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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정을 나와서 너른 닭실마을 들판을 휘감아 돌아가는 뚝방길을 가다보면 마을 공터의 주차장이 보일 즈음에 하천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가 하나 모습을 드러낸다. 다리를 건너자 마자 다시 급하게 우측으로 꺽어서 뚝방길을 오르다 보면 경관이 아주 수려한 계곡을 끼고 산자락을 돌아가는 숲길이 나타난다.
어딘가에 공사가 있었던듯 중장비 바퀴자국이 선명하고 숲길 곳곳에 나뭇가지를 모아 쌓아놓은 무더기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혹시라도 지나가는 차량이 있을까 몰라 수풀더미 너머까지 깊숙하게 차를 주차시키고 걸어 들어가기로 한다.
지금에야 누구라도 당연한듯이 봉화읍에서 울진 방향으로 향하는 국도 36번 도로의 기찻길 굴다리를 빠지자마자 매우 위험스레 나타나는 급커브를 가로질러 닭실마을에 들렸다가 너른 들판에서 우측은 충재고택과 청암정으로 향하고, 작은 하천을 건너 뚝방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바로 석천정사(石泉精舍)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만, 본래는 봉화읍에서 나와서 내성천을 따라 물야면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오다 보면 물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여기에서 오른쪽 방향의 물길을 따라 거슬러 올려와야만 석천계곡이 시작되고 이어서 석천정사를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충재 선생께서 이곳에 터를 잡으시고 마을을 세우셨을 때부터 닭실마을이 외부와 교통하는 통로는 이곳이 유일하였다. 그러니까 닭실마을을 찾아오는 사람은 가장 먼저 석천계곡을 지나게 되고 석천정사를 거쳐야만 닭실마을에 당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도 36번 도로가 생겨나는 순간부터 이제 마을 길이 변하고 만 것이다. 이제 마을을 국도변에 걸쳐있게되어 교통이 자유롭게 되었으며, 초입에 있던 석천정사가 이제는 일부러 한참을 돌아서 찾아가야만 하게끔 변해진 것이다.
충재 선생이 이곳에 있다는 천하의 명당 터를 택하셨을때 이런 후대의 일을 알아차리셨을까? 혹 36번 국도의 개통이 명당의 지기(地氣)에 영향을 끼친것은 아닐까?
더 없이 짙푸른 숲이 바람결에 소리를 내며 일렁거리고 그 나뭇잎 위로 툭 툭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붉고 키가 큰 노송들이 빼곡히 들어서고 뽀얀 암반들 사이를 맑은 급류가 이리저리 물소리를 내며 굽이쳐 흐르는 지금의 이 풍경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면 좋단 말인가?
처음 이곳에 발길을 내딛어 터전을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의 당시 심정은 어떠했을까?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모두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 아님을 아는 낯선 여행자에게도 이토록 좋으니, 처음 이곳에 시선을 둔 옛 사람의 기쁨은 과연 얼마만 했을까?
수태극 산태극으로 감아돌아가는 이 계곡 숲속 은밀하고 아름답고 청정한 계류변에 마치 배가 한 척 떠있는듯이 정자가 놓여 있다.
숲길 짙어 이끼 푸르고
나무 사이사이 강물이 희여.....
햇볕 어린 가지 끝에 산새 쉬고
흰 구름 한가히 하늘을 거닌다.
산까마귀소리 골짝에 잦은데
등넘어 바람이 넘어 닥쳐와.....
굽어든 숲길을 돌아서 돌아서
새냇물 여운이 옥인 듯 맑아라.
푸른 산 푸른 산이 천 년만 가리
강물이 흘러 흘러 만 년만 가리
산수는 오로지 한폭의 그림이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현 듯 떠오르는 싯구가 있어서 핸디폰으로 문명의 혜택을 빌어 신석정 선생님의 <산수도> 라는 시를 숲길을 걸으며 읊조려 본다. 가끔은...... 아주 이다금씩은 나도 모르게 싯구절이 떠오를 때가 있다. 고등학교 때 시인이셨던 국어 선생님은 나에게 시를 써보라고 권해주셨지만, 이상하게도 글을 줄여서 쓰는 재주가 나에게는 없는듯 하여 결국엔 글을 늘여서 쓰는 소설쪽을 택했던 이유가 분명하게 나에겐 있었다.
청암정이 동적(動的) 이라면 석천정사는 정적(靜的) 이라고 해야 하겠다.
충재 선생의 아들인 권동보가 닭실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하는 계곡의 암반 위에 석축을 쌓은 뒤, 그 위에 팔작지붕의 멋들어진 한옥을 올렸다. 정사 아래로 맑은 계류가 사시사철 청아한 물소리를 내며 흐르고 뒤로는 적송 우거진 숲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자연과 인공이 만나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석천정사로 들어가는 돌계단에 걸터 앉아 계곡의 풍광을 둘러보자니......... '오호라. 선계(仙界)가 어디더냐? 두어라. 이만하면 되었느니라.'
한국화가 이호신님의 작품 <석천정사>
석천계곡은 산을 끼고 물이 휘감아 돌며 흘러내리는 감입곡류의 전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데, 한국적인 미(美)를 담고 있는 산수화의 정취를 느끼기에 너무도 충분하다. 너럭바위가 있고 그 주위로 옥류수가 흘러내니며 노송과 수목석이(水木石)이 한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진 가운데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한옥이 한 채 들어서 있는 것이다.
지금은 석천계곡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거슬러 내려가야만 하지만, 본래는 닭실 마을의 초입이라고 할 수 있는 석천계곡의 중간쯤에는 왼편의 산기슭에 청하동천(靑霞洞天) 이라는 참으로 읽기조차 힘든 서체의 글자가 붉은 주칠로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충재 선생의 5대손인 권두응이 쓴 것인데 닭실마을에 기반을 둔 안동권씨 중에서 최고의 필력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이 글씨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강화도 마니산 계곡에서 만났던 함허동천(涵虛洞天) 이라는 폭포 옆 암벽에 새겨진 글씨가 생각이 난다. 함허동천은 함허대사 기화(己和)가 마니산 정수사를 중수하고 이 암벽에서 수도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 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하여간 옛날에 이름 꽤나 날렸던 분들은 탄성이 절로 터져나올만큼 갖가지 이름 하나에도 정말로 멋들어지게 만들어 붙이셨다. 감탄이 절로 터져나올 지경이다.
