 해체를 요구하는 안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송진우 측의 구상은 무산되었고, 오히려 내부에서부터 반발을 샀습니다. 진짜 친일 지주, 자본가 계층은 좌익에 이렇게까지 양보해야 한다는 것에 치를 떨었고, 온건한 이들은 강경 우익 기득권의 뻔뻔함을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우익 진영이 심각한 내분에 빠져 송진우가 대단히 곤란해하던 차, 여운형이 짧은 “가짜 와병”에서 복귀하며 건준은 다시금 안정을 찾았습니다.
2. 무궁화와 목란화
1945년 9월 2일, 평양에 도착한 박현우와 권가연은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안내로 평양 시내를 둘러보며 변화의 기류를 체감했습니다. 평남건준의 최능진이 조직한 자경단이 치안을 맡고 있었고, 전시 혼란과 화폐난 속에서 부랑자들이 넘쳐났습니다. 소련군은 자경단과 부랑자들 사이의 충돌을 조용히 제지하고 있었으며, 일행은 평남의 현장을 목격하며 이 현실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곧 조만식 위원장과 조선공산당 평남지역위원장 현준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이념을 지닌 두 지도자는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냉랭한 분위기를 감추지 못했습니다. 박현우가 공동치안 혹은 좌우 합작 모델을 제안하자, 현준혁은 소련군 주도의 경찰예비대 창설을 주장하며 최능진 자경단의 무장 해제를 요구했습니다. 이때, 박현우는 자신이 아는 중도 성향의 기독교 인물 김창준을 언급하며 기독교사회주의 노선의 제3세력 구성을 시도했습니다. 이 제안은 곧 평북에서 내려온 박영화 위원장, 한경직, 강량욱 목사 등의 참여로 구체화되었고, 권가연의 주선으로 천도교계 대표 김기전 역시 가세하면서 천도교청우당 창당 논의로까지 확산됩니다. 이들은 모두 사회복지와 대중선교, 민족자주를 결합한 ‘온정적 사회주의’ 노선을 형성하며, 조선 특유의 온건 사회주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권가연이 김달현 등과 천도교청우당의 창당 작업을 돕고 있을 무렵, 박현우는 소련군정의 실세 최용건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88여단 출신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했던 그는 박현우의 ‘기독교 좌파’ 전략에 공감하며, 협력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박현우는 이를 기회로 삼아 교회와 군정의 대화 경로를 정비하고, 각 지역 교회를 아우르는 네트워크로 기독사회민주당 창당 구도를 정비해나갔습니다.
기독교 좌파의 주도권이 정말로 최용건에게 넘어가버리자 사색이 된 한경직은 원래 준비했던 일, 즉 기독사민당 창당대회를 명목으로 만주 난민들을 잠입시켜 공산당원들을 테러하는 사업을 급히 취소하려 했습니다. 문제는 그 음모가 이미 한경직의 손을 떠났다는 것이었고, 평양 시내에서 총격이 발생해 박현우와 대화를 나누던 최용건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테러범은 현장에서 사살됐고, 일종의 공포를 느낀 박현우는 이 사태를 계기로 최용건의 기독교 세력 장악 계획에 더욱 협조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조만식은 명목상의 위원장으로 남고 실권은 최용건과 좌익 세력으로 넘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사회민주당, 천도교청우당, 공산당의 연립 체제가 형성되었으며, 최능진은 자경단 무력 해제 이후 남하하였고, 조만식의 측근들은 줄줄이 월남했습니다. 소련군은 평양의 정치지형 급변에 대응하기 위해 민정총책으로 안드레이 로마넨코를 임명했습니다. 로마넨코는 각 종교계와 접촉해 통합자선회 겸 부흥회를 조직했고, 이 부흥회는 기독사회민주당의 폭발적인 세 확장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오히려 북조선 내에서는 공산당보다 기독교좌파가 더 강한 기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평양 테러사건의 배후로 한경직이 사형 선고를 받으며, 북조선 내 보수 기독교 세력은 사실상 해체됩니다.
소련군은 만주에서 김학규가 이끄는 조선국민혁명군 잔류세력도 타격했으나, 중국 국민당의 항의에 따라 그를 석방했습니다. 염동진 역시 테러 배후로 의심받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과연 누가 계획한 짓일까요?
3. 계동 열성자대회
해방 직후부터 박헌영은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 즉 ‘8월 테제’를 발표하면서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주도권을 본격적으로 쥐기 시작했습니다. 이 테제를 통해 그는 당면한 조선 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민족해방과 토지문제를 핵심 과제로 제시했죠. 이론과 명분 모두에서 우위를 점한 박헌영은 단숨에 당내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불과 보름 만에 공산당 내부는 ‘박헌영 대 반박헌영’ 구도로 정리되었고, 각 파벌은 입장 정비에 나섰습니다.
