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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5. 묵상글 들,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내 인생의 동반자-김찬선 신부님 묵상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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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5. 김레오나르도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내 인생의 동반자
돌아보면 지금까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복음을 읽을 때
제가 주님처럼 누군가를 동반하는 관점에서 주로 읽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는 주님의 동반을 잘 받고 있는지 성찰케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수도원 부활절 연중행사로 엠마오를 많이 다녀오긴 하였지만
봄나들이 식의 연중행사였지 주님께서 진정 제 인생의 동반자임을
성찰하는 그런 엠마오 성찰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 또는
방향전환의 여정이라고 이번에 저는 묵상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방향 전환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으니 말입니다.
주님의 돌아가심으로 두 제자는 제자의 꿈이 좌절되었다는 절망감에
무작정 예루살렘을 떠났는데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깨닫게 하심으로 다시 제자들의 공동체에 합류케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공동체를 떠난 것이 잘못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없는 제자들의 공동체는 공동체도 존재 할 이유가 없지만
존재할 이유가 없는 공동체에 두 제자가 있어야 할 이유도 없는 거지요.
사실 우리 수도 공동체도 많은 사람이 이런 이유로 떠납니다.
자기가 자신이 없어서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공동체가 희망이 없거나 사랑이 없어서 떠난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 근본적으로 하느님이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어디든지 계시는 하느님이 우리 공동체엔 안 계실 리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하느님이 우리 공동체에 안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자기가 공동체에도 하느님이 없다고 보는 거지요.
사실 많은 경우 내 안의 절망이 공동체의 희망도 보지 못하게 하듯
내가 하느님 체험이 없기에 공동체 안에 계신 하느님도 못 보는 겁니다.
이것은 남 얘기가 아니라
제가 수도원을 떠날 때의 경험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수도원을 떠날 때는 프란치스코가 싫어서 떠난 것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는 너무도 멋지고 그래서 저도 그렇게 살고 싶은데 우선
제가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고, 공동체도 저에게 희망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을 나와 몇 달을 사는데
어느 날 부자 청년의 얘기를 읽으면서
오늘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깨달음이 오면서 하느님도 같이 제게 오셨습니다.
저의 성소 안에서 강한 하느님 체험이 없었기에 하느님 없이 살아왔고
하느님이 제 안에 안 계셨기에 저에게서도 공동체에게서도
희망을 제가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 제가 수도원을 떠나지 않고 산 것은
제가 자신이 있어서 산 것도 아니고 공동체가 훌륭해서 산 것도 아니며,
오로지 하느님께서 부르셔서 산 것이고 하느님의 힘으로 산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유턴하게 하신 하느님이
저도 유턴하게 하신 것이고 그래서 그렇게 유턴하여 수도원에 돌아가니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제자들 공동체에 돌아갔을 때 그때에야
제자들이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라고 하듯이
저도 그때에야 공동체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엠마오의 제자들과 저뿐 아니라 우리 신자들도 너무 실망하여
주님의 교회/공동체를 떠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놈의 교회엔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될 때 하느님이 진짜 그 교회 안에
안 계신 것이 아니라 교만의 눈이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을 못 보게 하는
것임을 오늘 제자들처럼 깨닫게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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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5. 이영근 신부님.“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양주 올리베따노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 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 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예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과 믿음이 무너졌다고 여긴 까닭에 절망하고 슬퍼했기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걸으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깊어져야 하고, 변화되어야 하고, 정화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그들은 먼저 그분에게서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사실, 실망과 절망에 빠질 때가 가장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실망하고 절망에 빠지고 슬퍼질 때, 바로 그때가 우리의 희망을 내려놓아야 하고, 우리의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뜻과 생각이 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눈이 가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알아야 할 바를 제대로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주시고,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는 세 과정을 봅니다. 그리고 이는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렉시오 디비나)의 세 과정에 비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열리게 되고(open mind), 가슴이 열리게 되고(open heart), 우리의 뜻이 바뀌게 되는(open will) 과정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개방과 말씀의 수용과 말씀으로 말미암은 변형입니다. 말씀을 듣고서 지성을 동반하여 깨달아 알아듣고, 알아들은 바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으며, 믿는 바를 그분의 뜻에 따라 실현함으로서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외적인 눈이 열리고, 속눈이 열리고, 영의 눈이 열리고, 마침내 그분을 뵙게 되는 일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기도 -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6)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제 안에서 숨 쉬시며, 발걸음과 함께 걸으신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뼈 속 깊이 계시고, 입술에 가까이 계시고,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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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5.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루카 24,17).”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루카 24,19-21)”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침통한 심정’이 된 것은, 예수님에게 ‘큰 기대’를
걸었는데, 그 기대가 ‘너무 큰 실망’으로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라는 말은,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그분은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으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예수님을 사람들을 구원하실 구세주로 믿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두 제자뿐만 아니라 사도들과 신자들 모두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으니 너무 허망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두 제자는 자기들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즉 그들은 메시아가 아닌 사람을 메시아로 잘못 믿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고,
“메시아께서 왜 그런 수난을 당해야 하는지, 또 왜 그렇게 돌아가셔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왜 꼭 그런 방식으로 하셨어야 했는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고 있더라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파스카의 신비’ 라고 부릅니다.