권두응 선생도 결코 함허대사 못지 않다.
'하늘 위 신선이 노니는 푸른 선경'이 바로 여기 청하동천이라고 했으니 말이다.(그 정도 까지는 아닌데.........)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 도교의 신선(眞人)들에 관해 적은 전기인 설원(說苑) 모군내전(募君內傳)에 처음 등장한 동천(洞天)은 '경치 좋은 천지가 둘러쳐진 신선이 사는 곳(大天之內 有地之洞天三十六所乃眞仙所居)' 라 적었는데, 이는 '속세의 때가 미치지 않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동천복지의 세계를 가리키며 다분히 도교적 가치관이 반영된 선경을 의미한다' 라고 했다.
석천 계곡의 권두응 선생이 쓴 (청하동천) 강화도 마니산 계곡의 (함허동천)
석천정사는 굳게 문이 잠겨져 있다.
외부인의 방문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담장 너머로 정사를 살피니 아무도 체류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방치한 것도 아닌듯 싶다. 마지막 손질은 좀 시간이 지난듯 해 보이지만 나름으로는 비교적 얼마전까지 누군가가 관리를 한 흔적들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런곳을 차지하고 들어앉아 한껏 머물수는 없어도, 잠시라도 찾아들어 옛정취에 취해보려 하였더니만.......
석천정사는 금강산의 작은 절집을 본떠 지었다고 하더니만...... 너른 암반 위에 척출을 쌓아 토석담장을 두르고 팔작지붕의 하사한 자태를 보고 있노라니 책속에서 흑백사진으로 보았던 금강사의 절집들과 정말로 많이 닮았다.
얼기설기 엮어놓은 듯한 돌다리를 건너 건너편 너럭바위에 걸터앉아서 아쉬운대로 석천정사의 풍경과 정취를 즐겨본다.
지나는 과객이 되어 하룻밤 유숙이라도 청해 볼 요량이었건만........... 그 또한 모두 부질 없음이련가?
석천계곡을 나와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호젓한 도로로 꼽히는 36번 국도를 타고 오늘의 목적지인 청옥산 자연휴양림을 찾아 태백 방면으로 차를 몰고 나간다.
주변으로 어디를 들러보나 붉은 노송들이 숲을 이루며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새소리와 물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지금 찾아가고 있는 청옥산 주변으로는 오미산, 각화산, 시루봉, 문수산, 장군봉 등 높이가 해발 1.000m 가 수두룩하다.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강원도와 경북의 경계 지역이라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주변 풍광으로는 영락없는 강원도 오지라 해야겠다.
캠핑장에 도착하기 전에 먹거리 장을 간단하게라도 보아야 하겠기에 먼저 태백 인근까지 가보기로 했다. 출발하자마자 사방으로 여기저기 새롭게 도로가 시원스레 건설되어 있어서 예전에 이곳을 지나쳤던 기억은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 우리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죽어라 꾸불꾸불 구도로를 기어코 찾아내서 느릿느릿 나아가는데, 차량의 내비게이션은 툭하면 새로 뚫린 도로나 터널을 향해 올라타라고 여간 성가시게 잔소리를 끌어다 붙이는게 아니다.
봉화에서 태백 초입까지 가는데 대충 어림잡아서 새로 개설된 도로로 씽씽 달리는 것 하고, 터덜터덜 옛날 도로를 고수하면서 고개를 넘고 낡은 다리를 건너고 강줄기를 따라 계속되는 급커브를 따라서 돌고돌아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비게이션 이랑 비교해 보니 대충 어림잡아도 27km 이상 차이가 나는것으로 판단된다.
나 혼자라면 당연히 시간 절약, 기름값 절약, 저녁 시간 준비 절약을 위해서라도 내비가 시키는대로 하련만........ 그럴때마다 유난히 촉(?)이 뛰어나신 태리할망구께서 찌릿찌릿한 눈초리를 무언의 선전포고를 보내오시는 통에 순종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온정성을 다해 울퉁불퉁한 노면의 구도로를 조심스레 헤쳐 나간다.
가파른 고개를 하나 넘어서 한참을 내려가니 우측으로 (춘양) 이라는 간판과 함께 (각화사) 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세간에는 (억지 춘향) 이라는 말과 (억지 춘양) 이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억지 춘향)과 (억지 춘양)은 어떤 말이 맞는 말일까?
엄밀하게 따진다면 (억지 춘양)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 춘향) 이란 말이 꼭 틀렸다고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모두가 이 지방에서 생겨난 말이고, 이곳의 특산물인 적송(춘양목)에서 본시 (춘양)이란 말이 생겨났지만, 어느때 부터인가 누군가에 의해서 (춘향)에 대한 말도 합리성을 갖게끔 이야기를 지어서 붙였기 때문이다.
(춘양)이 와전 되어서 (춘향)이 되었다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 어디에도 다시 없을 오지 중의 오지로 이 지방이 인식되자, 이 지방으로 시집을 오겠다는 색시들이 찾을래야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하다보니 부모끼리의 혼례 약속이나 아니면 맞선도 보지 못하고 억지로 떠밀려 마지못해 이곳으로 시집을 오게 된 색시들이 험준한 고갯길을 넘으면서 부른 속요인 (억지 춘향)에서 비롯되어 생겨난 말이 (억지 춘향) 이라는 시대적 재해석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다 정학히 말하자면 (억지 춘양)이 맞는 말이다.
유사 이래로 봉화 땅의 이 깊은 산골 오지의 지명은 본시부터 (춘양) 이었다.
이러한 촌동네 (춘양)에는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이 지역만의 아주 특별한 특산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적송(춘양목) 이었다. 이곳의 적송은 보통의 소나무에 비해 비록 3배 이상 성장이 느렸지만, 어느 소나무 보다도 하늘을 찌를듯이 곧게 높이 자라는 매두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더우기 잘라서 제재를 하였을 때 나무의 결이 아름답고 시간이 지나도 뒤틀림이 생기지 않는것으로 유명해 졌다. 거기에다가 워낙 오지이다 보니 적송으로 가득한 숲들이 자연상태 그대로 보존까지 되어 내려왔던 것이다. 이 적송의 가치를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목재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이 지역에서 나는 적송을 지명을 따서 (춘양목) 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외피는 거북등 같이 갈라져 있고 색깔은 암회색을 띠며 나무를 잘라보면 유난히 나이테가 좁고 치밀한 것이 특징인 춘양목은 일반 소나무에 비해 거의 10배 이상의 높은 가격에 매매가 될 정도였다.
