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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신학의 측면에서 자생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특정 전통을 비판 없이 따르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한국교회 대부분은 예전부터 안식일 엄수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했다. 이미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문제점을 복음의 관점에서 어느 정도 해결한 서양 교회들과 달리 한국교회는 아직도 유별나게 주일을 신약의 안식일로 믿는 경향이 강하다. 신약의 성도들은 주일을 그리스도의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날짜만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제칠안식교의 가르침을 거의 문자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주일 성수란 이름으로 주일에는 사업이나 장사도 접고 절대 근무를 하지 않는 것을 신앙이 좋은 것으로 본다. 주일은 말 그대로 신약의 안식일로 지킨다.
물론 지금은 주일을 안식일처럼 지키는 것이 예전처럼 과격하지는 않다. 예전에는 과거 청교도주의를 모범으로 삼아 주일날노동을 금하는 것은 물론 봉헌 이외에는 돈을 쓰는 모든 행위, 일과 오락에 대한 일절 금지를 요구한 교회들이 많았다. 따라서 버스 택시와 같은 공중 교통수단 사용 금지, 식당 찻집 금지, TV 극장, 연극, 세속 음악 시청 금지, 모든 스포츠 오락 금지 및 각종 시험 응시 금지를 주일 성수의 모범으로 여겼다. 어느 교회에선 주일날 바자회도 금지한다. 어느 목사는 주일날엔 자판기 커피도 빼 먹지 않는다고 하며 교인들이 그의 엄격한 경건 생활을 칭송하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럼 초대교회도 주일 성수를 했을까?
1. 안식일
1). 안식일의 제정자는 하나님(창2:1~3)이시다.
①. 안식일의 주권은 하나님(창2:2, 출31:13, 신5:14)
②. 안식일의 주권은 예수님(마12:8)
구원의 시대를 도래케 한 그리고 제자들을 그들의 짐으로부터 구출하신 인자 예수님은 이제 안식일 제도를 통해 고대해 왔던 영원한 안식을 제공해주심으로써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성취하신 것을 알리심.
③. 안식일의 주권은 사람(막2:27)
2). 샤밭 שבת (안식일)의 의의
①. 언약으로 돌아감. <שב(슈브) 돌아가다 ת(타브)언약(브리트)>,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로서의 의미에서 진정한 중요성이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출 31:12∼17, 겔 20:10∼26).
안식일과 언약
3세기 랍비 문학 전체를 통해 우리는 안식일을 지킨 자들에 대한 약속과 관련된 두 가지 언급을 발견한다. 랍비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세 개의 축제들(즉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을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랍비 엘리에젤은 그들이 세 가지 재앙(즉 곡의 날, 메시아의 도래에 앞서 있게 될 환난, 대심판의 날)을 피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언급들이 3세기 랍비 문학 전체를 통해 안식일의 언약적 의의(意義)에 대한 바리새적 사상을 그것도 간접적으로나마 증거 해주는 모든 경우이다.
랍비 문학의 특성을 고려해볼 때, 랍비 문학에서 안식일의 언약적 의의에 관한 어떤 직접적인 신학적 진술을 발견해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많은 양의 세부 규례들에 비교해볼 때 안식일의 언약적 의의에 관한 간접적인 자료조차도 지극히 희귀하다는 사실은, 랍비들이 안식일의 언약적 성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으리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논의는 1세기 때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이해 및 준수와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 점들을 제안해주고 있다. △안식일과 관련하여 랍비들은 지극히 세밀한 결의론을 발전시켰다는 점 △그들의 세부적인 규례 가운데는 다양성이 존재하였다는 점 △그들의 논의에 있어서 안식일의 언약적 의의와 축제적 성격에 대한 강조가 결여되고 있다는 점.
이렇게 볼 때, 랍비들은 주후 100년에 이르기까지 안식일에 금지된 일들에 관한 구약 성경의 일반 규칙들을 더 구체적이고 세밀한 결의론적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발전은 아마도 안식일 율법을 당대의 상황보다 잘 적용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한 규례의 증가 수효는 안식일 율법을 보다 불편하고 짐스러운 것으로 만들어주었으며, 사람들의 관심을 '안식일을 왜 지켜야 하는가'로부터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로 돌려놓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안식일 문제와 관련하여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정면충돌을 일으키시게 된다.
②. 휴식하는 날(출20:9~11 - 주인, 종, 객).
③. 거룩하게 지켜야 할 날(출20:11, 출 31:15, 고전3:14~15)
④. 괴롭게 하는 날(레23:32) - 겸손(humble:겸손, 낯추다, 꺽다.)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 괴롭게 하는 자세가 아니면 도와주지를 못하는 것이다. 레위기에 보면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경우에만 속죄제가 된다는 것이다. 회개를 해야 비로소 용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고집을 부리면서 투덜거리는 것은, 멀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내 팔자야!’ 라고 하는 사람을 도와줄 수가 없다.
기도에 대해서도, 오직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내 자존심은 부수어지고,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여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괴롭게 할 생각은 안하고, 자기를 감추기 위해서 율법을 취하는 것이다. 영을 받지 아니한 사람은 반드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할 때에도, 바리새인들과 이 죄인에 대한 개념이 다른 것이다. 신랑을 빼앗겼다고 아파하는 사람은 영을 받은 사람이고, 신랑이 없어도 율법이 있으면 된다고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⑤. 일하는 자는 죽임 당하는 날(출 31:15, 민 15:32-36)
⑥. 속죄일(레23:28) - 예수님이 십자기로 우리 죄를 씻어주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깨닫는 범주 안에서인 것이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괴롭게 함으로 죄를 깨닫고, 그래서 주님의 하나밖에 없는 제사가 온전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안식일이다.
⑦. 제사 드리는 날 - 제사장 만
⑧.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영역으로 삼겠다는 것이다(레26:9~14). -
한 마디로 이제 너희들은 죽었다(?)라는 것이다.
⑨. 하나님나라를 보여주는 도구 -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방법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롬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요 5:45~46)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⑩. 약속의 땅을 상속받음을 말하기 위해(레26:42~46) - 출애굽의 완성자는 예수님(히11:1~)
⑪. 안식일은 장래일의 그림자(골 2:16~17) -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⑫. 구원하신 일을 기념하는 날(신 5:15)
⑬.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헌신의 척도다(출 31:12-17; 사 58:13-14).
⑭. 하나님을 본받는 행위(출 20:8-11, 레 19:2-3)
⑮. (히) Shabbat ('중지하다' 또는 '그만두다'라는 뜻의 shavat에서 유래).
⑯.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종교세 거두기 시작 - 예언서에 나타나는 안식일 제의적 활동들에 관한 자료들은 주전 8세기께 이르러 안식일이 국가적 축제들 가운데 하나로 정착되어 있었으며, 그 날에 모종의 형태의 회합이 이루어졌음을 제안해준다(사 1:13, 호 2:13). 늦어도 에스겔 시대에 이르러서는 안식일에 제사장들과 군주뿐만 아니라 백성도 성전에 출석하는 것이 기대되었다(겔 46:1∼3).
예언서들은 늦어도 주전 6세기 초에 이르러 안식일 제사가 안식일 준수의 일부로 당연시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겔 45:16∼17, 46:4∼5). 백성은 제사에 소용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군주에게 종교세를 내도록 되어 있었고, 군주는 제사를 준비할 책임이 있었다(겔 45:16∼17). 일찍이 8세기 때 이미 안식일 제도의 진정한 언약적 성격을 인지하지 못하고 안식일을 헛되이 지키는 위험의 조짐들이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사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3). 안식일 제정 목적
①.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성품과 '종말론적 안식' (마11장 28∼30)
②. 사람을 위해서 제정된 제도(막2:27, 호세아 6:6) - 안식일은 짐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으로 주어졌다.
마카베오 시대(BC 2세기)에는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무기를 들고 방어를 하느니 차라리 살육당하는 편을 택할 정도로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켰으나 그렇게 하다가는 멸종당할 수도 있음을 깨닫고는 안식일에 다시 공격해오면 싸우기로 결정했다. 탈무드는 이 결정을 인정했으며, 생명이나 건강이 심각한 위협을 받을 경우, 39가지 금지된 노동이 유예된다고 말하면서, "안식일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③. 종말론적 안식에 들어가는 것 -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고 그 안에 현존하는 종말론적 안식(=구속)을 받아들이는데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안식일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즉 그의 성취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 결과 예수님께서 성취하시고 제공해주시는 안식일의 궁극적 목표였던 종말론적 안식 가운데 참여하는 것이다.
④.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 (마 12:8)
4).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일
①. 제사드리는 일 - 제사장에 한하여 가능하였다
②. 성전 안에서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범해도 죄 없음(민 28:9∼10, 마12:5,레 24:8-9)
③. 할례를 행하는 일(창 17:12, 레 12:3, 요7:22-23)
④. 선을 행하는 일(마 12:12) - 이는 오직 예수님만의 의견
5). 안식일에 금지된 일
①. 일반적인 노동 이외에도 불을 피우는 일(출 35:3)
②. 음식을 만드는 일(출 16:23)
중간기 문헌 희년서 2:29은 안식일에 음식 준비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그날에 그들은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은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말아야 한다." 다메섹문서 10:22도 역시 동일한 명령을 합니다. "안식일에는 미리 준비된 것 외에는 먹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음식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는 이유는 일하지 말라는 구약의 안식일 계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안식일에는 불을 피우지 말라는 계명을 적용한 것이다. 출 35:3: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은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음식을 하려면 불을 피워야 하므로 불을 피우지 않아야 한다면 당연히 음식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간기 문헌은 아니지만 요세푸스의 책 "유대전쟁"은 유대인들이 안식일 전날에 음식을 준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음식을 만들지 말라는 희년서나 다메섹문서의 규율은 실제로 지켜졌다고 볼 수 있다
③. 나무를 줍는 행위(민 15:32~35), 여행(사 58:13),
④. 현대적으로 엄격하게 전기를 키는 일을 포함해야 하는가?, 음식을 만드는 일은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데우는 행위까지, 그리고 투석형이 선고되었던 나무를 줍는 행위는 오늘날 휴지를 줍는 행위(종이도 나무니까)가 포함되어야 하는가? 또한 여행 금지로 인해 주일예배는 동네에 있는 곳에서만 드려야 하는가? 유대인들은 2000규빗(3/4마일) 이하의 거리만 걸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다(랍비들처럼, 출 16:29과 민 35:5를 근거로 해석할 때).
⑤. 금식하는 일을 금지 - 희년서 50:12-13은 안식일에 금식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날에 일하거나 여행을 하거나 ... 금식을 하거나 ... 이 중에 어떤 것을 안식일에 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스라엘 자손들이 안식일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죽여야 한다." 다메섹문서 11:4-5도 안식일 금식을 금지한다. "안식일에 의도적으로 금식하지 말아야 한다." Judith 8:6은 경건한 유대인이 금식을 하는 경우에도 안식일에는 금식을 중단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안식일에 금식을 금한 이유는 랍비문헌에 의하면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슬픈 날이 아니라 기쁜 날이었으며, 안식일은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중간기에도 구약의 안식일이 본래 하나님의 자비의 선물임을 인식하고 이날에 금식을 금했을 것이다.
⑥. 랍비문헌에 나타난 안식일 - 주후 약 200년경에 구두전승을 토대로 결집된 유대인들의 경전 미쉬나 Shabbath 7:2은 39가지 항목의 일들을 안식일에 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 중에 추수 즉, 곡식 베기가 포함되어 있다. 아마 40에서 하나 감한 것은 40가지가 되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미쉬나를 다시 자세히 토론한 예루살렘 탈무드 Shabbath 7:2에서 랍비 Hiya는 안식일에 곡식 이삭을 훑어내는 것이나 포도, 올리브, 무화과등을 따는 것을 추수의 일부로서 금지한다.
미쉬나 Pesahim 4:8에서 유대의 현자들이라 부를 수 있는 랍비들은 안식일에 나무 아래 떨어진 과일을 먹는 것도 금지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바벨로니안 탈무드 Shabbath 128a에서 갈릴리 사람인 랍비 Judah는 안식일에 밀이삭을 훑어내어 손바닥으로 비비는 것은 허용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도구를 사용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다른 주류 랍비들에 의해 거절당했다. 다른 랍비들은 손가락 끝으로 소량만을 비벼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의 출애굽기 주석인 메킬타는 출 31:14 주석에서 생명이 위험에 처할 경우에는 안식일 계명을 어길 수 있다고 한다. "그가 많은 안식일들을 지키기 위하여 그를 위해 하루의 안식일을 범하라." 미쉬나 Yoma 8:6도 생명이 위험할 경우 안식일 규례를 어길 수 있음을 말한다. "생명의 위험이 있을 의문이 있는 모든 경우들은 안식일을 초월한다." 메킬타의 출 31:13 주석에서 랍비 Akiva는 이점을 잘 논증한다. "만일 사형이 안식일을 능가하는 제사를 능가한다면, 생명를 살리는 것이 얼마나 더 안식일을 능가하겠는가?"
메킬타의 출 31:13 주석에서 주후 180년 경의 랍비 Simeon ben Menasha는 주장한다. "너희들에게 안식일이 주어진 것이지, 너희들이 안식일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메킬타 출 31:14에서 약간 바뀌어 반복된다. "안식일이 너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너희가 안식일에게 주어진 것은 ..."
메킬타 출 31:14와 미쉬나 산헤드린 7:8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으로 안식일을 어기는 사람은 사형을 당할 것을 기록하고 있다. 막 2:24에서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이 안식일을 어긴다고 지적한 것은 제자들이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안식일을 어기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경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막 2:23-28과 관련해서 우리는 미쉬나 Peah 8:7을 언급할 수 있다: "안식일에 - 세끼의 음식이 가난한 나그네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이 규례는 중간기 문헌에서 살핀 금식금지 규례와 관련된다. 금식이 금지되므로, 안식일에 나그네들이 굶는 것을 막기 위해 음식을 주는 것이다.
⑦. 병 고치는 일(마12:3)
⑧. 안식일 이전에 일 끝내기
랍비들은 안식일이 시작하기 전에 일을 끝내도록 하기 위해 다양하고 세심한 조처들을 취하고 있다. 라반 시므온 벤 가말리엘 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아버지의 집에서 그들은 보통 이방인이 경영하는 세탁소에 안식일 3일 전에 흰색 옷들을 맡기고는 하였다'. 여기서 '안식일 3일 전'이라는 시간제한은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안식일까지 세탁 일을 끌고 가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조처다. 랍비 엘리에젤은 '케이크 밑바닥이 딱딱해질' 시간이 남아 있지 않는 한 케이크를 숯불에 올려놓는 것을 금하고 있다.
⑨. 기타 안식일에 금지된 행동들
랍비들은 안식일에 허용된 행동들과 금지된 행동들을 매우 세세한 부분까지 규정하고 있다. 랍비 엘리에젤은 여인이 안식일에 관(冠;일명 '황금 도시'), 헤어네트, 향수병 등을 장식하고 집을 나가는 것을 허용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랍비들은 이들 모두를 금하고 있다. 한편 한 사람이 말린 무화과 용량보다 적은 양의 채소 씨앗이나, 두 개의 오이 씨앗, 두 개의 조롱박 씨앗 등을 집에서 가지고 나간다면 그는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 랍비 엘리에젤은, 만일 한 사람이 그의 손톱이나 머리카락 등을 깎거나 뽑으면 그리고 한 여인이 자신의 머리를 손질하거나 자신의 눈꺼풀에 화장하는 등의 행동을 하면, 그러한 자는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선언한다.
안식일에 두 글자를 이어 쓰는 것을 금하는 규정과 관련하여, 라반 가말리엘 2세는 만일 한 사람이 동일한 안식일에 무심코 행한 두 행동 중에 각각 한 자씩 써서 두 자를 썼을 경우, 그가 과실이 있다고 선언한다. 이에 반해 현자(賢者)들은 그가 과실이 없다고 선언한다. 랍비 엘리에젤은 꿀벌 통에서 꿀을 긁어모으는 자는 과실이 있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그는 꿀을 긁어모으는 행동을 '추수 행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랍비 요하난은 인간의 안전을 위해 전갈을 접시로 덮어놓는 행동을 허용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이는 아마도 그가 그러한 행동을 동물을 사냥하는 행동으로 간주하기 때문인 것 같다.
⑩. 여행에 관한 규례들
안식일 여행 한계가 2천 규빗(약 900m)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안식일 여행 한계에 관한 1세기 랍비들의 규칙은 매우 상세하고 세부적이다. △이방인이 한 사람을 다른 도시나 가축(家畜) 우리에 데려다 놓았을 때, 그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거리 △바다 위에 항해하고 있는 배 위에서 걸을 수 있는 거리(전 영역; 4 규빗) △여행 중에 밤이 된 줄을 모르고 잠이 들었던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거리(2천 규빗, 4 규빗, 2 규빗) 등.
6). 성경적 요일
욤 리숀 = “첫째 날" = (일요일Sunday)
욤 쉐니 = “둘째 날" = (월요일Monday)
욤 쉐리쉬 = “셋째날" = (화요일Tuesday)
욤 레비이 = “네째날" = (수요일Wednesday)
욤 카미쉬 = “다섯째날" = (목요일Thursday)
욤 쉬쉬 = “여섯째날" = (금요일Friday)
샤밭 = “일곱째날” (토요일Saturday)
7). 안식일 법보다 우선되는 법
①. 할례(창 17:12, 레 12:3, 요7:22-23)
②. 제사법(레 24:8, 민 28:9-10)
③. 선을 행하는 일
④. 성년식 - 안식일 아침 예배를 드리는 동안 그 전 주일에 13번째 생일을 맞은 유대인 소년은 관례에 따라 바르 미츠바(종교적 성년식)를 치르며, 하프타 찬송을 할 수 있게 된다.
⑤. 기타 안식일에 우선하는 문제들
1세기 랍비들은 안식일의 구속력을 벗어나는 몇 가지 예외 규정들을 만들었다. △할례 △안식일 제사 △유월절 △화재로부터 성경이나 음식물을 구해내는 일 △생명을 구하는 일 △자기 방어적 전쟁. 한편 랍비 아키바는 무슨 일이든지 안식일 전날에(혹은 전야에) 행해질 수 있는 일은 안식일에 우선하지 않지만, 안식일 전날에(혹은 전야에) 행해질 수 없는 일은 안식일에 우선한다는 일반 원칙을 규정한다.
8). 안식일 정신
①. 하나님의 궁휼(마 12:7)
②. 성전보다 더 큰 예수님권위(마 12:6)
9). 안식일 제정 시기
①. 출애굽 이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법을 제정하여 주신다 그러나 이때에도 안식일 법은 요구치 아니하셨다 이같이 하나님의 그 어떤 종도 이집트에서 탈출하기 전까지는 안식일을 지키도록 요구받지 않았음이 (신명기 5:2, 3과 탈출기 31:16, 17)에 나오는 증언으로 보아 명백하다. 그 성구들에서는 “여호와께서 이 계약을 우리 조상과 맺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 맺으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은 ··· 그들 대대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이것은 한정 없는 때까지 이르는 표이다”라고 알려 준다. 만일 이스라엘이 이미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다면, 신명기 5:15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이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일곱째 날에는 만나를 주워 모으러 나가지 말라는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하였다는 사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새로운 마련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출 16:11-30) 시나이 산에서 율법이 주어진 후에 기록상 최초로 안식일을 범한 사람과 관련된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는 점도, 안식일이 제정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았음을 알려 준다. (민 15:32-36) 이스라엘인들은 이집트에 있을 때 노예였으므로, 그 당시에 그러한 법아래 있었다 하더라도 안식일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파라오는 모세가 하나님께 희생을 바치기 위해 3일을 달라고 요청했을 때에도 그가 일을 방해하고 있다며 불만을 나타냈다. 하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7일마다 하루씩 쉬려고 했다면 사태는 더욱 어려워졌을 것이다. (출 5:1-5) 족장들이 7일로 이루어진 주간 단위로 시간을 계산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곱째 날을 특별한 날로 구별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일곱은 흔히 완전함을 나타내는 중요한 숫자였다. (창 4:15, 23, 24; 21:28-32) “맹세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샤바)는 “일곱”을 의미하는 단어와 같은 어근에서 나온 듯하다.
안식일은 신성한 날로(신 5:12), 모두—이스라엘인, 종, 외국인 거주자, 동물—가 온갖 노동을 중단하고 쉬며 기뻐하는 날로 지켰다. (사 58:13, 14; 호 2:11; 출 20:10; 34:21; 신 5:12-15; 렘 17:21, 24) 매일 정기적으로 “항상 바치는 번제물”에 더하여, 특별한 번제물이 곡식 제물 및 음료 제물과 함께 바쳐졌다. (민 28:9, 10) 신성한 곳에서는 진설병을 새것으로 바꾸었으며, 새로운 제사장 조가 임무를 시작하였다. (레 24:5-9; 대첫 9:32; 대둘 23:4) 제사장들의 임무가 안식일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마 12:5) 유아는 생후 8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이어도 할례를 받았다. 후대에 유대인들 사이에는, 제사장들의 임무는 안식일에도 수행되었다는 의미로, “신성한 곳에는 안식이 없다”는 속담이 있었다.—요 7:22; 레 12:2, 3. 「성전」(The Temple), A. 에더샤임, 1874년, 152면.
랍비 자료에 의하면,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는 금요일 제9시 곧 오후 3시경에 세 번 나팔을 불어서 안식일이 가까웠음을 알렸다고 한다. 이때 모든 일과 업무는 중단해야 하였으며, 안식일 등잔을 켜고, 축제용 옷을 입었다. 그 후에 나팔을 세 번 더 불어서 안식일이 실제로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임무를 마치는 제사장 조는 안식일에 아침 희생을 바치고 임무를 시작하는 제사장 조는 저녁 희생을 바쳐서, 신성한 곳에서 두 조가 함께 안식일을 지냈다. 각각의 조는 각 조가 몫으로 받는 빵의 절반을 대제사장에게 주었다. 그 빵은 깨끗한 상태에 있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 먹었다. 임무를 시작하는 조에 속한 가족들의 우두머리들은 어떤 가족이 그 봉사 주간 중에 각각의 특정한 날에 섬길 것이며 누가 안식일에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것인지를 제비뽑기로 결정하였다.—레 24:8, 9; 막 2:26, 27. 「성전」, 151, 152, 156-158면.
