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筏橋)를 가다(제3악장)
최 화 웅
벌교읍내 태백산맥 문학거리를 걸은 뒤 문학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제석산 조정래 등산로 초입에 현부자네 집이 버티고 서 있었다. 현부자네 집은 질펀한 중도 들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제석산 자락에 우뚝 세워진 집으로 대문과 안채가 옛 한옥의 틀을 갖추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2층 솟을 대문이 위압적이다. 소설 태백산맥의 말문을 열 때 나오는 첫 집의 위용을 엿보였다. 현부자네가 목욕탕까지 갖춘 별장과 제각을 신축하면서 전속무당이나 다름없는 월녀와 소화의 거처를 담장 밖 한 켠에 별체를 마련해주었다.
소화의 집은 방 둘에 부엌 하나인 단출한 구조로 뒤에 헛간이 달려있다. 소화는 신통력이 뛰어난 무당 월녀의 딸로 열일곱 살에 대물림을 받았다. 소화는 미모가 빼어난 한 송이 작은 꽃과 같다는 의미의 이름을 가졌다. 그녀는 웃음이 없고 말 수가 적어 기품을 가진 몸매의 새끼무당이다. 그녀의 운명은 기구했다. 소화는 정하섭의 할아버지 정 참봉과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정하섭은 어린 날 춤추는 소화의 모습을 마음에 두었다가 훗날 빨치산 남로당 비밀당원이 되어 찾아온 정하섭과 정을 통하고 사랑이 싹터 애까지 가진다. 정하섭, 이지숫 등의 여러 심부름을 해주며 좌익사상에 물든 뒤 조계산지구 빨치산과 합류하여 산생활을 하던 끝에 체포되어 5년형을 언도받고 감옥에서 정하섭의 아들을 낳는다. 삽작 밖에서 나직이 부르면 감칠맛 나는 꼬막을 무치던 손을 훔친 소화가 달려 나와 반길 것 같다.
소설에서 당시 벌교에 대해 “철교 아래 선착장까지 밀물을 타고 들어온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실거렸고, 상주하는 일인들도 같은 규모의 읍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만큼 왜색이 짙었고, 읍 단위에 어울리지 않게 주재소 아닌 경찰서가 세워졌다. 읍내에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터를 잡게 되었고, 돈의 활기를 쫓아 유입인구가 늘어났다. 모든 교통의 요지가 그러하듯 벌교에도 제법 짱짱한 주먹패가 생겨났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벌교에 가서 돈 자랑, 주먹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 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멋 자랑 하지 말라’는 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라고 작가는 썼다.
벌교에는 일본군인 출신 나카시마(中島)가 동척자금으로 바닷물을 막은 간척지가 있다. 사람들은 그 간척지를 중도 들녘, 중도방죽이라고 불렀다. 중도방죽은 소화다리로부터 호동리 선수마을까지 뻗어 있다. 중도는 평소 말을 타고 간척지를 돌며 거들먹거렸다. 작가는 소설에서 간척지의 방축을 쌓던 때 그 뼈 빠지도록 힘들었던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워따 말도 마시오. 고것이 워디 사람이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해 사는 가난헌 개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멍에 풀칠하자고 뫼성 쌓는 것을 질로 심든 부역으로 쳤는디. 고것이 지아무리 심든다혀고 워찌 뻘밭에다 방죽 쌓는 일에 비하겄소... 하여튼지 간에 저 방죽에 쌓인 돌뎅이 하나하나, 흙 한 삽 한 삽이 다 가난한 조선사람덜 핏방울이고...” 중도방죽은 일제강점기 벌교인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소설 3권에서 염상진의 아들 광조와 딸 덕순이가 몸져누운 엄마 죽산댁을 위해 참게를 잡으러 나가는 장면이 있다. 그때 광조와 덕순이가 중도방죽을 걸으면서 이 길이 “엄마 한숨맹키로 길다.”고 푸념했고 마지막 10권에서는 끝내 자폭한 염상진의 목이 별교역 앞에 내다갈린 처참한 모습을 본 이야기꾼 한장수 노인이 독백하며 걷던 길이다.
벌교갯벌에 찬바람이 불면 꼬막과 짱뚱어가 제철을 만나 뛴다. 소설 태백산맥에서도 여러 번 꼬막 맛을 소개했듯이 벌교로 들어서는 어귀에는 한 집 건너 꼬막정식집을 알리는 간판이 즐비했다. 벌교천 하구의 갯벌에서는 최상급 꼬막이 캐내서 해마다 11월이면 꼬막축제를 연다. 벌교에서 늦은 점심을 꼬막정식으로 먹었다. 식탁에 올라온 꼬막은 자연산 참꼬막과 새꼬막이라는 양식 똥꼬막과 날로 올라오는 피꼬막까지 다양했다. 삶은 꼬막에 구운 꼬막, 꼬막전과 꼬막무침, 꼬막탕수육으로 갖가지 꼬막찬으로 가득했다. 양념을 하지 않았는데도 간간하고 쫄깃쫄깃한 벌교의 자연산, 똥꼬막은 그대로 일품이었다.