조선 시대 이후에 궁궐이나 커다란 사찰이나 세도 높은 권세가의 양반가에는 모두 이 춘양목이 사용되었다. 가을과 겨울에 베어져 다듬어진 목재들이 태백 영월지방의 남한강 상류로 운반되어 봄이되어 강물이 불어나면 뗏목으로 만들어져 단양, 충주, 여주를 거쳐 광나루까지 물길을 이용해 운송되었다. 그 과정이 시간이 워낙 많이 걸리고 힘이 들다보니 벌목을 해 갈수 있는 양이 그리 많치 않아서 춘양의 적송 숲은 예전처럼 그대로 유지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일제가 철광석과 석탄 채취를 위해 철도를 놓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이내 일본인들도 이곳에 널린 춘양목의 가치를 알아보게 된 것이다. 일제는 사람도 거의 살지 않는 이 산간 오지에 역을 개설했다. 오로지 춘양목을 벌채해서 역 주변에 모으게 하고 실어 나르기 위한 역사가 생긴 것이다. 일제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춘양목이 벌채되었고 대부분이 일본으로 실려갔다. 이쯤되자 사람이 살기도 힘든 산간오지 춘양에 목재상들과 벌목공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춘양 뿐만이 아니라 인근 장동과 내성의 장날에 목재 시장이 생겨났을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다.
상황이 이쯤되자 특성이 뚜렷한 춘양 지방의 목재시장에 외형적으로 비슷하게 생긴 일반 소나무를 가져와서는 춘양목이라 우기면서 팔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나면서 거기에서 (억지 춘양) 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억지 춘양) 이란 목재의 왕이라 불렸던 춘양목에서 그 유래가 시작되었다는 말에 실감이 날 것이다.
일제에 의한 남벌의 휴유증이 극도로 심했고, 해방 이후에도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눈 앞의 이득만 챙기고자 하는 일부 목재상들에 의해서 지금은 이곳 충양 일대에서도 제대로 된 춘양목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여전히 춘양면 일대에 붉은 소나무는 빼곡하게 숲을 이루고 있지만, 곧고 높이 자라서 좋은 목재로 사용할 수 있는 적송이 눈을 씻고 찾아도 없을 정도라는 이야기다. 덕수궁의 복원이나 남대문의 복원 작업에서도 이 일대의 소나무를 전수조사까지 했으며, 일련 번호를 먹여가면서 특별 관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러면 다 뭐해? 남대문 복원에 따른 흑막이 언론을 타고 퍼졌을때, 온 국민이 받은 상처와 배신감은..........
거창하게 과대 포장된 (억지 문화재 복원 사업)이 이 시대의 대한민국 국책사업의 하나였다는......... 몇 몇 사람만의 영달과 배불리기에 동원된 거짓투성이였다는 사실은.......... TV 화면을 통해 남대문이 불타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던 순간 이상으로 우리 모두가 통분을 일으키기에 너무도 충분한 분명한 현실이었던 것을 말이다.
구도로를 따라 가다보니 작은 면단위 마을들을 빠짐없이 관통하게 된다. 옛날에는 소위 대로라는 것이 마을이던 면소재지던 읍내던 도시던 간에 가장 중요한 한복판을 그대로 관통하는 것이 정통이었기 때문이다.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변이 가장 번화가이고 관청과 경찰서와 시장과 약국이 바로 그 주변에 몰려 있는것이 당연시 되었다.
시대의 변천으로 면사무소는 외곽으로 이전을 하였지만, 여전히 파출소와 미니 소방서와 시장과 그리고 농협은 시골마을의 중심에 여전히 버젓이 놓여 있다. 지금 우리가 찾는것은 초록색 간판의 농협이다. 좀 더 정확하게 하자면 은행업무를 보는 농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한 건물에, 혹은 약간 떨어져 있는 농협 하나로 마트를 찾고 있는 중이다.
과거의 어느때 부터인가 대한민국을 두루두루 여행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고마우면서도 중요한 것을 두 가지만 꼽으라면 나는 촌각도 망설이지 않고 (자연 휴양림)과 (농협 하나로 마트)를 꼽겠다.
계절과 날씨 같은 캠핑의 장애가 되는 부분을 단번에 말끔하게 해결해 주는것이 바로 (자연 휴양림) 이다. 자연 휴양림의 탄생 초기에서 부터 나는 적극적으로 참여한 절대적 애용자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해 피 튀기는 예약제도 라는 것이 아예 없었다. 주말에도 아무데고 불쑥불쑥 찾아가면 항상 숲속의 집이 남아 있었다. 삼봉. 기리봉산. 미천골. 남해 편백. 천관산. 덕유산 등은 거의 수시로 찾았었다고 해도 무방 할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자연 휴양림)은 일단 흔히들 '절간 만큼이나 명당' 이라고 부를만한 장소에만 들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거기에다 지금은 가격(이용료)가 많이 올랐지만, 그래도 여타의 다른 숙소들에 비하자면 가성비가 대단히 즐거울 정도로 높다고 할 수 있겠다. 조용하고 깨끗하고 누구를 동반하던 어느정도의 안전이 보장되는 장점이 있다.
(하나로 마트)는 대한민국 어디에나 빼곡하니 포진해 있다. 규모의 차이는 상당하지만 인간의 생활 영위에 가장 기본적인 필요 상품으로부터 시작해서 매장의 규모만큼 다양한 물품을 고르게 비치하고 있다. 굳이 생활주부 처럼 꼼꼼하게 가격대를 따지고 들지 않는다면, 적어도 농협이라는 어느정도 신뢰가 가는 기관에서 보증하는 품질과 가격대에 다양한 상품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여행 초기엔 많은 준비가 필요(주로 먹는 부분에) 했지만, 하나로 마트가 전국각지에 고르게 분포되고 원협과 수협까지 통합되면서 부터는, 해변을 가던 산골짜기를 가던 어디 시골마을을 가던 아무런 걱정이 없게 되었다. 그저 목적지 주변에 가장 가까운 하나로 마트만 찾으면 일단 민생고(?)는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해결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로인해서 생겨나는........ 캠핑장, 시골 마을, 여행지 숙박업소 주변 등등의 소형 마트나 매접들에게는 엄청난 타격이 가해졌을테지만 말이다.