정기적인 매주의 안식일과, 축제와 관련이 있는 안식일 즉 “거룩한 대회”와는 요구되는 것에 차이가 있었다. (레 23:2) 일반적으로 말해서, 매주의 안식일이 제한이 더 엄격해서, 힘이 드는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신성한 곳은 예외임). 나무를 하거나 불을 피우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민 15:32-36; 출 35:3) 여행도 제한을 받았는데, 이것은 탈출기 16:29에 근거한 것인 듯하다. 속죄일도 마찬가지로 모든 종류의 일을 쉬는 때였다. (레 16:29-31; 23:28-31) 하지만 축제의 거룩한 대회 날에는 힘이 드는 일이나 장사 또는 상거래를 할 수는 없었지만, 요리나 축제 준비 등은 허용되었다.—출 12:16; 레 23:7, 8, 21, 35, 36.
때때로 두 종류의 법적 안식일이 똑같은 24시간에 겹치면, 이날을 “큰” 안식일이라고 불렀다. 니산월 15일(안식일)이 정기 안식일과 같은 날이 된 경우가 그 예이다.—요 19:31.
안식일의 유익과 중요성 모든 노동을 그만두고 하나님이 주신 그 밖의 안식일 요구 조건을 지킨다면, 신체적으로 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으로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각 사람이 믿음과 순종을 나타낼 기회를 갖게 되었다. 또한 부모는 하나님의 법과 계명을 자녀의 정신과 마음에 부지런히 가르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신 6:4-9) 안식일에는 보통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섭취하고 영적인 필요를 돌보는 일을 하며 보냈다. 그 점은 수넴 여자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보러 가겠다며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자 그의 남편이 “왜 오늘 그에게 가려고 하오? 오늘은 신월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닌데”라고 대답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왕둘 4:22, 23) 그리고 그 나라 전역에 흩어져 있던 레위 사람들은 틀림없이 안식일을 이용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쳤을 것이다.—신 33:8, 10; 레 10:11.
이스라엘 사람 각자에게는 안식일을 잊지 않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였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여호와에 대한 반역으로 여겨서 사형에 처하였기 때문이다. (출 31:14, 15; 민 15:32-36) 동일한 원칙이 그 나라 전체에도 적용되었다. 마음을 다해 안식 제도 전체 — 안식일과 안식년 — 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의 나라로서 존속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다. 그들이 안식에 관한 법을 존중하지 않은 것은, 그 나라가 멸망되고 그들이 범한 안식을 보충하기 위하여 유다 땅이 70년 동안 황폐된 채로 있게 된 중요한 원인들 가운데 하나였다.—레 26:31-35; 대둘 36:20, 21.
안식일에 관한 랍비들의 제한 규정 안식일은 원래 기쁘고 영적으로 세워 주는 때가 되게 하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방인들과 자신들을 최대한 구별하고자 하는 열의 때문에, 특히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후에, 안식일 제한 규정을 39가지나 크게 늘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사소한 제한 규정들을 둠으로써 점차 안식일을 짐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제한 규정들을 수집하면 두 권의 큰 책이 되었다. 예를 들어, 벼룩을 잡는 것은 사냥으로 금지되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도 사망할 위험이 없는 한 그 고통을 덜어 줄 수 없었다. 뼈를 맞출 수도 없었고, 삔 곳에 붕대를 감을 수도 없었다. 이들 유대교 지도자들은 안식일의 참다운 목적을 헛되게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 되어 하나님께 영예를 돌리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을 전통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마 15:3, 6; 23:2-4; 막 2:27) 예수의 제자들은 곡식을 따서 손으로 비벼 먹었을 때, 두 가지 이유로 즉 안식일에 수확과 타작을 하였다고 해서 비난을 받았던 것 같다. (누 6:1, 2) 랍비들 사이에서는 “안식일에 관한 모든 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우상 숭배자라 해도, 그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된 것이 아님 예수께서는 율법 아래 태어나신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바대로(바리새인들이 지시하는 대로가 아니었음) 안식일을 지키셨다. 그분은 안식일에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마 12:12) 하지만 영감 받은 그리스도인 기록에서 알려 주는 바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시며(로 10:4),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벗어”나게 된다. (로 7:6) 예수께서도 그리고 제자들도 이른바 도덕에 관한 법과 의식에 관한 법을 구분하지 않으셨다. 예수와 제자들은 또한 십계명뿐 아니라 율법의 다른 부분에서도 두루 인용하였으며, 이 두 가지 모두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마 5:21-48; 22:37-40; 로 13:8-10; 야 2:10, 11)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법령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였다고 그리고 하느님께서 “법령들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를 거스르는 손으로 쓴 문서를 지워 없애셨”으며 “그분은 그것을 고통의 기둥에 못박아 없애셨”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폐하”고, “지워 없애”고, “없애” 버린 것은 모세의 율법 전체였다. (엡 2:13-15; 골 2:13, 14)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에 의하여 안식 제도 전체가—안식일이든 안식년이든—율법의 나머지 부분과 함께 끝나게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의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고, 안식일이든 다른 어떤 날이든, “한 날을 다른 모든 날과 같다”고 여길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로 14:4-6; 골 2:16) 바울은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세심하게 지키는 사람들에 관하여, “나는 어떻게든 여러분에 대하여 내가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았나 싶어 여러분이 염려됩니다.”라고 말하였다.—갈 4:10, 11.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사도들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도행전 15:28, 29이나 그 이후의 기록에서 안식일은 그리스도인의 요구 조건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새로운 안식일 즉 “주일(主日)”을 제정하지도 않았다. 현재 일요일로 불리는 날에 예수께서 부활되기는 하셨지만, 성경 어디에서도 그분이 부활되신 이날을 “새로운” 안식일로 또는 여타의 방법으로 기념해야 함을 시사하지 않는다. 고린도 첫째 16:2과 사도행전 20:7을 근거로,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앞의 성구는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빈궁한 형제들을 위하여 매주 첫째 날 일정 금액을 집에 따로 저축해 두라고 지시하였음을 알려 줄 뿐이다. 그 돈은 집회 장소에 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도착할 때까지 가지고 있어야 하였다. 뒤의 성구와 관련해서는, 바울이 주간 첫째 날에 트로아스에 있는 형제들과 모임을 가졌던 것은 지극히 타당한 일이다. 바울이 바로 다음 날 떠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안식일과 안식년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은 1세기 그리스도교의 일부분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기원 321년이 되어서야 콘스탄티누스가 일요일(라틴어, 디에스 솔리스. 점성술 및 태양 숭배와 관련이 있는 고대 명칭으로, 사바툼[안식일]이나 디에스 도미니[주일]가 아님)을, 농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쉬는 날로 포고하였다.
하나님의 쉼에 들어감 창세기 2:2, 3에 의하면, 하느님은 여섯째 창조의 날 즉 창조 기간 이후에, 창세기 1장에 기술된 땅과 관련된 창조 활동을 그만두시고 ‘일곱째 날에 쉬기 시작하셨다.’
2. 모세에게 준 안식일
1). 안식일 제도
하나님께서 창조 후 일곱째 되는 날을 축복하신 가운데 암시적으로 나타난 그의 백성을 위한 영원한 안식의 계획을 반영한다(창 2:2∼3 / 출 20:8∼11 참조). 또한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신 구속적 구출 사역 역시 반영하고 있다(신 5:12∼15 참조). 이처럼 안식일은 기원에 있어서 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표현이었다. 이사야 1장13절에서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제도화된 안식일 회합을 미워하신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회합들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회합들이 무의미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행동들 때문이다(사 1:15∼17).
출1:8에 등장하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과거 요셉을 총리자리에 앉혔던 왕과는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는 투르모세 1세(1529-1517)로 요셉을 알지 못할 뿐더러 이스라엘과 애굽인들 모두의 기억 속에서 요셉에 대한 모든 것을 말살하려고 했던 왕이었다. 당시 애굽은 최강의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그 이면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한 어마어마한 인력자원이 있었다.
우리는 애굽의 왕이었던 '파르오(פרעה)'를 단순한 왕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애굽의 왕은 곧 '신'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굽의 왕 '파르오(פרעה)'의 이름을 살펴보면 앞으로 그 왕을 통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지 예상해볼 수 있다. 애굽어로 '프로'라고 하는데 '커다란 집'이라는 뜻이다.
פ는 '입'을 뜻하고, 가운데 히브리글자 רע는 '악'이라는 뜻이요. 나머지 פה는 '고통,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즉, 파르오(פרעה)는 입에서 고통과 괴로움, 악함이 나온다는 것이다.
출1:15-22에서 '파르오(פרעה)'는 히브리 남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히브리 산파 '쉬프라'와 '푸아'를 통해 먼저 그 일을 하한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잠1:7, 9:10)으로 애굽 왕의 명령을 아니 애굽 신의 명령을 거절한다.
산파는 히브리어로 ירד(야라드)다. '손이 생명을 향해 가리킨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산파들의 용기를 통하여 많은 생명들이 지켜진다.
'쉬프라(שפרה)'라는 이름은 '선명하다', '분명하다', '좋게하다'는 뜻 특히 שפ는 정의, 공의, 재판이라는 뜻이요. 산파였던 '쉬프라'와 '푸아'의 행동은 토라 안에서 공의롭고 정의로운 행동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다.
모세의 출생과 성장기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바로의 딸을 통해 물에서 건져진 모세는 왕궁 생활을 하게되는데.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출5장을 보면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 선다. 다시 말하자면 애굽의 신적 존재인 바로 앞에 서게 된 것이지요.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 좋은 예가 '에스더'다. 에스더는 왕후였지만 마음대로 왕 앞에 나아갈 수 없었다.
하만을 통해 자기 민족 이스라엘이 몰살당할 위기임에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허나 금식과 기도 가운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나아간다. 왕후라 할지라도 왕 앞에 함부로 나섰다가 목이 달아나기 일 수 였다. 허나 에스더의 목에 칼이 날아오기 전에 왕은 자신의 금 규(막대기)를 내어줍니다. 그것을 잡은 에스더에게 내리치던 칼은 거두게 되는 것이다.
모세가 그냥 노예로 살던 히브리 민족 중 한명일 뿐이었다면 감히 왕 앞에 나갈 수나 있었을까? 바로가 만나주기는커녕 잡아서 옥에 가두던가 아님 목이 달아났을 수도 있다. 허나 모세는 과거 왕궁에서 살면서 애굽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를 보고 듣고 자란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는 모세를 만나주기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출애굽을 위한 놀라운 계획이었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חג)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 5:1)
출애굽의 목적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모세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광야에서 지킬 절기”는 아직 출애굽하기 전으로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절기인 유월절이 이뤄지기 전이다.
바로는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게 해 달라는 그들의 요구에 이렇게 대답한다.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출 5:4)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출 5:5)
4절의 '쉬게 하다'는 '단순히 일에서 떠나게 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5절의 '쉬게 하다'는 "안식하다" 혹은 "안식일을 지키게하다"라는 단어 שבת(샤바트 sabbat)다.
바로는 모세의 요구를 단지 "일을 안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에서 떠나 안식일을 지키려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출애굽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일한 여호와의 시간은 일곱째 날마다 돌아오는 안식일뿐이었다. 그런 그들이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 하면서 안식일을 잊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 세대, 아비 세대, 자녀 세대 모두가 노예였던 것이다.
그들은 안식일만을 잊어버린 것이 아닌,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 하고 있을 때 감독들이 매주 요구되는 작업량을 증가시켰다.
그로 인해 안식일에도 노동을 시킴으로 안식일 준수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 5:15)
모세가 바로에게 요구한 절기는 바로 안식일(Shabbat)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2). 구약의 안식일
한국의 한 신문사의 주 이스라엘 특파원이 이스라엘이 금요일 해질 무렵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 준수하는 사바스란 생활습관을 보고 매우 기이하게 여겼던 것 같다. 안식일을 잘 지키려면 어떤 생활 자세를 취해야만 하는가? 『안식일 날을 기억하고 그것을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
1. 호텔의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는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 사바스 기간 동안 자동으로 매 층마다 멈추어 문을 열고 닫고 하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다. 이스라엘 의회인 크네세트는 2001년 사바스 특별법을 마련했는데 이때 모든 건물의 엘리베이터 하나 이상을 이처럼 자동으로 매 층을 열고 닫게 했다 한다.
2. 『너희는 안식일 날에 너희의 온 처소에서 불을 피우지 말지니라』(출 35:3). 안식일에는 불을 피워서는 안 되기에 유대인 가정에서는 음식 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안식일에 먹을 음식을 미리 준비해 둔다. 그들이 음식을 데워 먹으려고 마이크로 오븐을 사용할 수 있을까?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오븐을 작동하려면 손가락으로 돌려야 하는데 그 “일”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3. 안식일에 유대인들은 컴퓨터의 자판은 물론이요, 휴대폰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한다. 대단한 준수이다.
4. 이스라엘의 항공사 EL-AL이 안식일에 운항하지 않은 일은 이미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회당에서 아침 예배를 드릴 때 토라의 한 부분이 낭독되고 하프타라(Hafṭara:예언서에서 발췌한 내용) 찬송이 이어진다. 〈시편〉도 안식일 날 예배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안식일 아침 예배를 드리는 동안 그 전 주일에 13번째 생일을 맞은 유대인 소년은 관례에 따라 바르 미츠바(종교적 성년식)를 치르며, 하프타 찬송을 할 수 있게 된다. 유대인의 가정에서는 금요일 저녁 해지기 전 주부가 하얀 안식일 초를 켜놓고 축복기도를 하고, 키두시(Qiddush:성화의 축복)를 낭송한 다음 안식일 음식을 먹는다. 다음날 아침에도 간추린 키두시를 낭송하고 예배가 끝난 다음에 아침 식사를 한다. 특별한 축복기도(하브달라)로 안식일을 마치는데, 이 기도는 구별(안식일과 나머지 6일,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빛과 어둠의 구별) 개념을 강조한다.
오늘날에도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엄숙하게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보수파 유대인들의 관습은 다양하며, 그중 몇몇 사람들은 안식일에 여행하는 것을 허용하는 등 몇 가지 규정을 수정하려고 한다. 개혁파 유대인들은 어떤 경우에는 일요일에 회당예배를 드린다. 종교개혁 이후의 그리스도교 교파들 가운데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를 비롯한 몇몇 교파는 토요일을 휴식과 예배의 날로 지킨다.
유대 종교력에서 셰바트(유대 민력에서 5월) 말일과 니산(7월) 초하루 사이에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안식일이 4번 있다. 이들 안식일의 특수한 이름은 그날에 낭독하는 마프티르(Mafṭir:정해진 토라 일과 가운데 마지막 부분) 대신에 토라의 다른 부분을 추가로 낭독하는 일과 관계가 있다. 이 4번의 안식일에는 각기 독특한 하프타라를 부른다. 아달월 1일 혹은 그 전에 오는 셰칼림('세겔들'이라는 뜻) 안식일은 세금을 가리키며, 〈출애굽기〉 30장 11~16절을 본문으로 삼는다. 자크호르('기억하다'라는 뜻) 안식일이 되면 유대인들은 〈신명기〉 25장 17~19절을 낭독하며 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광야에서 아말렉에게 어떻게 공격 받았는지를 기억한다. 이 안식일 전에는 부림절이 있다. 파라('붉은 암소'라는 뜻) 안식일에는 〈민수기〉 19장 1~22절을 근거로 유월절(페사흐)을 지키기 위해 의식을 통해 정결을 얻으라고 훈계한다. 하호데시('그 달'이라는 뜻) 안식일은 유월절 바로 전에 오는데 낭독하는 본문은 〈출애굽기〉 12장 1~20절이다. 이 4번의 안식일을 가리켜 '아르바 파라시요트'(4번의 성서 낭독)라고 부른다. 유월절 바로 앞에 오는 안식일은 샤바트 하가돌(큰 안식일)이라고 부른다.
다음의 세 안식일은 그날에 낭송되는 하프타라의 핵심이 되는 단어를 따서 이름을 붙인다. 샤바트 하존(이사 1:1)은 아브월 9일(티샤베 아브) 이전이며 금식일이다. 샤바트 나하무(이사 40:1)는 아브월 9일 이후이며, 샤바트 슈바(호세 14:2)는 욤 키푸르(대속죄일) 바로 앞에 온다. 마지막으로 샤바트 베레시트(시작의 안식일)가 있는데, 토라를 낭독하는 1년 주기가 끝나고 〈창세기〉 1장부터 다시 읽기 시작하는 날이다. 샤바트 시라(노래의 안식일)는 〈출애굽기〉 15장, 즉 모세가 부른 승리의 노래를 낭독하는 순서에 온다. '홀하모헤드'(중간의 날들)는 유월절과 초막절 사이에 온다.
3. 희년
유대교는 시간 속에서 변해 갔기 때문에 한 시대의 유대교의 모습을 다른 시대와 같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유대교도 여러 가지여서 한 유대교의 모습을 다른 유대교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유대교의 모습으로 제한해서 어떻게 이 바리새유대교의 안식일 전통을 복원할 수 있을지 살펴보자.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시딤은 바리새파와 쿰란 공동체의 공통 조상이라고 믿는다. 또한 E.P. Sanders 등의 학자는 바리새파와 랍비 유대교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설을 받아들인다면, 쿰란 및 에센파의 공동조상인 희년서 내지 쿰란문헌과 랍비문헌 사이에 일치되는 전통은 결국 그 중간에 끼이는 바리새파에도 동일하게 존재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유대 종파 간에 아무런 연결이 없다고 해도, 연결이 없는 유대교파간의 일치는 그 일치점이 널리 퍼진 보편적 전통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 문헌들의 일치를 바리새파의 전통을 알아내기 위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희년서와 쿰란문헌에 속하는 다메섹 문서, 미쉬나는 모두 안식일에 금식을 금지한다. 이러한 일치로 보아 바리새파도 안식일 금식금지 규례를 지켰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우리가 바리새파의 전통을 알아낼 수 있는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전통의 변화 경향을 통한 것이다. 미쉬나 결집에서 빠진 유대구두전승을 모은 토세프타 Shabbath 14;1에서는 바리새파의 두 학파인 샴마이파와 힐렐파의 규율들이 벌써 상당히 느슨해졌음을 암시한다. 미쉬나 Erubin 5:5은 "현자들은 규례를 더 엄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가볍게 하려고 그것을 말했다."고 한다. 즉, 랍비들이 이 전의 규례들을 더 느슨하게 만들었다는 경향을 가졌다는 것은 당시 바리새파의 규례의 강도를 미루어 추측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미 랍비들이 나무 아래 떨어진 열매를 먹는 행위도 금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일 바리새인들의 규례가 이보다 엄했다면 당연히 밀 이삭을 훑어내어 비벼 먹는 것도 금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알렉산드리아의 예수님 당시 유대인 Philo는 그의 책 "모세의 생애" 2:22에서 "잎을 자르는 것이나 어떤 과일이든지 훑어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썼다. 열매를 따는 것이 안식일에 금지되는 전통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주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도 그러한 전통을 따랐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금식이나 밀이삭을 훑어내는 것 모두를 금하고 있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1. 희년에 대한 어의론 적 의미
'희년'이라는 말은 '요벨' 즉, '양의 뿔' 이라고 하는 히브리어에서 번역된 용어로서 히브리 성경에 모두 26번 나온다. 희년을 맞이하는 해의 일곱 번째달의 열번째 되는 날 즉, 대속죄일에 이 양의 나팔이 울려퍼지게 되면, 기업의 원주인에게로의 회복을 포함한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자유가 선포된다. Liber, van Selms, Lemche 그리고 Wright와 같은 학자들은 '요벨'의 정확한 어원적 의미를 설정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지만, Morgenstern, Noth, Patrick, Heinisch, Chirichigno, North, Snaith 그리고 Neufeld등과 같은 대다수의 학자들은 '양의 뿔'에서 그 어원적 의미를 찾는다.
Morgenstern은 양의 뿔로 만든 나팔은 특별한 때에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사용되어졌다고 보면서, 일반평민들은 '쇼파르'라는 나팔을 사용한 반면 제사장들만이 요벨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또한 일반적인 해는 그 해의 첫해에 '쇼파르'를 통해서 선포되어진 반면에 희년은 '요벨'에 의해서 선포되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Chirichigno는 '요벨'과 '쇼파르'를 동의어라고 보았는데, 출 19:16절과 여 6:4-8, 13절에 나타나는 '쇼파르' 역시도 양의 뿔로서 묘사가 되어진 점을 본다면 이 Chirichigno의 견해가 더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2. 희년의 선포는 49년째인가? 50년째인가?
희년주기는 아주 복잡한 문제를 이야기시킨다. 즉, 49번째 되는 해에 희년이 선포되었는가? 아니면 50번째 되는 해에 희년이 선포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는 일차적으로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라고 한 레 25:8-9절과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라고 한 레 25:10-11절 사이의 텍스트 상의 희년선포 시기에 대한 불일치 때문에 제기되어지며, 부차적으로는 2년 연속되어지는 땅의 휴경이 가져오게 될 사회 경제적인 어려움을 고려하는 학자들의 견해 때문에 생기게 되었다.
첫째, 희년이 50년째에 선포되었다는 견해
50년 희년 설은 주로 초기의 보수적인 학자들에 의해서 주로 주장되었다. Lesetre는 신 16:9절의 "칠주를 계속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주를 계수하여"에 나타나는 맥추절은 49일 다음에 오는 날이며, 요세프스와 파일로 등과 같은 랍비 주석가들이 모두 50년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고 한 레 25:11절의 파종을 금지하며 충분한 양식을 약속한 말씀은 50년설에 더욱 적당한 것이라고 보았다. Paton역시도 49년 설은 본문과 고대증언들과 상치된다고 보았고, 구체적으로 랍비중 한 사람인 Yehuda Ben-Ilai를 들며 랍비의 전통적인 견해는 50년 설에 서있다고 주장했다. Delitschz는 49년 희년 주기설은 인본주의적인 계산법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레 25장의 내용에 반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는 희년은 레 25장에 기록된대로 7번째 안식년 다음 해, 일곱 번째 달, 열흘 째 되는 날 양의 뿔 나팔 소리로 선포되었다고 보았다. Strack 역시도 50년 희년 설을 받아들이면서, 매 7번째 희년은 어느 한 안식년과 일치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희년은 안식년주기의 어느 해와 겹쳐질 수 있음을 지적했다.
