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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물결을 찾아서/ 산유화가,정읍사,서동요 -박종일
유민이란 이곳저곳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다. 떠돌이 별 유성처럼 고향을 떠나 세상을 쏘아 다닌다. 그래선지 우리나라의 광대나 기생의 시원을 백제의 유민에서부터 라고 보는 견해가 있었다.
거리의 곳곳에는 죽은 자의 영혼이 떠돌아 다녔기에, 너는 초조에, 나는 공포에 떠는 전율 밖에 없었다.
백제부흥군은 구심점이 없었다. 지방세력들은 왕실과 틀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의자왕과 대신, 그 가족들은 당으로 끌려갔다. 사비도성에 남아 있던 지배층들은 살기 위해 벌써 적에게 붙어버렸다. 짓눌려 지내는 식민지의 백성이 돼버린 것.
그러나 싸움은 아직도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었다. 창칼에 찔렸거나 찔린 사람들이 선지피를 흘리며 숨을 거둔다. 길거리에 는 주검들이 나뒹굴고 민초들은 들쥐처럼 숨어다녀야만 살 수 있는 서글픈 운명이기에 옛날이 그리웠다.
비적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며 백제부흥군을 사칭했다. 그러나 정말 그런지? 그게 그대로 통했다. 모두가 야윈 목숨이다. 한뼘의 땅이 있어 농사를 짓고 세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것이 무엇이냐 푸념하지만 그 때가 훨씬 좋았더라.
삶의 흔적이 묻어 있는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절망하는 수도 있다. 때론 분노하는 때도 있다. 전쟁은 사람들을 죽음과 피페함 속으로 끌고만 가기 때문이다. 한숨이 절로 새어 나오고 노래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것조차 할 수 없다면 숨을 쉰들 어찌 산 목숨인가.
산유화가(山有花歌)는 증보동국문헌비고(권246) 백제가요조에 내용이 좀 나와 있었다. 또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의 농사소리 속으로 일부가 전해진다. 전해오는 소리는 먼저 1 긴모심기소리(긴산유화가), 2 자진모심기소리(자진산유화가), 3 긴 김매기소리, 4 자진 김매기소리, 5 바심소리, 6 나비질소리, 7 곳간에 쌓는소리, 8 맺음소리 등 8소리로 엮어진다.
<메> 에헤에 야아하 에헤
에헤 에헤여루 상사디이요
<받> 에헤에 야아하 에헤
에헤 에헤여루 상사디이요
<메> 산유화야 산유화야
궁야평 너른들에
논도 많고 밭도 많다.
씨뿌리구 모 욍겨서
충실허니 가꾸어서 성실하게 맺어보세
<받> 에헤에 야아하 에헤 에헤 에헤여루상사디이요
<메> 산유화야 산유화야 이런말이
웬말이냐 용머리를 생각하며
구룡포에 버렸으니 슬프구나
어화벗님 구국충성 다못했네
<받> 에헤야 야아하 에헤 에헤 에헤여루 상사디이요
- <긴산유화가> / 부여농사소리 중에서, 세도중학교 ( CD-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향토민요 전국여행)
산유화가는 산유화곡이라고도 불렀다. 본디 백제 유민들의 한 맺힌 노래였는데 언제부터인지 들노래가 됐나 보다. 노래가 사는 어느 정도 백제의 설음을 담고 있지만 민요학자들은 강원, 영남의 메나리권과 호남의 육자배기권 사이의 노래로 여긴다. 또 산유화가 8소리 중에서 다섯번째(5)의 소리인 바심소리가 지금의 가장 내포(부여)적인 소리라고 한다. 노래를 들어보니 나도 그런 생각이 든다.
산유화가가 진짜로 백제의 것이면 산유화가의 소리는 장구한 세월을 타고 조금씩 변했을 것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가사는 훨씬 뒷날의 이야기가 된다. 백제시대 원래의 산유화가는 농동요였으리라 짐작을 해본다.