태백까지 가지 않고 작은 마을의 하나로 마트에 들려서 깜빡하고 빼먹은 모기향과 몇 가지 장거리를 보고나서 파리 빠게트를 찾아 빵을 좀 사고는 방향을 돌려 본래의 목적지인 청옥산 자연휴양림으로 향한다.
빗방울이 여전히 떨어졌다 멈췄다를 반복하고 있다.
'쏟아져도 상관은 없는데........ 제발 내가 텐트를 다 칠때 까지만 좀 기다려 주라. 응?'
춘양목이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오르며 숲을 이루고 있는 청옥산은 여름이면 울창한 산림 속에서 더위를 씻고 산림욕을 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더욱이 캠핑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덕유산 야영장과 함께 한겨울의 캠핑도 가능한 성지로 여겨지고 있는, 가히 캠핑장계의 5성급 호텔이라 불리고 있다. 아울러 이곳에는 유명한 캠핑용 데크가 둘 있는데, 하나는 복층 구조로 되어 있어서 2층 방갈로 처럼 사용할 수 있는 데크와, 다른 하나는 국내 최대의 초대형 캠핑 데크(4m x 6m)가 있어서 인터넷 예약단계에서부터 경쟁이 극한일 정도로 치열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리하여........ 8년 만에 캠핑을 다시 시작하기로 하고 첫 여행지로 청옥산 자연 휴양림을 거점으로 정한만큼 당연히 그 유명하다는 야영 데크를 목표로 염두에 두고 처음부터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씨구........ 제법 열과 성의를 드리기는 했지만......... 복층은 놓치고 초대형 데크라는 242번 데크를 예약하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이거야 말로...... OH, MY GOD !!!!!!!!!!
청옥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하여 관리소에서 체크 인을 하는데......... 국립공원 관리자 하시는 말씀이..........
'242번 데크를 예약하셨는데, 혹시........ 인터넷에 유포되어 있는 이야기 처럼 초대형 데크 때문이셨나요?'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쳐가는 어떤........ 슬쩍 불길한 느낌이........ 괜히 이 상황에서 그렇게 물어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네. 남들이 하도 좋다하기에 저희도 한 번 이용해 보려고............'
'242번 데크는 지금도 분명히 존재하는데요.......... 예전의 초대형 데크는 이제 아닙니다. 낡은 테크들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242번을 비롯해 몇 개의 대형 데크들을 부득이 빼버렸거든요. 현재의 242번 데크는 주변의 크기와 같은 일반적인 데크입니다. 저희 휴양림 공지 사항에 안내를 올려 놓았는데 읽어보지 못하셨나봐요?'
헐!!! (순간적인 멘붕 상태)
홈페이지를 통해서 예약을 하는 과정에서 한참 지나간 공지까지 꺼내서 일일이 읽어보는 사람이 어디있담???????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인걸...........
접수를 마치고 오솔길을 올라가 242번 데크 앞에 도착했다. 그저 고만고만한 (3m x 3m) 크기의 야영 데크가 242번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한참 주변을 둘러보다가 길 건너편 공터를 살피니 그곳에 아주 커다란 빈 데크가 놓여 있었는데, 다가가 살펴보니 그것이 폐기 처분한 (4m x 6m)의 옛 242번 평상(데크) 였다. 방부목이 상해서 너덜너덜 하기도 하고 피스(나사못)이 여기저기 삐쭉삐쭉 빼져 나와 있다.
미련을 접고...... 8년 만에 텐트를 다시 쳐 보는데........ 그게 왜 이리도 낯설기만한지....... 도무지 완성될 기미를 보이질 않는다. 어찌어찌해서 겨우 조립을 마치고 테크에 얹으려는데........ 아뿔싸!!!!...... 야영 데크가 작아도 한참이나 작다.
이럴 줄 알았다면 (3m x 3m)에 겨우 설치는 할 수 있는 작은 텐트로 바꾸어 왔을텐데.......... 미티미티.
빗방울은 떨어지고 저만치 하늘 구석에서 먹구름은 몰려 오는데........... 아!!! 어쩌란 말이냐? 이 난처한 상황을?
관리 사무소로 쫓아 간다. 사정을 설명하고 야영 데크 교체를 요청하는데......... (무조건 보다 큰 데크가 필요함.)
코로나 사태로 거리두기를 시행하고 있는 터러 비워 둔 대형 데크들은 더러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기는 한데,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입지 조건이 문제가 아니겠는가? 청결한지. 화장실 계수대 샤워장 과는 거리가 어떤지 등등을 염두에 항상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용 가능한 서너개의 데크 번호를 적어서 받아 들고는 이제 현장으로 하나씩 입지 조건을 일일이 확인하러 다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암튼 어찌어찌해서 최적의 대형 테크를 선정하기는 했는데......... 문제는 이미 힘들게 텐트를 조립해 놓은 기존의 242번 데크와 한참이나 떨어진 210번 데크를 선택했다는 점에 새로운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이거야말로 숲속 휴식을 위한 (캠핑 여행)이 아니라, (극한 직업)이나 (체험 삶의 현장)에 출연한 촬영장 꼴이 되고 말았지 않은가? 땀이 비오듯 흐르는데.......... 태리할망구랑 조립된 대형 텐트를 양쪽에서 쳐들고 숲속 길을 따라 242번 데크에서 210번 데크까지 야반도주하는 행색으로 이사를 감행한다. 이상스레 쳐다보는 여행자들에게 씁쓸한 미소로 대신 답을 하면서 말이다. 다행이 210번 데크에는 일단 텐트가 무사히 겨우 올라앉기는 했다. 휴~~~~~~~~~~
'다녀 올테니 잘 붙잡고 있어' 하고는 다시 언덕길을 죽어라 뛰어 올라가 사방에 너저분하게 펼쳐놓았던 짐보따리를 바리바리 차에다 꾸겨넣고는 서둘러 다시 새집으로 내려 온다. '지난번 아파트 이사때, 내 다시는 이사 안한다고 맹세까지 했었는데......... 헐. 이런 난감하고 어처구니 없는 이사를 또 하게 되다니....... 또 헐!'
아무튼 어찌되었던 간에 집수리를 마치고 이사를 왔으니 짐정리는 마쳐야겠는데......... 너무도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는지 눈이 마주친 태리할망구께서 왈.......... '말짱하고 편한 집 내버려 두고 시방 우리가 지금 뭔짓을 하고 있는겨?' 한다.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던 우리는 박장대소를 하면서 그대로 주저 앉아 버렸다.