둘째, 2년 연속 땅의 휴경의 농경적 비현실성
Wetzstein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토양은 안식년이 지난 8년째에는 기경을 해야만 농산물을 얻을 수 있는 농경적 환경조건에 주목하면서, 만약에 2년 연속 휴경이 되어진다면 양식을 얻기가 정말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Kugler역시도 땅과 기후의 조건이 좋지 않기 때문에 땅의 기경이 없는 연속된 휴경은 곡물을 생산할 수 없는 땅의 황폐함을 야기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North는 마카비 일서 6:49절의 안식년 준수로 인한 기근의 도래를 사례로 들면서, 2년 연속의 휴경을 전제로 하는 50년 희년설 보다는 일곱 번째 안식년과 희년의 일치를 주장하는 49년설을 이야기 했다.
셋째, 희년이 49년째에 선포되었다는 견해
Hoenig와 Wenham은 희년을 49일의 '도약된 점핑된 해'(leap year)로 제안을 했는데 제 2성전기의 월력에서 희년에 사라진 것은 이 견해를 뒷받침해준다고 보았다. Box는 창세기에서 출애굽기 14장까지의 역사를 49주기로 등분하여 재구성한 가경중의 하나인 'The Book of Jubilees'의 저자가 50에 대한 이해를 49로 하여 역사를 49등분하여 기록한 것을 주목하면서 일곱 번째 안식년과 희년의 동일성을 이야기 한다. Morgenstern역시도 'The Book of Jubilees'의 49주기를 주목하면서 마키비와 마카비후기에는 희년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했다. Heinisch, Reventlow, Elliger, Cardellini, van Selm, Kugler 그리고 Noth와 같은 학자들은 히브리인들이 날짜 계산시에 마지막 숫자에서 처음 숫자를 빼고 남은 날수를 계산하는 히브리 계산법을 염두에 두면서 49년설을 지지한다. 즉, 히브리인들은 7일에서 12일 사이에는 6일이 아닌 5일이 있는 것으로 계산한다. Vaccari는 또한 고대 로마의 월력에서 희브리 계산법과 비슷한 자료 즉, 이틀전이라는 것을 'tertio calendas'로 표현한 것을 들어 49년설을 이야기 한다. 한편 Kaufmann은 '요벨'과 고대 바빌론의 'misarum' 선포를 비교하면서 희년은 49년에 선포되었다고 했는데, 현재 희년주기의 마지막 해는 다음 희년 주기의 첫해가 되어진다고 보았다. Hartley는 만약에 단 9:24절의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에 나타나는 490년을 10번째 희년이라고 본다면, 일곱 번째 안식년이 희년이라고 하는 견해를 지지해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50이라는 숫자는 실제적인 특별한 월력을 나타내는 숫자가 아니고 상징적인 것이라고 보았으며, 희년은 다른 안식년들과는 달리 일곱 번째 안식년을 구별하기 위한 특별한 표식이라고 보았다. Stone은 50년은 두 월력 체계 즉, Sun과 Moon력의 상이한 길이에 의해서 발생되어지는 현상이라고 보았다. 그는 희년을 두 월력사이의 차이를 조절하기 위한 Moon력에 부가된 길이의 시간으로 보았다. Klostermann역시 두 월력사이의 차이점을 보면서 49번째 Sun year는 50번째 Moon year의 이어지는 달수로 보았다. 그러므로 49년의 Sun year 시작은 50년의 Moon year의 후반기 시작이 되는 것이다. 즉, 50년 Moon year는 49년 Sun year 일곱번째 달 열흘째 되는 날에 끝나게 되는데 이때 희년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희년선포 시기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은 확실한 희년 선포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에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으나, 다니엘서의 490년에 대한 해석과 중간기 가경인 'The Book of Jubilees' 저자의 희년의 49주기 이해나 Sun-Moon 월력의 차이는 49년째 희년 선포를 더 지지해주고 있는 듯하다.
3. 레위기 25장의 안식년법과 희년법
1). 서 론
레위기 25장에는 세가지 희년규례 즉, 땅의 휴경과 노예해방 그리고 토지의 원주인에게로의 반환을 규정하는 조항들이 나타나 있지만 부채탕감에 대한 규례는 언급이 없다. North나 Noth와 같은 학자들은 부채에 대한 용어의 언급은 레위기 25장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너의 형제가 가난하게 되면...' (25a, 35a, 39, 47a)과 같은 조건절을 들어 25장이 부채탕감의 조항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Elliger와 Wenham과 같은 대다수의 학자들이 말하듯이 부채탕감에 대한 특별한 규례를 레위기 25장에서는 찾아볼 수 가 없다.
2). 레위기 25장의 구조
레위기 25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으로 즉, 하나는 2-7절의 안식년과 그에 따른 규례들이며 다른 하나는 8-55절의 희년과 그에 따르는 규례들로 구분할 수 있다. Hartley는 조금 다르게 레 25장의 구조를 보고 있는데, 그는 2-22절의 안식년과 희년의 월력과 몇 몇 규례와 23-55절의 희년과 관련된 부속규례들로 나눈다. 특별히 그는 희년을 'a high sabbatical year'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 두 구조가 밀접히 연관되어져 있다고 보고 있다. 또한 후반부에 등장하는 세가지 규례 즉, 땅의 매매와 대여 (23-34절),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대부 (35-38절) 그리고 부채로 인한 노예해방 (39-55절) 등의 규례등은 그 각각의 계약만기 시점을 모두 희년에 두고 있다고 하는 사실과 가난-대부-기업을 잃음-노예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관련성 때문에 이 세가지 규례들은 희년에 밀접히 연관되어져 있는 규례들이라고 이야기 한다.
3). 안식년에 관한 규례 (레 25: 2-7)
이 안식년 법에 관한 규례에서 우리는 안식년 법들의 기초가 되고 있는 땅에 대한 여호와의 소유권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Henry는 이 법이 출애굽기 23:10-11절과 아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레위기의 이 규례에서는 아주 독특한 동기가 발견되어진다고 이야기 한다. 즉, 출애굽기 23:10-11절에는 가난한 자들이 경작하지 않는 땅에서 자연히 자라난 곡식들을 먹을 수 있게 한 인도주의적인 사회적 기능을 볼 수 있는데 반하여, 레 25:4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는 안식의 개념을 통하여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는 종교적인 동기롤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Wright는 Gordon과 Lemche의 견해에 동의 하면서 안식년 법이 고대 이스라엘에 하나의 제도(Institution)로서 정착하기전에, 이미 안식년 법의 개념과 그 실행에 있어서 분명한 종교적이며 제의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러한 안식년 법은 어떻게 지켜졌으며, 안식년의 양식의 종류와 용도는 무엇이었으며, 안식년 법의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A) 안식년은 개별적 혹은 부분적으로 지켜졌는가? 아니면 동시에 전체적으로 지켜졌는가?에 대한 학자들 간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째, Killian 과 Porter는 개별적인 안식년 즉, 돌아가면서 땅을 휴경하는 견해에 동의하는데, 이들은 돌아가면서 이루어지는 안식년은 농부들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안식년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둘째로, Ginzberg는 전체적인 땅의 휴경으로 말미암은 사람들의 굶주림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가나안의 정복이 같은 해에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언제 안식년이 지켜졌는지 결정할 수가 없다고 이야기 했다. 셋째로, Wright는 안식년 법은 가난한 자들과 들짐승들에 대해 인도주의적인(Humanitarian) 동기를 가지고 있는데, 전체적인 땅의 휴경은 이들로 하여금 더욱 어려운 시간을 가지게 할 것이라고 하면서, 땅의 휴경은 전체 농부들에 의해서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개별적인 농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적으로 돌아가면서 땅의 휴경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에 대해서 전체적인 안식년 즉, 땅의 휴경을 지켰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를 가진 많은 학자들의 주장이 있다. 첫째로, Wacholder는 안식년 법과 안식일 사이의 매우 밀접한 성격과 연관성을 지적하면서 안식일 법이 모든 백성이 동시에 전체적인 준수를 했다면, 안식년도 동시적이며 전체적인 준수를 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둘째로, Safrai와 Eisenstein은 만약에 개별적인 안식년의 준수가 이루어진다면 희년의 계산에 아주 치명적인 혼선을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을 했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안식년의 준수는 모든 지파가 각각 땅을 분배받은 뒤에 이루어졌다고 했다. 셋째로, Paton은 땅의 휴경와 노예해방과의 관계를 주시하면서, 특별한 부분적인 휴경은 땅의 주인으로 하여금 나머지 7분의 6에 해당하는 땅을 매년 농사지어야 하는 부담과 욕심을 주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노예해방을 시행하지 못하도록 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넷째로, 제 2성전 말기의 제 1 마카비서와(I Macc. 6:49, 53) 요세프스의 기록(Ant. XII. 377-378; Ant. XIV 475ff)의 역사적 자료들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음식부족으로 인한 기아가 도래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부분적인 휴경의 준수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다섯째로, 레 25:20절의 "혹 너희 말이 우리가 만일 제 칠년에 심지도 못하고 그 산물을 거두지도 못하면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에 있는 질문은 7분의 6의 농사를 지을 땅이 있는 상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물음이다.
이러한 안식년의 휴경법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와 역사적인 증거 그리고 성서 텍스트의 증거들은 부분적인 휴경보다는 전체적이며 동시적인 안식년 법 준수의 견해를 더 타당한 안식년 준수 방법으로 말하고 있다.
B) 안식년의 양식의 종류와 용도
레 25장에는 안식년을 위한 두가지 양식 즉, 레 25:5-7절의 저절로 자라난 양식과 레 25:20-22절의 저장된 양식이 나타난다. Noth와 Saith는 비록 안식년에 수확하는 것이 없다하더라도 전년도 수확기에 떨어진 이삭으로부터 저절로 자라난 곡물들이 양식이 되어 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Hartford-Battersby도 이들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안식년에 곡식을 거두지 못하게 한 것은 상거래를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수확들을 금지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Brown, Driver 그리고 Briggs도 '떨어진'의 히브리어 어원적 접근을 통하여 이전 수확기에 우연히 떨어진 곡물들이 안식년에 자라난 것으로서 이것을 양식으로 사용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5절의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네지레'는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드리는 나실인의 모습중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민 6:2, 13, 18-21절), 이처럼 전혀 수확을 위한 노력이 들지 않은 포도나무 열매를 가르친다. Ginzberg도 안식년에 저절로 자라난 곡물의 매일 양식으로서의 이용은 저자의 humanitarian적인 배려라고 보았다.
이러한 일련의 견해들을 볼 때 안식년에 사용된 양식은 전해에 저장된 양식과 저절로 자라난 곡물인데, 특별히 이 저절로 자라난 곡물은 가난한 자들을 비롯해서 필요한 사람들 모두에 의해서 상업적인 목적이 아닌 일용할 양식으로 사용되어졌음을 볼 수 있다.
C) 안식년의 기원
안식년의 원래적인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의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첫째 견해는 인도주의적인 관점이다. Weber와 Kugler는 휴경 즉, 안식년은 순수한 인도주의적인 관점을 반영한다고 했다. Eichrodt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떨어진 곡물뿐만 아니라 모퉁이에 곡물도 남겨놓으라고 한 레 19:9-10절에 주목하면서 the Holiness Code의 전반적인 인도주의적인 강조점을 말했다. 둘째 견해는 안식년의 제의적인 기원을 이야기 한다. North는 소유주의 땅의 소산물에 대한 권한포기를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방법으로 간주하면서 안식년 제의의 기원을 이야기 한다. 셋째 견해는 안식년의 농경적인 기원을 이야기 한다. Penderson은 땅과 사람과의 밀접한 관련성에 주목하면서 안식년의 농경적인 관점을 이야기 한다. 그는 토양의 성질에 대한 성경의 구절 즉,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욥 31:38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40절),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19-22절)을 언급하면서 땅의 본질상 자유의 시간 즉, 휴경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안식년의 기원에 대한 여러 견해들은 각각 어느 한 기원의 설명이 안식년 기원증거로서 필요 충분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비록 안식년의 일차적인 초점이 인도주의적인 관심에 있다하더라도 다른 두 요소 즉, 제의적이고 땅에 대한 농경적인 관점도 또한 이 안식년 기원의 한 뿌리로 간주하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
4). 희년에 관한 규례들(레 25:8-22)
양의 뿔인 요벨은 희년의 일곱째 달 열번째 날에 울려퍼졌다. (8-9절). 이 희년에 모든 백성들은 모든 빚의 탕감과 노예해방 그리고 그들의 원래의 기업으로 돌아가는 은혜를 포함한 자유의 선포를 받게된다 (10절). 희년의 목적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 각 지파의 견고성을 지키려고 했던 것으로서, 무름(redemption)에 관한 규례들은 유산의 소유와 개인의 자유를 지키게 하는 주요한 원칙들이었다.
야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애굽에서의 구출의 두가지 동기가 이스라엘 백성으로하여금 이와같은 해방의 규례들을 선포하게 만들었다. 다음 돌아오는 희년까지의 남은 햇수가 사고 파는 거래에 있어서 가격 결정의 중요한 요소였다 (15-16절). 이 법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착취하지 말아야 할 것과 야훼 하나님께서 충분한 양식을 주실 것이라는 권면도 가지고 있다 (20-22절). Hartley는 특별히 21절의 "내가 명하여 제 육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년 쓰기에 족하게 할지라"에서 '나의 축복' 전에 있는 '명령하다'라는 단어에 주목하면서 이는 충분한 수확을 보장하는 야훼의 의지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5). 땅의 회복에 관한 규례들 (레 25:23-34)
안식년 법전과 비교해서 희년 법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독특하게 보이는 규례는 레 25장에서만 발견되는 유산의 본래의 주인에게로의 회복에 관한 규례이다. 레 25장에는 6가지 유업의 회복에 대한 규례가 있다. 23절에 농경을 위한 땅은 팔수 없고 오로지 임대만이 가능하며, 25절에는 가난으로 말미암아 그의 유산을 팔 수 밖에 없는 형제를 위해서 근족의 구제의 의무를 명시하고 있으며, 26절 하반절에는 근족이 없는 원주인이 땅을 다시 사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29-31절에는 집에 대한 규례로 성곽안의 집과 시골에 있는 집의 거래에 대한 규례와, 32절에 레위인의 재산에 대한 특별규례등이 그것들이다.
①. 땅의 거래에 대한 규례 (레:23-28)
이 구절들에는 야훼의 땅에 대한 소유권과 모든 가계의 유산에 대해서 무를 수 있는 권한에 대해서 다시금 규정하고 있다.
A) 땅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소유권
땅의 소유주가 임차인과 농경지에 대해서 일정기간 계약을 체결하는 것과 같이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맺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의 진정한 주인은 야훼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자 한 것이었다. Wilkie는 야훼의 명령하에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사건은 땅에 대한 야훼의 주권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이야기라고 보았다. 이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팔레스타인에서 야훼의 땅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게 만들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Fager는 특히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한 23절에 대해서 모든 희년법규의 궁극적인 기초 (the ultimate moral basis or the cornerstone of the Jubilee) 라고 했다. 그것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한 뒤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준 야훼 하나님께서 그 땅과 그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유일한 소유주라는 것이 모든 희년법규 시행의 동기가 되는 신학적인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히브리 성경 원문에는 땅이 주어이며 미완료 수동형의 동사(닢알 3인칭 여성 단수)가 사용되어져 있기 때문에 '토지는 영원히 팔릴 수 없다'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지며, 이것은 곧 이어지는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고 하는 야훼 하나님의 선포와 더불어 토지는 인간이 자의적으로 팔고 살 수 없는 야훼 하나님의 것임이 더 강조되어 나타난다. 이 히브리 성경 구절의 번역본들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개역성경),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 (표준 새번역), "The land must not be sold permanently, because the land is mine and you are but aliens and my tenants" (NIV), "The land shall not be sold in perpetuity, for the land is mine; with me you are but aliens and tenants" (NRSV), "The land shall not be sold permanently, for the land is Mine; for you are strangers and sojourners with Me" (NKJV), "The land shall not be sold for ever: for the land is mine, for ye are strangers and sojourners with me" (KJV).영문성경들이 이 문장을 땅을 주어로 하여 수동으로 번역해 놓은 것과는 달리, 개역성경을 비롯한 한글성경들이 능동형으로 번역해 놓은 것은, 토지와 직접관련을 가지고 있는 이용주체에 강조를 두고 번역을 한데 기인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개역성경에서도 곧 이어지는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고 하는 문구가 명확히 야훼 하나님의 토지 소유권에 대한 선언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개역성경도 궁극적으로는 23절의 문맥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Hartley는 '하에레쯔'가 23절 문장 첫머리에 쓰인 것은 강조를 위함이라고 보았으며, Hogg는 개역성경 '영원히'에 해당하는 '쯔미투트'를 'without right of redemption' 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문맥의 이해들은 야훼 하나님의 토지에 대한 궁극적인 소유권을 더욱 잘 말해주는 생각들이다. 23절에 하나님과 함께 쓰여진 두 개의 히브리어 즉,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는 노예의 상태에 대해서 쓰여지곤 했던 단어들인데, Wright는 이러한 두 단어를 가나안인들이나 이주민들의 후손을 언급하는데 쓰였다고 보았다. 그들은 단지 땅을 소유하지 못한 거주하는 고용인들로서 주인에게 그들의 노동력을 주었다.
B) 근족의 기능
근족의 책임은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라고 한 25절에 나타나 있다. 즉, 근족은 '기업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는 사람을 구원해줄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을 가리킴을 보여준다. Noth는 '고엘'에 대해서 그는 그 자신을 위해서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했으며, Hubbard는 부채로 인한 모든 노예들이 희년에 그들의 지위를 회복할 때 야훼께서 그들의 근족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또한 Ginzberg는 고엘의 기능에 대해서 넓은 가족의 범위안에 그 기업을 둠으로 해서 가족의 견실성을 지키려는 수단으로 보았으며, 한편으로 Buhl은 이 고엘의 기능을 개인의 기능으로 보기보다는 그 사회의 집단의 기능으로 보기도 했다. 이러한 각 가족의 유산을 최소한 친족의 소유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고(룻 4:9절) 예레미야가 하나멜의 땅을 사는 것(렘 32:6-15절)에서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규례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조상이 물려준 기업을 팔아야만 했을 때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 기업의 친족안에 머무름을 위해서 사야하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근족의 제도를 보면서 Bellefontaine은 이스라엘 사회의 구조는 그들의 땅에 대한 태도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엘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도 희년이 가까워 짐에 따라 땅의 가격이 내려가기 때문에 수년이 지난 다음에는 그 잃었던 땅을 다시 살 수도 있었다 (26-27절). 따라서 원래의 주인이 그의 땅에 대한 소유권을 회복하는 길은 고엘을 통해서나, 그것을 얼마뒤에 다시 사든지, 아니면 희년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②. 집의 매매에 대한 규례 (레 25:29-34)
(A) 성곽안에 있는 집과 시골에 있는 집 (레 25:29-31)
일반백성의 집에 대한 두가지 종류의 규례가 있다. 성곽이 없는 마을에 있는 집들은 팔린 후 언제든지 무를 수가 있었으며, 희년이 되면 자동적으로 원주인에게로 회복이 되어진다 (31절). Kellog에 따르면 성곽이 없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목자들이거나 농부들이었기 때문에 목축과 경작을 위해서 그들의 집들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므로 성곽이 없는 마을의 집들은 희년법의 적용을 받게 된 것이다.
반면에 성곽안에 있는 집은 팔린 뒤 일년안에 무르지 않으면 무를 수가 없었다 (29-30절). 다른 말로하면 언제든지 무를 수 있는 권한이 성곽안에 있는 집들에게는 적용이 되어지지 않았다. 성곽안에 있는 집들이 희년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이유는 희년의 규례들이 농경에 사용되어지는 땅들에만 적용되어졌기 때문이다. Sulzberger는 성곽안의 경제제도와 시골 땅의 경제제도의 차이점을 보면서 귀족들은 성곽안에 있는 재산들을 영구히 살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으로 레위기 저자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으로부터 나온 견해로서 Ginzberg는 저자의 부자와의 타협책의 가능성을 지적하면서 상업적인 이익 때문에 성곽안의 유업의 배제가능성을 이야기 하기도 했다.
(B) 레위인들의 집들과 그들의 재산 (레 25:32-34)
레위인들은 언제든지 그들의 도시에 있는 그들의 집들을 무를 수가 있었다 (32절). 또한 레위인들의 성에 있는 그들의 집은 그들의 유업이었기 때문에 희년이 되면 자동적으로 회복이 되었다 (33절).
3.1.5.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빌려주는 대부에 대한 규례 (레 25:35-38)
이자의 종류에는 돈을 빌려주는 것과 관련이 있는 '네섹'이라고 하는 것과 음식을 빌려주는 것과 관련이 있는 '타르빗' 혹은 '마르빗'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자는 이스라엘 백성사이에서는 늘어나는 이자로 인해서 가난한 자들이 노예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금지되었다 (36절). 이러한 규례들의 정신 역시도 야훼 하나님에 의해서 애굽의 속박에서 놓여난 출애굽 정신과 관련이 있다 (38절).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곤경에 처한 형제들로부터 이자를 받는 대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다 (35절). 그렇지만 Noth는 이법과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라고 한 출 22:25절의 초점이 가난한 자들이라는데 주목하면서 구약성경의 규례들이 이자를 받는 대부를 반대하지 않았다고 하며, 이러한 이자를 반대하는 규례가 돈을 빌려주는 모든 상황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6). 부채에 의한 노예에 관한 규례 (레 25:39-55)
희년의 마지막 규례는 노예해방에 관한 규례이다. 노예와 함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년이 되어 요벨이 울려퍼질 때 그 노예들을 놓아주었다. 그러면, 노예들은 그들의 지파와 유산인 그들의 땅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이 규례의 동기도 역시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바 나의 품군인즉 종으로 팔리지 말 것이라"고 한 레 25:42절의 애굽으로부터 구속한 야훼 하나님을 기억하는데에 있다. 노예해방에 관한 이 희년법은 다음과 같은 규례들을 말하고 있다. (1) 노예를 다루는 방법 즉, 가혹하지 않고 고용된 일군을 다루듯이 친절하게 (39-40a, 43, 50c, 53절), (2) 노예해방의 기간 (40a-41절), (3)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규정 (44-46절), 그리고 (4) 이방인과 이주민에게 팔린 이스라엘 백성에 관한 규정 (47-55절)등이 그것들이다.
