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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 시 세계 / 최동호 해설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시집 『시인들 나라』(서정시학, 2010)
배고픔의 사각지대
환한 대낮
잘 퍼진 쌀밥이 고봉으로 열렸다
이팝나무 가지, 가지 위
구수한 조밥이 대접으로 담겼다
조팝나무 가지, 가지 위
밥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 같다, 그쟈?
누나가 말했다
우리는 아침도 안 먹고
점심도 아직 못 먹었잖아!
한참 만에 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뭔 새들은 저렇게 울어쌓고
지랄하고 그런다냐? 그것은
꾀꼬리 쌍으로 우는 환한 대낮이었다.
시인들 나라 2 / 나태주
일찍부터 그랬다 하나의 병이었다
또래가 좋은 시집을 내거나 상을 타면 배가 아프고
밤에 잠자리까지 불편한 고질병
오락가락 꿈도 이상한 꿈을 꾸곤 했다
젊었을 때는 문학지에서 또래가 좋은 시 한 편
발표하는 것만 보아도 쩌르르,
가슴에 감전이 오는 듯 저려오곤 했다
그렇게 살면서 나이를 먹고 이 모양으로 늙어버렸다
이 부질없는 일 부질없는 근심과 걱정
이쯤에서 헤어나고 싶다
얼마 전 선생이란 이름은 벗어버렸지만
시인이란 이름도 벗어던져야 할 허깨비다
시인이란 이름을 벗어서 길바닥에 팽개치긴 좀 뭣하고
누군가에게 주어야 할 텐데 누구에게 준다?
나무에게 줄까 바람에게 줄까 흰구름에게 줄까
패랭이꽃한테 민들레꽃한테 맡길까
아무래도 새들한테 주는 게 가장 모양새가 좋을 듯 싶다
새들한테 준다면 꾀꼬리? 뻐꾸기? 비둘기? 물총새? 도요새?
그렇다면 나는 어떤 종류의 새였을까
또 그 짓이다, 그 짓! 도루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아, 이것도 끝내는 그만두어버리자
나는 참 어쩔 수 없는 얼치기 인간인 모양.
시인들 나라 4 / 나태주
괜찮은 시인, 서정주와 박목월을
욕하는 사람이 있었다
숨어서 오랫동안 그 시인들을
혼자서 좋아했던 사람들이다
얼마 뒤에 보니 그들이 서툴게
서정주와 박목월 흉내 내고 있었다
더러는 시인 정지용을
헐뜯는 축들도 있었다
뒷북치는 인간들이다.
은빛 / 나태주
눈이 내리다 말고 달이 휘영청 밝았다
밤이 깊을수록 저수지 물은
더욱 두껍게 얼어붙어
쩡, 쩡, 저수지 중심으로 모여드는 얼음의
등 터지는 소리가 밤새도록 무서웠다
그런 밤이면 머언 골짝에서
여우 우는 소리가 들리고
하행선 밤기차를 타고 가끔
서울 친구가 찾아오곤 했다
친구는 저수지 길을 돌아서 왔다고 했다
그런 밤엔 저수지도 은빛
여우 울음소리도 은빛
사람의 마음도 분명 은빛
한가지였을 것이다.
대숲 아래서 / 나태주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가족 / 나태주
펄렁!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면서 말했다
잘 있어, 나 먼저 가
펄렁!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면서
말을 받았다
같이 가, 나도 지금 갈 거야
지나는 바람이 귀 기울였다
땅바닥이 부드러운 품을 열어
안아주고
햇빛은 또 쓸쓸한 이불을 꺼내어
그들을 덮어주었다
나태주 시집 『시인들 나라』
귀가 순한 울보 시인
김세영 시인
나태주 시인이 울면서 썼다고 하는, 신작 시집 『시인들 나라』를 단숨에 읽었다.