여행은 떠나 왔고........ 비 쏟아지기 전에 어찌되었던 텐트는 쳐 놓았으니....... 더 이상 서두를 이유가 무엇인가?
여행하면서 유럽에서도 항상 우리가 하는 말.......... '가진게 전부 시간과 배짱 뿐인데 도대체 뭐가 걱정이여?'
짐정리는 차후의 문제고........... 차 뒷좌석 아이스 박스에서 5L 짜리 생맥주 통부터 꺼낸다. 밤새 김치냉장고에서 숙성(?) 시켜서 아이스 박스에 신주단지 모시듯 정성을 들인 녀석이다. 한참 생맥주 맛에 빠져버린 태리할망구를 위해서....... 이것저것 마셔보아도 생맥주만은 하이네켄이 최고의 맛이라나 뭐라나........
손에 집히는대로 방울토마토와 참외만 꺼내놓고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생맥주 파티부터 벌이는데..........
'부어라' '마셔라' '나와서 먹는 생맥주 맛이 최고여' '이거 오늘 다 아작내는거 아니여' '태백 이마트가 26km여. 새로 또 사면 되지 뭐' '저녁은 어떻하지' '생맥주에다 빵으로 때우지 뭐' '여기가 시방 이탈리아여 독일이여' '평소대로 하면 되여'
간만에 설치해보는 텐트라 대충 억지로 때려맞춘것 같고 팽팽하게 할래도 이제와서 일일이 끈을 매고 당겨매기도 그렇고 해서 대충 바람에 날라가지 않을 정도로만 해놓고는 날이 아직 훤한데 흐흐흐흐........ '지치고 땀흘릴땐 역시 생맥주가 제격이여' '인생 뭐 있어?'
이런게 딱 우리 부부의 여행 스타일이다.
마실만큼 퍼 마신 다음에야 짐을 꺼내 날라서 텐트 안에 정리를 하고........ 땅거미 내려앉고 나서 제4 야영장이 있는 산능선까지 산책을 하고 나서......... 가스 램프를 켜고, 다시 풍성한 우리만의 식탁을 차려서 소맥과 함께 조촐한(?) 저녁식사를 한 후에는 노트 북으로 (킹덤 오브 해븐)을 재감상하면서 오늘 하루 일과를 마친다.
내일은 또 우리 방식의 새로운 하루가 펼쳐지리라........ ㅎㅎㅎ
<백두대간 협곡열차> <낙동강 하늘 세평 하늘길 트래킹>
코레일(한국 철도공사)는 영동선 철도가 운행되고 있는 구간중에서 이땅에서 오지 중의 오지라 꼽을 수 있는 몇 개의 지역을 선정하여 그동안 교통이 불편하여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이들 지역의 빼어난 산수와 경치를 구경할 수 있는 특별 열차를 2013년 부터 신설하여 운행하고 있다. 이 열차의 명칭은 '백두대간 협곡열차' 이며, 별칭으로 'V - train' 이라고 부른다.
하루 2회 왕복하는 스케줄로 운영을 시작한 협곡열차의 운행구간은 (분천역 - 비동역 - 양원역 - 승부역 - 철암역) 이었으나, 개통 이후에 전국적인 뜨거운 관심과 참여로 붐이 일게되자 여행객의 편의를 위하여 부분적 개편을 단행하여, 첫차에 한해서는 (영주역에서 출발하여 - 봉화역 - 춘양역 - 분천역 - 양원역 - 승부역 - 철암역)을 정차하였다가 통과하는 왕복 운행을 하였으며, 다음 열차는 비동역을 제외하고 (분천역 - 양원역 - 승부역 - 철암역)을 운행하게 되었다.
2020년에 들어서 코로나 바이러스 19의 발생과 확산으로 운행과 중단을 수시로 반복하다가, 같은 해 8월 1일부터 정상 운행되었으나 12월 23일부터 지금 현재까지 완전 운행 중단된 상태이다.
<백두대간 협곡열차>의 개통으로 이곳 산간 오지로의 전국민적인 관심이 쏠리기 시작하였으며, 그 덕분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낙동간 하늘 세평 하늘길 트래킹>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쉽사리 접근조차 하기 힘들었던 산간 오지의 비경을 봉화군과 지역민들이 합심하여 실제로 걸으면서 체험과 감상을 할 수 있는 빼어난 트래킹 코스를 조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평 하늘길 트개킹>의 구간은 (분천역 - 양원역 - 승부역) 사이의 구간을 때론 '기차길을 따라서' 때론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서' 걷게되는 약 12km가 조금 넘는 구간이 되겠다.
여기에 매력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 기차(협곡열차)의 이용이 따라 붙는다는데에 커다란 메리트가 생겨난 결과이다.
중부지방이나 수도권 거주자는 분천역에서 열차를 타고 승부역까지 이동한 후에 다시 트래킹으로 출발 지점까지 돌아오면 되는 코스이고, 반면 영남권 거주자들은 승부역에서 열차에 올라 분천역에서 내린 뒤에 걸어서 다시 승부역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짧은 기차여행(일반 열차의 경우 14분 소요이지만 협곡 열차는 풍경 감상을 위해 아주 저속으로 달림)이겠지만, 열차 안에서 내다보는 풍경을 다시 걸어서 되돌아 오면서 두루 돌아볼 수 있는 결코 흔치 않은 여행지로서의 매력이 차고 넘치는 코스라 할 수 있겠다.
코로나 19가 잠잠해 질 때까지는 아마도 협곡열차는 꼼짝않고 그대로 멈춰 서 있을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경북 봉화로 여행을 떠나 온 마당에 이쯤에서 세평 하늘길 트래킹을 포기할 우리 부부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비록 협곡열차는 멈추어 서 버렸지만, 대신 일반열차(무궁화호)를 이용해 트래킹을 하기로 계획을 했고, 아침에 일어나 새벽 산책과 향긋한 커피로 상쾌한 아침을 실컷 누린 다음에 분천역을 향해 차를 몰았다. 기차표는 여행을 계획하고 나서 곧바로 충주역에서 예약 티켓팅을 해 두었던 상태라 시간적인 여유도 넉넉했다.
