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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호학 산책 (장 들로르므 신부님과 까디르인들) 원문보기 글쓴이: 데레사
태생소경
(요한 9장)
장 들로르므 신부님 강의, 다섯 번째 만남 1997년 4월 8일
V. 본다는 것의 역전
태생소경은 보게 되고, 보는 이들은 눈먼 이가 되다 (요한 9장)
이 이야기에는 주인공인 태생 소경을 주위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태생 소경은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굳이 찾지 않으나, 다른 모두는 그와 관련하여 행동하고 반응한다. 태생 소경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말한 것을 행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자신에게 묻는 질문들에 대답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모든 것이 태생 소경 안에서 일어나고 그와 관련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일반 대중을 위한 예수님의 두 말씀이(1-5절과 39-41절) 이 이야기를 틀 지우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세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짧은 두 장면에서는 예수님이 등장하고 주도한다.(6-7절과 35-38절) 이 두 장면 사이에, ‘보게 된 눈먼 이’와 그에게 명령한 미지의 인물(예수님은 사라졌다)에 관한 긴 탐색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관건은 ‘눈먼 이’다. 이야기 첫 부분에서 그에게 일어난 것은 예수님의 말을 들은 결과인데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모두 말로 진행된다. 보는 것보다는 듣고 말하는 부분이 많으며, 중심 문제는 진리의 문제로 떠오른다.
먼저 세 단계로 소경의 행보를 살펴본 다음, 태생 소경의 경우를 초월하는 예수님의 처음과 마지막 말씀을 살펴보자.
A. 눈먼 이가 순명하자 보는 이가 되다(6-7절)
이 장면은 짧고 군더더기가 없는 장면이다. 소경은 어떤 갈망도 표현하지 않았다.(그는 ‘구걸하는 이’였으므로, 적선을 바랐을 것이다.) 예수님은 말과 행동으로 주도하시고, 소경은 자신에게 명해진 것을 가서 실행함으로써 “앞을 보게 되어 돌아온다.”
예수님의 이상한 행동: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만든다. 이것은 그의 몸과 입의 어떤 것과 땅이 섞인 것이다. 이어서 명확하게 명하신다.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완전히 닫힌 눈으로, 소경은 들은 말씀을 실행한다. 그리고 “실로암”이 “파견된 이”를 뜻하므로(앞선 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파견된 이라고 했다), 서술자는, 소경과 아버지께서 “파견한 이” 사이에 은밀한 행보 속에서 소경이 알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관계가 세워짐을 암시한다.
“그가 씻고”와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사이에 신체적 변화 순간은 어디에도 얘기되어 있지 않다. 이 변화는 나중에 언급되고 있을뿐더러 증인조차 없다. “치유”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태생 소경은 앞선 상태를 되찾은 것도 아니다. 그는 오로지 눈을 뜬 것(시력에서 태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들었으나 “파견된 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채 연결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B. 사면초가의 인정[확인](8-34절)
이웃들과 함께 하는 장면(8-12절)
“바리사이들”과 함께 하는 세 장면
- ‘보게 된 눈먼 이’와 바리사이들(9-18절)
- 그 부모와 바리사이들(19-23절)
- “보게 된 눈먼 이”와 바리사이들(24-34절)
a/ 첫 장면(8-12절)은 눈먼 이를 알았던 이들과의 문제(‘모르는 이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그인가? 아니면 그와 꼭 닮은 다른 사람인가? 외양은 양면성을 지닌다. 그는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라고 말한다. 믿으라고 요구하는 그의 말이 개입해야만 한다.(믿지 않고서는 어떤 사람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때,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여기서도, 그가 말하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어떻게는 부재중인 익명의 사람과 관련되는데, 그가 부재중이며 누구인지도 몰라 그에게 질문할 수조차 없으므로, 조사는 벽에 부딪힌다. 보게 된 이는 자신이 이전의 바로 그 소경이었음을 확인시키는 것도, 믿게 하는 것도 쉽지 않다.
b/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상황과 함께 바리사이들이 조사를 다시 시작한다. 대두되는 문제는 ‘어떻게’이다. 그리고 이 ‘어떻게’의 문제는 안식일에 진흙을 개어 눈을 뜨게 한 익명의 사람에게 집중된다. 이 사람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의견이 분분하다. 사람들은 법을 위반한 사람(“죄인이다”)과 반박할 수 없는 사실(그분은 내 눈을 뜨게 해주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 사이에 잡혀있다. 남자의 말(그분은 예언자시다)은 고려되지 않는다.(이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해석하고 믿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들은 첫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그가 진짜 태생소경인 바로 그 사람인가?
c/ 질문을 받은 부모는 이 질문에 확실히 대답한다. 그래서 ‘어떻게’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부모에게는 질문자들의 종교사회적 권력 때문에 이 질문이 당황스럽다. 그래서 명확한 것에 대해서만 말한다. 곧 이전에 그는 소경이었고 그리고 지금은 그가 본다. 이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 사이의 ‘어떻게’에 관한 것은 그의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부모는 진리의 위험을 감수하라는 요청에 눈을 감아버린다.
d/ 바리사이들의 판결: “그자는 죄인이다.”