화요회 계열은 민족해방과 토지개혁을 강조하는 박헌영의 노선을 전면 수용하면서도, 자신들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각시키려 했습니다. 반면 서울파, 상해파, ML파 등은 박헌영의 독점적 당운영에 의심을 품고 견제했지만, 그를 논리적으로 반박하기에는 뚜렷한 대안 없이 고심만 깊어졌습니다.
9월 6일로 예정된 ‘계동 열성자대회’를 앞두고, 장안파 지도부는 종로 장안빌딩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김철수, 정백, 이영, 하필원 등이 모였고, 오랜 해외 망명 끝에 돌아온 원로 김사국도 합류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지에서 노동조합운동을 경험한 인물로, 노동자에 의한 자주적 공장 관리를 전면적으로 긍정하면서도 그 운동을 당의 지도 하에 통합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김사국은 함흥에서 활동 중인 조공 함남위원장 오기섭의 포고문을 꺼내 보이며, 이미 북에서는 실질적 공장 접수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허경훈은 조심스레 “생디칼리슴 아니냐”는 우려를 품었지만, 김사국은 “노동조합의 단견성을 전위당의 지도로서 극복해 궁극적으로 노동자평의회가 권력을 장악하게끔 해야 한다”는 답을 내놓았습니다. 또한 부르주아 공화국에 아예 참여하지 말아야 하냐는 물음에 그는 자신이 아나키스트는 아니라며, 의회주의 문제 역시 전략적 판단의 차원에서 생각할 문제라고 정리했습니다.
장안파는 마치 그 옛날 로자 룩셈부르크의 노선을 연상시키는 김사국의 제안을 수용하고, 노동자 자주관리 전면 지지를 자신들의 차별적 슬로건으로 채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후 조선 좌익 운동가들과 연이 깊은 경성제대 철학과 교수 출신 미야케 시카노스케를 접촉해 명분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미야케는 당내 분파성을 비판하면서도, 장안파가 ‘단일당 절대사수’를 공개적으로 천명한다면 노동자 자주관리 노선을 지지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허경훈은 이를 수용했고, 장안파 내부에서도 즉각 승인되었습니다.
다음날, 홍증식의 계동 자택에서 열린 열성자대회에는 재건파와 장안파 양측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미야케의 연설 후 김철수는 평의회적 인민자치를 당이 지도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연설했습니다. 이에 이주하가 조용히 박수를 보냈고, 이내 박헌영은 김삼룡의 과격한 반발을 제지하면서 오히려 ‘방법은 과격할지라도 당위는 인정한다’는 식으로 유연하게 대응했습니다.
이에 탄력받은 허경훈은 박헌영의 ‘8월 테제’ 일부를 인용하며 ‘진보적 조선인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민주적 당대회를 열자고 주장했고, 박헌영은 이를 수용했습니다. 이어 그는 화요파 출신이면서도 건준 선전부장인 자신의 선배 조동호를 당 총비서로 추천하면서 전면에서 약간은 물러난다는 과감한 선택을 했고, 이 추천은 양측 정파의 박수 속에 채택되었습니다. 이로써 당 중앙위원회는 양 정파가 동수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고, 장안파는 적어도 일정한 정치적 지분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론적 주도권은 여전히 박헌영 측이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다음날, 북조선분국은 당 중앙이 노동자 자주관리를 지지했다는 점을 근거로, 공장 접수 운동을 즉각 실행에 옮겼습니다. 원산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일본인 관리자 없이 공장을 직접 장악하기 시작했고, 조만식 계열이 운영하던 사업장들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소련군정 초기에는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기독교사민당같은 ‘사이비 사회주의자’들의 지나치게 가파른 성장세를 견제하려던 극동사령부 총정치위원 시티코프 상장이 오히려 노동자들의 공장 접수를 장려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상황은 일변했습니다.
마치 경성의 박헌영이 소련 당국과 짠 것만 같은 이 조치는 박헌영의 실질적 라이벌로 떠오르던 최용건의 위상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민중 기반 없이 소련의 후원에 의존하던 최용건은 큰 타격을 입었고, 이로 인해 박헌영은 다시 한번 상징적 지도자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4. 십자군 국가
1945년 9월 8일, 미24군단이 제물포에 입항했으나, 건준 대표단은 미국 장교들과 거의 접촉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미군 장교들은 조선인 대표자들보다는 총독부 출신 관료들과 친일 기독교 엘리트들과 어울리는 데 집중했습니다. 여운형 측이 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준비해도, 미군은 그들을 철저히 배제했습니다.