장애물 없이 유유히 흐르는 시의 강물에 마음을 맡긴 채 안온한 유영을 하는 듯 한 자연서정시집이었다. 화려하게 멋을 부린 외출복이 아닌, 약간의 땀내가 나는 평상복을 입은, 다정하면서도 사려 깊은 이웃 같은 인간서정시집이었다. 시업 40년의 중진 시인인데도 새로운 시집으로 누군가에게서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속내를 숨기지 않는 진솔함과 순수한 동심적 시심이 흠뻑 느껴지는 시집이었다.
나태주 시인의 시의 주제는 그리움이라고 느껴졌다.
고향 막동리의 언덕과 미루나무 그리고 노을을 노래하며, 나뭇잎, 잠자리 그리고 벌새와 친구가 되는 자연서정시, 그리고 할머니, 아내, 딸, 친구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 등 인간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인간서정시들이 많았다. 중환의 병마와 싸워서 회복한 최근에는 인생을 관조하는 순명의 시들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나이가 들고 병을 앓고 나니, 나 자신과 세상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고 나 시인은 말했다.
공주문화원 원장으로서 고향의 문화유산을 잘 보존 관리하듯이 한국 서정시의 본령을 잘 가꾸고 지키는 시인임을 알 수 있었다.
어려서 외할머니와 둘이
오막살이집에서 살 때
자주 외할머니와 뒷동산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곤 했다
(중략)
생각해보니 외할머니와 살던
오막살이집이 먼 곳이고
외할머니와 함께 올라 먼 곳을 바라보던
뒷동산이 먼 곳이었다.
- 「먼 곳」 부분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젖던 어린 시절에서의 먼 곳이란 공간적으로 먼 곳을 뜻하나, 살아 온 날이 많은 순명의 나이에 이른 지금에서의 먼 곳이란 공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멀리 있는 곳을 뜻한다.
어릴 적의 그 오막살이집과 뒷동산은 다시는 가볼 수 없는 과거 속의 먼 곳이자 그리움의 모태이다.
집에 밥이 있어도 나는
아내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
내가 데려다 주지 않으면 아내는
서울 딸네 집에도 가지 못하는 사람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살면서
반편이 인간으로 완성되고 말았다.
- 「완성」 전문
인간서정의 전형적인 시이다. 혈육이 아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가 부부이다.
남남이 만나서 혈육보다 더 가까운, 소위 일심동체의 관계가 되는 것은 믿음과 사랑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산책길에서 주름살 투성이의 손을 다정스럽게 잡고 걷는 노부부를 보면 부러움을 느낀다. 남들에게 쑥스럽다는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깊은 부부애가 있기 때문이다.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 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 「십일월」 전문
자연시정과 인간서정이 혼합된 시이다. 계절에서의 십일월은 인간에서의 노년기기에 해당된다.
11월의 장미는 폐경기의 여인처럼 시들어가는 꽃잎 속에 마지막 향기를 붙잡고 있어 보기에 처연하다.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꽃과 시인은 서로가 잘 알고 있다. 장미에게 가장 아름다운 때가 꽃을 피우고 있을 때이듯이 사람에게서도 사랑할 때가 가장 아름답고 행복할 때이다.
겨울이 다가 올수록, 나이가 많아질수록 사랑이 더욱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나에게서 아침이 아주 사라져버린 날 사람들은
세상에서 나조차 사라졌다 하고 다만 나 있던 자리
찌푸러진 양재기 하나 보았다 하리라.
- 「동안거」 부분
나의 가장 커다란 실수는
시 쓰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시를 품고 살면서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로 하여
서럽고도 아기자기 찬란한 인생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시인 · 2 」 부분
오직 시에 대한 생각
가슴에 태양처럼 안고 긴 밤을
뜬 눈으로 새우는 남자
(중략)
그렇게 세상의 강물을 조심조심 숨어서
소리 없이 자취 없이 건너가고 있는 한 사람
-「진짜 시인」 부분
이번 시집에는 제목처럼 시인을 주제로 한 시들이 많다.