노예가 되는 원인들은 풍족하지 못한 수확, 전염병, 질병, 다른 어려운 상황등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 "너는 그를 엄하게 부리지 말고 너의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한 43절은 주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심하게 다루거나 지배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40절의 "품군이나 우거하는 자같이 너와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는 그 노예들의 성격과 조건에 대해서 '고용된 일꾼들' 이나 '우거하는 자'라고 묘사 했다. 고용된 일꾼들로서의 지위를 갖는 노예들은 집들과 얼마간의 땅과 같은 것들이 함께 제공 되었다. 그러므로 Fuchs는 "이스라엘 백성들사이에는 전혀 노예가 없었다......단지 때때로 자유를 잃었을 뿐이다."라고 했다. Buhl 역시 "이스라엘 백성은 팔리기 보다는 일정기간동안 부림을 당할 수 있었다."라고 했다. 한편 Noth는 레 19:13절과 신 24:15절의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의 고용된 일꾼들에게 해가지기전에 품삯이 주어진 것에 주목하면서, 해마다 노예들에게 고용된 일꾼처럼 임금이 주어졌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Wolf, Reviv, de Vaux 그리고 Driver와 Miles같은 학자들은 다른 고대 근동의 법률 모음집들과 계약서등을 보면서 고용된 일꾼들의 의무는 목수, 대장장이, 보석공 등과 같은 숙련된 노동자들의 특별한 일들이었다고 했으며, Warhaftig 또한 노예주는 노예와 맺은 계약외의 일들을 그들에게 시킬 수 없었다고 보았다.
48-49절의 "팔린 후에 그를 속량할 수 있나니 그 형제 중 하나가 속하거나 삼촌이나 사촌이 속하거나 그 근족 중 누구든지 속할 것이요 그가 부요하게 되면 스스로 속하되"에서 쓰인 근족의 범위는 25절에서 쓰여진 근족의 범위보다 더 넓은 범위를 나타내고 있다. Japhet은 또한 주인과 종과의 관계를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과 그들 각각의 하나님의 관계로서 보았다. 그녀는 이러한 종교적인 개념이 땅과 노예들의 구속을 위한 규례들을 하나의 사회 복지를 위한 제도로서 묵어주게 된다고 보았다
레위기 25장에 나타나 있는 안식년법과 희년법의 규례는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몇가지 깨닫게 하는 바가 있다. 애굽 노예 신분에서 하나님의 자유한 백성으로 바꾸어주신 것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들의 죄인 된 몸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됨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며, 야훼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가나안 땅의 복된 선물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날마다 주시는 커다란 은혜들이며, 출애굽과 야훼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가나안 땅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더불어 살게 하신 안식년 법과 희년법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의 은혜를 받고 그 분의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땅에서의 그 분의 나라를 위한 말씀에 대한 순종의 삶과 행함을 요청하시는 말씀임을 깨닫게 한다.
희년사상의 현대적 적용을 하려고 하는 노력의 첫째 근거는 신학적인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구원을 얻은 모든 이들에게는 '그러면 이 땅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질문이 있다. 이 질문에 대한 신학적 전거는 '이 땅도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희년사상은 이 물음에 대한 실천을 위한 고민의 한 대답으로 삼을 수 있는 규례이기 때문에 그 적용성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천당'식의 복음 전도가 잘못 되어서라기보다는, 시대마다의 사명이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한다면, 오늘의 믿는 우리들에게는,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고 하는 행함의 방법과 표현은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믿음과 행함이 비율적인 균형이 아닌, 온전한 믿음은 온전한 행함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말씀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희년사상의 현대적 적용의 둘째 근거는 희년법의 이른 기원에 대한 견해다. 희년법 기원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아주 이른 연대기를 주장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은 바벨론 포수기 이후 제사장계열의 문서편집기에 첨가되고 신학화 되어진 사상이라고 보는 편이 있다. 후자를 취하면 희년사상은 단순히 메시야 도래시에 이루어지게 될 유토피아적인 해석을 하게 되어 본질적으로 인간이 이룰 수 없는 규례들이 되어지고 만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희년사상의 이른 연대기를 주장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고 더욱 설득력이 있다. 이 이른 연대기는 희년사상이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닌 실제적인 사회적용을 위한 규례였음을 보여주는 견해다. 먼저는 레위기에 나오는 희년을 나타내는 '요벨'을 비롯한 4가지 중요한 단어들은 후기 성서에 관련된 문헌들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운 단어들인 반면에, 고대 우가릿어 'mk'나 'samid adi dariti'에서 그 기원을 찾게 되어지는 것은 이 희년사상의 초기 발생설을 지원해주는 한 설명이다. 그리고 고대근동에서 시행된 노예와 부채의 탕감에 대한 실제 사례들과의 여러면에서의 유사성은 초기 발생설을 주장하게 되는 또 다른 설명이다. 이러한 초기 발생설은 희년규례가 단순히 유토피아를 지향한 실현할 수 없는 규례가 아니었으며,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실제적인 실현을 위한 규례였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정의를 위한 규례를 어떻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적용하느냐는 그 당위성에 있어서는 정당하다. 하지만, 각론적인 실천을 위해서는 여러 면에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분석하고 적용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노력과 지혜가 필요한 일이다. 안식년과 희년법 규례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따라 행함으로 옮기게 하는 것은 그 어느 길보다도 지극히 좁은 길일 수 있다. 그러나 순종의 발을 내딛을 때 우리들에게 기쁨으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가 또한 있음을 말씀하시는 약속의 말씀을 믿으며 새 힘을 얻게 된다.
4. 예수님의 안식일
1).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큰 자다(마12:6)
성전이 하나님 임재의 중심으로서의 역할 때문에 안식일보다 더 큰 권위를 갖는다면, 성전의 역할을 성취하심으로써 성전 자체를 대체하시는 예수님 자신은 안식일보다 훨씬 더 큰 권위를 갖는다.
하나님의 임재가 예수님에 의해 성취되었고 이전되었다는 사상을 강력히 제시해주는 이 성전-모형론은 사실 마12장의 3중적 모형론(12:6, 40∼41, 42) 가운데 하나다. 이 3중적 모형론을 통해 마태는 예수님께서 성전, 솔로몬과 같은 위대한 왕 그리고 요나와 같은 선지자보다 더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이 정도로 5∼6절은 단순히 제자들의 행동 선례를 예시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예수님의 권위가 성전(그리고 다윗)의 권위보다 크시며, 따라서 안식일의 권위를 능가한다는 기독론적 주장인 것이다.
2). 안식일의 완성자 예수(마5:17)
예수님은 안식일 율법의 원래적이고 근본적인 목적을 성취하심으로써 안식일 율법을 초월하신다. 예수님의 안식일 성취는 예수님의 구속이 안식일을 궁극적으로 성취하셨다는 의미에서 '연속성'의 요소와, 안식일이 예수님의 성취에 의해 초월되었다는 의미에서 '불연속성'의 요소를 공히 갖는다. 인자이신 예수님은 안식일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취하러 오셨다(5:17).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셨던 3년 반 동안 안식일에 ①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② 제자들이 곡식밭을 지나다가 이삭을 따먹기도 했다.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 주시기도 했다. 『사람들은 주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가를 지켜보고 있었으니, 이는 그들이 주를 고소하려 함이더라』(막 3:2). 그럴 때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율법사들, 바리새인들로부터 추궁을 당하고 비난을 받으셨다.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니니라.』(막 2:27)고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타당하냐, 아니면 악을 행하는 것이 타당하냐? 생명을 구하는 것이 타당하냐, 아니면 죽이는 것이 타당하냐?”고 하시나, 그들은 잠잠하더라』(막 3:4). 그들이 완고하고 우직한 전통으로 강직하게 된 것을 주님께서 아시고 제사장들이 안식일이면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읽어 보지 못했느냐고 힐책하시면서(마 12:5) 『인자는 곧 안식일의 주니라.』(마 12:8)고 말씀해 주셨다.
그들이 고집해서 준수하려 했던 것은 성경적 교리가 아니라 누룩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리를 조심하라 하셨다(마 16:12). 한국 개신교는 누룩을 복음이라고 가르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전통을 교리인 양 알고 실행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보시고 『너희는 또 어찌하여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마 15:3)고 말씀하셨고, 심지어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기시키고 있는 것이라.』(마 15:6)고도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태어나신 하나님이시요(딤전 3:16),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며(요일 5:7), 하나님의 아들(요 10:36)이심도 믿지 않기에 거듭날 수 없어, 구원받지 않은 유대인으로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시고 이방인들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물론 이방인들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정녕 할례자도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게 하고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니라』(롬 3:29,30).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니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도 없고 종이나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으니 이는 너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너희는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에 따른 상속자들이니라』(갈 3:26-29).
3). 안식일의 충돌
안식일이라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하고 유대인들하고 계속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충돌을 하는 가장 큰 이유가,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 있다.’ 라는 것을 유대인들은 자기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으로 잘못 착각을 했고,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졌다고 하니까, 그런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안식일이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괴롭게 하는 것보다, 자기들이 편하게 살기 위해서, 오히려 그 괴롭게 하는 원인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4). 신약의 안식일
신약은 안식 후 '첫날'을 신약의 안식일로 대치하려거나, 안식일 신학을 주일예배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 초대교회의 주일은 예배의 날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에 상응하는 공휴일을 제정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주일이란 표현에 익숙하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주의날(퀴리아케 해메라, 주일)'이란 표현이 딱 한 번 요한계시록에 나온다(1:10). 여기서 '주의날'은 △종말론적인 "주의날(Yom Yahwe, 심판과 구원의 날)" △안식일(토요일) △부활절 △일요일로 제안되었다. 아마도 이 표현은 일요일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유는 12사도의 가르침을 적은 2세기 초 기독교 문헌인 디다케에서 주일예배를 명령하기 때문이다.
외경(디다케 14:1)에서 말한 내용 "주님의 주일마다 여러분은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드리시오.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의 범법들을 고백하여 여러분의 제사가 깨끗하게 되도록 하시오.."
또한, 초대교회 교부인 이그나티우스는 일요일을 주의날로 표현하면서 일요일을 "안식일화 하지 말고 주님의 날(Lord's Day)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명령한다(Ignatius, Magnesians 9:1). 이 구절은 교부들이 초대교회가 주일을 '신약의 안식일'로 여기려던 시도를 금지한 증거이기도 하다.
대략 기원후 70년 이후 1세기경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바나바 서신도 제 팔일(주일)의 기념(예배)을 강조한다. "우리 역시 팔 일을 기념하며 즐거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Epistle of Barnabas 15)."
바울의 의도 - '모든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지 특정 날만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새 언약의 성도들에게 가하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이다(이미 논의한 대로 골 2:16~17; 참조 롬 14:5~8; 히 4:1~11, Ignatiusgnatius, Magnesians 9:1).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주일은 특별하게 거룩한 날이다. 그러나 다른 날들도 똑같이 특별하게 거룩하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을 때(신 7:7) 유대인들과 세우신 표적이었다(출 31:13, 겔 20:20). 안식일은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성경은 세 부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과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다(고전 10:32).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지키는 것은 그날이 주의 첫날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주의 첫날에 부활하셨고(마 28:1, 막 16:9, 눅 24:1, 요 20:1), 주의 첫날 제자들이 모여 설교했으며(행 20:7), 연보를 걷었기 때문이며(고후 9:5), 성령님의 강림하심도 오순절인 주의 첫날이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의 안식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십계명을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성경을 나누어서 공부해야 함을 무시하고(딤후 2:15) 주일을 안식일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이 아니요 영적 유대인들이다. 성경을 나누지 않고(세대적 진리) 무조건 다 믿으려고 하는 것, 심지어 영적으로 은유적으로 해석하며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 성경을 가장 잘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 3, 4장에서 광야에 있던 유대인들이 불순종과 믿음의 결핍 때문에 하나님의 쉼 즉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알려 준다. (히 3:18, 19; 시 95:7-11; 민 14:28-35)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들은 쉼을 경험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메시아 아래서 누릴 온전한 쉼은 아니었다. 그것은 모형적인 것 즉 실체의 그림자에 불과하였다. (수 21:44; 히 4:8; 10:1)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안식의 쉼이 남아 있다.”고 설명한다. (히 4:9) 그러므로 순종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일” 즉 전에 자기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고 했던 일을 쉬고 “안식의 쉼”을 누린다.(로 10:3)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안식 즉 쉼이 그의 시대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이 그 쉼에 들어가고 있었다고 설명하는데, 이 점은 하나님이 쉬시는 날이 수천 년이 됨을 시사해 준다.—히 4:3, 6, 10.
“안식일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자신을 가리켜 “안식일의 주”라고 말씀하셨다. (마 12:8)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노동으로부터 휴식을 주는 것을 의미한 문자적 안식일은, “오게 될 것들의 그림자이고, 실체는 그리스도께 속”하였다. (골 2:16, 17) 그러한 “오게 될 것들”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그 주가 되시는 안식일이 있다. 그리스도는 주들의 주로서 온 땅을 천 년 동안 통치하실 것이다. (계 19:16; 20:6) 예수께서는 지상 봉사 기간에, 아주 두드러진 기적 얼마를 안식일에 행하셨다. (누 13:10-13; 요 5:5-9; 9:1-14) 이것은 예수께서 다가오는 천년 통치 중에 인류를 영적·신체적 완전함으로 끌어올리심으로 어떤 구출을 가져오실 것인가를 알려 주는 것인 듯하다. 따라서 그때는 땅과 인류가 안식의 쉼을 누리는 기간과 같을 것이다.—계 21:1-4.
4. 로마카톨릭의 안식일
로마카톨릭 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태동했으나 초대교회의 순수한 진리에 이교의 철학과 잘못된 교리를 섞어가며(일요일 예배에 대한 로마 교회의 공식 결의 등) 그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와 같이 일요일 예배는 비성서적인 배경을 가지고 매우 인위적이면서도 이교적인 방법으로 교회에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카톨릭화 되어가는 종교, 정치, 사회적인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면서 마침내 교회에서도 일요일 예배를 합법화시키기 위한 몇 차례의 회의가 있었고, 성경의 권위가 아닌 교회의 총회(부록 참조)를 통해서 결의를 하게 되었다.
1. 일요일 예배를 시작하는 일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정책
2세기 초엽에 로마에는 하드리아누스라는 황제가 있었다. 유능한 정치가였고 로마의 많은 속국들과 화친 정책을 펴서 매우 안정된 정치를 하였다. 그 당시 반란이 심하던 유대인들의 소원을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 재건 허가를 해주었다.(서기 130년 경)
유대인들은 성전 재건을 위하여 막대한 자금을 거두었다. 얼마 후, 황제는 모든 속국들에게 자신을 신의 아들로 부르도록 하는 황제 숭배를 강요하였고, 유대인들은 몹시 반발하였다. 하드리아누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유대인들이 시행하던 할례 의식을 금지시켰다. 전국 유대 랍비들의 격렬한 항의가 있었고 하드리아누스는 분노하여 예루살렘 성전 재 건령을 취소하였다.
로마에 대한 유대 반란 (AD132~135년 경)
유대인의 할례 의식이 금지되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령이 취소되자 서기 132년부터 135년 사이 발코케바를 주동으로 하는 유대인들의 대규모 반란이 있었다. 이미 거두어진 성전 건축 자금이 반란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황제는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당시 로마의 명장 세베리우스와 정예부대 22군단을 파견하였다. 전쟁과 반란에 능한 유대인들은 로마의 군대를 '엥케리'라고 하는 험한 골짜기로 유인한 후, 미리 매복해 있던 반란군들이 뛰어나와 로마의 정예 부대를 참패시켰다. 세레리우스 장군은 몹시 자존심이 상하여 군대를 재정비한 후, 유대인 마을들을 하나씩 포위하여 초토화시키는 작전으로 유대인의 마을 985개를 전멸시켰으며 약 80만명의 유대인을 살륙하였다.
그 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에 공식적으로 세 가지 금지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 세 가지 금지령을 어기면 사형으로 다스렸다. 이 금지령 때문에 교회 안에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공존하고 있었고, 모두가 다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 반란으로 인한 금지령 속에 포함된 안식일 준수 문제는 기독교인들에게까지 해당되는 칙령이었다.
기독교인들의 난처한 입장
유대인이 아닌 기독교인 들이고 안식일을 지키면 유대인으로 간주되어 박해를 받게 되었는데, 당시 로마 제국의 위정자들은 그리스도교를 단순히 유대교의 또 다른 한 분파로만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간주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래와 같이 세 가지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교부들은 황제에게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다르게 취급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황제는 이를 거절하였다. 당시 교회를 대표하는 변증 교부들이 황제에게 보내는 서한들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는 다르니 다르게 취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를 무시하고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박해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결국, 교부들은 유대인들과의 차별화와 로마의 이교도들과의 동질화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대인과의 차별화를 위해서는 구약의 하나님 대신 신약의 하나님을 강조하며 이교도와의 동질화를 위해서는 안식일 대신 당시 태양신을 섬기는 이교도들의 예배일인 일요일 예배를 교회에 도입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 내 기독교는 다음과 같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나며 분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첫째 안식일을 계속 지키려는 무리들 둘째 안식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려는 무리들
셋째 두 날을 모두 지키는 무리들
321년 3월 7 일요일 예배의 법제화 -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는 마침내 321년 3월 7일에 일요일을 공식적인 휴일로 선포하게 되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법령은 그리스도교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하는 기점이 되었다. 이 법령을 통해서 콘스탄틴 황제는 제국 내의 2대 종파, 즉 태양신 아폴로를 숭배하는 이교도들과 또 다른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그리스도교도들을 일요일로 묶어서 단일 종교로 융합해 보려는 야심적인 종교 정책을 시도했던 것이다. 콘스탄틴은 이 정책의 성공을 위해서 자신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선포했으나 사실상 이것은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전략상의 개종이었다.
325년 니케아(Nicaea) 종교회의 - 태양의 날 일요일을 부활절로 성수하도록 결의함
343년 사르티카(Sardika) 종교 회의 - 태양의 날 일요일을 '부활의 날'이란 미명 아래 일요일 신성론으로 부각시키면서 "주의 날(Lord's day)로 개칭하고, 교역자가 여행으로 "주의 날"을 세 번 범하면 제명시킬 것을 종규 제11조에 명시하도록 의결했다.
364년 라오디게아(Laodicaea) 총회 - 일요일을 준수하도록 결의하였다. 총회에 의결된 종규 제29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결국 안식일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생각이 교회의 권위로 결의되어 일요일 예배로 변경된 것이다.
375년, 천사와 죽은 성자들 숭배, 성상사용
431년,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높이기 시작함(Ephesus 종교회의)
500년, 이교 제사장들의 본을 따른 복장으로 집전함.
593년, 교황 그레고리 1세에 의하여 연옥 교리가 소개됨.
600년, 마리아나 죽은 성자들에게 직접 기도 드림.
1215년, 하나님 대신 사제에게 죄를 고하는 고해성사가 교황 인노센트 3세에 의해 선정됨(Lateran 종교회의)
1439년, 연옥이 정식 교리로 선포됨 (Florence 종교회의)
1513년, 교황 레오10세는 영혼 불멸을 교리로 확정하고 조건적 불멸 신앙을 이단으로 선언함 (Lateran 종교회의)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성모 마리아는 탄생 때부터 원죄도 없고 해산의 고통도 없었다는 성모무염시태를 교리로 선포함
1950년, 교황 피우스 12세에 의해 마리아는 죽은 직후 육신 그대로 승천했다는 성모 몽소승천을 교리로 선포함 (축일은 8월 15일)
1910년 1월 25일 교황 피우스 10세로부터 "사도적인 축복(Apostolic Blessing)을 받은 [회심자를 위한 카톨릭 교리 문답서]에서 아래와 같이 확인되고 있다.
<카톨릭 자체 증언>
"법왕의 권세는 사람의 권세가 아니요, 하나님의 권세이므로 그는 하나님의 법도 수정할 수 있다."(Lueus Ferraris, Prompta Bibliotheca Canorica Vol. lv)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주: 교황을 뜻함)들은 교훈이나 금지에 관한 율법을 부가할 수 있는 권세를 가졌음과 아울러, 이러한 율법들로부터 면제해 주는 권세도 있고, 필요하다면 폐지시키는 권세도 있다 ... 이러한 사법상의 권한은 심지어 죄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포함하고 있다." Pope,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XII, 265, col. 2.
"카톨릭 교회는 안식일을 주일 중 일곱째 날인 토요일에서 첫째 날인 일요일로 변경시킨 후, 십계명의 넷째 계명을 고쳐서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라고 명하였다.(Catholic Encyclopedia, Vol, IV, p153)
"교황은 너무 존엄하고 높기 때문에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일 뿐만 아니라, 육신의 베일 속에 감추어진 예수그리스도 자신이다."(Prompta Bibliotheca, vol VI pp.25,29)
"우리(주: 교황들)는 이 땅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Pope Leo XIII, Encyclical Letter, 7.20,1894.
"교황은 너무나 위엄이 있고 지고하기 때문에 그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인 동시에 하나님의 대리자이시다. 교황은 지상의 하나님이시며, 왕 중의 왕이시고, 최고의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 Prompta Bibliotheca, vol. VI, p. 25-29.
"성경에서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모든 명칭들과 그분의 최상권에 관한 모든 것들은 교황에게도 적용된다." Bellarmin, On the Authority og Councils Vol. 2.
2. "카톨릭교회는 주의 날을 안식일에서 일요일로 변경시켰는가?
그리스도께서 교황에게 주신 묶거나 푸는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교회는 주의 날을 일요일로 변경시켰다."(Life in Christ, 천주교회의 1958년도 판 교리문답 p243)
일요일이 공휴일이 된 것은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부터다. 콘스탄틴 황제는 기원후 321년 3월 3일 주일을 쉬는 날로 정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리고 7월 3일 로마법은 주일을 공휴일로 선포했다(Codex Instinianus 3.12. Codex Theodosianus 2.8.1).
그러나 이때에도 주일은 예배의 날임을 강조했지 신약의 안식일로 강조하지는 않았다(330년 교부 유세비우스의 시 91편 주석 참조). 초대 교부들인 저스틴(Justin), 터툴리안(Tertullian),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드(Clement of Alexandria), 그리고 오리겐(Origen)까지 모두 주일을 예배의 날로 강조할 뿐 신약의 안식일이라거나 쉬는 날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소수지만 4세기경 성 암브로시우스와 같이 일요일에는 여행과 연극 관람 등을 금하고 성찬 행위와 자비로운 행위만 하라고 권한 경우도 있었다(Exam, III. 1.1).