(‘신비’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그런데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일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5-27).”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구약성경에 있는 메시아의 수난에 대한
예언들과, 그 수난의 의미와 이유 등을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수난 뒤에 부활이 있음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어린양으로) 바치신 일이라는 것이 우리 교회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에 대한 설명이고,
“왜 꼭 그런 방식이어야만 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두 제자가 예수님에게서 들은 설명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떻든 두 제자는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서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깨달았고, 실망감에서 벗어나서
예수님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0-32)”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에는 두 제자의 마음이 열렸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에는 눈이 열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제자의 마음과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은,
예수님의 인도로 그들이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직후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일, 또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초월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셨어도 놀라지도 않았고
당황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은 보이든지 안 보이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라는 말은,
그들이 어떤 감동에 사로잡혔음을 뜻합니다.
그 감동을 ‘영적 은혜의 충만함’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자기 눈에 예수님의 모습이 안 보여도
예수님께서 언제나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고,
그 믿음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미사 전례 중에, 또는 기도 중에, 또는 성경 묵상 중에,
또는 사랑 실천을 통해서,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예수님께 기도를 드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살아계신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 가운데에, 또는 우리 곁에 존재하십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만난 것을 기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자기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증언했습니다(루카 24,35).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엠마오 사이의 길을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엠마오로 가는 길’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예수님에게서 떠나가는 길이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다 보면 중간에 십자가를 만나기도 하겠지만,
끝까지 잘 걸어가면 부활과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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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5.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이야기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있었던 두 제자의 대화는 그들의 삶과 미래 전체가 달려 있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근심과 걱정,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가가시어,
당신에 대한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시며 믿음과 희망을 되찾아 주십니다.
특히 제자들과 함께한 식탁의 자리에서는 부활하신 당신을 알아보게까지 하십니다.
제자들의 대화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제자들이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오늘 독서에서도 베드로와 요한은 평생을 실의와 절망 속에서 이웃의 물질적 도움에 기대어 살아왔던 불구자에게 새 삶의 희망을 제시합니다.
성령을 받은 두 사도는 주님의 이름으로 바로 그에게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나그네 인생길이며 주님을 따르는 순례의 여정에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성경 말씀과 영원히 배고프지 않게 할 생명의 빵으로 함께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과연 무엇에 우리 삶의 희망을 두고 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 간절히 청합시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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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5.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날입니다. 투표는 소중한 권리입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선택한 후보와 당에게 여러분의 표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87년부터 7번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습니다. 84년부터 10번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습니다. 군대에서도 했었고, 주민 센터에서도 했었고, 성당에서도 했었고, 상가건물에서도 했었습니다. 방송국에서는 투표가 끝나면 출구조사를 통해서 정당의 예상 의석수를 발표하였습니다. 때로는 예측이 틀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예측대로 개표가 이루어졌습니다. 국민의 선택을 받은 당선자들은 선거유세 때 말했던 것을 앞으로 4년 동안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선거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구도, 주제, 인물’입니다.
야당은 집권당의 국정에 대한 평가와 심판을 구도로 잡습니다. 집권당은 국정 운영에 대한 지지와 협조를 구도로 잡습니다. 국정 운영에 대한 심판이 우세하면 야당에게 유리할 것입니다. 국정 운영에 대한 지지와 협조가 우세하면 집권당이 유리할 것입니다. 판단은 유권자의 몫입니다.
