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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교회의 청소년 교육의 방향 - 제3의 기독교 교육
이천진 목사 (이화여자대학교 병설 영란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 교목)
마음을 여는 장
1.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 똥’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돌이네 집 마당에 흰둥이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흰둥이가 똥을 누었습니다. ‘강아지 똥’이 태어났습니다. ‘강아지 똥’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참새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아가다가 ‘강아지 똥’을 보며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왜 하필이면 ‘강아지 똥’으로 태어났니? 너는 더럽고 냄새가 나서 아무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아. 나를 봐라. 나는 새로 태어나서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잖아. 내가 부럽지 않니?” 참새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강아지 똥’은 자기의 정체를 알고 나서 슬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왜, 똥으로 태어났을까?’ ‘강아지 똥’은 하느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불공평하십니다. 왜 참새도 만드신 분이 나는 이렇게 똥으로 만드신 것입니까?” 한참 동안 원망하고 있는데,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밤하늘에 별이 떴습니다. 반짝이는 별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아름다운 별을 보고 있으니까, ‘강아지 똥’은 더 슬퍼졌습니다. ‘저렇게 아름다운 것도 있는데 나는 왜 똥으로 태어난 것일까?’ 이번에는 울면서 하느님께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불공평하십니다.” ‘강아지 똥’은 울다가 지쳐서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이 되었는데 뭔가 옆에서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강아지 똥’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야, 너는 누구니?” “음, 나는 민들레야.” “네 이름은 뭐니?” ‘강아지 똥’은 자신 없는 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음, 나는 강아지 똥이야. 그런데 민들레야, 너도 하늘의 별처럼 아름답게 변할 수 있니?” “그럼.”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 “음, 지금은 내가 봉오리라서 그런데 며칠 후에 꽃을 피우면, 나도 하늘의 별만큼 아름다워진단다.” ‘강아지 똥’은 자기도 변화될 수 있을까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꽃을 피우는 거니?” “음, 하느님이 햇빛을 주시고, 공기를 주시고, 비를 주시고, 아참 또 하나 있어.” “뭔데?” “음, 너를 나에게 줘야돼.” 그 순간, ‘강아지 똥’은 있는 힘을 다하여 민들레를 꼭 껴안았습니다. 후드득, 후드득 소리가 나더니, 삼일 동안 장마 비가 내렸습니다. 장마 비는 ‘강아지 똥’의 몸을 갈기갈기 부수었습니다. 고, 부서진 ‘강아지 똥’의 살은 땅 속으로 들어가서 민들레의 뿌리로 들어갔습니다. 민들레의 줄기를 타고 봉오리로 들어갔습니다. 삼일만에 비가 그쳤습니다. 드디어 민들레는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그 아름다운 민들레꽃은 삼일 전, 바로 더럽고 냄새나던 ‘강아지 똥’이었습니다. ‘강아지 똥’이 삼일만에 민들레꽃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집단사고
1. 학습은 ‘변화’를 전제로 합니다.
‘강아지 똥’은 삼일만에 민들레꽃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똥이 꽃으로 변하고, 물이 기체로 변하는 것을 물리학에서는 ‘질적 비약’이라고 부릅니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우주도 극점에 이르러 질적 비약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거듭남’,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교실에서 성서학습을 통해 ‘질적 비약’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교육학자, 이용걸 교수는 「학습의 기초」에서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학습에 대한 몇 가지의 정의들이 예시되었지만 그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의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공통점은 바로 변화이다.
2. 변화가 없는 것은 학습이 아닙니다.
이용걸 교수의 주장은 ‘변화’가 없는 것은 ‘학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질적 비약’, ‘거듭남’, ‘회심’이 없는 것은 ‘학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박원호 교수도 신앙교육에 있어서 ‘변화’를 강조하였습니다.
신앙교육은 전인교육이다. 이는 지적인 면과 함께 정적인 면, 의지적인 면을 포함한 우리의 전체가 모두 고려되어야 함을 뜻한다. 신앙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에 응답하는 백성들의 삶이다. 그러기에 신앙교육을 위한 방법은 인격과 삶의 변화(transformation)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학교교육에서 보는 것과 같은 지나친 지식중심(information)의 교육 방법은 신앙교육이 자칫 범하기 쉬운 잘못이다.
문제의식
1. 변화가 일어나는 교실을 ‘교육 현장’이라고 부릅니다.
은준관 교수는 「기독교교육현장론」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영적 사건’이 일어나는 교실을 ‘교육 현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교실은 ‘교육 공간’일 뿐입니다.