천주교회의 항의 “개신교회는 왜 일요일을 지키는가?”(부록 참조)
-로마 카톨릭은 일요일 제도를 자신들의 고유 절기라 주장하는 글
지금부터 백여 년 전, 1893년 5월 1일부터 동년 10월 말일까지 개최된 시카고 세계 박람회를 앞두고 일요일에도 박람회를 계속하기로 한 계획 때문에 미국 정부는 개신교계의 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 해결 과정에서 사법부는 “미국은 기독교 국가”란 해석을 내놓았고, 그에 힘입어 일요일에는 박람회를 휴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헌법 정신, 즉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원칙에 비추어 볼 때 정부가 금지된 분야에 간섭한 사례가 되므로 국제 종교 자유 협회는 이에 대해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그 내용을 "항의와 호소"란 제목의 책자에 담아 전 미국의 주요 기관들과 종교 단체들 앞으로 발송했다.
이 "항의와 호소"를 받아 본 천주교회측은 그들의 기관지인 "가톨릭 미러"란 신문을 통해 그 해 가을 4회에 걸쳐서 '기독교의 안식일'이란 제목의 논설을 발표했다. 그 글의 놀라운 점은 기독교의 일요일 준수가 비성서적이며 천주교회의 전통에 불과한 것임을 밝히고, 성서 제일주의를 표방하는 개신교회가 일요일을 준수하는 것은 철저히 변호불능, 자가당착적인 모순임을 지적한 것이었다.
*. 일요일 예배는 로마 카톨릭의 제도가 아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지킨 예배일이다.
이들의 주장은 마치 일요일 예배가 자신들의 전유물인줄로만 착각하고 있다.
이들은 “일요일 예배를 자기들이 만들었으니 쓰지 말라고 하는것인바 이는 마치 천국을 우리들이 선점하였으니 당신들은 천국에 들어 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옥에가 가십시오 하는 것과 무었이 다른가.”
5. 안식일을 지키는 교파
안식일 예배자들의 주장
1. 예수 믿는 성도는 왜 안식일을 지켜야하는가?
1).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들의 영원한 표징이기 때문이다
①. 안식일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원한 표징이다
안식일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셨다.(창2:1~3)
②. 바벨탑 사건후에 택하신 아브라함과 그 후손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계명으로 주신 표징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안식하라. (출20:8~11, 신5:12~15, 출31:12~17)
2) 이스라엘멸망의 근본 원인이 안식일을 충실하게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①. 출애굽백성들의 불순종(겔20:10~16) 하고 업신여기고 더럽힘
②.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나라를 건설한 후손들의 불순종(겔20:18~28)
3). 교회시대에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다 이스라엘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4). 이방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이스라엘백성이 되었습니다.(엡2:11~13)
5). 구약시대에 이방인이 이스라엘백성이 되는 길(육적인 할례를 통하여)(출12: 43~49)
6). 신약시대에 이방인이 이스라엘백성이 되는 길(그리스도의 할례를 통하여)(롬2: 28~29)
골2:11~12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마음의 할례)
2,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백성들이 짐승의 표와 싸우는 표이기 때문이다.
1) 출애굽직전에 이스라엘백성들의 이마와 손에 표를 주신 하나님 - 유월절 규례를 주시면서 유월절을 지키는 자는 구원하시고 원수들은 멸하심의 증거(출13:14~16) - 그러나 이 증거 및 표식은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의미 한다(출13:16 태에서 처음 난 모든 수컷들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내 아들 중에 모든 처음 난 자를 다 대속하리니 이것이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가 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 )
*. 출13:1-22에 모세에게 주신 말씀 중 9절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고 말씀하신 내용은 안식일의 징표로 주신 것이 아니다.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징표로 준신 것을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에게 주셨다고 착각하는 무지함에 있다
2) 용(적그리스도)의 세력과 싸울 때 하나님의 백성의 표시로써의 계명(계12:12 ~17)
3)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 표를 주심(계7:1~4)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4) 짐승(적그리스도)도 자신의 표를 이마와 손에 인치려고 함(계13:15~18)
안식일 교파는 일요일 예배드리는 행위를 짐승의표를 받는 행위로 말함
이들은 그 증거를 단7:25~27의 말씀을 들어 교황권이 안식일 예배를 일요 강제 휴무 및 예배로 변경시켰다고 주장함(사단에게 경배하는) - 그러나 그 이전부터 안식일과 일요예배를 병행하여 드린 증거가 성경에 있음
5) 짐승의 표를 받지 말 것을 경고하시는 하나님(계14:9~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
3. 부활과 일요일 예배의 관계
일반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일요일 예배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예수님의 부활과 연관 지으려는 시도가 계속되어 왔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은 매우 귀중한 진리요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되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활한 날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성서적으로 아무런 명분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한 일들은 사건 자체로써 의미를 갖는 것이지 하나님의 계명을 대체할 만한 어떤 명분도 지니고 있지 않는 것이다. 주님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셨다고 하여 그날을 예배일로 정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나 하나님의 말씀의 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발상일 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성만찬 예식(고전11:26)을 통해서 기념하도록 되어있고, 부활의 의미는 침례 예식(벧전3:21)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침례를 받은 뒤로는 세족 예식(요13:10)을 통해서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4. 일요일 예배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 제시하는 성경 절들
1) 제자들이 안식 후 첫 날에 모여 예배를 드리지 않았는가?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20:19
이 성경절의 배경을 보면, 모임의 목적이 예배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여인들이 전한 부활의 사실도 의심한 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 곳에 모여 문을 닫고 숨어있는 장면이다.
2) 사도 바울이 안식 후 첫날에 떡을 뗀 기록이 있지 않은가?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행20:7
이 성경절도 역시 '안식 후 첫날'이라는 보통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떡을 뗐다는 내용도 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해가 지면서 하루가 시작되는 유대식 계산법을 사용했다.(레23:32)
'안식 후 첫날'은 토요일 해가 지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 일행이 드로아에서 한 주일을 머물고 이제 다음날 떠날 예정이었다. 때는 토요일 저녁이었다. 어떤 영어 성경에는 이 시간에 대하여 '토요일 저녁(On Saturday evening)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 날 저녁은 송별회 시간이었고 밤 중 집회가 계속되었으며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다가 창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바울이 살리는 일도 있었다.
초대 교회는 날마다 떡을 떼는 일이 흔했는데(행2:46) 그러므로 안식 후 첫날에 떡을 떼러 모였다는 사실 자체가 일요일 예배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가 될수는 없는 것이다.
3) 고린도전서에 보면 첫 날에 연금을 드린 기록이 있지 않은가?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pay)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고전16:1,2
이 성경 절에서 '연보'라는 말과 '매주일 첫날'이라는 말을 연결시켜 일요일 예배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 사용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우선 여기 '연보'라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이나 헌금과는 구분되는 '구제금'의 일종이었다. 연보는 '수집' 혹은 '모금'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로기아(logia)를 해석한 것이다. 헌금은 헬라어로 '토라(dora, 눅21:1,4)'이며 연금과는 다른 말이다.
이 성경 절은 당시 기근으로 인해 고생하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돕기 위한 구제금 모금에 관하여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제안하는 내용이다. 갈라디아 교회에 제안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매 주일 첫날 일을 해서 번 돈은 개인을 위해서 사용하지 말고 따로 저축해 두었다가 다 함께 모아서 구제금으로 보내자는 것이다.
오히려 주의 첫날 일요일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일하는 날임을 알려주는 명백한 구절인 것이다.
4) 사도 요한이 주일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지 않은가?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계1:10
우선, 신약 성경 어디에도 일요일 예배에 대한 근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시록의 '주의 날'을 주일로 적용하려는 것 자체가 무리한 해석이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때와 거의 동시대에 같은 저자가 기록한 요한복음 어디에도 일요일(주의 첫날)을 '주의 날'로 부른 예가 없다.
그러면 왜 사도 요한은 다른 곳에서 사용한 일이 없는 '주의 날'이라는 표현을 계시록에서 쓰고 있는가?
당시 로마 황제 도미시안은 자신을 신격화하여 황제 예배를 강요하였으며, 이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다. 도미시안은 자기를 '주와 하나님(lord and god)'으로 칭하도록 했다. 그리고 황제가 어떤 도시를 방문하면 그날은 공휴일이 되었으며 동시에 황제 예배일(황제의 날)이 되었다.
요한은 이런 시대적 배경 때문에 이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며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는 날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그날의 주인이라고 선언한 날은 언제인가?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막2:28)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1장 10절의 '주의 날(lord's day)은 오늘날의 주일인 일요일이 아니라 안식일 토요일을 말하는 것이다.
주의날(계1:10)에 대한 오류 들
사도요한은 주의 날 ejn th/' kuriakh/' hJmevrᾳ(엔 테이 퀴리아케-이 헤메라이)“주의 날에, 주께 속한 날에”계시를 받는다.
요한이 계시를 받은날은 오늘날 성도들이 지키는 주일(일요일)이 아니다. 요한은 주의날이라고 말하면서 어느날(hJmevra-day)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날들(hJmevrᾳ-days)이라고 한다. 왜 요한이 많은 날들을 일컬으면서 “주의 날”이라 하였을까 “주의 날들”을 말하는 요한의 의도는 무었일까? 궁금하지 않는가.
만약에 오늘날 말하는 주일이나 안식교도들이 말하는 안식일만 의미한다면 요한은 죄악의 도성 밧모섬에서 이중적 삶을 살수도 있었을 것이고 넓게 보면 예수님은 주일(일요일 혹은 안식일)에 재림한다는 가정을 세울 수도 있다.
말씀에서 말하는 날(hJmevra)은 낮 시간을 말한다, 성경은 성도들을 낮의 아들(고전5:5,8)이라고 하였고 사람이 사는 날 동안을 낮(롬13:12)이며,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을 낮(요9:4)이라 하셨다.
사도요한은 밧모섬의 유배생활동안 하나님 안에 거하였으며 그런 행동을 부끄럼 없이 제자들과 아시아 일곱 교회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여러 핑계를 찾는다,
그러나 지금 사도요한은 말세를 사는 우리들에게 “당신들도 나와 같은 형제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부족함을 채워 주셨드시 당신들의 부족함도 채워주심니다. 그러니 내가 담대하였던 것 같이 당신들도 담대하십시오 당신들이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주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말하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
주의 날은 주일(일요일, 안식일)이 절대 아니다 그러나 주일(안식일)은 주의 날들 중에 한날은 될 수 있다.
또한 성도들은 날에 매여 살아서는 아니 된다, 날들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에 감동되어 계시를 받았다 하였으니 이는 성령안에 있는 날이 주의날이다.
이들은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며 아래의 표를 만들어 홍보한다.
(주로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에서 활용한다)
5. 안식일을 준수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을 여전히 지키고 있었다. 마 24:20: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왜 예수님께서 도망하는 날이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을까? 청중들이 안식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는 마을을 떠나 멀리 여행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따라서 안식일에 환란이 닥치면 도망칠 수가 없게 되니 곤란해진다. 눅 23:56은 제자들이 안식일을 지켰음을 분명히 한 다.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바울도 안식일을 지켰다. 바울은 그의 습관대로 규칙적으로 안식일에 유대인들을 만났다. 행 17: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Bacchiocchi는 로마 교황청 대학에서 박사논문에서 이것은 유대교적 장소와 집회 시간에서부터 철저한 분리가 일어나지 않았기에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행 15:1-29에 언급된 이방인의 율법준수 문제를 논의한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안식일 문제는 거론되지도 않았다. 이것은 심지어 이방교회도 당시에는 안식일을 지켰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면 행 20:7에 나오는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는 도대체 주일이 지켜지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어서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하고 나온다. 즉 이 모임은 Bacchiocchi의 주장대로 바울을 송별하기 위한 특별한 모임이었던 것이다.
고전 16:2에는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하는데 이것이 혹시 주일이 안식일 대신 지켜졌다는 증거일까?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Bacchiocchi의 주장처럼 매 주일 첫날은 단지 재정을 지출하기 전에 효과적으로 저축하게 위한 방안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골 2:16은 어떤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도 안식일 폐지의 증거는 아니다. 유명한 주석시리즈인 WBC 주석시리즈에 실린 골로새서 주석을 쓴 O'Brien에 의하며 골로새에서는 성일들이 "우주의 기초 영들"을 위해 지켜졌으며, 바울은 성일들을 이런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안식일을 다른 신을 위해 사용하는 안식일 남용에 대해 위에 언급한 호세아서의 정신에 의해 경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들에는 안식일을 폐지한 흔적이 없다. 이것은 아직 신약성경의 교회들은 구약과 유대교의 상당히 연속선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6. 안식일은 폐지된 율법인가
1). 율법의 의의
율법을 사람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특별한 자손이 오실 때까지 죄가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서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중보자(중개자)의 손을 빌어 천사들을 시켜 만든 것이다. 갈3:22-24 "성경은 온 세상이 죄에 갇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는 믿음을 통한 약속을 주시기 위한 것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올 믿음의 길을 보여 주실 때까지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율법이 우리의 선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에는 우리가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율법은 복과 저주의 법이며 죄와 사망의 법(로마서8:2)으로 아무도 지킬 수 없는 아주 무거운 법이었으며 그 누구도 구원시킬 수 없는 법이었다.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을 예수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다. 즉,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시면 그 효력이 상실되는 법이다.(엡2:15, 골2:14-16)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고 육체의 복(福)과 화(禍)에 해당된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새 언약을 세우셨다.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히10:16]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2]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롬7:6]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10:9]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히7:18]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4~16]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2:14~16]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3:23~25]
예수께서 성령으로 제정하신 생명의 성령의 법은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를 구원하는 법입니다. (롬8:2)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제정됨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미 폐지된 율법의 낡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로운 법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롬7:6)>
①.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
②.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행7:53]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③.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7:6 ]
④. (갈5:1) 종의 멍에는 율법을 말합니다. 또 사도바울은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고 경고하고 있으며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끓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5:3)
율법의 폐지에 대해서는 로마서, 히브리서, 골로새서. 에베소서등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갈5:1~4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 육체로 모든 율법을 폐지(엡2:14-16, 골2:14-16)하시고 성령의 새로운 법을 세우셨다. (롬8:2, 롬7:6, 히10:16) 예수께서는 율법을 완전히 폐지하시고 율법에 대하여 성령으로 세우신 새로운 두 계명으로 일축하셨다. (마22:37-40) 첫 째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고 둘째 계명은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새계명을 지켜야 한다.
마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⑥. 어떤 분이 십계명은 영원한 법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십계명은 돌판에 새긴 법이었다. 십계명의 폐지에 성경은 잘 설명하고 있다. (고후3:3-9, 히10:16 )
히10: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기 전에는 안식일을 지킨 일이 없었다. 안식일은 율법의 하나로 죄와 사망의 법이었다. (롬8:2) 왜냐하면 안식일을 어기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다.
행15:10~11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따라서 율법의 하나였던 안식일도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주신 이미 폐지된 율법의 하나일 뿐이다.
이것을 이방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분명히 불법이다. (갈2:18)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히 7: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갈 2: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만약 안식일을 지키려면 할례도 받아야 할 것이며 율법의 모든 것을 지켜야 할 것이다. (갈5:3)
안식일교는 이미 폐지된 율법을 주장하려면 날짜변경선(international date line)에 따라 변하는 날짜와 요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재의 웰링턴 지역을 지그재그로 지나가는 날짜변경선(international date line)의 성경적인 근거가 무엇인지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안식일이 이스라엘의 날짜와 시간을 기준으로 결정되는지 아니면 각 지역의 날짜와 시간을 기준으로 결정되는지를 성경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 대해 언급이 없다.
그 이유는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주셨던 지엽적이고 한시적인 법이었기 때문이다. (갈3:19)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한시적으로 주셨던 복과 저주의 법이며 죄와 사망의 법이었던 율법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시고 성령으로 세우신 생명의 성령의 법을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인들에게 동시에 주셨다. (롬8:2, 롬7:6, 히10:16)
우리는 율법의 낡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 (롬7:6)
2). 안식일의 종말
호 2:11은 하나님께서 남용된 안식일을 없애실 것을 말씀한다.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날인 안식일은 "바알들의 날"로 만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예 그 날을 없애시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호 2:15 (한글성경은 2:13) 히브리어 본문은 "예메이 하베알-리-임" 즉 "바알들의 날"을 언급하고 있다. 안식일이 없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의 선물인 휴식보장책, 노예화 방지책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의 실현도구인 안식일이 없어진다는 것은 이제 인간은 하나님을 닮는 존재가 아니라 내버려져서 방향을 읽고 표류하는 존재 즉 포기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노예화되는 것을 방지하는 장치가 없는 사회들, 인간이 하나님을 닮는 장치가 없는 사회들 속에서 많은 현대인들은 불행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모두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을 망각한 인간과 사회가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다.
3). 안식일(安息日) 논쟁
말세가 되면서 개혁교회 목사들이 평생 동안 드리던 일요예배를 토요예배로 변개하면서 일요일 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사단에게 드리는 예배요 짐승의 표를 받는 행위라 주장하며 성도들의 신앙을 흔드는 자들이 있다.
이들 중에는 온 이스라엘교회 목사(필명 광남). 창원 새 하늘교회 김 태수, 성결교회 은퇴목사 한 성호, 또한 교단이 확실치 않는 늦은 비 성령 하나님의 교회 김 동수, , 등이 있다.
이들은 개혁교회에 속한 목사들로서 갑자기 일요예배에서 예배의 날을 토요일로 바꾸어 드리고 있으며 이들은 일요일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 들(안식일 계통의 주장 수용 - 계13:11~18)이라고 주장한다. 이들 외에 토요일 예배를 주장하는 이들 생애의 빛 강병국 목사, 안식일교회,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 등이며 이들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이들은 성경 어디에도 안식일이 폐지되었다는 말이 없다고 주장하며 안식일과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느 개신교(改新敎)회의 목사(牧師)는 기존(旣存)의 주일(主日)을 페하고 안식일(安息日)을 지키자고 주장하는데 그 사람의 주장은 주일(主日)은 성경(聖經)에 없는 것이고 주일(主日)을 지키는 우리 모두가 정신(精神)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성결교회 은퇴목사 한 성호목사라는 사람이 中央日報와 朝鮮日報 그리고 京鄕新聞에 게제 함. 그 사람이 우리 교계(交界)에서 큰 영향력(影響力)이 있는 사람인 줄은 모르나 그 사람의 주장으로는 주일(主日) 학교나 주일예배(主日禮拜) 주일(主日) 성수(聖守)를 하지 말고 구약시대(舊約時代)에 지키던 안식일(安息日)을 지키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전단지 아래 부분에는 안식일(安息日) 교회(敎會)의 광고(廣告)가 실렸다.
이는 그 목사가 안식일 교회(敎會)로 개종(改宗)을 하지 않았거나 거기에 미혹(迷惑) 된 사람일 것이다.
안식일 교회는 영혼을 부인(否認) 한다. 이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靈魂)은 멸(滅)한다고 했고 우리 개신교(改新敎)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 주님께서 그 영혼이 천국(天國)에 이른다고 한다. 마태복음 24장에는 어떤 경우 던지 거기에 미혹(迷惑)되지 말라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다.
성결교회 은퇴목사 한 성호의 주장은 우리의 신앙 시대가 신약(新約)에서 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구약시대(舊約時代)로 돌아가자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와 유대인들이 구별(區別)이 되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것이고 우리 주님의 구속(拘束)의 역사(歷史)도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는 것이다.
두부류 - 안식일 주장, 일요예배 주장
첫째 - 본래(本來) 안식일(安息日)은 토요일(土曜日)이었으며, 더 정확(正確)히 말한다면 금요일(金曜日) 해질 때부터 토요일(土曜日) 해질 때까지였다.
지금도 안식일(安息日) 교회(敎會) 에 다니는 사람들은 안식일(安息日)을 토요일(土曜日)에 지켜야 한다고 주장(主張) 한다.
둘째 -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토요일(土曜日) 안식일(安息日)이 주일(主日)로 날자만 바뀐 것 이라고 주장(主張).
그러나 이런 주장(主張)은 성경적(聖經的) 근거(根據)도 없을 뿐더러 설득력(說得力)도 없다. 안식일(安息日)에 나타난 안식(安息)의 교훈(敎訓)과 정신(精神)은 지금도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결론 -
①. 율법적(律法的)인 의식(意識) 혹은 제도(制度)로 서의 안식일(安息日)은 이제는 없어졌다.
그러면 어떻게 안식일(安息日)이 폐하여지고 그 대신 주일(主日)이 제정(制定)되었을까?
⓵ 안식일(安息日)이 일주일(一週日)의 마지막 날에서 첫째 날로 바뀐 것은 그리스도 자신(自身)의 지정(指定)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變化)는 교회(敎會)의 권위(權威)로 된 것이 아니다. 퍼킨스(Perkins)는 "교회(敎會)는 안식일을 제정(制定)할 권한(權限)이 없다"라고 말했다. 윌리엄 에임스는 "신학(神學)의 정수(整數)"에서 "인간적(人間的)인 권위(權威)가 아니라 신적(神的) 권위(權威)가 일주일(一週日)의 마지막 날을 첫 번째 날로 변화시켰다.
오직 안식일(安息日)의 주인(主人)이신 분, 즉 그리스도만이 안식(安息)의 날을 변화(變化)시킬 수 있다."고 했다. 주(主)님은 "안식일(安息日)의 주인(主人)"(막 2:28)이시다.
그리고 그 날의 주인(主人)이신 분외에 누가 한 날을 지정(指定)할 수 있겠는가?
물론 성경(聖經)에 이것에 관한 직접적(直接的)인 증거(證據)는 없다.
그러나 토마스 왓슨의 다음과 같은 주장(主張)은 설득력(說得力)을 가지고 있다.