야당은 경제 정책의 실패와 부정과 부패를 주제로 주로 정부 정책에 대한 비난과 비판을 주제로 이야기합니다. 집권당은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기를 바랍니다. 개혁과 혁신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지를 호소합니다. 경제 정책이 잘못되었고, 부정과 부패가 많다고 판단하면 야당이 유리할 것입니다. 개혁과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집권당이 유리할 것입니다. 판단은 유권자의 몫입니다.
선거를 이끌어가는 것은 후보자입니다. 참신하고 검증된 후보자, 경력과 능력을 겸비한 후보자, 존경받고 사랑받은 후보자를 공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야당도 집권당도 후보 공천에 심혈을 기울이기 마련입니다. 선명성 있고, 능력 있고, 도덕성을 겸비한 후보가 많은 정당이 유리할 것입니다. 그 판단도 유권자의 몫입니다.
우리는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부활을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변화입니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나약한 제자들은 거리로 나가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베드로와 요한은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걸을 수 있도록 기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베드로에게 금이나 은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전해주신 복음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기적을 행하니까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덧 제도와 규율이라는 틀에 우리를 가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성과 과학이라는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변화된 신앙인들에 의해서 전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엠마오입니다. 오늘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엠마오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가슴이 뜨거워 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고, 예수님을 향한 마음이 뜨겁다면 우리는 언제나 엠마오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신앙이 메말라간다면 아무리 성지순례를 해도, 좋은 곳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편안한 잠을 잔다고 해도 그곳은 엠마오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하는 이웃을 사랑하고, 나의 가진 것을 기쁜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다면,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있다면 역시 그곳이 엠마오입니다.
세 번째는 만남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였던 사람을 만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였던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서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몸으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좌절과 실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풀이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빵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두 사람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감동을 다른 제자들에게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만남을 통해서 사랑을, 기쁨을, 위로를,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의 만남을 통해서 주님의 은총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삶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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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5. 새벽을 열며.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빠다킹신부님
땅바닥에 폭 30cm의 간격으로 두 개의 선을 긋습니다. 이 폭 30cm 간격 사이로 똑바로 걸어갈 수 있을까요?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폭 30cm는 두 발을 모아도 남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땅바닥이 아니라, 3m 높이 위에 폭 30cm가 되는 나무다리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다리를 땅바닥처럼 편하게 걸을 수가 있을까요? 아마 불안한 자세를 취하며 걸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혹시 나무다리에 몸을 완전히 기대서 힘들게 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땅바닥의 선과 3m 높이의 다리는 폭이 30cm로 똑같은 크기입니다. 하지만 그 위에 올라섰을 때의 반응은 분명히 다릅니다. 어쩌면 3m 높이에 있는 나무다리의 폭이 더 좁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발을 헛디뎌서 3m 아래로 추락할 수 있다는 의심이 두려움을 만듭니다. 땅바닥에서는 절대로 이 폭에서 벗어나는 실수를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혹시’라는 아직 일어나지 않는 가정을 하면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많은 두려움을 안고 있는 우리입니다. ‘혹시’라는 일어나지 않는 가정들이 할 수 있는 것도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를 복음이 전해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지요. 이 제자 역시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주님께서 함께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셨지만, 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뵙지 못합니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라고 표현된 것을 볼 때, 예수님과 가까운 관계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 죽음에 대한 실망, 절망, 그리고 의심까지 이러한 부정적인 마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앞서 땅바닥에서와 3m 높이 위에서의 마음가짐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마음가짐이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도 누구와 걸어가는지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뵈었던 순간은,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을 때라고 합니다. 바로 미사를 통해 특히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아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가리켜서 어렵고 힘든 곳이라고 말합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과 시련의 공간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실망, 절망,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님께서 주십니다. 두려움을 접고 대신 큰 희망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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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상황을 바꿀 수 없을 때는 우리 자신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빅터 프랭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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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성격도 괜찮아
어렸을 때 자기표현을 잘하는 사람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자기 의견을 내세워서 그 뜻을 관철하는 것을 보며, 저 역시 그렇게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하고 늘 후회만 할 뿐입니다.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하는데….’라고 말입니다. 동시에 ‘나는 왜 그렇게 말하지 못할까?’라며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말을 하게 되면 울렁증이 시작되면서 떨려서 제대로 말도 못 했습니다. 또 후회했습니다. ‘괜히 말했다’라고 말이지요.