나 시인은 좋은 시를 쓰고자 하는 열망이 누구보다도 강한 것 같다. 시인은 시업 40년 동안 28권의 시집을 상재했으니 실로 왕성한 시작 활동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족스런 시작을 못했다는 자조로 인해 자신을 찌푸러진 양재기로 비하하기도 하고, 창작의 고통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자기 찬란한 인생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고 다행스럽다고 자위를 한다. 육십이 넘도록 혼자서 조용히 사는, 그러나 세상이 공명을 탐하지 않고, 시에 대한 생각을 가슴에 태양처럼 안고 사는 친구 임석순 시인을 진짜 시인이라고 말한다.
오직 사람다운 사람 하나
이 땅에 태어나
오직 사람 때문에 마음 아파하면서
사람답게 살다가
사람답게 죽어서 땅에 묻히는 날
눈이 내렸다
새하얀 세상이 되었다
-「눈-김수환 추기경? 3 」부분
순수함의 결정체 같은 눈, 세상을 새하얗게 정화시키는 눈의 이미지로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짐승의 피와 신의 혼이 주먹밥으로 뭉쳐진 우리. “나의 존재의 좌표는 어느 위치에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한다.
저는 너무나 조그맣고 보잘것없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 못난 조그만 아이였으니까요
(중략)
시 쓴답시고 책이나 옆구리에 끼고
어정거리며 예쁜 여자애들 얼굴이나
흘낏거리고 다녔을 겁니다
(중략)
가족들을 정스럽게 보살피고 보듬기보다는
내 뜻대로 이끌고 다니며 살았으니까요
다만 끝까지 가족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하기위해
이를 악문 날들이 많았습니다
-「참회록」 부분
순명의 시로써 시집의 마무리를 한다. 어린 시절의 소심함, 청소년기의 부끄러움, 장년기의 욕심들을 참회하고 있다. 그러나 부족하지만 삶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살았음도 고백하고 있다.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아 미안하고, 좀 더 열심히 살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 시인은 “미안합니다.” 이 한 마디로 시집의 결어로 삼고 있다.
나태주 시인은, 시집 『눈부신 속살』로 2009년에 수상한 한국시인 협회상 수상 소감에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기왕에 제 시의 주제였습니다만, 이제는 영혼의 말씀에 겸허히 귀 기울이는 고요의 나날들이 저에게 허락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말했다.
자연과 인간의 아름답고 슬픈 정서에 눈물 흘리는 감성고운, 귀가 순한 울보 시인에서, 자연의 섭리와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영혼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귀가 밝은 성찰의 시인의 모습으로 쓴, 다음 시집이 기다려진다.
『미네르바』 2010년 가을호 게재
곰삭은 삶과 순명의 시학
자연 사정에서 인간 서정으로
시력 40년을 기록하는 나태주의 시가 1970년대 서정으로부터 출발하였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순수 서정시인으로 나태주는 세속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나름대로 서정시의 길을 충실히 걸어왔으며, 그것은 한 시인으로서 보자면 매우 뜻 깊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과연 하나의 길만을 걸어왔을까 하는 의문을 오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제기할 필요를 느낀다. 그가 걸어온 서정시의 길속에서도 자신이 겪었던 다양한 삶의 체험이 복합되어 있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에 간행하는 시집 『시인들 나라』(2010)을 읽고 나니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다시 그의 시를 전체적으로 정독하고 보니 그런 시는 자연 서정에서 인간 서정의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자연서정에 충실하던 초기 그의 시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고자 한다. 단순소박한 시라는 느낌이 우선 들었지만 오래도록 이 시가 입가에 떠나지 않고 맴돌았던 기억이 필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ekj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대숲 아래서 1]
모두 다섯 개의 분절로 이루어진 이 시는 자신의 시상을 자연을 매개로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의 시를 자연 사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가 여기서 마련되었을 것이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 [멀리서 빈다], 제1-2연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꽃잎처럼 웃고 있는 사람으로 인해 눈부신 아침이 오고,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사람으로 인해 고요한 저녁이 온다는 위의 진술에서 이 세상의 아침과 저녁을 위해 기도하는 서정이신의 낮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낮은 목소리는 서정시가 사라졌다고 단언하고 시인이 죽었다고 공공연하게 외치는 시대에 우리로 하여금 시가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인지를 돌이켜보게 만든다. *
# 최동호(시인. 평론가)의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