예쁜 우리 손녀들(태리. 세리)과 함께 오지 못했음에도 할망구는 정신줄 놓을만큼 혼자서도 잘 논다. 헐!!!!
간이역(簡易驛).
국어 사전을 찾아보면 아주 간단한 낱말 풀이가 나온다. '일반역과는 달리 역무원이 없고 정차만 하는 역' 이라는 설명이다. 뭔가 석연치 않게 슴슴한 표현일뿐 도무지 정답일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좀 더 전문적인 답변을 얻고 싶어서 철도청 홈페이지에서 간이역을 찾아 보았다. '보통역보다 등급이 낮은 역으로서 이용객이 많지 않아 보통역처럼 많은 비용을 들여서 역을 운영할 필요가 없을 때 지정하는 역' 이라는 오히려 더 아리송하고 맹탕 같은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아닌데....... 적어도 간이역은 이런 형식적인 틀에 갖힌 문구로 억지로 짜맞추듯이 대충 설명될 수 있는것이 결코 아닌데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결국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서 간이역에 대한 외국어 표현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중에서 그나마 가장 마음에 드는 표현을 찾아냈는데, 바로 영어 표현중에 간이연을 (flag stop, fiag station) 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flag stop) 이란, 손님이 있으면 역무원이 철로변에 나와서 깃발을 흔들어 기차를 세워서 태워주는 작은 역이라는 뜻이다. 그런가하면 기차 안쪽의 손님은 역무원에게 미리 내릴곳을 이야기하면 역무원이 차창 밖으로 깃발을 흔들어 이를 본 기관사가 열차를 알아서 세워주는 시골역의 의미도 담고 있다.
영어식 표현속의 간이역에는 우리들의 기억속에 아스라한.......... 미류나무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시골 비포장도로를 뽀얗게 먼지를 날리며 달리던 완행버스를 저절로 떠올리게 한다. 그래. 적어도 간이역은 저런 그리움으로 가득한 멋스런 우리들 추억 주변이었어. 암. 그렇구 말구.
간이역을 떠올리면 항상 어디엔가 깊이 감춰두었던 듯한 진한 페이소스(pathos)가 나도 모르게 따라 나온다.
적어도 우리 세대쯤은 되어야 느낄 수 있는 아날로그적 향수 때문이라고나 할까? 아련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간이역에 대한 기억은 이제는 한 세대쯤 훌쩍 지나가 버린 아득한 옛추억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가만히 좀 더 사실적으로 따져본다면 우리나라의 철도 역사는 일본의 침략과 함께 시작된, 외세의 힘과 침탈의 아픔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아픔의 상징임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일제가 열악한 우리나라의 도로 사정을 감안하여 사람과 물자의 교류를 원활하게 하여 경제생활 개선을 만들어 주려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을사보호 조약 이후로 일제는 본격적으로 조선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지진 활동이 빈벌하는 섬나라에는 부족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해안지방의 수산자원과 호남지방의 곡식은 그런대로 선박에 실어 일본으로 나르면 되겠는데, 산간 오지의 목재와 철광석이나 선탄 같은 지하자원은 운송이 거의 불가능해 지자 경인선을 시작으로 한반도에 거미줄처럼 기차 철도를 개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약탈을 위한 운송 시설로 철도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비록, 본래의 속사정은 그렇다해도 쉽사리 사람이 오가지 못하는 강원도 경상도의 산간 오지에 철길이 뚫리면서 부수적으로 사람과 물자가 오갈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이 조성 되었다. 주전역이나 춘양역 등의 산간 오지에 사는 사람들은 도회지에 시장 한 번 보려면 산 넘고 물 건너서 사나흘씩 걸어서 다녀와야 하는 일이 다반사 였다. 이런 오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기차란 일반 열차가 아니라 비록 화물차를 몰라 올라타고 뛰어내려야 하는 경우를 포함해서도 가히 혁명적인 새로운 교통수단의 등장이라고 아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간이역(簡易驛)은 이렇게 조선의 약탈을 위한 운송 수단으로서의 철도가 생겨난 이후에 단선철도(單線鐵道) 라는 태생적 한계에서 어쩔 수 없이 탄생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숫자도 얼마되지 않는 산간오지 마을의 주민이 채소며 산나물이며 약초를 바리바리 싸서 머리에 이고 새벽 기차를 타고 읍내 장에 가서 시장에 노점을 펼치고 가지고 온 것을 팔고, 해질녁 떨이로 라도 모두 팔아치운 다음에 고무신이며 양말에 꽁치 몇 마리라도 사서 짐바리에 싸서 이고는 저녁 기차를 타고 밤이 이슥해서 오지마을로 돌아 올 수 있겠끔 경제생활에 기여해주기 위하여 일제가 선처해 마련한 것이 결코 간이역은 아닌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억속에만 아련하게 새겨져 있는 옛스럽고 낭만적인 간이역의 정취일 뿐, 실상은 전혀 다르다.
영동선의 경우를 예로 치자면, 산간 오지로 목재와 석탄 철광석 등을 약탈하기 위한 기차가 청량리역에서 행렬을 이루어 지방으로 출발 한다. 제천 영월 태백의 역마다 수많은 철도차량에 석탄과 시멘트와 철광석을 봉화 역에선 춘양목을 가득가득 싣고 있다. 기차 한 대가 빈차로 내려가서 해당 화물차량만 채워서 온다면 약탈이라고 까지는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기차 철로는 하나(단선 철도) 인데 길게 행렬을 이룬 기차들이 수도없이 쏟아지듯 내려 가고, 가득 약탈물을 실은 기차들이 청량리로 올라와 다시 경인선을 통해 인청항 부두로 가서 일본으로 가는 선박에 약탈물을 싣게되는 것이다.
오르내리는 기차들이 교통망이 겹쳐지거나 고장이 나면 임시로 주철도에서 비켜나게 해서 정비를 하기 위해 엉쩔 수 없이 만든것이 바로 간이역 이다. 철길을 따라 옆에 늘어 선 전신주를 통해 간이역들마다 전보 통신을 주고 받으면서, 적절한 교통 활로를 모색하기 위하여, 하나의 간이역 구역에 상행선 열차들을 모아서 기다리게 하고, 하행선 열차들이 빠져나가면 다시 상행선 철로를 열어주는 방식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최선의 방책으로 창안해 낸 것이 바로 간이역인 것이다.