9월 10일, 하지 중장은 조선총독부 기구를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폭탄 선언을 발표했고, 이는 국내 모든 정치세력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불과 8시간 만에 철회됐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발표 하나로 미군정이 얼마나 조선 현실에 무지했는지가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고민 중이던 일행들응 찾아온 박석윤은 그들에게 미군정과 총독부 간 유착 정황을 알리면서, 미군 군의관 조지 윌리엄스 소령과 연희전문 교장 이묘묵 박사의 밀착관계를 지적했고, 이를 통해 미군정 내부의 네트워크를 파악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습니다.
주아문은 박현우가 구축한 정보망을 재가동하고, 김계조-최민환 라인을 통해 경제인 회의라는 명분으로 이들의 동향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김계조는 총독부 잔당들 및 조선 내 친일 경제인들을 규합해 조선석탄대책준비위원회를 추진했으나, 주아문의 공작에 의한 내부 갈등 끝에 폭력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김계조가 고용한 깡패들조차 김두한의 사람들과 뒤얽혀 있었고, 김두한은 결국 그를 제거했습니다. 김계조 자택에서 확보된 금고에서는 일본군 잔존 병력이 미군에 대한 역정보 공작, 조선 내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무차별 테러 등 조선 내 극심한 혼란을 조장하려 한 정황이 담긴 문서가 발견됐습니다. 이는 즉각 건준에 보고되었고, 내부 회의에서는 소련 측에 알릴지, 미군정과 어떻게 접촉할지에 대한 격론이 이어졌습니다.
건준은 결국 송진우를 우회로 삼아 미군정에 접근하기로 했습니다. 그에 따라 주아문은 송진우와 접촉했고, 그는 ‘조선인민공화국 선포’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한편 신지훈은 이묘묵의 주선으로 조지 윌리엄스 소령과 대화숙장 나가사키 검사와 접촉했습니다. 윌리엄스는 건준을 공산주의 조직으로 간주하며 해체를 요구했으나, 신지훈은 건준해체 시 좌익 세력의 통제가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는 건준이야말로 좌우익의 조절자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실용적 대안을 제시했고, 윌리엄스는 결국 그의 논리에 일부 설득되었습니다. 이후 신지훈은 미군정 학무국 학무과장으로 보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묘묵과 윌리엄스, 나가사키 등이 조선을 ‘미국의 장녀’로 만들겠다는 발언을 하며 대놓고 오리엔탈리즘에 심취한 가치관을 드러냈고, 이는 신지훈에게 깊은 혐오감을 안겼습니다.
한편 “김계조 화일”은 미군정에 의해 공식적으로 수사되었고, 니시히로 경무국장, 호즈미, 최민환, 나가사키 등이 체포됐습니다. 이묘묵 역시 해임되며 미군정에서 퇴출됐고, 미군정이 조선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자문 인사를 요청함에 따라 김영옥 대위와 이홍립 소위가 경성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소련에도 충격을 주었습니다. 소련은 조선의 우익들이 일본과 결탁해 테러를 자행한 정황에 격노했고, 조만식을 시베리아로 보내고, 북조선 기독사민당 내 회색분자들을 축출해 조선사회민주당으로 재편했습니다. 남한 기독사민당은 이에 반발하며 정당성 경쟁에 나섰고, 박현우 역시 자연스레 남조선 조직에 합류했죠.
김계조 사건의 후폭풍은 조선 정치 지형에 거대한 균열을 남겼습니다. 한국국민당은 창당도 전에 분열됐고, 김성수를 따르는 강경우익 친일 계열은 자유민주당을 창당했습니다. 이에 맞서 안재홍과 건준의 온건 세력은 국민당에 입당했고, 여운형은 민민련과 합세해 조선인민당을 창당하며 건준 내부에 여당을 구축했습니다. 건준 치안대와 그 산하 조직으로 ‘조선민주청년단(민청)’이 결성되며 김두한이 민청 수장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9월 15일, 미군정은 총독부의 공식 해산을 선포했고, 군정청이 이를 계승했습니다. 신지훈은 학무국 학무과장이 되었고, 오천석이 주도하는 서울대 창설안도 시작되며 조선 교육 개혁의 단초가 마련되었습니다. 동시에 건준 기관지 《길》(The Path)이 창간되며, 이는 미군정과 건준 사이의 비공식적 소통 통로가 되었습니다.