현재, 그때의 모습이 후회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의견을 잘 내세우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모두와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친구들을 지금도 만나고 있는 것도 당시의 소극적인 모습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비판적이고 자기 의견을 내세우는 사람은 외로울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친구를 많이 사귀어야 할 시기에 가지고 있었던 저의 성격은 친구와 함께하기에 분명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떤 성격도 다 괜찮습니다. 자기의 성격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이 성격을 통해 분명히 더 나은 나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선 부정하고 보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이유는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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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5.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참 멋지고 아름답다!”
-예수님, 베드로, 주님을 만난 우리들-
오늘 사도행전, 루카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저절로 솟아난 “참 멋지다”란 말마디입니다. 내용도 멋지고 아름답지만 나오는 인물, 예수님, 베드로, 주님을 만난 제자들, 치유받은 앉은뱅이, 모두가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매해 이날 읽을 때 마다 늘 새로운 감동으로 와 닿은 독서와 복음말씀입니다.
오늘은 4.15일 제21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날입니다. 우리 역시 투표소 안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내 손에 달린 내일의 정치’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잘 투표하기기 바랍니다. 어느 기자와 저명 신자분과의 인터뷰 한 대목입니다.
-기자; “일반 신자들은 어떤 믿음을 갖고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까?”-
-저명 신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야기한 바가 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비밀투표를 한다. 이는 모세의 장막과 비슷하다. 모세는 자신의 백성을 거느리고 이집트를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장막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하느님과 만났다. 하느님과 독대하는 자리인 것이다.
투표소에서도 하느님과 일대일로 마주한다. 당신이 누구에게 투표하는지는 하느님만 안다. 하느님의 가르침대로만 투표하면 된다.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받는 사람을 위해 한 표를 던지는 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이다. 이 외에는 이기심일 뿐이다. 다른 종교 신자도 마찬가지다. 불자라면 부처님의 대자비에 따라서 투표하면 된다.”-
투표소를 모세가 하느님과 독대한 만남의 장막에 비유한 점이 이채롭고 공감이 갑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는 장막과 같은 투표소가 경건한 마음을 지니게 합니다. 부활대축일후 맞이하는 선거날,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대한민국에 함께 하기를 빕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참 놀랍고 멋진, 아름다운 삶입니다. 마침 어제 써놓은 ‘오늘의 소망’이란 글을 나눕니다. 날마다 이 소망대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이런 멋지고 아름다운 소망의 실현이겠습니다.
-“영혼은
하늘의 새처럼/가볍자/날자/자유롭자
아무도 탓하지 말자/깊어지자/높아지자
함께해도/홀로 서자
이래야 평화로운 공존이다/성공적 공동체 삶의 비결이다
끊임없이 낮아져
깊어지자/높아지자
끊임없이 비워/사랑으로 채워 넘치도록 하자
오, 이게 참겸손, 참사랑이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내적으로 낮아지고 깊어집니다. 역설적으로 높아져 자유로운 삶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에 참 담대하고 활기가 넘치고 자유롭습니다. 막힘이 없습니다.
“우리를 보시오” 태생 불구자와의 눈맞춤(아이 컨택트)을 시도한 후의 은혜로운 말씀은 그대로 베드로를 통한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름다운 문’이란 성전 문 곁에 자선에 의지하여 살던 걸인 불구자 제대로 눈들어 보기는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마다 따뜻한 눈맞춤의 사랑을 실천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생각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습니까! 신바람 나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베드로처럼 언제나 부활하신 주님을 모신 이들이 참 멋진 영적 부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모신 자가 진정 참 부자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주님이야말로 우리가 이웃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저는 봉헌금이 적거나 빈손으로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미안해 하는 분들에게 는, “전혀 개의할 바 못됩니다. 자매님 자체의 삶이 최고의 봉헌 선물입니다.”라고 지체없이 격려하며 때로 안아드리기도 합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이들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고 기쁘고 고맙습니다. 주님의 마음도 이러할 것입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대로 영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이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치유의 기적입니다. 베드로가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는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제자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치유받고 하느님 찬미와 감사로 응답하는 태생 불구자도 참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 이런 치유의 기적입니다. 온백성은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驚歎하고 경악驚愕합니다. 얼마나 멋지고 놀랍고 아름다운 장면인지요. 진짜 아름다운 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엠마오 도상에서 실의에 빠진 두 제자들을 만나 힘을 북돋아 주시는 부활하신 주님은 얼마나 멋지신지요. 우리의 눈이 가려 부활하신 주님을 뵙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겠는지요. 사랑의 눈만 열리면 형제들 하나하나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임을 깨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복음의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은 낯선 동행인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이들은 바로 우리와 함께 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이실 수 있습니다. 깨어 잘 보고 잘 들어야 할 것입니다. 낯선 이를 환대하여 빵을 나눌 때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 본 제자들입니다. 그대로 복음 후반부는 성찬전례를 상징합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참 멋지고 아름다운 장면이요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깨닫는 제자들의 모습도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이런 깨달음 역시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입니다. 그러고보니 엠마오 도상의 복음 이야기 전반부는 미사로 하면 전반부 말씀전례에, 후반부는 성찬전례를 상징합니다.