식민지 침탈과 약탈의 최전선에서 참호 역활을 수행하던 것이 틀립없는 간이역의 실제 용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간이역은 근대화 과정의 우리 서민들 역사 속에서 구구절절한 수많은 사연들을 잉태하게 되었다. 구성지고 살진 이야기는 물론, 피눈물로 얼룩진 아픔과 수많은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들이 그 안에 빼곡하게 새겨있는 것이다.
화전민이나 광부의 자식으로, 또는 무지랭이 농투성이의 자식으로 태어난 설움을 어떻게든 극복해 잘 살아보겠다고 막내 여동생의 중학교 등록금으로 한푼 두푼 악착같이 모으던 어머니의 쌈짓돈을 훔쳐서 새벽 기차에 몸을 싣고 떠나던 못난 오빠의 사연도 어느 간이역 대합실 담벼락엔 새겨져 있을 것이다. 지게꾼, 리어카꾼, 공순이, 차순이, 식순이 라는 이름 뒤에는 어쩌면 보이든 보이지 않든 빼곡하니 시골 간이역의 풍경이 고스란히 녹아 스며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간이역은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그런 그리움을 간직한 한 시대가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듣기만 해도, 생각만으로도 가슴 먹먹한 느낌들이 여운 처럼 눈 앞을 맴돌고 있다.
결국엔 헤어지고 만 첫사랑의 연인처럼 간이역은 가슴속을 아련하게 훼집어 놓고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어디론가 스쳐 지나간다. 한참을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살며시 뒤돌아 보니........ 가슴 한쪽을 아련하게 후벼파던 간이역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어쩔 것이냐? 가던 길이나 마저 갈 수 밖에.........
승부역에서 분천역에 이르는 (낙동강 세 평 하늘길)은 참으로 아름답다.
들길이며 숲길이며 물길과 철길이 두루두루 한없이 넉넉하고 아름답다. 간이역 처럼 마냥 처연한 모습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다시 하늘길로 접어든다.
"무릇 유람이란 아취((雅趣; 고아한 정취)가 중요하다.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아름다운 장소를 만나면 곧바로 멈추어 서서, 지기지우를 이끌고 회심처(會心處)를 찾아야 한다. 복잡하고 떠들썩한 것은 결코 나의 소망이 아니다. 어떤 이는 나에게 묻기를 '산중에서 가야금과 거문고 소리를 들으니 어떠한가?'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나의 귀는 다만 물소리와 스님의 낙엽 밟는 소리만 들었다네' 라고 할 뿐이다."
사람이 평온한 마음으로 자연과 하나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깨우침의 중요성을 조선 후기의 실학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선생께서는 <묘향산소기>에서 그렇게 적으셨다.
늘 시간에 쫓기고 먹고 살기에 고달픈 현실 속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갖고 즐겁게 살아갈 줄 아는 시대에 맞는 현대적인 삶의 지혜와 가치관과 멋을 우리에게 당부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이는 내가 트래킹(Tracking)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박제가 선생님의 가르침에 산책(散策)을 보태면, 그것이 바로 트래킹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낙동강 세 평 하늘길)을 걷는 이유 또한 모두 거기에서 기인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거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날의 (세 평 하늘길)은 그렇게 만만하거나 결코 호락호락 하지가 않았다.
가볍게 떠난 트래킹이 그만........ 옴팡진 고생길이 되고 말았으니.......... 모두가 내 탓이라!
사나흘간 계속해서 날이 잔쯕 흐리고 종일 빗방울이 오락가락 하는 날씨가 계속되었었다. 그래서 이날도 그러려니 해서 륙색에다 접는 우산을 하나 넣었을 정도였다. 12km 남짓의 (하늘 세 평길)을 걷는데는 4시간 남짓을 예상하는데, 중간 지점인 양원역 근처에 막걸리에다가 파전이나 도토리묵을 파는 점포들이 있다고 들었다. 거기에다 유일한 가파른 언덕길인 체르마트 고갯길 앞에 차와 커피와 음료와 맥주도 마실 수 있는 휴계소까지 있다고 들었고 확인했다.
그러다 보니 분천역에서 기차에 오를때 우리 차림새는 아주아주 간촐했다. 우리동네 호암지 산책하는 기분으로 륙색에다 카메라와 접는 우산과 캔맥주 하나가 전부였다. 그 흔한 김밥이나 생수 조차도 없었다. 가볍게 산책하면서 중간에 동동주에 도토리묵 무침이나 먹고, 고갯길에서 냉커피나 마시면 가뿐하게 이번 트래킹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랬던 것인데......... 고것이 고넘의 코로나 사태라는 복병 땀시 그만........
승부역에 도착해서 기차에서 내리고 보니 현지인으로 보이는 분들은 동네로 서둘러 들어가 버리고 (하늘 세 평길)을 걸으려는 폼으로 보이는 무리는 우리를 포함해서 달랑 세 팀뿐. 부피가 있어 보이는 짐보따리를 든 청년들 다섯이 한 팀으로 내리자 마자 벌써 앞장서서 돌진하다시피 하고, 주변을 살피다가 안내 표지판을 따라 기차역에서 나가는 두 번째 팀이 우리 부부였다. 세 번째 팀은 우리 또래의 부부팀으로 승부역사 사진을 찍으시느라 우리보다 조금 처졌다.
청년들, 그 다음에 우리 부부, 뒤로 또 다른 부부팀, 이렇게 세 팀이 거리를 제법 두고서 트래킹을 시작했다.
얼씨구?
강을 건너서 작은 숲길을 지나 본격적으로 강변을 따라 걷기를 시작하는데......... 낮에 한 두 차례 소나기가 제법 퍼부을것이라는 기상대의 예보가 점 점 뻥이었다는 확신이 늘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나마 여기저기 쬐끔 있던 조각 구름들 마저도 사라지고 말 그대로 완전 날 것의 쨍쨍한 태양만이 최고의 위엄을 잔뜩 뽐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이거 낌새가 좀 그런데? 이쯤에서 되돌아 가?'