산유화가 또는 산유화의 유래는 길고도 멀다. 또한 남여상열(男女相悅)의 많은 작품들이 동시에 존재한다.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창작된 시기도 다양하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전해오지만 산유화가의 원류는 아무래도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당하다. 백제의 고토인 부여군 세도면에서 전해오는 이 노래는 사랑적인 요소를 갖지 않았다. 오직 백제 유민의 슬픔만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산유화가는 백제사람들이 의자왕과 대신, 그 가족들이 함께 당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세상을 한탄하여 불렀다는 것. 그러기에 비가조의 노래일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상여소리가 메나리조라면 산유화가는 육자백이조다. 하지만 전라도 육자백이와는 좀 다르다. 모를 심을 때 부르는 노래이니, 일종의 농부가다.
채록 및 전승 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현재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4호인 부여지방 산유화가의 전수자 박홍남님이 1974년 10월경에 부여군 세도면 동네 계모임에 따라갔다. 그 때 술을 몇 잔 마신 뒤 동네 노인 두 분이 일어서서 흥겹게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그도 그 노래에 심취해 열심히 배운다.
내가 찾아간 부여국악원은 부여읍 관북리의 언덕 위에 올라서서 읍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홍남님은 1920년이시니 연세가 많았다. 아직도 건강하지만 그의 소리를 받은 김영구님이 있으니 든든하다.
연대미상- 임윤필- 김학수- 홍준기- 박홍남- 김영구
이병호- 조택구
사람의 소리는 기후와 풍토, 습속에 따라 약간씩 다른 것 같다. 그래선지 몇 백리에 불과한 거리지만 높은 산을 넘거나 강을 건느면 갑자기 말씨가 달라진다. 그래서 사투리가 생겼다.
경상도지방으로 넘어간 산유화가는 남여간의 사랑 이야기을 담고 있었다. 또다른 산유화가를 만든다. 여기서는 산유화가의 원명을 메나리노래라고도 한다. 어쨌든 메나리는 산에 피는 꽃의 총칭이다. 그렇다면 김소월의 시 산유화까지도 그 맥이 닿아 있다고 보는 견해다. 산유화가는 황해도 일원에도 전한다.
민요는 민족의 노래다. 또한 전해오는 끈질긴 생명력은 힘이다. 그러기에 순수한 향토의 노래라고 할 수가 있겠다. 따라서 고유한 특질이 강렬하게 나타났다. 예술성이나 개성이 모자라도 기층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그 점이 어느 노래보다도 출중나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실린 백제의 노래는 지리산가, 무등산가, 선운산가, 정읍사 등이다. 그러나 가사가 나와 있는 것은 정읍사 뿐이다. 정읍사는 평민 부녀자의 가창이라는데 춤과 더불어 노래을 불렀던 모양이다.
<전 공> 달아 노피곰도다샤
어귀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귀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드리
<후 공> 전져재 녀러신고요
어귀야 즌대를 드대욜셰라
어귀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귀야 내 가논대 졈그랄셰라
어귀야 어강됴리
소 엽> 아으 다롱디리
전라도 정읍은 전주(완산)의 속현이다.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의 정이 푸근하게 서린 백제적이고 우리 것 다운 노래다. 혹시 저자(시장)에 간 남편이 굿은 일에 빠지지나 않을까 마음조리며걱정한다. 어귀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는 반복하는 감탄의 사설이리라.
시조의 형성은 고려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조의 시작에 대하여 고구려의 을파소, 왕산악, 백제의 성충 등이 라고 시조집(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에서 언급한다 그렇지만 확정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다만 향가를 거쳐 가사와 더불어 시대를 내려오는 동안 정형시조로 정착을 했다고 1차적으로 이야기할 수가 있다.
삼국유사 등에 실려 있는 많은 한역가요와 구전하는 고가요는 세월이 흐르면서 시가, 음악, 무용 등으로 각기 분류되어 나갔다. 따라서 시조의 기원도 향가나 고려가요까지 소급하거나 정읍사 등의 음악형태에서 그 맥을 찾아 보고 싶다.
사실상 가곡, 시조, 가사, 잡가, 민요 등이 상호 넘나드는 관계로 간략해서 그냥 소리라고 불렀다. 계절이 바뀌면 밤낮의 길이가 달라져 언제나 몇 시부타는 밤이다, 몇 시부터는 낮이다 할 수가 없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뭉덩거려 저녁 때라고 부르지 않는가.