두 지식이 대립된다.
바리사이들: “우리는 알고 있소.”(선험적 판단)
보게 된 소경: “나는 이 한 가지는 압니다.”(체험적 지식)
명백한 사실은 인정을 요구한다. 바리사이들은 행위의 문제를 어떻게(3번째)로 가져간다. 그는 빈정거린다.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화를 내고 욕설을 퍼부으며, 모세와 “우리가 아는 것”에 근거한 진리를 주장한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28-29절) ‘우리’라는 행위자는, 믿음을 참여시키는 판단과 인정의 행위를 통해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에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을 하느님에게서 온 분을 인정할 줄 아는 종교지식을 체험적으로 깨우친 이 남자가 해낸다.(30-33절) 이제, 이 남자의 말을 묵살하고(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므로) 밖으로 추방되는 것만 남는다. 그것은 그가 사람들의 독점적 힘이 된 지식에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34절)
증인은 방해자다. 그는 질문을 열려있게 두고, 이 질문에 대답할 위험이 있는 부르심을 열어두기 때문이다. “눈을 뜨게 해준 이가 어디에서 왔는가?” 이 질문에 대답을 거부하는 이들의 나약함이 여러 방식으로 표시되어 있다. 곧 그들은 반복하고 제자리에서 뱅뱅 돈다. 그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한 종류의 지식에만 매달린다. 그리고 사실들에 반대하여 다른 것을 아무 것도 알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증인은 인정받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 그의 외양에 대한 (사람들의) 망설임에 봉착한다.(그인가 혹은 그와 닮은 다른 사람인가?)
- 권력과 안전의 체계가 되어버린 굳어져버린 지식의 편견들에 부딪친다.(대답을 미리 알고 있으며 질문을 무산시켜버린다)
그는 자신이 증인이 된 익명의 사람을 인정하게 하는데 쓰라린 경험을 한다.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은 그분의 증인을 인정하고, 증인이 말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관련된다.
C. 사람의 아들을 믿다 그리고 그분을 보다(35-38절)
내쳐진 증인인 그를 찾는 것은 예수님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하는 질문은 놀랍다.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따라서 ‘보게 된 소경’의 행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를 시험한다.
그것은 “보다”와 “알다”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어떤 사람 “쪽으로/안에 믿는가”라는 질문이다. 믿음의 대상을 향한 도약에서 그 존재안에 까지 그와의 개인적 신뢰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 텍스트에서는 놀라운 표현이다. 이 텍스트에서 예수님은, 그분을 보지 않고서도 “파견된 이”로, “예언자”로, “하느님에게서 온 분”으로 불렸다.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주십시오”라는 질문에서 “~을 믿다”는 어떤 감정 혹은 “어떤 것을”(에너지, 수호신, 하늘에 대한 사랑) 향한 도약 혹은 다소간 모호한 신심이 아니라, 그가 마음으로 인정한 타자를 향한 움직임의 행위다.
이것은 어떤 식으로든 그분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분을 이미 보았지만, 외모는 그분을 알아보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지만, 그분이 말하는 것을 직접 들어야 한다. 혹은 우리는 이 사람의 증인과 할 것이 있다. 그러나 그가 믿을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이 여기서 “사람의 아들”과 함께 복잡해진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불릴 수 있다고 어떻게 인정하겠는가? 그것은 어떤 사람의 아들(fils d’homme; 아무나가 될 수 있는)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Fils de l'Homme)”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녀관계의 외관으로 인류에 속하면서, 유일하고 완전한 방식으로 인류에 소속된다. 자녀관계의 신비와 인간의 기원을 건드리는 모든 것처럼, 이것은 “보다”와 “알다”를 벗어나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는 오롯한 신뢰가 담겨있다. 그가 누구인지 말해주면, 그를 믿겠다는 말이다.
대답은 주의 깊게 가늠해보아야 한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이 말은 들으라고 제공된 것이다. 곧 너에게 말하는 자가 그가 누구인지 너에게 말한다. 인정은 신뢰의 듣기를 통과한다. 말은 네가 모르고 보았던 네가 본 이를 밝혀준다. 네가 보는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들어야 한다. “듣기”는 “보기”를 변화시키고, 항상 애매모호한 외양을 신뢰하는 대신 “보다” “믿다” 안에서 완성된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보다”는 “눈으로 보는 것” 만이 아니다. “믿다”에는 더 이상 대상에 해당하는 보어가 필요 없다. “믿다”는 자신을 완전히 열고, 자신에게서 완전히 나가는 행위다. 그리고 “~를 향해 믿다”는 경배하는 몸의 움직임으로 표현된다.(그래서 눈은 더 이상 보지 않으며, 볼 필요도 없게 된다!) 주어진 말씀, 들은 말씀은 말하는 이를 보는 것보다 더 단단한 끈을 맺어준다.