뭔가 불길한 조짐을 떨칠 수가 없어서 슬쩍 옆눈질로 마눌님 표정을 은근히 살펴보는데........ 세상 근심 다 떨쳐낸 표정으로 태리할망구는 여전히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나간다.(하여간 울 마눌님. 걷는거 하나는 무지무지 잘 걷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앞 뒤를 살펴보니........ 앞서 간 청년들은 자취조차 보이질 않고, 돌아보니 다른 부부팀이 저만큼 뒤에 나타나 쫓아오고 있다. 후회막급, 진퇴양난에 사면초가란 이럴때 사용하는 것일까? 나아가자니 쌩 고생이 바가지일 것 같고, 포기하자니 두고두고 쪽 팔릴것 같고.......... 다시 죽어라 마누라 그림자 붙잡기로 가 볼 수 밖에.......
숲길도 지나고 기찻길 옆 제방 뚝길도 걷고 방부목 데크를 깔아 놓은 벼랑 지대도 지나간다. (하늘 세 평길)을 개설한 사람들의 노고가 고스란히 느껴져 온다. 주변의 풍광도 빼어난 멋진 트래킹 코스임에는 분명하다.
다만 날씨가........... 하염없이 닥달하는 뙤약볕이 원망스러운 점만 빼면.........
거북바위를 돌아나가는 데크를 돌아 산중턱에 오르는데.......... 앞 서서 달려갔던 청년들이 강물이 휘감아 도는 전망대에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 앉아있다. 쉬어가려나 하고 살펴보니 아니었다. 아예 자리를 차지하고 짐보따리들을 펼쳤는데......... 버너까지 꺼내서 아예 요리까지 할 심산인가보다. 혹 여기가 목적지였을지도........ 여기로 천렵을 온건가?
데크를 내려서서 다시 강변길에 닿으면서 우리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퓩색에 달랑 하나 들어있는 캔맥주가 냉기를 모두 잃고 밍밍한 상태였기에 잠시 쉬면서 마셔 없애기로 했다. 미지근한 맥주를 억지로 마셔가는 즈음에 후위의 부부팀이 나타났다. 서로간에 덕담이 담긴 인사를 나눈 뒤에 부부팀이 앞질러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때........ 눈에 확 띄는......... 이제 순서가 바뀐 부부팀은 각자 작은 배낭을 하나씩 메고 있었다. 분명 마실것과 먹을것이 들었을텐데............. 오메. 적어도 오늘만은 대단히 부러운거............
이제 상황이 이쯤 되었으니 대충 대충 추스려서 이야기하자면........... 어찌어찌해서 양원역 까지 도착을 했는데....... '개뿔!!!! 막걸리에 도토리묵은 무슨......' 허허벌판 사막에 내버려진 심정이랄까?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운영이 되지 않아서 모든 노점이 완전 폐점 상태라나 모라나......... 허니 어쩌겠는가? 체르마트 고갯길 직전에 있다는 휴계실을 목표로 다시 젓먹던 힘까지 짜내서 도착했더니만........... 기약없는 휴점이라나 뭐라나?
죽을뚱 살뚱 체르마트 고갯길을 넘어서는데 남의 속을 훤히 들여다 보고 있는 챠밍여사 왈......... '그래도 구담봉에 비하면 쬐끔은 수월하지 뭐' 라고 하면서 연실 내 표정을 살핀다. 이럴땐 당연히 묵언수행을 해야만 한다.
제법 세월이 한참이나 지나간 오래전 일이다.
그때도 이런 폭염이 계속되다보니 우리 모두 심신히 지치고 체력과 정신력까지도 고갈되어 가던 그런 시점이었다. 그래서 불쑥 '어차피 더운데 우리 산책이나 할까' 했더니만 마눌님이 순순히 '오 케이' 하는 것이 아닌가? 산책하면 주로 호암지를 걸어서 도는게 일과였던 처지라........ 딱 그런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호암지만 도는 것으로는 이 폭염사태를 극복하는데 한계가 있을것 같아서 '우리 나선김에 구담봉 산책이나 할까'로 급전환을 했다. 근처의 제비봉과 옥순봉은 가보았어도 당시까지 구담봉은 가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드라이브도 겸할겸 산책 코스를 급하게 구담봉으로 바꾸었는데........ 가파른 암벽에다가 철그물 로프까지 연실 매달려야만 오를 수 있는 가히 암벽등반 코스가 구담봉일 줄을 그땐 꿈에도 알지 못했었다. 암벽에 내려 걸린 철그물 로프를 올려다 보면서 마눌님 왈 '이게 산책이니? 암벽등반이지?'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되긴 했어도 그날......... 기어코 봉우리 정상을 너끈하게 찍더만...... ㅎㅎ
그렇게........ 그렇게......... 어찌되었건 우리는 (세 평 하늘길) 트래킹을 완주했다.
갈증도 나고 또 배도 어찌나 고프던지.......... 산해진미도 다 싫고, 술도 싫고......... 오로지 시원하게 빨리 먹을 수 있는것을 찾다가 만난 분천역 바로 앞동네의 한 막국수집........ 우리동네 막국수 하고는 비주얼도 맛도 전혀 다른 열무김치 막국수가 나온다. 시원한 열무김치 국물부터 들이켜 보니............ 와!!! 이제 좀 살것 같다.
(낙동강 세 평 하늘길) 트래킹은 나름 매력적인 코스라고 하겠다.
12km의 낙동강변길을 4시간반 정도에 걸으면서 산과 물길과 숲을 모두 감상 할 수 있는 결코 흔하지 않은 길이다. 거기에다 아련해져만 가는 간이역에 대한 향수도 느껴 볼 수 있다. 날씨 대비와 간식과 음료를 제대로 준비만 한다면 우리 보다 훨씬 즐거운 나들이가 될 것이다.
여행하려는 사람이나 준비하는 사람에 따라서 좀 더 쉽고 편하게 절반 정도의 코스를 선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승부역 <--> 양원역, 양원역 <--> 분천역, 이렇게 코스를 나누어서 살펴 본다면 나는 승부역에서 양원역 사이의 코스를 우선 선택 할 것이다. 이곳이 좀 더 아기자기하다는 생각이다. 주변의 풍광도 더 좋다고 할 수 있겠다. 거기에 비하자면 양원역에서 분천역 사이는 좀 단조롭고 지루한 느낌도 솔직히 없지는 않다.
가을이 되었던 겨울이 되었던.......... 코로나 사태가 잠잠해 지면 다른 계절을 택해서 우리는 (세 평 하늘길)을 찾아가 다시 걸어 볼 생각이다.
우선, 어서빨리 코로나 사태가 해결되어서 지금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지극히 평범한 과거의 일상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 무더위에 모두 건강하시고 힘 내세요. 찾아 주시고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