교사도 있고, 교재도 있으며, 교육시설도 또한 행정적인 뒷받침도 있으나, 변화를 경험하는 교육의 현장은 아직 우리 눈에 뚜렷이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의 기독교교육의 위기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건 없는 현장, 현장 부재에 기인하고 있다.
은준관 교수는 기독교교육에 있어서 교사도 있고, 교재도 있고, 교육시설도 있지만, 변화가 일어나는 ‘교육현장’은 없다고 오늘날의 기독교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였습니다.
2. 변화는 삶의 질문과 복음의 응답이 오고가는 대화에서 일어납니다.
은준관 교수는 “기독교교육의 현장이란 삶의 질문과 복음의 응답이 서로 오고가는 대화이고 또 대화가 일어나는 참여의 자리”라고 하였습니다. 변화가 일어나는 ‘영적 사건’, ‘거듭남’, ‘회심’은 학생들의 삶의 물음과 성서의 응답이 만날 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Kenneth H. Pohly는 그의 단행본 「The Contextual Model」(현장적 모형)에서 기독교교육의 근본적인 방향이 내용 전달 중심에서부터 임상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여기서 임상적이란 삶의 자리, 삶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그 경험과 자리의 의미를 신앙 안에서 추구하는 행동 - 성찰 과정을 뜻합니다.
과제추구
1. 현재 기독교교육은 학생들의 삶의 질문에서 출발하고 있는 교육이 아닙니다.
1) 교육에는 ‘구조’와 ‘과정’이라는 두 요소가 있습니다.
Jerome Bruner는 「The Process of Education」(교육과정)에서 교육에는 지식의 구조 (Structure of Discipline) 와 학습 과정 (Learning Process) 이라는 두 요소가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과정을 외면하고 구조만 강조할 경우, 그것은 주입식 교육, 내용 중심의 교육이 되어 버립니다. 반면에 구조보다 과정만 강조하면, 경험 중심의 교육이 됩니다.
내용 중심의 교육과 경험 중심의 교육의 갈등은 일반 교육사에서도 계속되어 왔습니다. 중세기와 르네상스 시대에는 권위주의 대 인본주의 사상의 대결이 있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전체주의 교육 (독일 나치스)과 민주주의 교육 (죤 듀이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교육운동)의 대결이 있었습니다. 이 대결은 기독교교육에서도 나타났습니다. 현재 기독교교육에서는 성서중심의 교육(장로교의 통일공과)과 경험중심의 교육(감리교의 계단공과)이 대결하고 있습니다.
2) ‘구조’ 중심의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기는 용이하지만, 삶의 변화를 일으키기는 어렵습니다.
학생들은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살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정체성의 문제), ‘나는 왜 외로운가?’(고독의 문제), ‘나는 왜 한국인으로 태어났나?’(민족 정체성의 문제), ‘왜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나?’(가난의 문제),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진로문제), ‘나는 왜 여자로(남자로) 태어났나?’(성 문제), ‘왜 우리 민족은 분단되어 있나?’(통일 문제), ‘나는 왜 사랑 받지 못하나?’(자기 비하의 문제, 따돌림의 문제), 이러한 학생들의 물음에 대하여 교사는 답변을 해 줄 책임이 있습니다. 기독교교육이란 학생들의 그러한 물음에 대하여 학생들이 성서의 답변을 경험하도록 교사가 도와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바로 ‘영적 사건’, ‘거듭남’, ‘회심’, ‘질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구조중심’의 교육은 학생들의 물음을 외면하고 교사가 일방적으로 미리 정해놓은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Paul Tillich는 「Theology of Culture」(문화의 신학)에서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어린이들로부터 물어지지 않은 질문들 위에 기독교교육은 해답만을 강요하는데 난점이 있다. 어린이들은 질문도 하지 않는 동안 하느님, 그리스도, 죄, 구원, 하느님 나라 등등의 언어표현을 통해 기독교교육은 마치 돌을 던지는 것처럼 강요하고, 또 해답을 주려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자는 배우는 자들의 마음과 가슴속에 솟아오르는 실존적인 물음부터 찾아내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정웅섭 교수는 이러한 ‘구조’ 중심의 교육을 “기성화된 통조림 같은 방식”(canned approach)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이러한 교육 방식은 ‘신속성, 용이함, 부담감이 없음, 경제성이 높음’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학생들의 창조성과 자발성과 적응성을 악화 내지 말살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3) 구조 중심의 교육과 과정 중심의 교육의 대결을 극복하는 제3의 기독교 교육은 ‘회심 중심의 교육’ 입니다.