엠마오 여정이 상징하는바 인생여정이요, 인생여정에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는 미사전례가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하겠다”(마태28,20ㄴ)는 말씀처럼, 우리의 인생여정에 영원한 평생 도반, 부활한 예수님을 깨닫게 해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이 되어 이웃에 참 좋은 선물이 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어제의 아름다운 본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느님,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저희를 치유해 주셨으니, 천상 선물도 풍성히 내리시어, 지금 세상에서 맛보는 기쁨과 자유를, 하늘에서 온전히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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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5. 주님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분이 알려주셔야 비로소
오늘은 국회의원선거일입니다. 고귀한 참정권의 행사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내가 누구를 뽑는다는 생각보다는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달라고 기도하신 후에 투표에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그를 선택하십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무슨 특별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뿐입니다. 마음에 있는 얘기는 기회가 되면 할 것이고 지금은 묵묵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큰일을 치루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무기력한 죽음에서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졌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시고 더더욱 그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늘같은 스승이 힘없이 사라졌으니 거기에 있다가는 어떤 불똥이 튀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사실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자기 영광 속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눈이 뜨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큰 실망과 좌절만이 더하였습니다. 실망이 큰 만큼 기쁨이 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자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깨우침이 남아있었는가 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창세18,1-15)하였듯이 나그네를 묵어가라고 붙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마침내 나그네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알 것을 알았으니 더 이상 거기 남아계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가던 길을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셔야 그분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눈이 뜨인다는 가르침을 얻게 됩니다. 또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다만 내 아픔이 커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면서 마음을 열어 주시고 뜨겁게 해주시지만 지금 당장은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절망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주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지 함께 묵으십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1,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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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5.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오늘 미사의 독서 대목들은 매우 유명하고 감동적인 일화들입니다.
복음은 예수님 죽음과 시신 실종 후 엠마오로 되돌아가는 제자들 이야기입니다. 평소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다가왔는데 오늘은 제자들의 행동이 부각되어 들어옵니다.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루카 24,17).
무너진 기대, 깨진 꿈으로 실망과 두려움에 차서 내려가는 귀향길에 웬 낯선 이가 가까이 다가와 함께 걷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을 주고받느냐는 그의 질문에 제자들은 멈추어 서지요. 예루살렘에서 멀어지는 낙향의 발걸음을 "멈추고" 낙담과 절망으로 헛도는 말을 "멈춥니다." 이 "멈춤"에서 구원이 시작됩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7).
그리고 그들은 귀를 기울입니다. 듣습니다. "말씀"이신 분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을 흡수합니다. 후에 고백하지만, "그분이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타오릅니다"(루카 24,32 참조). "멈춤"으로 부활하신 구원자께 자신들을 개방한 그들은 "들음"으로써 구원을 섭취합니다.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루카 24,29).
그들이 적극적으로 주님을 붙듭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나 그이를 붙잡고 놓지 않았네"(아가 3,4). 찾아 헤매던 님을 만나, 그를 붙잡고 놓지 않는 아가의 여인이 떠오릅니다. 이 적극적 행동은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사랑의 의지입니다.
"멈추고", "들은" 그들은 이제 구원을 꼭 "붙듭니다." 말씀을 더 듣고 싶고 그분과 계속 함께 머물고 싶습니다. 아직 이성은 감지 못해도 사랑이 사랑을 알아본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일치, 하나됨을 지향합니다.
제1독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베푼 치유 이야기입니다.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사도 3,2)
오늘의 주인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단 한 번도 서거나 걷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는 "성전 문 곁"(사도 3,2)에서 구걸을 해 연명합니다. 그가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는 곳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사도 3,7).