"아르노비우스(Arnobius)와 대부분(大部分)의 해석가(解釋家)들은 '主의 날'(啓 1:10)이라고 불려지는 날을 기독교(基督敎)의 안식일(安息日)로 이해(理解)한다. 주님이 떡과 포도주를 제정(制定)하사 속된 용도(用度)에서 특별(特別)하고 성(聖)스러운 용도(用度)로 따로 구별해놓으셨기 때문에 이것이 '주(主)의 만찬(晩餐)'이라고 불려지는 것처럼 주의 날도 주님이 이것을 제정(制定)하사 보통 날들에서 그의 특별(特別) 예배(禮拜)와 봉사(奉仕)를 위해 따로 구별(區別)해놓으셨기 때문에 이것이 주의 날이라 불려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주일의 첫째 날 무덤에서 살아나셨으며, 그 날 그의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셨는데(요 20:19, 2) 이 어거스틴과 아타나시우스가 말하는 바와 같이 그가 유대인의 안식일(安息日)을 주의 날로 옮기셨다는 것을 그들에게 암시(暗示)하시는 것이었다."
(2) 일요일(日曜日)을 주일(主日)로 지키는 것은 사도(使徒)들의 관례(慣例)였다.
행 20:7 "안식(安息)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講論)할 새" 고전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貯蓄)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捐補)를 하지 않게 하라."
이처럼 주일에 말씀을 강론(講論)하는 것과 성찬식(聖餐式)과 헌금(獻金)이 있었다.
이들은 일요일(주일날) 그들은 모여서 주 하나님께 예배(禮拜)를 드렸습니다.
윌리엄 에임스는 "신학(神學)의 정수(整數)"에서 매우 중요(重要)한 지적(指摘)을 했다.
"주일(主日)이 사도적(使徒的) 제정(制定)에 의해 인정(認定)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초(基礎)는 신적(神的)이다. 왜냐하면 사도(使徒)들은 복음(福音)의 교리(敎理)를 말과 문서(文書)로 선언(宣言)할 때처럼 거룩한 행위(行爲)들에 있어서도 성령(聖靈)에 의해 인도(引導)를 받았기 때문이다."
백스터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이 주장(主張)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위임(委任)한 일을 하기 위하여 적절(適切)하게 성령(聖靈)을 부여받은 사람이 성령(聖靈)의 인도(引導)도 없이 그리스도를 경배(敬拜)하기 위한 주일(主日)을 지정(指定)하는 것과 같은 엄청난 일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마찬가지로 신약성경(新約聖經)이 성령(聖靈)의 인도(引導)로 쓰여졌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 모든 장과 절을 불확실한 것으로 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날 예배(禮拜)하기 위해 모였던 사도(使徒)들의 관례를 하나님의 뜻에 부합(附合)하는 결정(決定)으로 인정(認定)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3) 초대교회는 우리가 현재(現在) 기념(記念)하는 주의 날을 존중(尊重)하였다.
이 날을 지키는 것이 초기(初期) 기독교(基督敎)의 하나의 상징(象徵)이었다.
사도(使徒) 요한의 시대(時代)에 살았던 초대(初代)교회(敎會)의 교부(敎父)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누구든지 주일(主日)의 첫째 날 곧 주(主)의 날을 거룩히 지킬지어다." 라고 말하였다.
이 날은 교회에 의해서 1,600년 이상이나 지켜져 왔다. 웰즈(Wells)는 "안식일(安息日) 엄수(嚴守)의 실제(實題)"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교회(敎會)에서는 오랫동안 초기(初期)의 제도(制度)와 명령(命令)에 대해 논쟁(論爭)하느라고 암흑(暗黑)에 쌓인 채 분열(分裂)을 일삼아 왔다. 그러나 주의 날에 대해서만은 교회(敎會)가 항상(恒常) 침묵(沈?)을 지켰던 것으로 볼 때 주의 날의 신한 권위를 확인(確認)할 수 있다.
주의 날에 대해서 교회가 그처럼 침묵(沈?)을 지켰던 까닭은 감히 하나님께서 세운 제도(制度)의 기반(基盤)을 무너뜨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4) 안식일(安息日)은 구약(舊約)의 율법(律法)이며 그림자이기 때문에 신약시대(新約時代)에는 폐하여졌다.
구약시대(舊約時代) 에서 아무리 중요(重要)한 율법(律法)이라도 신약(新約)에 와서 폐한 것이라면 그것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안식일(安息日) 문제(問題)가 그렇다.
구약(舊約)에서는 중요(重要)하게 지켜졌지만 신약(新約)에서는 폐한 것이기 때문에 안식일(安息日) 준수(遵守)는 더 이상 우리의 의무(義務)가 아니다.
신약시대(新約時代)에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즉 성, 속의 구별(區別)이 없어졌다.
(엡 2:11∼22). 구약 시대에는 성·속을 구분하는 여러 가지 법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과 이방인, 레위인과 일반인(一般人), 거룩한 곳, 부정(不正)하고 정한 것, 거룩한 날 등의 규례(規例)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성·속의 구별이 모두 없어졌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런 것에 얽매일 필요(必要)가 없다.
①. 신약 시대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어졌다(엡 2:11∼17). 구약(舊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異邦人)의 구별(區別)이 있었다.
이 법은 엄격(嚴格)하여 이방인(異邦人)과의 결혼(結婚)이나 교제(交際)를 금하고 이방인(異邦人)은 기업(企業)을 얻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로 말미암아 이 구별(區別)이 폐하여졌다.
"원수(怨讐)된 것 곧 의문(疑問)에 속한 계명(誡命)의 율법(律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和平)하게 하시고...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5, 1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自主者)나 남자(男子)나 여자(女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이처럼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분이 없다.
②. 신약시대(新約時代)에는 레위인과 일반인(一般人)의 구별(區別)이 없어졌다(벧전 2:9).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안에서도 레위인과 일반(一般)백성(百姓)으로 구분(區分)되어 있었고, 제사장은 언제나 레위지파, 아론의 자손(子孫)들이라야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新約)에서는 이러한 구별(區別)이 없어졌고 거듭난 성도(聖徒)는 누구나 다 "왕(王) 같은 제사장(祭司長)"이다(벧전 2:5∼9).
③. 신약시대(新約時代)에는 거룩한 곳, 즉 성전(聖典)의 개념(槪念)이 없어졌다.(신12:5, 11, 14 마 18:20 고전 3:16 엡 2:21). 구약에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곳(성전(聖殿))이 따로 있어서 그곳에서만 제사(祭祀)를 드릴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다(신 12:13). 만약 지금도 거룩한 곳의 구별(區別)이 있다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가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라고 말씀하셨다. 또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이 폐하여졌기 때문이다.
④. 신약 시대에는 부정하고 정한 것에 대한 구별이 없어졌다(겔 36:17 민 19:9 레5:3 히 9:13 롬 14:14). 구약에는 부정하고 정한 것의 규례들이 있어서 죽은 시체나 무덤이 부정하고, 경도하는 여인이 부정하고, 출산한 산모가 부정하고, 짐승이나 물고기 등도 부정하고 정결한 것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부정한 것은 먹거나 만질 수 없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부정과 정결의 규례가 다 사라졌다.
만약 지금도 부정과 정결의 규례가 있다면 경도하는 여인은 부정하니 교회에 나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구분은 사라졌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라고 선언(宣言)한 것이다.
⑤. 신약 시대에는 거룩한 날과 보통 날의 구별(區別)이 없어졌다(골 2:16 롬 14:6 갈 4:10∼11). 구약에는 거룩한 날(절기, 월삭, 안식일 등)과 보통 날을 구별했습니다. 이러한 날 중에 안식일에 대한 구별은 철저했다.
만일 안식일을 범하게 되면 돌로 쳐 죽이라는 엄격한 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이러한 구별이 없어졌다.
거룩하게 구별했던 안식일 구별도 다른 성·속의 구별이 폐한 것처럼 폐해졌다. 그래서 바울은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롬 14:5)라고 말한 것이다.
안식일이 어떻게 폐해졌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모델 하우스는 아파트 분양이 끝난 후에는 없애버린다. 마치 이와 같이 실체가 이루어지면 모형과 그림자는 폐해지게 되어 있다. 안식일 역시 같은 원리에서 폐해졌다(히 4:1∼6 마 11:28).
안식일은 실체가 아니다. 안식일은 그림자다. "...
절기나 월삭(越朔)이나 안식일(安息日)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貶論)하지 못하게 하리라
이것들은 장래(將來)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 2:16-17) 이처럼 안식일(安息日)은 그림자인데, 참 안식(安息)의 실체(實體)이신 예수 그리스도(마11:28)의 그림자다. 그러므로 실체인 예수님이 오시면 안식일(安息日)은 폐(廢)해질 수밖에 없다.
이동원 목사(牧師)님은 많은 사람들이 "왜 안식일(安息日)을 토요일(土曜日)에 지키지 않는가?"라는 질문(質問)을 하는데, 그런 질문(質問)은 "오늘날 우리는 왜 양을 제물(祭物)로 잡아서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가?"라는 질문(質問)과 동일(同一)한 종류(種類)의 어처구니없는 질문(質問)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세상(世上)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심으로 속죄(贖罪) 제도(制度)의 의미(意味)가 성취(成就)된 것처럼, 안식일(安息日)도 안식일(安息日)의 주인(主人)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심으로 안식일(安息日)의 의미(意味)를 완성(完成)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오라"는 말은 나를 믿으라는 말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4:3절에는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安息)에 들어가는 도다"(히 4:3)라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미 안식(安息)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본래(本來) 인류(人類)가 안식(安息)을 잃어버린 이유(理由)는 죄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人間)의 죄 문제를 온전히 해결(解決)하셨다.
이제는 누구든지 회개(悔改)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죄 짐에서 벗어나 참된 안식(安息)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안식은 이미 주어졌다.
따라서 안식(安息)의 그림자였던 안식일(安息日) 역시 이미 폐해진 것이다.
"안식일(安息日)교회(敎會) 대논쟁(論爭)"이라는 책에서 최삼경 목사와 진용식 목사(牧師)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약(新約)성경(聖經)에 안식일(安息日)을 지키라고 명령(命令)한 구절(句節)은 한 곳도 없다...
왜 신약(新約)에 안식일(安息日)을 지키라고 한 말씀이 한 곳도 없는가? 또 지켰다는 기록도 없는가?... 구약(舊約) 성경(星鏡)에 그렇게도 많이 안식일(安息日) 준수(遵守)를 강조(强調)하다가 갑자기 신약(新約) 성경(聖經)에 와서 안식일(安息日) 명령(命令)이 전혀 없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안식일(安息日)이 폐했다는 강력(强力)한 증거(證據)인 것이다. 구약 성경에 할례가 강조(强調)되다가 신약(新約) 성경(聖經)에 전혀 그 명령(命令)이 없는 것은 할례 제도(制度)가 폐했기 때문인 것처럼 안식일(安息日)도 폐한 것이다."
그럼 안식일(安息日)이 폐해졌으니 이제는 칠일을 모두 일해도 되는가?
모일 필요(必要)도 없고 마음대로 살아도 됩니까? 아니다. 하나님은 안식일(安息日) 대신 다른 날을 준비하셨다. 그 날은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復活)하심으로 죄와 사망(死亡)을 정복(征服)하고 인간(人間)에게 참된 안식(安息)을 주신 오늘날 우리가 성일(聖日)로 지키는 주일(主日)이다.
"건축자(建築者)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그리스도의 죽음에서의 부활)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 118:22-24)
복음(福音)송 중에 "이 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이 날은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이 날은 이 날은 주의 날일세"라는 노래가 있다.
이것은 안식일이 아니라 바로 주일을 노래한 것이다. 그 증거로 이 복음송의 출처(出處)인 시편 118편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정하신 날"은 건축자(建築者)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그 날을 가리킨다!
물론 그 날은 천지창조(天地創造) 후 하루를 쉬신 그 안식일(安息日)이 아니다.
그러면 그 날은 언제일까? 행 4:10-11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이로 보건대 그 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復活)하신 날이다. 그러므로 주일이 바로 여호와께서 정하신 그 날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區別)하고 성일(聖日)로 지키는 것이다.
(5)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날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생각나게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는 창조(創造)를 기념(記念)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안식일(安息日)을 폐하고 주일(主日)을 제정하셨을까? 그것은 창조(創造)보다 더 영광(榮光)스러운 사역(使役), 곧 구속(拘束)을 기념(記念)하기 위해서다.
창조의 사역도 위대하지만, 구속(拘俗)의 사역(使役)은 훨씬 더 위대(偉大)하다.
큰 지혜가 우리를 지으시는 데 나타났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智慧)가 우리의 구원(救援)에 나타났다.
큰 능력(能力)이 우리를 무에서 이끌어내시는데 나타났다. 그러나 더 큰 능력이 우리가 무엇보다도 더 악할 때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 나타났다. 창조보다도 구속이 더 많은 값이 든다. 창조에서는 한마디 말씀하시는 것뿐이었으나(시 148:5), 구속에서는 피 흘림이 있었다!
(벧전 1:19). 성경에 의하면 창조는 하나님의 손가락의 사역이었고(시 8:3), 구속은 그의 팔의 사역이다(눅 1:51). 창조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주셨다.
그러나 구속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셨다. 창조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상의 낙원에 대한 권리를 가졌으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천국의 후사가 되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모로 보나 창조보다는 구속이 더 위대하고 놀랍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속을 기념하시기 위해 주일을 거룩한 날로 제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윌리엄 에임스는 "신학의 정수"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자신의 사역을 중지하시고 그가 안식한 날을 축복하고 거룩하게 하셨듯이, 그리스도가 자신의 일에서 안식하신 바로 그 날이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當然)하다"고 썼다.
참으로 주일은 안식일보다 배나 더 기념할만한 가치가 있는 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主日)을 성일(聖日)로 지켜야 한다.
결론(結論)을 말씀드린다. 세익스피어의 "맥베드"를 보게 되면 왕을 살해한 맥베드가 독백으로 "이제 나는 잠을 자지 못한다. 맥베드여, 너는 잠을 죽였다. 아! 천진난만한 잠이여, 고민이 엉킨 실타래를 풀어 주던 잠, 피곤을 풀주던 잠이여"라고 영혼의 창백한 절규한다. 마치 이 맥베드와 같이 인류는 죄를 범하므로 말미암아 안식(安息)을 잃어버렸다.
그러면 잃어버린 안식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안식일의 그림자가 아니라 안식일(安息日)의 실체(實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다.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수천 년 째 토요일 안식일(安息日)을 지켜오고 있지만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림자인 안식일만 취하고 실체(實體)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拒絶)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는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일을 안식일로 지킨다.
여러분의 가슴속에 안식(安息)이 있는가? 안식일(安息日)을 지키면서 안식(安息)을 누리지 못하는 것, 저는 이것이야말로 비극(悲劇)이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히4:3절)에는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安息)에 들어가는 도다"(히 4:3)라고 기록(紀錄)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安息)을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무거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편해야한다.
왜냐하면 무거운 마음은 짐을 지고 있는 마 음이고 편한 마음은 쉬고 있는 마음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아주 특별한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겠다.
히 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계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紫禁)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聖靈)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愁苦)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이 말씀들에 의하면 안식할 때가 성도들에게 남아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천국이다.
계 14:9-13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敬拜)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葡萄酒)를 마시리니 그 진노(震怒)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葡萄酒)라. 거룩한 천사(天使)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硫黃)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苦難)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偶像)에게 경배(敬拜)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聖徒)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誡命)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音聲)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聖靈)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이 말씀에 의하면 지옥(地獄)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곳이고 천국(天國)은 수고(愁苦)를 그치고 쉬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지상(地上)에서부터 천국(天國)생활(生活)을 하기를 원하신다.
천국(天國)은 어떤 곳인가? 천국(天國)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천국(天國)은 죄가 없고 가난이 없고 질병(疾病)이 없는 곳이다. 바로 이런 삶을 하나님은 이 땅에서 모든 신자(信者)들이 살기를 원하신다(요삼 2).
그리고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비결(秘訣)이 바로 믿음이요 믿음은 죄를 이긴다. 믿음은 가난을 이긴다. 그리고 믿음은 질병(疾病)을 이긴다.
그러므로 담대한 고백을 통해 믿음을 활성화(活性化)시키고, 믿음을 얻되 풍성(?盛)히 얻게 될 것이다.
4). 구약에서 말하는 영원이란 세례요한까지다.
①. 세례요한은 성경에서 말하는 영원의 변환점이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 마11:13)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성경 여러 곳에 “영원한 법, 영원한 약속, 영원한 증표” 등등의 표현을 함으로 이 약속이 세상끝날까지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것처럼 표현되고 있다.
-- 구약성경을 통하여 영원토록 변치않는 약속 --
①. 무지개 언약 - 노아와 그의 후손들에게 한 약속(창9:12, 사54:7-10)
②. 할례의 약속 - 아브라함과 약속(창17:9-14, 출4:18-26)
③. 여러 민족의 아버지 - 아브라함과 약속(창17:7)
④. 왕위 계승의 약속 - 다윗(삼하23:5, 대하13:5)
⑤. 안식일 언약 -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약속(출31:16)
⑥. 소금언약 - 제사에 관한(민18:19)
⑦. 영원한 제사장의 약속 - 레위족속과 소금언약(민25:12-13)
⑧. 영원히 전복되거나 뽑히지 않는 곳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의 새 언약(렘31:28.40)
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 떠나지 않음을 약속(렘32:40)
⑩. 이스라엘은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 - 하나님이 떠나지 않음(신29:11-15)
⑪. 용서의 약속 - (겔16:63)
⑫. 유월절 약속 -절기의 규례(출12:14)
-- 신약의 약속 --
①. 영원한 피의 약속 - 용서의 약속(히13:20)
②. 십자가의 구속 - 죄의 용서(히5:9, 9:12)
구약 곧 율법과 선지자가 말하는 영원한 약속의 끝은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칠 때, 그리고 나서 목베임을 당한 때까지이다.
이후 예수님이 복음을 증거 하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칠 때부터는 새로운 약속이 이행되는 시작점이요 천국을 소유하는 때이며 새로운 영원으로 이르는 때인 것이다.
안식일 법의 유효성도 세례요한까지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까지 이기에 이후 제사법이 폐지되고 제사장법이 폐지된 것이다.
이후부터 누구든지 예수님만 영접하면 비록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천국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할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이 약속되고 다윗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왕권이 약속되는 것 바로 세례요한 때에 폐지된 율법과 선지자 법에 의해서다.
이로 보건데 구약시대 안식일을 괴로운 날로 지키지 않아도 양을 잡아 희생제를 드리지 않아도 아론의 반차를 쫒아 제사장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읽으며 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율법이 폐지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 할 수 없었고 만약 낭독 하였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가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가 폐지됨으로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수 있었고 낭독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약의 성도들인 우리들이 율법을 따라 안식일에 자신을 괴롭게 아니하고, 세상과 단절하지 아니하고, 고난의 떡을 먹지 아니하고, 돌에 맞아 죽지 아니 할 수 있는 은혜는 오로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어떤 분이 “십계명은 영원한 법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십계명은 돌판에 새긴 법이었다. 십계명의 폐지에 성경은 잘 설명하고 있다. (고후3:3-9, 히10:16 )
위의 나열된 영원한 법들 중에 구약에 해당되는 내용들은 세례요한 때까지다.
그 후 예수님의 시간부터는 구약의 약속들은 필요 없는 약속들이 된 것이다.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안식일을 핑계하여 안식일 규례를 따라 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소금 언약을 따르는 제사장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된 영원한 제사장이요 왕인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천국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로 인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율법을 버렸는데 어떤이들은 다시 의문의 율법으로 돌아가고 있다.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에 속한 양들을 초등학문으로 끌고 간다.
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의문의 법과 바꾸려 하는지 안타깝다.
5). 주일날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신학은 어디서 나왔을까?
일요일이 공휴일로 선포된 이후에도 기원후 6세기까지 일요일에 일하는 것을 금지하려는 시도는 드물었다(Bauckam, <Post-Apostolic Church>, p. 286). 기원후 1200년경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5-74)는 안식일 엄수주의(Sabbatarianism) 교리를 확립한다. 그는 주일을 기독교의 안식일이라 선포했다.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므로 모든 일을 금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안식일에 관한 제4계명은 폐지될 수 있는 의식법이 아니라 신약의 백성에게도 유효한 하나님의 도덕법이라 주장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즉 날짜만 바뀐 것이라 했다(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 5 vols,; [repr.: New York: Benzier Brothers, 1948], 1a 2ae 100.).
①. 아퀴나스의 오류
아퀴나스의 율법에 대한 분류는 율법의 절기와 의식, 제사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대치되었고 이스라엘과 관련된 율법의 시민법 역시 민족을 넘어선 복음으로 효력이 다하였고, 오직 도덕법만이 남는다는 이론이다. 이 중 안식일의 쉼이 도덕법에 속한다는 것이기에 오늘날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을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으로 분류하는 아퀴나스의 전통은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국가와 종교가 구분되지 않았던 고대 유대인들에게 종교법과 시민법, 혹은 도덕법의 분류는 불가능하다. 그들에게 이런 구분 자체는 헬라적 이원론의 산물에 불과하다. 신정 통치를 추구한 이스라엘은 종교국가로 율법은 국가법이자 종교법이며 도덕법이다. 그들에게 제사제도는 곧 시민법이요 도덕법이다. 또한, 도덕은 하나님에 대한 제사이다. 율법을 통합적으로 보는 그들에겐 절기, 의식, 제사법을 다른 법에서 구분할 방법이 없다.
설사 아퀴나스의 분류를 인정한다 해도 율법 조항 중엔 이렇게 분류하기 모호한 것들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희년은 의식법으로 보기도 시민법으로 보기도 모호하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밭의 모퉁이를 남겨 두라는 것은 시민법일까 도덕법일까? 십일조는 그럼 도덕법이라 오늘날 강조하는 것일까? 율법은 하나로 되어 있지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 해석할 수 없다. 안식법도 쪼개서 결코 도덕(쉼의 논리)법과 의식법(요일의 변경) 부분으로 나눌 수 없다.
②. 종교개혁자들의 반기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안식일 엄수주의 신학에 반기를 들었다. 칼뱅은 주일을 기독교의 안식일로 선포한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유대교의 미신을 기독교에 접목한 거짓 선지자로 몰아세웠다. 안식일 엄수주의적인 주일성수에 대한 칼뱅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이처럼 거짓 선지자들의 덧없는 이야기들은 사라진다. 그들은 지난 수백 년에 걸쳐 사람들을 유대교의 견해로 감염시켰다. 그들은 이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부분(그들이 하는 말로, 일곱째 날의 '제정')만이 폐지되었고, 도덕적 부분(즉, 으레 가운데서 하루를 정하는 것)은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의미에서 날을 변경한 것일 뿐이고, 그날을 거룩하다고 하는 생각은 여전하다…. 이러한 자신들의 교회 규정들을 고수하는 자들의 미신은 유대인들보다 세 배나 더 유치하고 육욕적인 안식일 엄수주의적 미신이다(Calvin, Institute, 2, 8, 34)
<기독교 강요> 2, 8, 28~34에서 칼뱅은 안식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폐지되었음을 강조한다. 칼뱅은 여기서 예배가 꼭 일요일(주일)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주일 예배는 일요일이 쉬는 날이기에 다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편의성 때문이다. 성취된 안식일에 대한 그의 견해는 기독교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린다.”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The Heidelberg Catechism, 1563). 따로 주일을 인식일로 지킬 필요란 없다.