변화가 일어나기 어려운 ‘구조’ 중심의 교육과 성서가 약화되기 쉬운 ‘경험’ 중심의 교육의 대결을 극복하는 제3의 기독교육을 저는 ‘회심 중심의 교육’이라고 부릅니다. 회심은 물음과 응답의 만남에서 일어납니다. 경험과 말씀의 만남에서 일어납니다. 과정과 구조의 만남에서 일어납니다. 회심 중심의 교육을 통해 회심이 일어날 때, 우리의 교실은 ‘교육 현장’이 될 것입니다.
4) ‘삭개오의 회심 사건’에서 우리는 제3의 기독교 교육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삭개오 회심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말씀도 아니고, 삭개오의 물음도 아닙니다. 삭개오의 실존적 물음과 예수님의 답변과의 만남을 통해 삭개오가 변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삭개오가 질적 변화를 했다는 것, 영적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종교적 회심이 일어났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삭개오에게 회심이 일어나게 한 것은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엄청난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가 회심하기 전에 하신 말씀은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라는 말씀뿐이었습니다. 삭개오의 회심은 예수님이 지식을 전달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관계를 맺고, 함께 지내주고, 마음(영성)을 함께 나눈 것이 일으킨 회심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영성교육’이었습니다.
삭개오는 회심을 한 후에, 스스로 자발적으로 이웃에게 자기의 소유를 나누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가 먼저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2. 회심이 일어나지 않는 원인은 현재의 기독교교육이 ‘지성 교육’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교육에는 지성교육, 심성교육, 영성교육이 있습니다.
인간은 세 가지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머리와 가슴과 마음이 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 암기, 분석을 합니다. 가슴으로는 사랑을 느낍니다. 마음으로는 예배를 드리고, 불쌍한 사람을 돕습니다. 머리와 가슴과 마음이 균형 있게 발달할 때,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고,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교육은 지성교육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심성과 영성은 병들고 있습니다. 교육부에서 ‘전인교육을 해야 한다’라는 주장은 촌스러운 발언입니다. 종교과목이 없는 학교는 ‘전인교육’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영성교육’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교육도 성서중심이라는 이름으로 성서지식을 전달하고, 정보를 제공해 주는 지성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아내는 하와다’라는 성서지식은 학생의 삶 속에서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변화가 없는 것은 학습이 아닙니다.
박원호 교수는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성서를 배우고, 교제를 하며, 사회 봉사를 하는 모든 활동들을 통해 우리는 신앙의 성장을 꾀하게 된다. 무엇보다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 삶 전체의 응답이다. 너무나 타당한 사실이지만 재확인해야만 하는 것은 오늘날 많은 신앙교육이 지식 자체를 가르치는 데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신앙은 항상 ‘지, 정, 의’의 요소가 함께 포함되어 있으며 함께 움직인다. 그러나 교육활동이 어느 한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에 신앙의 본래적인 모습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 교육에 임하는 사람은 그 가르치는 행위에 전인이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신약성서학자, Walter Wink도 「Transforming Bible Study」(변화의 성서연구)에서 “오늘날에는 변화가 없는 지식위주의 성경공부가 성행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윙크는 성서교육의 본질은 성서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한 변화에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토마스그룸도 신앙의 가르침에 있어서 특히 행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은 행함에 있다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교육학자 Ronald Goldmann은 자신의 학위 논문에서 “아이들에게는 성서 자체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성서의 메시지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기독교 교육은 성서지식을 전달하는 지성교육입니다.
2) 지성교육은 삶의 변화를 일으키기 어렵습니다.
이화여대 석좌교수인, 이어령 교수는 「21세기 한국과 한국인」에서 21세기는 티모스의 시대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서구의 고전적 이론을 보면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은 욕망, 이성, 티모스의 세 가지로 되어 있다. 인간의 욕망은 경제활동을 낳았다. 배고픔을 채우기 위한 욕망 때문에 사람들은 생산을 하고 경쟁을 하고 교환을 한다. 그러나 배가 고프다고 물건을 훔치거나 그냥 나무 밑에 앉아서 떨어지는 감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과학 기술이나 법과 같은 제도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과 그것을 해결하는 기술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가? 욕망의 목구멍과 이성의 머리와 손만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다. 플라톤이 말하는 ‘티모스’라는 가슴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배가 고프고 아무리 음식이 독이 없이 정갈해도 그것을 주는 사람이 개에게 먹이 주듯이 한다면 그 모욕에 분개를 하고 식사를 거부한다. 이 자존심과 기개 때문에 사람들은 때로 목숨까지 버린다. 그것을 한국인들은 오랜 옛날부터 ‘기(氣)’라고 불러왔다.