5. 고평릉
1945년 9월 16일 밤, 중국 국민정부 주석 장제스와 국민혁명군 총참모장 허잉친을 태운 C-47 수송기가 버드 스트라이크로 인해 추락,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충칭은 곧바로 혼란에 휩싸였죠. 정부수반과 군 최고통수권자가 동시에 사라진 가운데, 누구도 명확한 승계 절차를 갖추고 있지 않았습니다. 국민당 비서장 우톄청과 행정원장 쑹쯔원이 각각 당과 정부 직무를 대리할 수 있었지만, 군부 지휘권은 공중에 떠 있었습니다.
그 시각 충칭에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 중국공산당 대표단이 국공협상을 위해 체류 중이었습니다. 누군가 정부청사에서 “공산당의 테러”를 주장하자, 긴장감은 일거에 고조됐습니다. 군사적 대응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회의장은 곧 극단적 주장들이 오가는 전장처럼 변했습니다. 쑨원의 먼 친척이자 왕징웨이 정권과의 유착 의혹을 받던 쑨유얀은 발작적으로 “어차피 저들이 주석의 유고를 틈타 먼저 공격해올테니 우리가 먼저 행동해야 한다”고 외쳤고, 이는 충칭 외곽에 머물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 대표단이 폭살당하는 결과로 이어졌죠.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패트릭 헐리 주중미대사는 곧바로 사임했고, 웨드마이어 장군은 강경파를 비난하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민당 내부에서는 오히려 강경파가 주도권을 쥐었습니다. 천리푸-천궈푸 형제가 쑹쯔원을 꼭두각시로 앞세운 채 권력을 장악했고, 쑹칭링과 쑨커, 천청 등 반대파들을 체포하며 CC계 군벌 중심의 독재 체제를 구축해갔습니다.
예상과 달리 공산당은 놀라운 침착함을 보였습니다. 충칭으로 향하던 후발대에 있던 린보취가 폭탄 테러 직후 현장에 도착했고, 무려 중국동맹회 시절부터 쑨원의 동지이자 공산당 최고 원로의 권위를 활용해 복수주의에 들끓던 당중앙을 진정시켰습니다. 린보취는 국민당 전체가 아닌 CC계 군벌만을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격론을 벌이던 당은 이를 수용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주석이 된 린보취는 민주동맹과 온건파, 국민당 내 반CC계 인사들과 함께 정치협상회의를 제안하고, 신민주주의 통일전선 구성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역시 이를 지지했죠. 이에 호응하듯, 산서의 옌시산, 직예의 리쭝런, 운남의 룽윈, 야인 펑위샹, 그리고 소련과 연대한 장쉐밍까지 국민당 민주혁명위원회를 선포하며 동참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좌파였습니다. 김두봉, 최창익, 허정숙 등 조선민족혁명당 계열은 민주정부 지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고, 김원봉 세력은 물론 김규식과 그를 따르던 아나키스트들도 곧바로 그 뒤를 따랐습니다. 반면 CC단과 연루된 한국독립당은 어떤 입장도 쉽게 밝히지 못한 채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됐습니다. 임정 주석 김구가 “중국 내부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조소앙, 신익희 등과 개인 자격으로 귀국을 서두른 것은 바로 그 직후였습니다..
@차들어 홍차야 아뇨 나머지는 원래 치안대 소속이 아니니 원래 거처로 복귀한 상태였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이벤트를 종료합니다.
@E.E.샤츠슈나이더 수고하셨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수고하셨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보통 이럴때는 호신을 후에 굴리던데(?) 바이에른, 홍콩 이벤트처럼.
@E.E.샤츠슈나이더 수고하셨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앵... 왜 협상을 하지? 그냥 돌아오면 되지 않나?
[민족주의] 하나로 점점 통합되어 가는 인민당, 민족혁명당, 국민당, 한독당, etc라니… 주아문의 미친 군사지휘능력 대체 뭔가요(…)
@차들어 홍차야 대장정해서 올 게 아니면 배를 줘야 돌아오죠 아무래도(…)
@E.E.샤츠슈나이더 미국이나 영국 해운사 배 빌리면 되죠(?)
@E.E.샤츠슈나이더 좌우익 빅텐트 ㄷㄷ
@E.E.샤츠슈나이더 그것이 통솔력이죠 ㅋㅋ
+ 아. 주아문 통솔은 4로 기록 해 두셨을까요...? 일괄적으로 다 +4던데, 지금에서야 다시 확인하니 주아문 통솔은 3이네요. 다행히 17/20 이라서 16/19는 결과값이 바뀌는게 아니지만...