그는 단순히 습관적으로 물질적 동냥을 바랐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치유를 선사합니다. 걷기는커녕 일어서 본 적도 없던 그가 오른손을 잡아 끄는 베드로에게 몸을 맡깁니다. 가능할지 불가능할지 재고 따지고 할 것 없이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사도 3,6)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사도 3,8).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그가 걷기 시작하면서 자기 발로 가장 먼저 향한 곳이 성전입니다. 그동안 그 언저리에서 사람들의 자비에 몸을 맡겼던 그가 이제 뚜벅뚜벅 제 발로 성전 안을 걸어 들어갑니다. 거리상으로 보면 그리 멀지 않지만 "성전 문 곁"과 "성전 안"은 엄청난 간극을 지닌 거리입니다. 걷고 뛰고 찬미하는 그에게서 기쁨과 행복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복음 속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제자들의 발길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들은 말씀과 빵의 나눔을 통해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고"(루카 24,31) 다시 용기를 내어 발길을 되돌립니다. 이제 그들은 선포하고 나누며 힘차게 제자의 길을 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말씀과 성체로 우리와 함께하시지요. 그런데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호응하고 해야 할 몫이 분명히 있다는 걸 오늘의 말씀은 들려 줍니다. 멈추고 듣고 붙들고, 쳐다보고 내어맡기고 일어나 걷고 뛰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가운데 구원이 무르익어 갑니다. 완성을 향해 갑니다. 주님과 우리의 사랑은 성전 안 지성소가 상징하는 존재의 깊은 마음자리에서, 주님과의 영원한 일치로 완성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하루 "말"은 좀 줄이고 다가오시는 말씀을 기다립시다. 누구를 통해서건, 사건이나 기억을 통해서건 그분이 지나치시기 전에 멈추고, 듣고, 붙듭시다. 부활 체험은 나약한 죄인인 우리에게서도 이렇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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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5.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24,31)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약11키로)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향하는 그들의 표정이 침통했다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의 죽음 안에 갇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실망을 안고 자기들 삶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과 함께 걸어가시면서 대화도 하시고 당신에 관한 성경도 풀이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았을 때,
곧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을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발길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터닝 포인트!'
오늘 복음이
예수님을 만나야 터닝 포인트 할 수 있고,
말씀 안에 머물고 성체를 받아모시고 영적인 눈이 열려야 터닝 포인트 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들려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어가시오."(사도3,6)
베드로의 이 말이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이 일어나 걸어가게 되는 '치유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굳게 믿으면서, 영원한 생명을 그리워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우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가
우리들 안에서 날마다 일어나야 하는 '회개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의 고통이 영과 육의 건강과 피조물들의 건강이 회복되는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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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5.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사도행전 3,1-10
루카 24,13-35
동반자이신 하느님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가장 큰 목적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청소년들의 신앙 여정을 잘 동반(同伴)하는 것!
가난하고 상처 입은 청소년들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직면하게 될 여러 가지 도전들을 잘 극복하고, 일상의 삶을 충실하고 기쁘게 살아, 무사히 하느님 나라에 도착하도록, 옆에서 지속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저희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동행(同行), 동반(同伴)! 말만 들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단어들입니다.
‘엠마오 사건’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 인간을 동반하시는지를
너무나도 명확히 드러내고 있는 사건입니다.
스승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실의와 절망 속에 길을 걸어가고 있는 두 제자들 사이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바로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스승님을 몰라봤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일이 아닐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한 곳이 아니라 이 세상 어디든지 현존하고 계십니다.
대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매일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 사고 속에서,
내가 가정이나 일터에서 만나는 인간관계 안에 현존하시며, 우리와 매일 함께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엠마오로 걸어가던 제자들처럼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언제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뵈었을까요?
날이 저물어 한 집에 들어가신 그분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그분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주셨을 때!
그제야 제자들은 눈이 열렸습니다.
그때 비로소 스승님임을 알아 뵈었습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특별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차린 제자들이 감동하고 기뻐하는 그 순간, 스승님께서는 또 다시 홀연히 당신의 모습을 감추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 방식이 명확히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언제나 자신들의 신앙여정 안에 지속적으로
충실히 동반하고 계신다는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종전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에 현존하십니다.
때로 나타나시지만 즉시 사라지십니다.
여기도 계시지만 지구 반대편에도 계십니다.