수렵시대에는 욕망이, 산업화시대에는 이성이 역사를 움직여 갔는데 이제 정보화시대에는 티모스가 역사를 움직여 간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흐름이 합리적인 ‘이성’에서 ‘티모스’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티모스는 소년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보여 주었던 ‘기(氣)’입니다. 데카르트 이후에 세계를 움직여 왔던 이성의 시대가, 합리주의 시대가 이제 ‘가슴의 시대’, ‘비합리주의 시대’, ‘신바람의 사회’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 ‘바람’이라는 말은 ‘영’과 같은 말입니다. 개역 성경 창세기 1:2에 나오는 ‘하느님의 신’을 NRSV는 “a wind from God”으로 표현하고 있고, NASB는 “the Spirit of God”으로 표현하고 있고, Good News Bible은 “the power of God”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바람은 ‘하느님의 바람’,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기운’입니다. 안병무 교수는 이 ‘기’를 ‘성령’으로 보았습니다.
이어령 교수의 주장대로 앞으로의 사회가 ‘티모스’의 사회라면, ‘이성 중심적 세계’는 무너질 것입니다. 그래서 김지하도 21세기는 영의 시대라고 하였습니다.
21세기는 영의 시대, 정신의 시대라고 합니다. 영적 인간, 정신적 인간의 출현 없이는 21세기는 무의미합니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이하고 신비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우주 생명이 살아 있고 모든 사람 안에 우주 생명이 살아있음을 인정함으로써 서로 공경하며 동식물과 무기물도 우주 삼라만상 전체의,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광활한 적막 속에서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활동하는 하나의 큰 생명의 테두리 속에, 영겁의 한 흐름 속에 일치되고 있다는 이 믿음을 각성하고 실천할 때, 바로 그것이 영성이며, 영적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존재의 근거가 ‘이성’이라는 데카르트의 주장(“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은 촌스러운 주장입니다. 인간은 머리(Logos-이성)와 가슴(Pathos-열정)과 마음(Ethos-윤리, 혼)을 가진 통전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기독교 교육은 지성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지성교육은 똑똑한 아이들을 길러낼 수는 있겠지만, 아이들의 삶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기는 어렵습니다.
공연예술기획가인 강준혁은 인간을 혼의 에너지(spiritual energy), 지적 에너지(intellectual energy), 예술적 에너지(aesthetic energy), 신체적 에너지(physical energy)의 복합체로 보면서, 오늘날의 일탈적인 현상의 원인을 이렇게 지적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지적 에너지가 너무 비대해져 인격이 총체적으로 성숙하는 것을 방해해 왔고, 특히 인격의 중심이 되는 혼의 에너지가 억눌리면서 여러 가지 일탈적인 현상이 발생했다.
3) 지성교육과 심성교육을 극복하는 제3의 기독교 교육은 ‘영성 교육’입니다.
단순히 성서의 지식을 전달하는, 그래서 변화가 일어나기 어려운 ‘지성교육’과 단순히 착한 사람을 길러내는 ‘심성교육’’을 극복하는 제3의 기독교 교육은 ‘영성교육’입니다. 학생들의 삶의 현장에서 질문되는 실존적인 물음과 그 물음에 대한 ‘성서의 답변’과의 만남은 아이들의 영성을 성장시켜서 아이들이 하느님과 자연과 사람과 튼튼한 관계를 맺게 할 것입니다.
3. 21세기는 영성의 시대입니다.
1) ‘지구’라는 작은 연못이, ‘한반도’라는 작은 연못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프레온 가스에 의해 대기권의 오존층에 구멍이 뚫리고 이산화탄소, 메탄 가스에 의한 온실효과로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구의 온난화’라고 부릅니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은 남극과 북극의 얼음을 녹게 하였고, 녹아 내린 물은 바다로 흘러가서 바다의 높이, 해수면을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발을 디디며 살고 있는 육지는 지금 이 시간에도 조금씩 바다에 잠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밀림이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사막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유엔에서는 “1년에 한반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땅이 사막으로 변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사건이 다시 재현될 수도 있는 전 지구적 ‘생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지구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까? 세계적인 미생물학자, 르네 듀보는 「퍽이나 인간적인 동물」에서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근대의 과학혁명 이래 기계론, 유물론은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오늘의 경이적인 기술을 낳았으며, 생명현상을 물리, 화학적으로 규명하려 온 힘을 쏟아왔다. 이렇듯 숨가쁘게 질주해온 과학기술은 이제 지구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다. 과학의 방향은 바뀌어야 한다. 분자 생물학(서양)에서 생태학(동양)으로 가야한다. 종교로 돌아가야 한다.