++ 아니면... 3+1의 보정...? 이 되나요? 트레잇의 절반만 받은거라던가?
@E.E.샤츠슈나이더 오늘도 민사주의자 권가연은 웁니다(?)
@E.E.샤츠슈나이더 이대로 가면 허모씨는 월북 엔딩 아닌가요 (...)
@dnjdss 이래서 권가연을 부르는겁니다(??) 민사주의자시라구요? 뭐 어떻습니까 ㅎㅎ 같은(?)
@렌지파일 월북? 그 북을 하나로 만들어 버리겠습니다(??) 자자 이리로 왓!
@dear0904 오... 그 도전 받아들이겠습니다.
@dear0904 사실 권가연이 주아문에게 감복해서 민사주의에 민족주의를 붙히면 안됩니다(???)
@dnjdss 저도 민사주의자지만 중간에 정체성 혼란 세게 왔습니다.. 공산주의도 패야 되고 외세도 패야 되고 친일파도 패야되고 우익도 패야 되는 진짜 애매한 위치..
@dnjdss 붙이고 민족 사관학교를 세우면 됩니다(???)
@하일레 셀라시예 진짜 이 판국에서 중도는 참 어렵죠(...)
@dear0904 하지만 우익은 저 혼자라 아주 힘듭니다...
@dear0904 사실 붙여서 흑화하면 슈트라서주의나 민족 볼셰비키가 되어버리는.... 읍읍!
@차들어 홍차야 플레이어로써는 그렇겠지만 임정만 복귀하면 캐릭터는 편하지 않을까요? (암살은 몰?루)
@dnjdss 흑화 안하게 잘 조절 해야죠 ㅋㅋ... 예전 연대기에서는 강제 흑화도 있었지만 이젠 없으니까 잘 컨트롤 하면...
@차들어 홍차야 오히려 혼자라서 할 수 있는 전략도 있습니다(...) 예컨데, 제 경우도 4안에서 단독 1은 결국 안될거 알고, 변칙 안건 빠르게 동조해서 2 우세가 아니라 1 우세를 만들 수 있게 투표 했듯이(...)
@하일레 셀라시예 좌익이 더 커지지 못하게 견제하고 우익 세를 늘려야 하는데 제 의견이나 행동이 하나도 반영되지 않거나 성공하지 않아서 잘하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차들어 홍차야 의도대로 안 되는 것 까지 rp의 일부죠 뭐 평양에서 열심히 전도해놓고 이남으로 쫓겨난 박현우나(....)
@하일레 셀라시예 박현우는 부흥회라도 성공시켰지 전 뭐 해가지고 성공한게 있나요(....)
@하일레 셀라시예 심지어 쫒겨나고도 욕먹는거 보면(...)
@차들어 홍차야 제가 늘 미는 이론인데 행운 총량 보존 법칙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운이 안 좋으면 어느 날 기가 막힌 운빨로 보상이 되더라구요
@하일레 셀라시예 ㄷㄷㄷ... 그럼 전 다음 연대기에 엄청난 실패 두번과 대실패 한번을 당하는건가요 ㄷㄷ 무섭다...!
@하일레 셀라시예 글쎄요 9일에 세이아 천장쳤는데 15일에 교네루 천장친걸 봐서는 그런 법칙은 없는거 같은데...
@차들어 홍차야 그건 블아 확률이 문제가 아닌지...
@하일레 셀라시예 사실 좌익 민족주의 당이 되어버린 인민당에서 민사주의+중도 맑시즘 정당의 창당각을 위해 존버 중 입니다
@렌지파일 아직 “그 위폐”는 나오지도 않았긴 한데.. 역사대로 분단된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ㄷㄷ
@차들어 홍차야 똑같이 혼자인 허경훈이랑 좌우합작하시죠(?)
혹시 중도 참가가 가능할까요? 입원하는 동안 밀린 일들을 처리하느라 좀 바쁠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이벤트 참가할 시간은 낼 수 있을것 같습니다.
오.. 좋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2화를 지금 올려서 로그 보기 편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벌써 2화를? 올라오는 속도가 빠르네요.
@차들어 홍차야 챗지피티 딸깍이 아주 편합니다. 물론 그냥 딸깍은 아니고 좀 세팅을 해야 하지만…
@E.E.샤츠슈나이더 와우... 진짜 바로 올리실줄은 몰랐습니다 ㄷㄷㄷ... 나머지 다 써놓으셨어도 실질 30분만에...?
+ 챗지피티가 편하긴 합니다 ㅋㅋ 일단 세팅도 해야 하고 0에서 1 자체는 어려워 하지만... 그거만 아님 진짜 돈값 하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