정읍사는 백제가요다. 옛 백제지방에서 유행하던 가요라고 하는데 민요라고도 볼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정악인 영산회상은 연주인들 사이에서 정읍이다. 정읍은 속명이기에 이 곡은 백제가요 정읍사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은 장엄한 합주곡 스타일로 변했다.
시조는 고가요 속에서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가요에서 조금씩 태동한 다음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크게 발전한다. 따라서 우리의 노래는 공후인, 황조가, 영신가 등의 원시가요를 거치고 백제가요, 신라의 향가를 통과한다. 그리하여 고려의 별곡체 형식을 만나서 정형성이 크게 약해지거나 후렴구 부분이 소멸돼갔다.
그리고나서 조선시대 로 넘어오니 장가, 단가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단가에다가 조선시대 영조 때 가객 이세춘이 시조라는 이름을 붙쳤다. 그리되자 장가는 가사형태로 바뀐다. 그리고 서구문물이 밀려들던 1900년대가 돼서야 시조는 전통의 규율에서 벗어난 현대시와 더불어 오늘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민요와 시조는 오랜 세월동안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시조와 가곡 등의 영역이 별개로 생긴 다음 독립됐으며 노래가락, 잡가와도 구별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은 한문자, 향찰, 이두, 구결, 토(吐) 등을 따라 오다가 조선시대 세종 때 한글이 만들어지고 언문일치의 문학이 생겨나자 그 때서야 비로소 자리를 제대로 잡는다.
향가 서동요(薯童謠)는 로맨틱한 사연과 함께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노래가사다.
선화공주니믄
남그으지 얼어두고
맛둥방을
바매 몰 안고가다
선화공주님은/남 몰래/밀통하고/서동을/밤에 몰래/안고 간다는 뜻.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다. 서동은 백제 무왕의 아명이라고 삼국유사 무왕조는 설명한다.
마를 캐어 생게를 꾸려가던 백제의 어느 서동이 신라의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서 서라벌로 갔다. 서동은 꾀를 내어 아이들에게 마를 나뉘주며 서동요를 퍼뜨렸다.
노래 서동요가 서라벌에 널리 퍼졌다. 나중에는 궁성에까지 전해지니 야단이 났다. 그런 이유로 공주는 모 처로 피신내지 귀양 비슷한 것을 떠났다.
그 때 길목을 지키고 있던 서동이 따라 나서며 여러가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에 마음이 끌리고 좋아하게 된다. 또 그의 이름이 서동임을 차차 알게 되니 서동요 노래가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지금도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가면 삼국유사를 뒷바침해주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서동이었던 무왕이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연못 마룡지와 마를 캐다가 오금(五金)을 얻은 오금산이 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쌍릉. 이 두 능을 무왕과 왕비인 선화공주의 묘라고 마을 사람들은 굳게 믿는다. 그러나 통설은 무왕의 어머니가 살아다는 못을 부여군 부여읍의 궁남지라고 여겼다. 그래서 궁남지 앞에다가 서동요비를 세운다.
실제로 무왕과 진평왕의 세째 딸인 선화공주는 기록상 아직까지 혼인한 사실이 없다. 다만 전 왕인 동성왕이 혼인을 청하여 신라의 이찬 비지(比智)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을 뿐이다. 그런 사실이 설화로 유입되면서 동성왕이 무왕으로 바뀌었다고 보면 가능하다. 그러나 무왕은 훨씬 후대의 사람이니 이야기가 걸맞지 않는다.
어쨌든 서동요의 서동을 설화상의 가공 인물로 치더라도 마를 캐던 서동이 어찌어찌하여 공주를 아내로 삼았다는 신분상승의 상징적인 이야기는 된다. 그게 향가로 편입되면서 엉뚱하게 역사적인 인물과 잘못되게 결부되었나?
그러나 미륵사는 무왕과 왕비인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찰이라고 했다. 왕비가 신라 진평왕의 세째 딸 선화공주가 아니라면 그런 비슷한 이름을 가진 익산지방 토호의 딸일 수도 있다. 그게 부풀려져서 기록되었거나. 아니라면?
