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0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주일>
선교, 시대에 부응한 교회의 본질
전교주일인 오늘 미사의 ‘본기도’는 ‘하느님, 모든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구원되기를 바라시니’로 시작한다. 선교, 복음화 이 모든 것은 곧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태 28:19)라고 하신다.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마태 28:20)을 말한다.
교회는 선교를 위하여 존재하며, 선교는 교회에 대한 주님의 명령이다. 그러므로 선교야말로 교회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구원에 차별과 구분이 없는 것처럼 선교 역시 차별과 구분이 없이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기에 교회의 선교활동은 구원의 보편성에 대한 증거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 복음에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라는 표현이 듣기에 따라서는 좀 거북할 수 있겠으나 당시의 스승과 제자의 의미를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단순히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의 관계로서 주종관계가 아니다(‘하느님의 벗’, 야고 2:23, ‘주님의 벗’, 요한 15:15). 물론 이것도 포함하지만, 당시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훨씬 깊은 의미를 지녔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그분의 삶을 ‘살아가는 자’요, 그분의 길을 함께 ‘걷는 자’다. 우리가 흔히 ‘제2의 예수’라는 표현을 쓸 때의 의미가 당시 제자의 의미에 가깝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올라 아버지 오른편에 앉아계시지만, 당신을 따르는 제자(현재, 우리 자신, 신앙인)들에 의해서 현존하시며 살아계신다고 할 수 있겠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통하여 ‘어디에나 계시는 것’이다.
이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다.’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겠다. 현대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제자란, 스승님과 뜻을 같이하고 그분의 진리와 정의, 사랑과 평화를 위하여, 자기 시대의 세상을 바라보고 그 길을 가고자 신의로 맺어진 관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에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여기’에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그분은 어떠하실까? 그분은 당시 율법학자든 바리사이든, 사두가이파든 이방인 사마리아인이든 누구도 가리지 않으셨다. 지금이라고 개신교다 불교다 천주교다 뭐다 해서 구분하실까? 중요한 것은 ‘당신의 제자인가?’ 하는 것이 아닐까? 그분의 뜻을 나의 뜻으로 삼고, 그분이 가신 길을 나의 길로 여기며, 그분께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나 또한 나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것이 그분의 제자이거늘 우리는 과연 그분의 제자인가? 그래서 누군가 ‘선교에 앞서 먼저 자신이 복음화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마태 9:35)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을 떠나’(마태 11:1)가신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라고 분명하게 밝히신다. 예수님의 말씀에 절실함이 묻어나고 간절함이 넘쳐난다. 잠시도 쉴 수 없다. 조금이라도 빨리, 더욱 많은 고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들’은 누구를 말하는 걸까? 길 잃은 어린양일까? 죄인으로 취급받으며 추방당한 병자들일까? 아니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의 기회를 엿보는 자캐오와 같은 이들일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라고 하시는 그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일까?
혼자서 그 무거운 짐과 일상의 송사(시빗거리)를 다 떠맡기에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신명 1:12), 죄악이 넘쳐나 무거운 짐처럼 버거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시편 38:5), 그물에 걸려들어 무거운 짐을 떠안게 된 억울한 사람들(시편 66:11),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자신이 암흑보다 더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 사람들(지혜 17:21), 이들이 울부짖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신다. 그런데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어떠했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선교란, 어쩌면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가며 증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태 16:6, 마르 8:15)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루카 12:1)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마르12:38, 루카 20:45)) 우리는 ‘탐욕을 조심’(루카 12:13)해야 하고 우리는 ‘스스로 조심’(마르 13:9, 루카 17:3)해야 하며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루카 21:8)해야 한다.
그럼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복음’이란 무엇인가? 성경에 의하면 복음은 ‘율법준수’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6)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에는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고대 근동지역의 문화 특성에 비추어서 볼 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획기적이며 충격적인 소식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제정일치 사회로서 왕과 귀족 그리고 노예와 천민으로 구분되는 신분 계급과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이 통용되는 미진화된 사회에서 ‘모든 이에게 열린 구원’이란 개념은 놀라움을 넘어선 충격이었을 것이다.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에서 ‘제한 없는 종교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을 반포하였듯이, 역사적으로도 신분을 넘어선 ‘구원의 보편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종교의 자유’를 주고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로마’를 위해 싸우도록 한 사실이 매우 흥미롭지 않은가?
작금의 우리 사회는 검찰의 독립성에 대해서조차도 일치된 모습을 보이지 못할 만큼 왜곡된 사고와 일그러진 정의 속에 살고 있다. 어쩌면 예수님 시대나 지금 우리의 시대나 구원의 관점에서 볼 땐 달라진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마치 이를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누군가 내 이름을 들먹이며 ‘내가 그리스도다.’ 또는 ‘때가 가까웠다.’(루카 21:8)하고 말하더라도 속지 말고 그들을 따라가지(추종, 제자가 됨) 말라고 당부하신다. 선교는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세상에 외치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진리와 정의 그리고 사랑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는 그 시대의 정치적 정의와 경제적 윤리와 무관할 수 없고 길을 잃은 자들, 힘없이 희생양이 되는 자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비천한 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이고 그들 곁에 함께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그곳 사람들을 만나셨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셨다. 수많은 병자, 가난하고 자기 앞길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마태 9:37, 38, 루카 10:2)라고 안타까워하시며 더 많은 일꾼을 보내달라고 청하기를 당부하셨다.
선교란, 달리 어떤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넓은 의미에서 선교는 교회의 모든 ‘사도직 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좁은 의미에서는 가두선교나 방문선교 등의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선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사도직 활동’이라는 큰 틀에서 찾을 수 있으며 교회 공동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 즉 ‘하늘나라의 증거’가 되느냐에 따라 더 결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마태 23:27)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32)
예수님 시대에도 훼방꾼이 있었고 그들은 더 나아가 자기들의 탐욕이 노출될까 봐 작당하여 끝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고야 말았다. 한 사람만 제거하면 모든 백성이 혼란에 빠지는 것보다 낫다고, 교회의 역사에는 많은 그림자가 있다. 이 그림자가 인간의 조건상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에 따른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하는 사람들을 방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게으르고 나태한 자들은 회칠한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다.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새로운 역사적 시대상에 비추어 하느님의 뜻을 더욱 깊고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이에 적극적이고 부지런히 쫓는 것도 이 시대의 선교에 있어 중요한 본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자기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교회는 ‘회칠한 무덤’과 같을 것이기에 하느님의 창조물인 ‘시간’ 안에서 우리는 늘 새롭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