루터는 칼뱅보다 더욱 비판적이다. 루터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매주 '쉼의 날'이나 심지어는 '예배일'까지도 종교적 의무로써 지켜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다(the Augsburg Confession, 1530).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모범을 누리고, 따라서 안식일이나 혹은 다른 한 날을 지키는 것이 필수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을 즐거워할 일이다."
6). 예수님과 율법사(서기관)와의 대화에서 말씀하시는 안식일
예수님과 부자로 표현된 율법사(서기관)의 영생에 관한 대화(마19:16-30, 막12:28-34, 눅10:25-37)를 살펴보면 예수님은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마19:18-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29-31)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눅10:25-28) .... 하나님을 유일하신 주이심과(막12:29)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증거한다.
예수님과 율법사와의 대화를 보면 예수님과 율법사는 안식일준수가 영생과는 관계가 없슴을 말하고 있다. 만약에 안식일 준수가 영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 율법사에게 답변하기를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안식일을 준수해야 하며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한다.”라고 수정하여 말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 준수와 영생과는 밀접하며 큰 관계성이 없기에 율법사(서기관)이 대답한 내용을 사실로 인정하여 주신 것이다.
특히 마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계명(영생)에 관하여 질문하실 때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막12:33)라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을 살펴보면 서기관은 예수님께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안식일에 제사장이 성전에서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대답한다.
안식일의 중요성을 너무나도 잘 아는 예수님과 서기관이 안식일은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이 중요하다고 증언한다.
그의 대답에서 안식일 준수가 영생을 얻는 것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아니함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안식일을 준수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세상에게 하나님은 유일한 구주시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이다.
7). 안식일과 천국에서 큰 자의 조건
성경에 “율법이나 선지자의 말을 듣고 행하는 것 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증언하신다.
안식일에 바리세인의 집으로 떡을 떼러 들어가는 예수님을 율법을 범한자로 여겨 죽이려는 당시의 유대인들(눅14:1),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면서 안식일 및 율법을 범하는 세리와 창기를 개만도 못한자로 취급하는(눅18:1-43)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천국은 안식일을 철저히 준수하며 사는 바리세인의 것이 아니라 세리와 같이 진심으로 회개하는 이들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안식일을 지킴이 하나님께로부터 온자라는 선민의식이 있는 유대인들 앞에서 죄인으로 정죄 받는 소경의 눈을 뜨도록 만드심으로.(요9:16) 용서와 영생은 선민의식이나 안식일 준수로 얻는 것이 아님을 증거 하신다.
천국에서 큰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이지 안식일 준수를 강요하며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짐승표를 받는 자 이거나 받을 수밖에 없는자로 폄하하는 무리들이 아니다.
이같이 안식일 준수를 고집하는 자는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지키길 주저하지 않는자니 이들이 천국에 간다면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들이 될 것이다.
7. 결론
1).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골 2:16~17) - 안식일 계명은 그리스도로 인해 나타날 영원한 안식에 관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2). 안식일을 지킴은 초등학문(갈4:9~11) - 사도바울은 안식일은 복음과 대치된 '율법의 행위'이며 부정적으로 반대하는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바울은 유대의 율법 교사의 요구를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복음을 부인하고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 종노릇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3).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허락된 법(롬 14:1~12) - 로마서에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아직 율법의 행위에 대하여 자유를 얻지 못한 오직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해서만 허락된다.
4). 혼합주의로 돌아가는 것(골 2:16~17) - 이는 본질적으로 이전 세대에 속한 것이고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더는 구속력이 없다. 안식일 계명은 그리스도로 인해 나타날 영원한 안식에 관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5). 안식일은 연장된 법이 아니다(히 4:1~11)
6). 복음에 응답하여 구원에 들어가는 것(히4:2) -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낸 목적이었다. 히브리서 저자에게 창조의 일곱 번째 날에 하나님의 쉬신 사실, 즉 안식일의 의미는 마지막 때 주어질 참된 안식(히3~4, 10절)은 '하나님나라' 혹은 요한복음의 '생명'과 같은 뜻이다. 신약에서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참된 안식이 제공되는 종말론적인 구속으로 성취된다. 결코, 안식일 율법이 신약에서 날짜만 바뀌어 연장된 것은 아니다(히 4:1~11). 히브리서는 3:7~4:11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다루고 있다.
7). 마태복음의 안식일은 주님을 만나 안식을 성취하고 완성하는 날! - 예수를 율법의 위에 있으신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배하는 주님으로 소개한다(눅 6:1~11, 막 2:23~28).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내는 핵심 구절은 마태복음 12:1~14(병행 구절 눅 13:10~17; 14:1~6; 요 5:1~8)이다
8). 복음의 완성은 안식일의 완성 - 그렇다면 안식일은 완전히 폐지된 것인가? 아니다! 예수는 안식일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성취하고 완성하러 오셨다. 구원으로 성취되고 그 원래 의도했던 정신은 복음으로 완성되었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어 구원의 안식에 거하면 안식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된다. 이후 기독교인에게는 영적인 차원에서 날마다 안식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육체적 안식은 필요하다. 육체의 완전한 구원은 장래의 것이기에(고전 15:51~54; 빌 3:21),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일곱째 날의 안식이란 창세기의 내용은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나만의 쉼이 아니라 모든 고용인에게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쉼을 제공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구약의 안식일 율법에는 오늘날도 배워야 할 사회 복지적 정신이 있다.
*. 정확하게 말하면 주일만 거룩한 날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날을 거룩한 날로 지켜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특별한 날을 지키는 것을 금한 의도이다.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어찌 주일 오전 예배는 중요하고 오후 예배나 평일 날 드리는 예배는 덜 중요하단 말인가? 모든 날이 소중한 것같이 모든 예배가 중요하다. 특히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며 율법의 무거운 짐에서 우리를 구해 주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며 구원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 마땅하다.
*. 기독교인이 주일날 할 수 없는 것은 다른 날에 해서는 안 된다. 다른 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주일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주일을 율법적으로 사업이나 운동, 오락을 금하는 날로 여겨서도 안 되지만 경건한 예배와 모임의 중요성을 위해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한다. 예배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명령이다. 주일은 특별하고 소중한 날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일뿐만 아니라 다른 날들도 다 특별하고 소중하다.
그러나 안식일 혹은 주일 엄수주의를 떠날 때 또 다른 위험도 따른다. 율법의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는 것이다. 주말의 여가나 사회적 활동을 위해 주일의 참된 의미를 무시하거나 간과한다면 이는 율법주의만큼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며 공휴일이기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기에 적합한 날이다. 주일은 예배를 위한 기독교의 중요한 전통이다. 예배를 온전히 드릴 목적으로 그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명령이라 할 수는 없어도 매우 바람직한 현실적인 권장 사항이다. 또한 창세기 2장 2절을 모델로 하여 일주일에 최소 하루 정도 육체적으로도 쉬는 것은 바람직하다. 마침 공휴일인 주일날예배를 위해 모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좋은 전통이다.
*. 신약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명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과 같은 특정한 날을 지키는 것을 금지한다(골 2:14, 15~16).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안식일 율법은 그리스도의 참되고 영원한 안식에 대한 그림자였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성취/완성되었다. 구원의 안식을 누리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미덥지 않은 율법 준수는 이제 피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종하는 신약의 교회는 안식일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마 11:28). 우리는 구약과 동일한 방법으로 안식일을 지킬 수도 없고 지킬 의무도 없다. 종교개혁자들도 안식일 엄수주의가 성경에 근거할 수 없는 가르침임을 간파하고 다시 초대교회의 성경적 신학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였다. 주일은 안식일의 의도가 아닌 거룩한 예배를 위한 모임 날로 지켜야 한다.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주간의 첫날로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은혜의 날인 주일날 자발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렸다(디다케 14:1 참조 고전 16:2).
*. 주일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주일은 율법적인 의무가 아니라 기쁨의 잔치에 초대이다. 주님을 위한 예배를 억지로 드리거나 자주 빠진다면 문제가 있는 그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예배 모임을 위해 명령을 받았다.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히 10:25)."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고후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여기서 의문은 율법에 해당하고, 영은 그리스도에 해당한다.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는, 사실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지만, 인간이 죄인이 때문에 율법과 그리스도가 대립이 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에게 쉽게 다가오고, 그리스도에게는 거리를 두는 것이다.
(고전 2:8~12)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 십자가와 성령 - 하나님과 인간이 접촉점이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외부적으로는 십자가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증거는 성령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 십자가가 하나님과 인간을 떼어놓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누구인지,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도무지 함께 할 수가 없음을 말이다. 그리고 성령은 이 떼어놓음을 영원히 떼어놓는 것이다.
(갈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우리는 ‘율법도 지키고, 예수님도 믿고’ 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의로운가를 판정을 내리려고 하시기 때문인 것이다.
(갈 2:16~17)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롬 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롬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 하나만을 바라본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만 믿으면, 그것이 우리에게 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나도 의로운 것이 되어 버리지 아니하면,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인가? 선택한 자가 엉망이라고 취소하는 그런 예수님은 없다는 것이다. 강도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는 것이다. 죄인을 용서해 준다고 욕을 듣는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인 것이다. 십자가의 피는 괜히 흘리신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 초대교회는 주일을 신약의 안식일로 바꾸지 않았다.
초대교회에서 주일은 안식의 날이 아니라 예배의 날로 정착되었다. 그들은 언제 예배를 드렸을까? 그들은 일을 마치고 주의 만찬을 포함하는 저녁 예배를 주로 드렸다. 기독교가 탄생하고 2000여 년이 지나기까지도 주일은 기독교인들에게 일하는 날이었다. 주일날 사업을 접고 직장을 가지 않고 쉬는 날로 생각한 기독교인은 있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공휴일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초대교회에 주일은 쉬는 날이 아니라 주중에 육체적으로는 가장 '힘든 날'이었다. 일은 일대로 하고 예배는 예배대로 드렸기 때문이다.
부록
*. 로마 카톨릭의 주장은 일요일 예배를 자신들이 제정한 날이기에 개혁교회는 이날을 지킬 권한이 없다는 미련한 주장을 한다.
이들의 주장을 살펴보자면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성경에 대한 최소한의 종교적 지식이 없음을 자신들 스스로 자인함을 알게 된다.
신앙의 무지함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단순하게 그들은 로마 카톨릭의 교황청에서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마치 꼭두각시 모양의 신앙적 종교적 삶을 살고 있음을 그들의 이런 항변에서 어리석은 모습을 본다.
아래는 그들의 일요일 준수에 대한 자가당착적인 주장을 나타낸 글이다
읽고 참고하시기 바란다.
1, "가톨릭 미러" 지의 첫 번째 논설, 1893년 9월 2일자
천주교회가 말하는 기독교의 안식일 (Ⅰ부)
“기독교의 안식일은 천주교회가 교회의 권위로 만들어낸 소산이다.”
우리가 개신교회가 지키는 안식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지난주 “호소와 항의”라는 제목으로 국제종교자유협회가 발행한 21쪽의 소책자를 접수하고부터이다. 그 책자의 내용은 미합중국 의회와 대법원이 일요일에는 세계박람회를 개장하지 않기로 결의함으로써 국민의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침범했다고 하는 신랄한 논평과 비난을 담고 있었다.
거의 대다수의 개신교회들은 그들이 출현한 16세기 이래 성경을 그들의 유일무오의 스승으로 소중히 받들지만 그 행위로는, 유대인들의 오랜 관습인 안식일(토요일) 준수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경배하는 날로 정하신 그날을 거부하고 성서에 그 목적을 위해 단 한 번도 언급된 일이 없는 날(일요일)을 지키는 명백한 모순을 범해 오고 있다.
일요일 예배를 철저하게 준수할 것을 강조하지 않는 개신교회의 강단이 어디 있는가? 얼마 전에 있었던 세계 박람회를 일요일에도 개최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감정적인 항의를 했던 사실과 주의 날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백만이 서명하여 제출한 수천 장에 달하는 진정서를 누가 잊을 것인가? 진정 그러한 흥분과 비난은 그것에 걸맞는 정당한 근거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 박람회 현장에 여러 개신교 단체들을 위한 전시장 배정이 끝난 후, 대법원이 일요일 개장에 관해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는 결정이 알려지자 장로교회 형제들이 노출했던 그 양심적인 분노를 누가 잊을 것인가? 신문보도에 의하면 그들은 배정된 장소의 사용 또는 개장을 단호하게 거부했으며 그들의 엄격한 원칙에 따라 물품 반출 권리를 요구했다. 이것은 신성을 모독하고 안식일을 범하는 전시장과는 일체의 관계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네 차례에 걸쳐서 안식일 문제에 대한 천주교회의 입장을 발표하는 우리의 목적은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한 조명을 통해 (만일 개신교 강단에서 안식일 문제가 제기된다면, 개신교단은 방향을 잃고 목사들은 그들이 즐기는 단단한 “치즈”를 빼앗기는 셈이 되겠기에) 독자들이 그 문제의 모든 국면을 깊이 이해하고 분명한 결론을 스스로 얻게 하려는 데 있다.
기독교계는 원칙적으로 주일 중 첫날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 문제로 연합되어 있다.
유대인들과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에 흩어져 살면서 주일 중 마지막 날인 일곱째 날을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일로 지키고 있다.
유대인들과 소수의 특정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성경의 권위에 의해 그날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날임을 주장하며, 한결같이 토요일을 엄격히 지킬 것을 가르친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의 권위만 인정하지만 소수의 특정 그리스도인들은 개신교회인들이기 때문에 신약 성경의 권위도 동일한 수준으로 인정한다. 즉 신약도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믿는 것이다. 그들은 신구약 성경이 서로 일치하는 것으로 믿으며, 구세주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 토요일 이외의 다른 어떤 날도 지키신 일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사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발견했으며, 사도행전, 편지서, 및 요한계시록에 안식일(토요일) 제도가 취소된 근거가 전혀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소수의 특정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믿는 바를 구약 성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데, 특히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약 성경에서도 토요일 - 안식일을 확인하며 구세주와 그의 사도들이 거의 1세기 동안이나 생애와 실천으로 가르쳤음을 말해주는 성경의 기록위에 신앙의 토대를 두고 있다.
유대인들과 소수의 특정 그리스도인들은 개신교회의 세계적인 교세에 비교하여 볼 때 매우 적다. 그러나 문제는 숫자가 아니고 진리성 여부, 사실성 여부, 정당성 여부이가 때문에 엄격히 공정을 기하기 위해 냉정하고 편견 없는 조가를 해 보지도 않고 이 소규모의 성서적 안식일 준수자들을 정죄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개신교계는 그들이 처음 생겨나던 16세기 이래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에 있어서 천주교회와 철저히 같이해 왔다. 이처럼 정서와 관습이 300년이 넘도록 일치해 온 근본을 따져 보는 일은 이 문제에 관한 개신교측의 입장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만일 유대인들이나 소수의 특정 그리스도인들이 제시하는 변론이 대다수 개신교회들이 반박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만일 양편 모두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는 성경에 호소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회들은 지금까지 일요일을 엄수해야 한다고 힘차게 주장하던 것과는 정반대로 그들이 배도한 교회로 지목하던 천주교회의 교리와 행습을 3세기가 넘도록 가르치고 실행해 왔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서적으로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이러한 잘못의 심각성을 더욱 고조시키는 것은 이 문제가 하나님께서 인간 가족에게 주신 가장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명령 중의 하나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하신 말씀(네째 계명)에 직접적으로 위배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절대다수의 개신교인들은 어느 한 사람도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들이 최고의 권위라고 주장하는 성경보다 “배도한 천주교회”의 가르침을 선호하여 따르고 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결코 일요일 예배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양쪽 모두 성경을 유일하고 최고의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명하신 날이 토요일인가 일요일인가를 성경으로 하여금 판단을 내리도록 하자.
둘 중 어느 한쪽은 반드시 틀렸을 것이며, 또한 이 중대한 문제에 있어 잘못된 편에 서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경고하신 것과 같이 "영원한 언약"을 범한 자들이 받을 두려운 형벌이 따르는 문제이므로 우리는 이제 양측 주장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 논의는 보통 사람의 머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대단한 연구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대답하기 쉬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평범한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성경은 주일 중 어느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고 있는가?
둘째, 신약 성경이 그 가르침과 행습으로 원래의 안식일 계명을 변조 또는 수정했는가?
셋째, 개신교 신자들은 16세기 이래 그들의 무오의 안내자요 스승인 성경에 명한 날을 “거룩히” 지킴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했는가?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위에 제시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진리를 옹호하고 오류를 지적하는 일에 추호도 어김이 없는 답을 제시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2. 가톨릭 미러” 지의 두 번째 논설, 1893년 9월 9일자
천주교회가 말하는 기독교의 안식일 (2부)
“광신은 한 번 자기가 좋아하는 오류와 단단히 결합한 후에는 끝까지 그것을 부둥켜안고 놓지 않으려는 성질이 있다” - 무어 -
이번 글에서 우리는 성경만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개신교회 신앙 원칙 중에서 가장 명백한 오류요 가장 용서할 수 없는 모순 하나를 폭로하려고 한다. 우리는 개신교회가 "무오의 성경" 외에는 아무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며 그것을 떠나서는 어떠한 신앙 원칙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이 논설을 진행하려고 한다. 천주교회 신도들이 영적인 문제에 관하여 자기의 판단보다는 오직 교회의 음성에 유감없는 확신으로 복종하는 것처럼 개신교회 신도들은 성경 외에는 아무도 스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모든 영성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영감적 스승이며,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성경은 그들의 종교와 신앙과 행위의 근본이다. "성경, 온전히 성경, 오직 성경만이 개신교의 신앙이다"라는 칠링워스의 말은 이 사상의 한 표현이며, 이것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책", "구원의 헌장", "기독교 신앙의 말씀" 및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교과서"와 같은 말이 된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만이 개신 기독교 신앙의 스승이란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한 사실 위에서 우리는 이제 지난번에 언급한 문제들에 대한 논설을 계속하려고 한다.
한편에는 그 가르침과 행위가 상반되는 개신교회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유대인들과 소수의 개신교회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이 두 그룹 중에서 어떤 그룹이 성경 위에 서있는가를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으로 가보아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에서 최초로 접하게 되는 표현은 창세기 2장 2절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일곱째 날 (하나님)은 모든 지으시던 일을 쉬셨다."
이 문제에 관한 그 다음 언급이 출애굽기 20장에서 발견된다. 거기서 하나님은 제7일을 지키라고 명하시면서 그 까닭을 당신께서 창조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그날 쉬셨기 때문이라 하였다. 성경의 본문은 그러한 이유로 그날이 지켜지기를 바란다는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제7일을 복 주시고 그날을 성별하셨다."
다시 출애굽기 31장 15절에서 우리는 이것을 읽는다. "엿새 동안 너희는 일하라. 제 7일은 안식일, 주께 거룩한 것이다." 16절에 보면, "이것은 영원한 언약", "영원한 표징"이라 했고, 17절에서는 "주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를 만드시고 제7일에 일을 쉬신 까닭"이라 했다.
구약 성경에는 제7일 안식일이 126번 언급되어 있는데, 이 모든 본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께서 그날을 먼저 지키셨으므로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그날을 "영원한 언약"으로 지킬 것을 명하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고 있다.
아마도 토요일이 안식일인지 또는 그날이 제7일인지를 의심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토요일 준수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해인 주전 2514년부터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옴을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안식일 준수를 눈으로 목격하고 있기 때문에 이보다 더 확실하게 역사적으로 확증된 사실은 없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민이요, 구약의 수호자들이요, 지금까지 존재해온 유일신(唯一神)신앙의 살아있는 대표자들이요, 개신교회가 태동하기 수 천 년 전부터 주일 중 특별한 날인 토요일을 매주 지킴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가 생긴 이래 제칠일 안식일을 지속해 오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이유를 밝히겠지만, 이 점에 대한 우리 천주교회의 입장이 오해 없이 분명하게 이해되기를 바란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선민이 3383년 동안이나 매주 지킨 살아있는 전통을 확인하거니와 하나님이 친히 그날을 당신 앞에 거룩히 구별해 지키라 하신 것을 지적하고, 그날은 토요일이며, 그날을 어기는 자는 사형시키도록 가르쳤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너희의 성일이니 그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 것이며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생명이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출 31:14).
위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께서 친히 명하셨고 또 옛 율법에 126번이나 언급된 이 명령을 위반한 자를 죽이도록 명하셨다. 그 이상 더 심한 벌이 어디 있겠는가?
개신교회의 신자들 가정에서는 어린 자녀들 마음속에 가능한 한 일찍부터 구약의 십계명이 주입된다. 십계명 중에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 이상 주일 학교와 설교단을 통해 열렬히 강조되는 계명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올바른 안식일을 가르치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2000여 년의 역사를 살펴서, 신약 성경이 옛 율법의 명한 바를 취소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제정된 옛 율법의 토요일 안식일을 다른 날로 대치하라고 한 명령이 있는지 조사해 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옛날에는 토요일을 지켰고, 또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날이 그날이었던 만큼, 오늘날 개신교회가 지키는 일요일 예배가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권위로 옛 명령을 취소하는 형식으로 토요일 언약을 폐지하고 그 대신 다른 날을 지명하여 그날을 "거룩히"지키라 하는 명령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신교회가 인정하는 유일한 스승은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예배 날이 바뀐 것을 구약이 말해 주지 않고 또 성경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개신교회가 토요일이 아닌 다른 날을 성수하고 있으니만큼, 개신교 신도라면 확실히 신약 성경을 펴서 토요일을 버리고 그 대신 종교개혁 초기부터 개신교가 지켜 온 일요일을 지키라고 명한 말씀을 제시할 의무감 같은 것을 느낄 것이다.