가설은 얼마든지 설정될 수가 있으나 진실은 오직 하나일 것이다. 너무나도 오래된 짧막한 노랫말이기에 향가 서동요 앞에 가로놓여 있는 해석이 구구하다.
구비문학(口碑文學)은 말로 된 문학이요, 기록문학은 글로 된 문학이다. 그리고 말로 된 문학은 구비전승을 한다. 민간전승이라서 민속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구비문학은 민중의 문학이다. 민중이란 일부 양반 지배층을 제외한 나머지 총인구를 의미한다. 그러나 구비문학도 이제는 사라져 가기에 전면적으로 채록되고 있다.
양서 신라전(梁書新羅傳)에 써 있기를 신라는 백제를 통해 중국과 소통했다는 것이다. 백제사람들이 한자를 일찍부터 사용했다고 생각해 볼일이다. 그렇다면 백제가 신라보다 먼저 향찰식 문자를 썼을 것 같다. 한자를 빌어 백제말로 인명을 표기했다고 추즉된다.
그것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왕비의 은팔찌에 향찰로 쓴 인명 다리(多利)라는 제작자의 이름이 음각돼 있기 때문이다. 그때가 무령왕 20년(520)이라니 신라보다도 앞선 연대다. 그러나 백제의 향찰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 말했다.
백제는 참 슬프오.
노래가 있었다. 백제의 노래와 어떤 관계가 있는 향가는 아니다. 그러나 꼭 부기하고 싶은 향가다. 요즘의 안목으로 생각해봐도 퍽 아름다운 작품이다. 옛 사람의 감정이지만 오늘을 사는 나의 가슴에도 곧바로 날아와 맺힌다.
제망매가(祭亡妹歌)는 신라 35대 경덕왕(742-765) 때 스님인 월명사(月明寺)가 지었다. 죽은 누이를 위해 49재를 지내면서 불렀다. 이 향가를 제사를 지낼 적에 노래하니 돌연 회오리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지전이 날려 서쪽 어디론가 사라진다. 신주(神主) 대신으로 지전을 만들어 붙이고 제사를 지냈나 본데 천지신명이 감동하여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다. 지전은 망자가 먼 길을 오며가며 쓰라고 만든 돈이다. 둥돈모양으로 오려낸 종이로 관 속에 넣어 준다.
내용을 읽어보면 인생에 대한 무상감이나 죽음 후의 세계인 미타찰(彌陀刹)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또한 예고도 없이 찾아온 혈육의 죽음을 슬퍼하는 정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노래말이다. 같은 부모의 몸에서 태어난 것을 나무의 한 가지라고 보았으며 삶과 죽음의 관계를 떨어지는 가을의 낙엽에 비유을 했는데 몹시 애틋하다.
생사의 길은
여기있으니 두려워하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가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으, 미타찰에 만날 나는
< 도닦아 기다리리
향가는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均如傳)에 11수해서 모두 25수만 전해오는 우리의 옛 노래다. 향가는 통일신라 때를 전후해 몹시 유행했나 보다. 승려, 낭도, 부녀자 등등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까지 편찬하게 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향가집이 전해오지 않으니 섭섭하다.
스님 월명사는 서라벌의 사천왕사에서 살았는데 피리를 잘 불었다. 달밤에 피리를 불며 바깥으로 나가니 달이 걸음을 멈췄다고 전한다. 작가 월명사는 도솔가( 率歌)도 지었다.
이처럼 산유화가, 정읍사, 서동요, 제망매가에 이르기까지 인생에 대한 무상감이나 예고도 없이 찾아온 이별 등에서 부딪는 경계인 한(恨)은 보통 맺힌다, 서린다, 깊다는 서술어와 함께 쓰인다. 감정이 밖으로 분출되지 않고 안으로 가라 앉은 것이다. . 즉, 애이불비의 아름다움이다. 애이불비(哀而不悲)는 속울음이다. 따라서 슬프지만 아무렇게나 울지 않는다.
공무도하가나 황조가는 님을 여윈 슬픔을 노래로 승화시켰다. 가슴 속에 새겨진 어떤 경계를 밖으로 보여준 것. 되돌아 생각해보면 산유화가도 이런 범주에 속하는 우리의 노래다. 또한 향가인 제망매가 같은 백제의 옛 노래 가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