D. 이야기 처음과 마지막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2-5절과 39-41절)
이야기 처음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이고, 이야기의 마지막 말씀은 몇몇 바리사이들과 대화를 촉발시킨다. 이 말씀들은 소경의 행보를 개인적 모험이기보다 더 크게 만든다.
- a) 태생 소경의 경우는 “사람의 아들”의 자격으로 예수님께 맡겨진 프로그램을 드러내게 한다.(사람의 아들에게 심판이 맡겨졌다. 5,26-30 참조) “이 세상에서” 외양 아래 감추어져 있는 참됨을 밝혀내기 위한 식별을 하는 것이다.
참됨은 본다는 것의 역전 이른바 “소경”이 “보는 이”가 되고 “보는 이들”이 “소경들”이 되는 변화에서 밝혀진다. “보지 못하는 이들이 보고”는 태생소경과 관련될 수 있으나, 그에게만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질문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에서 밝혀지는 두 개의 행보를 구분한다.
-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죄인이면서 눈먼 사람이거나 죄인이 됨 없이 눈먼 사람이 될 수 있다.
눈멂과 죄를 혼돈해서는 안 된다.(3절 참조)
-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본다고 자만하는 것, 여기에 죄가 있다.
본다고 자만하면 죄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보는 이”가 되기 위해서는 소경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때, 소경의 눈에 바른 진흙(침과 땅)을 이해하게 된다. 예수님은 그의 눈을 막았다. 그래서 그가 듣고 “파견된 이”에게서 눈을 씻으러 갈 수 있게 한다. 이 말씀은 본다고 자만하는 이에게는 듣기 힘든 말이며, 그는 진짜 소경이 된다. 이것이 시력의 법이다. 곧 더 잘 보기 위해서는 눈을 깜빡여야 한다. 눈을 감고 떠야 한다. 그리고 눈을 감았을 때 더 잘 들린다.
b/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눈멂과 죄 사이에 아무 연관도 없다. 그 사람이 결코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눈이 먼 사태는 “그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는 자리가 된다. 어떻게?
하느님의 일은
- 아무도 참여하지 않은 그의 눈뜸을 통해
- 그의 신원과 그가 증언한 말이 의혹에 놓이는 중에 그가 겪은 인정의 어려움을 통해
- 이와 함께 그가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증언하는 익명의 사람의 자격을 인정받아내기 힘듦을 통해
- 그가 아직 알지 못하는 분, 그에게 말을 걸었으며 그가 알지 못하고서 본 ‘사람의 아들’을 그가 인정함을 통해 드러난다.
하느님의 일은 묘사될 수 없다. 이 일은 사람들 안에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효과를 통해 드러날 뿐이다. 그것은 더딘 승인이다. 오해받을 소지가 있으며, 대립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 도중에 일어난다. 듣는 능력과 “보는” 능력이 시련을 겪으며, 그들의 말에서 그들이 누구인지가 밝혀지며, 그들을 묶어놓는 것과 자유롭게 하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은 진행 중인 심판이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덧붙인다.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기 전에 일하기
이것이 바로 파견된 이의 자격으로 하는 예수님의 일이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의 일이다. 5,16-17 참조)
그러나 그분만의 일은 아니다.(6,27-29 참조)
소경과 제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사람의 아들’을 믿도록, “보다”로 이끄는 말을 신뢰하면서 하느님의 일에 참여한다. 그것은 낮 동안 하는 일이다. 낮은 빛이신 예수님 곧 “세상의 빛”이 있는 동안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빛은 보기 위해(혹은 걷기 위해, 8,13 참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보는 이가 되려고 일하고자 주어졌다. 여기에는 안식일도 포함된다. 이것이 빛의 참된 일이다.
눈이 멀었다함은 하느님의 일과 관련하여 규정된다. 이것은 이전 상태로써,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없애려고 인간들의 차원에서 “파견된 이”를 통해 일하신다. 그리고 죄는 하느님의 이 일을 효과 없게 만들어 버린다. 육신의 눈멂(처음의 소경)이 다른 영적인 것의 상징(마지막에 바리사이들)이 되고도 남는다. 두 양태는 한 행보 안에 뒤섞여 있다. 곧 소경은 마지막에 가서야 참으로 “보기” 때문이다.
세 가지 형상이 눈을 뜨기 위한 그만큼이나 마지막에 “믿기”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협력이 필요하다.
눈 말을 듣기 예수님과의 관계
눈에 진흙을 바름 “가서 눈을 씻어라” 실로암 - 파견된 이
“네가 그를 보았다” “너에게 말하는 이” “사람의 아들을 믿다”
인정하고 믿기 위해서는 “본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들어야만 한다. 소경은 파견된 이의 말을 들었기에 “보는 이”, 믿는 이가 된다. 이에 비해 사람들은 인정문제에 들어설 때는, 안다고 자만하면서 듣지 않게 되어 점점 더 “보지” 못하게 되는 불신의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장 들로르므 신부님의 강의록에서
수정 정리: 마리 테스, 안데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