심지어 작가 조정래씨는 ‘겨울꼬막 맛 같은 쫄깃한 자궁을 가진 외서댁’이라는 원색적인 표현으로 꼬막을 자주 들먹였다.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한 인물은 무려 275명이나 된다. 그 가운데 외서댁처럼 ‘댁’ 칭호로 부르는 여인이 26명에 달했다. 빨치산 강동식의 아내로 염상구에게 겁탈 당하고 물에 빠져 죽으려고 살아나 끝내 입산한 외서댁을 비롯해서 그녀의 어머니 밤골댁, 외서댁을 물에서 건져낸 왕주댁와 그 이웃 아낙 중천댁, 해방구 율어에서 대를 이을 아이를 갖게 된 빨치산 고두만의 아내 칠동댁, 염상진과 심재모의 도움으로 빨치산인 아들 고두만과 칠동댁을 율어에서 합방시켜 손자를 본 감물댁, 하대치의 아내 들몰댁, 들몰댁의 어머니 구산댁, 그 뒷집의 구룡댁, 염상진 염상구의 머머니 호산댁, 염성진의 아내 죽산댁, 정하섭의 어머니 낙안댁이 차례로 등장한다.
그 밖에도 벌교역전에서 고구마를 팔던 녹동댁, 빨치산 하대치가 관계를 맺으며 빨치산의 겨울 누비옷을 마련해준 국밥집 주모 장터댁, 빨치산 강동기의 아내 남양댁, 육군장교 양효석의 어마니 원재댁, 경찰서장 남인태의 아내 목포댁, 민 순경의 아내 보성댁, 남편이 정현동을 살해하고 사형당한 예당댁, 빨치산 유서방의 아내 샘골댁, 빨치산 마삼수의 아내 목골댁, 김복동의 아내 장흥댁, 노덕보의 아내 조성댁, 유동수의 아내 초지댁, 그리고 과수원댁과 소작인 가실댁까지 모두 26명이고 더 소개하지 못한 댁이 더 많을 것이다. 부인을 부르는 칭호 집 ‘宅’자를 붙인 택호는 지역 이름을 나타내는 명사 뒤에 붙어 그 지역출신이거나 그 지역에서 시집온 여자를 일상에서 널리 부르는 애칭이다.
꼬막정식을 맛본 나는 일제의 수탈에 신음하던 식민지포구, 벌교포구를 거쳐 낙안 들녘으로 발길을 돌렸다. 낙안읍성으로 더 잘 알려진 낙안까지는 벌교로부터 15분 거리였다.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 조성된 지방계획도시로 충남 서산 해미읍성과 전북 고창읍성, 그리고 순천 낙안읍성 등 세 곳이 남아있다. 낙안은 그 중 하나로 과거와 현재가 살아 있는 옛 선인들의 생활공간이다. 지금도 관아 94, 민가(초가) 214 채에 모두 120세대 3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고 한다. 낙안(樂安)이라는 지명은 ‘땅이 기름지니 곡식이 많이 생산되었고 먹을 것이 넉넉하니 굶는 백성이 없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백성들이 풍족하니 관과 백성이 편안하였다는데서 유래했다.
낙안읍성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명성을 떨친 임경업 장군이 쌓았다고 전한다. 낙안읍성 동문벽을 따라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으로 나아갔다. 이 박물관은 ’우리 것, 우리 말 즉 우리 문화를 지켜온 이 고장 출신 한창기 선생의 개인소장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한창기 선생은 지난 1976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가로쓰기 한글전용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했다. 나오는 길에 박물관 건너편에 자리 잡은 한 채의 고택에 들렀다. 그 고택은 백경 김무규 선생의 고택으로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영화촬영 장소다. 태백산맥의 소화로 분했던 배우 오정혜가 영화 ‘서편제’에서 주인공 송화로 눈이 먼 뒤에 아버지와 함께 머문 집이기도 하다. 소설 태백산맥의 작품무대의 탐방을 끝내고 그리운 율스 부부가 기다리는 천년고도(千年古都), 옛 나주목(羅州牧)으로 서둘러 발길을 향했다.
첫댓글 마치 함께 여행에 동행하고 있는 듯하네요.
세세하게 올려주신 글을 읽으며 기억 저편으로 잊고 있던 주인공들이 가뭇하게 떠오르네요..
수고해주신 덕택에 편히 앉아 읽을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멋진 기행문 잘 읽었습니다..저도 낙안읍성은 가보았네요..^^*
머리속을 환하게 비쳐 주심 감사합니다 그쪽으로다 다녀왔건만다시돌아보고픔 입니다 세세히 글 주심 고맙습니다.^^* 영육간 건강 위해기도로 힘 보탭니다♥ " God with us"!!
국장님 글을 읽으니 낙안읍성 초입은 가본 기억이 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전 10권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읽기도 힘든데 그 소설의 배경까지도 여행을 다니신 그리움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대단한 힘이 건강을 되찾는 힘이 되길 기도합니다.
아~~ 이 시간이 참 행복합니다^^
"워따 말도 마시오. 고것이 워디 사람이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해 사는 가난헌 개돼지겉은 목숨덜이...
워찌 뻘밭에다 방죽 쌓는 일에 비하겄소..."
한구절 또 입속에 중얼거려 봅니다.
진하디 진한, 삶의 애환이 녹아 있는 이 표현들이 너무도 좋았었는데...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