신약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비판적으로 조사해 보았을 때 우리는 안식일이 61번 언급된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는 구세주께서 예외 없이 안식일(토요일)을 택하셔서 그날 회당에 가서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셨음을 보게 된다. 사복음서에는 안식일이 도합 51번 언급되어 있다.
성 마태와 성 누가의 글에는 구세주께서 어느 날 자기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 이라 말씀하신 기록이 있다 기록된 그의 전 생애동안 단 한 번도 그는 그 날을 변경하고 싶다는 언질을 주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사도들과 그를 가까이 따르던 자들이 그가 돌아가신 후 아직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계시는 동안 안식일을 철저히 지킨 뚜렷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누가복음 23장 56절은 다음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들은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고 계명에 따라 안식일을 지켰다.” “그러나 주일 중 첫날 이른 새벽에 그들은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왔다.” “향품”과 “향유”는 주님께서 돌아가신 금요일 오후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안식일이 거의 되었”었다(54절)
구세주의 측근자들이 보여준 행동은 그분께서 돌아가신 후 그들의 토요일을 “거룩히” 지켰고, 일요일을 주일 중 다른 어느 날과도 다름없는 날로 간주한 사실을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한다. 그렇다면 사도들과 여신도들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기까지 토요일 이외의 다른 안식일을 결코 안 일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무엇이 이보다 더 확실한가?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 흥미있는 문제의 조사를 위해 전도자 성 누가가 남긴 그 후 30여 년에 대한 사도행전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확실히 그날이 취소된 어떤 흔적이 있다면 이 연장 기간 중 사도들의 생활을 통해 엿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이 사도행전을 세심하게 살필지라도 그들은 다시 한 번 실망을 겪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여덟 번이나 안식일이 언급된 것을 읽지만 그것은 토요일, 즉 옛 안식일일 뿐이다. 만일 독자가 증거를 원할 경우를 생각하여 우리는 여기에 그 각 경우의 장과 절을 밝힌다. 행 13:14, 27, 42, 44 그리고 다시 행 15:21, 및 16:13, 17:2, 18:4에 안식일이 언급되어 있다.
“그(바울)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며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설득했다” 그러므로 안식일(토요일)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일관한다.
그러므로 구세주나 그의 사도들에 의해 원래의 안식일이 추호라도 침해당한 흔적을 신약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원래의 제도가 전적으로 옹호된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놀랍게도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전적으로 지지하셨고 또 그분께서 돌아가신 후 30여 년간이나 변함없이 사도들이 적극적으로 안식일을 준수했고 그날 이외의 다른 날을 지킨 일이 없다는 사실을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여러 번 증언해 준다.
그러므로 명백한 결론은 이것이다. 성경을 안내자로 삼는 유대인들과 소수의 특정한 그리스도인은 자기들 편에 모든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으나 오직 성경만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개신교인들은 토요일을 일요일로 대치한 것을 옹호하는 단 한 구절의 말씀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3. "가톨릭 미러" 지의 세 번째 논설, 1893년 9월 16일자
천주교회가 말하는 기독교의 안식일 (3부)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의 아비”인 사단이 우리의 첫 모친 하와에게 “네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되리라”는 말로 호기심을 자극하여 그녀를 유혹하였다. 하와처럼 그녀의 후손들도 유혹하는 사단의 의도를 시험에 쓰러진 후에 깨닫는다. 본 논설이 다루는 안식일 문제도 사단의 통상적 술책에 비추어 볼 때 예외적 상황이 아니다.
지난 3세기동안 불만과 야심으로 가득 찬 다수의 크리스천들에게 사단은 하나의 "새로운 출발"이 성공할 수 있다는 찬란한 가능성을 그럴 듯하게 제시해 주었다. 사단의 제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세우신 교회를 스승으로 모시기를 포기하고 오직 성경만을 그들의 새로운 스승으로 받아들이게 만들려는 유혹이었다.
영민한 악마는 이 계략의 찬란한 성공을 예측했다. 실제로 그 결과는 그의 교활한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모험에 앞장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담대하고 모험적인 정신 하나면 충분했다. 악마의 왕은 배도한 수도사 루터를 보는 순간 당장 알아보았다. 루터는 자기의 입으로 자기와 자기의 주인을 얼마나 서로 비슷한가를 그의 “탁상 담화”와 1558년 비텐베르크에서 멜란히톤의 감수 아래 출판된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베푼 그 능수능란한 과업을 루터는 기독교계에서 성취한 것이었다.
루터가 천주교회를 공격할 때 악마가 그에게 제시한 최종 목표는 기독교적 정신의 파괴였다. 이제 우리는 그가 그 일에 성공하도록 하기 위해 사용했던 수단들을 하나하나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것들은 잘못된 것이요 자가당착이요, 허망한 것이었다. 그러면 그의 협잡에 대한 조사를 더 진행해 보자.
앞에서 이미 입증한 것처럼 사복음서에 51번이나 언급된 안식일에 대한 기록을 살펴볼 때, 구세주께서는 그의 지상 생애 동안 단 한 번도 충실한 안식일(토요일) 준수를 이탈하신 일이 없고, 비록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으로 명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한 번도 그의 명령이나 행위로 그날을 다른 날로 대치할 생각을 암시하신 적이 없었다.
또한 성 누가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주는 것처럼(눅 24:1). 주께서 죽으시던 날 저녁 사도들과 여신도들은 주의 시신에 바를 향품과 향유를 사전에 준비했다가 안식일(토요일)이 지난 후에 사용하려고 했다. 이 사실은 혹시 하나님의 아들이 지상 생애 중 안식일 준수에 허점이라도 있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배제한다.
성 누가가 증명하는 것처럼, 주께서 돌아가신 후 사도들의 행적이 그것을 말해 주거니와 독자가 사도행전에서 분명히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그 후 30년 동안이나 이 점에 있어 그들이 주님의 본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안식일(토요일)을 지켰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도행전 18장 4절을 보라. "그(바울)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며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설득했다."
이방인 개심자들도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똑같이 안식일을 지키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란 말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들도 유대인들과 함께 그날 집회에 참석하여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일요일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누가복음 24장 33~40절과 요한복음 20장 19절에서이다. 이 두 본문은 사도들이 그날 모였던 유일한 동기를 말해준다.
그날은 주께서 부활하신 날(부활절)이었는데, 그 모임은 옛 안식일(토요일)을 버리고 새 날을 "거룩히 "지키기 위한 "새 출발"을 기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위에 말한 요한복음에서 우리가 분명히 읽는 것처럼, 그것은 기도나 권면이나 성경 낭독도 없이, 완전히 용기를 잃고 허탈해진 사도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의 그 방에 모여 있었을 뿐이다.
일요일에 관한 두 번째 언급은 요한복음 20장 26절부터 29절까지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8일 후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는 도마도 함께 있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날 모든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나타나셔서, 부활하신 날 저녁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던 도마의 의심을 해결해 주셨다.
만일 예수께서 안식일을 변경하실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면 제자들이 다 한 자리에 모인 이때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간단히 말하자면 이 모임에서도 부활하신 날 저녁과 마찬가지로 예배의 특징인 기도, 찬양, 또는 성경 낭독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사도들이 일요일에 모였던 세 번째 기록은 사도행전 2장 1절에서 발견된다. "오순절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그 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자, 그러면 이 본문이 우리의 성서적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드디어 토요일이 일요일로 대치되었음을 말해주는 희망적 증거가 되어 줄 것인가?
비록 유대인들이 이 일요일(오순절, 오순절이 항상 일요일이 되는 것은 아님)을 1500년 동안이나 지켜 왔고, 또 기독교 시대가 시작된 후에도 18세기 동안이나 매주 지키는 안식일과 함께 지켜 왔음을 우리가 알려 줄지라도 이 본문을 가지고는 아무런 위로도 안심도 얻지 못할 것이다.
오순절은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로 그 기간을 일곱 이레 즉 이레씩 일곱 번을 셈한 후 그것이 끝나는 다음날이 축제 기간 중 가장 큰 명절로서 그것이 일요일이 되곤 했다.
이스라엘 사람 치고 자기 민족이 3000년 동안이나 지켜 온 명절에서 주일 중 첫째 날을 지키는 관습의 근원을 찾으려는 사람을 볼 때 가련하게 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항상 지킨 안식일을 모독해 놓고 핑계할 말이 궁해진 개신교도들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기의 스승인 성경을 외면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오순절에 호소하려 할 것인가?
다시 말하거니와 날이 바뀌었다는 변론을 내세우는 성경 해석자들은 흔히 사도행전 20장 6절과 7절을 제시한다. "주일 중 첫날에 제자들이 떡을 떼기 위해 모였을 때...." 운운하는 이 성구는 언뜻 보기에는 우리의 개신교 친구들에게 약간 위로가 될 듯이 보이긴 하지만, “떡을 떼는” 일은 주일 중에 어떤 날이나 할 수 있는 행사이다. "지나친 증언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격언으로 성서적 일요일 성수론자들의 주장에 대한 대답을 대신하는 바이다.
그러면 사도행전 2장 46절을 한 번 살펴보자.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계속하여 이 집 저 집에서 떡을 떼고 음식을 먹었다." 이 본문을 보는 순간, 일요일 성수론을 지지하기 위해 내놓은 구절이 갑자기 무력해지는 것을 느끼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 그 구절을 방금 본 2장 46절과 나란히 놓고 대조해 보고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면 바보가 아닐까?
개신교회 신도들은 이 구절을 오직 일요일에만 적용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계속하여 이 집 저 집에서 떡을 떼고 음식을 먹었다"는 성 누가의 말은 그러한 일이 주일 중 어느 날에도 똑같이 진행되었음을 말해 준다.
토요일이 일요일로 대치되었음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본문이 또 하나 있다. 고린도 전서 16장 1,2절에 기록된 성 바울의 말씀이다. "그리고 성도들을 위한 연보에 관하여는... 주일 중 첫째 날에 너희 각 사람이 따로 집에 모아 두었다가..." 하는 부분이다. 우선 성 바울의 이 요청을 신도들이 잘 따라 주었다고 가정하고, 구세주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 토요일마다 무슨 일을 하셨고, 또 그 후 30년 동안 그것이 어떻게 지속되었는지를 사도행전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안식일마다"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즉 "안식일마다" 성경 말씀이 낭독되었다. "그리고 바울은 안식일마다 강론하던 그의 관습대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강론했다"(행 18:4) 이미 확증된 것과 같이 토요일마다 의례적으로 성경 낭독, 기도, 권면 및 설교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 어찌 되고 돌연 그 대신 주중의 다른 날 연보 거두는 일이 등장했다는 말인가? 이보다 더 엉뚱한 추리가 있을 수 있을까?
지금 숙고하는 이 본문의 가치를 충분히 알기 위해서는 사도들과 여신도들이 수난 금요일 해지기 전에 한 행동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들이 향품과 향유를 구입한 것은 시간적으로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진 다음이었다. 그들은 모든 행동을 중지하고 "여호와 앞에 거룩한" 안식일이 다 지나기까지 기다렸다가 일요일 아침에 비로소 예수의 거룩한 시신에 향유를 발라 장례 절차를 마치기 위해 묘실로 찾아갔다.
우리는 이것을 묻고 싶다. 왜 그들은 시체 손질을 토요일에 하지 않았는가?
주님의 거룩한 시신에 향품을 넣는 일도 중요했지만 엄격히 말해서 그것은 안식일 준수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안식일 준수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문에서 본 일요일 바로 전 날인 안식일이 준수되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될 때까지는 - 안식일은 매주 반드시 성수되었으므로 그럴 리는 없다 - 일요일마다 연보를 모아두라고 한 성 바울의 요청은, 그리스도의 시신 손질이 그랬던 것처럼, 안식일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결국 편의상 그 다음날로, 그러니까 일요일, 즉 주일 중 첫째 날로 미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신약에 언급된 안식일(토요일)과 주일 중 첫째 날(일요일)에 관한 본문을 모두 살펴본 결과 현재까지는 토요일이 일요일로 대치된 것을 입증할 만한 어렴풋한 근거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이제 한 가지 남은 것은 신약에서 발견되는 "주의 날"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등의 의미를 조사해 보는 일일 것이다. 이 문제를 우리는 다음 번 기사를 통해 계속 다루고, 어떤 신앙체계는 앞뒤가 맞지 않아 변호 불능, 자가당착, 그리고 자살적임을 지적한 후 결론을 맺으려 한다.
4. 부정하거나 논박할 수 없는 사실
천주교회가 말하는 기독교의 안식일 (결론)
우리는 이 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이 절대로 논박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도록 돕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6세기에 성경 제일주의가 나타나자 그 운동은 천주교회의 재산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그 야만적 정벌주의를 통해 그리스도교(천주교회)를 여지없이 파괴했다.
그 결과 교회의 창시자께서 제정하신 모든 성례와 거룩한 제사 제도가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이라곤 성경 하나밖에 없게 되었다.
개신교 운동의 주동자들은 성경만이 그리스도교 교리와 도덕을 가르치는 그들의 유일한 스승이라고 주장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가장 중요한 신조는 안식일 준수의 영구한 필요성이었다. 사실상 이것은 지난 300 년간 성경을 따르는 교파들 전반이 동의하는 유일한 기독교 신조가 되고 있다. 안식일 준수는 성서적 신학의 총회와 요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 목사들은 매주 천주교 국가들의 안식일 준수(일요일 준수를 말함-역자주)가 개신교 세계의 원만하고 자기만족적인 안식일 준수(일요일 준수를 말함-역자주)에 비해 이완되어 있음을 쉴 새 없이 공격한다.
세계 박람회장을 일요일에도 열 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직 결정을 보지 못하고 있을 때, 이 나라 방방곡곡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들이 모든 개신교 강단을 통해 과시했던 대단한 의분을 누가 잊을 것인가? 그리고 한 교파는 세계 박람회에 전시하려고 반입했던 물품 상자들을 열지도 않음으로써 그 결정에 대하여 성스런 분노를 나타냈던 것을 누가 잊을 것인가?
이 지극히 선량하고 구변 좋은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조심스레 잘 연구하고 주님 당시 그를 밤낮으로 따라다니며 그분을 무한히 괴롭히고, 주님의 안식일 지키는 방법이 자기들처럼 엄격하지 못하다 하여 참을 수 없으리만치 나쁜 소문을 퍼뜨리기에 바빴던 유별나게 선량했던 자들과 같은 부류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 문제를 상식적으로 대처하는 것을 증오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바리새인들의 오만함을 지극히 경멸하면서도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는 다른 명칭을 찾으려 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하나님은 19세기말에 이른 오늘에 와서도 그들을 따르는 자들과 동조자들이 외치는 야비한 소리를 옛날과 별로 다르지 않게 취급하실 것이다.
이 모든 사실 위에 옛날 바리새인들은 그나마 참 안식일을 지켰지만 우리의 현대판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믿어주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믿고 평생토록 참 안식일을 단 한 번도 지키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참 안식일은 주님께서 운명하시는 날까지 지키셨고, 그를 본받아 30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사도들이 지킨 날이다. 가장 적극적인 계명에 대한 고의적 모독과 배척이라 할 수 있는 극심한 모순이 오늘날 성경만을 믿는다고 말하는 기독교계의 행위에 나타나고 있다.
"성경과 안식일"은 개신교 사상의 표어이다. 그러나 우리가 증명한 것처럼 사실은 그것이 "성경 대 안식일"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이론과 실제 간에 그보다 더 큰 모순이 있을 수 없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우리는 개신교회의 성서적 선구자들과 현대 개신교인들이 평생토록 안식일을 하루도 지킨 일이 없음을 지적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여러 번 말씀하신 날을 그들이 매주 더럽히고 있음을 이스라엘인들과 소수의 특정 그리스도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스승인 성경을 업신여겨 무용지물로 만들고, 가톨릭교회가 지키는 날을 채택해 지키고 있다.
어느 프로테스탄트가 이 기사를 잘 읽어본 후에도 깨끗한 양심으로 자기의 스승인 성경이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뜻으로 제시하는 토요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계속 어길 것인가?
세계 역사는 이보다 더 어리석고 또 자신을 바보로 보이게 만드는 원칙 유기의 표본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스승은 그들에게 안식일 계명을 매주 준수할 것을 거의 매 페이지에서 뜨겁게 강조하며, 모든 사람이 자기를 "유일한 무오의 스승"으로 인정하고 순종해 주기를 바라는데, 그 스승의 제자란 자들이 300년이 넘도록 한 번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지키지 않고 있으니 이게 웬일인가!
성서적 기독교 신도들의 거대한 집합체인 감리교회의 신도들은 안식일이 결코 폐지된 일이 없음을 선언했고, 영국의 국교회를 따르는 신도들은 그들의 딸인 미국의 감독교회와 함께 앞서 인용된 것처럼 그들의 신조 제20항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위배되는 것을 제정하는 것은 불법"이라 규정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의하면 토요일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지정되었다. 이것은 절대적이며, 반복적이며, 적극적인 계명일 뿐 아니라, 이를 불순종하는 자는 극형에 처한다는 위협이 따르는 계명이다.
모든 성서적 교파들은 하나같이 무슨 말로도 정당한 이유를 밝힐 수 없는, 우매한 입장을 스스로 취하고 있는 것이다.
악은 자기를 속인다." 이 얼마나 상황에 적절한 성령의 말씀인가! 오직 성경만을 자기의 스승으로 삼고 따른다고 공언하면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그 유일한 스승을 무시하고, "모든 가증한 것들의 어미"로 악평하던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관습이라도 자기들 목적에 부합되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하신 계명을 어겨가며 그것들을 채택해 따르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안식일 계명 위배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극히 무서운 경고와 위협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가톨릭교회는 개신교회가 생기기 1천여 년 전에 그 거룩한 사명에 힘입어 예배일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꾸었다.
우리가 교회의 사명에 힘입었다는 말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부르신 분이 교회(천주교회를 뜻함, 역자주)에 당신의 권세를 주셔서 만민을 가르치게 하신 까닭이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라 하셨고, 듣지 않는 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하듯이 벌할 것을 말씀하셨으며, 세상 끝까지 교회와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셨다.
교회는 주께서 보내신 스승으로서의 헌장을 가지고 있다. 이 헌장은 무오인 동시에 영구한 것이다.
개신교가 탄생했을 때는 기독교의 안식일이 너무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아무도 그 기존 제도를 역행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제도를 묵인하고 안식일 문제를 덮어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300년이 넘도록 그들은 교회가 예배날을 변경할 권리가 있음을 시인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안식일은 오늘날까지 성령의 아내인 가톨릭교회가 낳은 자식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이 점에 대하여는 개신교계가 일언반구의 반박도 내놓은 일이 없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두 번째 주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이 토론을 위해 오직 성경만을 믿음과 행위를 가르치는 스승과 안내자로 삼을 것이다. 이 스승 즉, 성경은 날을 변경하는 문제를 절대적인 이유로 금한다.
이 계명은 "영원한 언약"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승(성경)이 요구하는 날은 한 번도 지켜진 일이 없다.
이것이 기존 원칙을 벗어나 배도한 과정인데,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구태여 표현을 하자면 그것은 자기모순에 빠지고, 스스로 속아 바보가 되고, 자멸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타락의 한계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아니 아직 멀었다.
그들이 가톨릭교회를 떠날 때 내놓았던 구실은 기록된 말씀이 가르치는 진리를 등지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그들은 기록된 말씀을 그들의 유일한 스승으로 삼는다고 공언했으나 그것을 즉시 포기하고, 본 논설이 지적한 것처럼 가장 기본적 교리에 있어서 그들의 유일한 스승의 명백하고 변함없는 가르침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의 웃음거리, 하나의 착각, 하나의 올무"란 말로 설명해야 적절한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일요일 예배가 성서적임을 주장하는 개신교 목사님들 가운데,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괴물을 해부해 놓은 우리의 논리적이고 성서적인 이 분석을 깊이 있게 연구해 본 다음, 합리적인 반론을 제시할 분이 계시다면 우리는 진정한 존경과 화기애애한 태도로 그것을 접수하여 거기에 답할 생각이다.
단, 반론을 제기하실 분은 해부된 각 부분을 다시 합쳐서 그 혼혈 잡종을 다시 살려 힘있는 생명체를 만들어 제출해 주시기 바란다.
우리가 개신교회의 경건하고 고집 센 목사들을 너무도 잘 알기에 말하거니와 이 일로 그들은 모두 목소리를 합하여 큰 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싶을 것이다.
만일 이 비성서적 괴물을 다시 내놓으면 우리가 다시 그것을 해부하여 죽여 놓을 것을 잘 알기에, 그들은 그런 기회를 우리에게 주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요즘 방침은 "가만히 엎드려 조용히 있는 것"이므로 분명 그들은 침묵을 지킬 것이다.
부록 1 : “가톨릭 미러” 지의 추가 논설
<이 부록은 “항의와 호소” 제 1판이 출판된 후, 1893년 12월 23일자 “가톨릭 미러”지가 발표한 논설이다>
이 논설 기사를 찾는 사람이 많고 또 국제종교자유협회에 의해 “항의와 호소: 프로테스탄트는 왜 일요일을 지키는가?”란 제목의 소책자가 시카고에서 출판된 후 시카고, 뉴욕, 캘리포니아, 테네시, 런던,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 및 캐나다의 온타리오에서 판매되면서 수요가 계속 증가하여, 미러 지는 부득불 이것을 영구한 형태의 책자로 꾸며 수요에 부응해야 할 입장이 되었다.
독자들은 이 책자에서 개신교계의 신조와 행습간에 존재하는 가장 괄목할 만한 모순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모순은 어떤 합리적 방안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은 성경을 유일한 스승으로 따른다고 공언하면서, 토요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분명하고 적극적인 성경의 명령을 외면하고 자기들이 표방하는 원칙에 위배되는 가톨릭 영역에 쭈그리고 앉아 350년 동안이나 온 세상이 보는 앞에 자기의 원칙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변호불능, 자가당착, 그리고 자멸적인 교리체계를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적인 프로테스탄드 라면 그들의 스승인 성경의 명령에 따라 일요일을 포기하고 토요일로 돌아가야 하며, 반대로 만일 그들이 일요일을 지키라 명한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포기할 생각이 아니라면, 차라리 성경의 가르침을 포기하고 가톨릭 교회의 모든 가르침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성경에 무지한 로마카톨릭 주교들의 황당한 주장
“이성과 상식은 두 길 중 하나의 선택을 요구한다. 프로테스탄트는 토요일을, 가톨릭은 일요일을 성수해야 한다. 타협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