저 멀리 위에도 계시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도 자리하십니다.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함께 길을 걸으시고, 대화를 통해 이것 저 것 자상히 가르쳐 주시고,
빵을 떼어주시고, 그러나 또 다시 사라지시고...
참으로 묘하신 하느님, 신비의 절정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 한 가지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우리 앞에 확연히 나타나십니다.
다시 말해서 매일 우리가 거행하고 참여하는 성체 성사 안에서 꾸준히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가 좀 더 잘 준비되어야겠습니다.
좀 더 경건하고 깨어있는 태도로 임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다가오시고, 영성체를 통해 우리 눈이 열려 주님을 뵈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매일 내게 다가오신다신 것,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내 인생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신다는 사실,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정한 친구의 모습으로 매 순간 내 옆에서 함께 걸어가신다고 생각하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듯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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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5.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사도행전 3,1-10
루카 24,13-35
우리는 성경공부로 성경을 가르치는 이의 믿음을 전수 받는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가 한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며 또한 생계를 힘들게 만들었고 부활절 미사도 TV로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세계가 하나이기 때문에 이기적인 국수주의가 통하지 않는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했고,
공기가 정화되었으며,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는 ‘신천지’라는 사이비가 만천하에 드러나서
다행히도 많은 이들이 그들의 약은 방법을 통한 전교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 젊은이들이 사이비나 이단의 허황한 교리에 빠질까요?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보다 성경이 더 중요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성경 자체가 문자 그대로 진리인 양 믿는 것에서 이단이나 사이비가 발생하고 또 그런 것에 빠지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교회에서 요한 묵시록을 성경에서 빼겠다고 하면 될까요, 안 될까요?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어차피 교회가 교회의 권위로 묵시록을 성경에 넣었으면 교회의 권위로 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 위에 놓으면 안 됩니다.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위는 교회에 있습니다.
“성경 해석에 관한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해석하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그 직무를 수행하는 교회의 판단에 속한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19)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단이나 사이비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들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실 연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시간에 우리의 것을 더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일반대학교에 다닐 때는 집에 ‘여호와의 증인’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그때도 천주교 신자들이 성경으로 설득하는 여호와의 증인에 많이 넘어갔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펴며 알려주는 교리들은 너무나 설득력이 있었지만, 천주교 신자는 성경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교리도 잘 몰랐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여호와의 증인을 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당히 맞서 싸웠습니다.
그때 저는 ‘나주 율리아’도 믿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당시 공공연하게 성모님의 피눈물 흘리는 책자를 성당에서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저도 가감 없이 믿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설명하는 여호와의 증인 앞에 피눈물 흘리는 성모님의 사진을 가져다 놓으니
그들이 설명하는 성경 말씀이 힘을 잃었습니다.
낮은 수준에 있는 사람이 안 되니 그다음은 더 높은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역시 성경은 모르지만, 나주의 피눈물 흘리는 성모님의 사진으로 맞섰습니다.
그들은 저의 믿음을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그때 믿었던 성모님의 피눈물 흘리는 것이 조작으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나주 율리아가 제병을 휙 던져서 위에서 떨어지는 장면이나 성모님의 피가 돼지 피라는 것, 그리고 율신액이라고 하여 나주 율리아의 소변을 나누어 마시는 장면 등이 PD수첩에서 방영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도 무언가를 확고하게 믿어버리면 성경 말씀도 그 사람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믿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믿음을 확증하게 하는 도구가 성경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2티모 3,16)
믿음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이 그 믿음을 통해 성경을 배우는 일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성경은 교육하는 데 유익합니다. 이 순서를 잊으면 안 됩니다.
성경을 배울 때 성경의 진리를 배우기보다는
그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의 믿음을 배우고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에 관한 말씀을 성경을 통해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십니다.
이미 그 제자들은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완전하지 않기에 당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의 지식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약함을 나무라십니다.
그들은 비로소 성경을 알려주시는 분이 누구이신지 알게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공부한다고 해서 오류에 빠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누구든 그 가르치는 사람의 믿음을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을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성경이 아닌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의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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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15일 수요일 부활팔일축제 수요일 매일미사
_이도행 토마스 신부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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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2020년 4월 15일 수요일 부활팔일축제 수요일
Wednesday in the Octave of Easter
이도행 토마스 신부 (가톨릭 평화방송 평화신문 보도주간) 집전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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