르네 듀보는 ‘전 지구적 생명의 위기’를 서구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원자론과 환원주의에 돌렸습니다. 그리고 해결책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였습니다. 하나는 서양의 방법론(분자 생물학)으로부터 동양의 방법론(생태학)으로 전환하는 것이고, 하나는 서구과학으로부터 ‘종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미래학자, 나이비스트는 「대추세 2,000」에서 21세기의 특징 십대 요점 중, 열 번 째로 새 천년을 맞는 ‘종교의 부활’을 들었습니다. ‘전 지구적 생명의 위기’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자본’도 아니고, ‘이성’도 아니고, ‘과학’도 아닙니다. ‘서구 사상’도 아닙니다. 우주를 창조하였던 ‘하나님의 신’, ‘성령’, 즉 종교 외에는 우리의 지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대전에서 열렸던, 과학의 발달을 자랑하는 ‘엑스포 대회’ 개막 공연의 메시지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개막 공연은 무용극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처음 장면은 ‘봄(농경사회)’이었습니다. 씨를 뿌리고 정직하게 열매를 거두는 평화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사람들은 편리함을 위하여 괭이를 발명했습니다. 과학의 시초입니다. 괭이로 땅을 파기 시작합니다. 마치 에덴동산을 훼손시키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이제 수확량을 서로 많이 가지려고 (자본주의의 출현입니다) 싸우기 시작합니다. 괭이로 사람을 치기 시작합니다.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마치 카인이 아벨을 치는 모습 같았습니다.
두 번째 장면은 ‘여름(산업사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바퀴를 발견했습니다. 기계 문명의 시작입니다. 바퀴를 돌리자, 엄청난 에너지가 생산되었고,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산업혁명을 통해 사람들은 성장과 개발을 향해 치닫기 시작합니다.
세 번째 장면은 ‘가을(정보화사회)’이었습니다. 상품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풍요의 극치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연 생명은 파괴되어져 갑니다.
네 번째 장면은 ‘겨울(종말시대)’이었습니다. 자연 생명이 죽어 가더니, 드디어 지구가 핵폭발로 죽어 버립니다. 모든 것이 죽었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어디선가 생명의 소리인,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오더니, 생명의 소리를 타고 한 아이가 지팡이를 들고 나와 죽은 것들을 건드리기 시작합니다. 죽었던 것들이 다시 꿈틀거리며 살아나기 시작하더니, 새로운 지구가 탄생합니다. 이전의 지구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질적 비약을 한 새로운 지구가 탄생합니다. 마치 요한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꿈돌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고난의 역사 속에서 끈질기게 꿈꾸었던 것(꿈돌이)이 있습니다.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 아이는 바로 메시아였습니다. 과학의 발달을 자랑하는 ‘엑스포 대회’ 개막공연의 메시지는 ‘지구를 죽이는 것은 과학이요, 지구를 살리는 것은 종교’라는 것입니다. 이성의 시대를 지나 영성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2) N세대인 청소년들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영성’입니다.
(1) N세대는 상호작용 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인터넷 세대입니다..
‘N세대’라는 말은 ‘돈 탭스콧’(Don tapscott)이 「N세대의 무서운 아이들」(Growing up Digital : Net Generation)이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입니다. 돈 탭스콧이 주장하는 N세대는 일방적으로, 수동적으로 정보를 제공받았던 TV세대와는 다른 세대입니다. N세대는 인터넷을 통하여 상대방과 상호작용적으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그들은 일방적인 의사소통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취향과 관심여하에 따라 자신들이 정보를 선택합니다. 여기에서 권위 위주와 경험 위주의 서열체계는 여지없이 무너져 버립니다. N세대 문화의 핵심은 ‘상호작용성’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일방적인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학교 교실이 붕괴하고 있고, 학교 교육을 모방하며 일방적인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교회학교 교육도 표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 탭스콧은 N세대의 문화적 특징을 10가지로 주장하였습니다. 첫째, ‘극단적 독립심’입니다. 그들은 간섭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만의 방을 추구합니다. N세대들이 PC방, 노래방, 비디오방, 전화방, 소주방 등을 애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상화는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31가지 이유’ 중에서 다섯 번째 이유가 “교회 가면 ‘하지 말라!’는 것이 너무 많고 경직된 분위기 때문에 숨쉬기가 곤란해서 가기가 싫다”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감성적, 지적 개방성’입니다. N세대는 인터넷을 통해 남에게 자신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작업, 일, 생활 등을 알리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이 하는 것을 앉아서 구경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유명한 복음성가 가수가 공연을 해도, 유명 인사가 강연을 해도 N세들이 끊임없이 잡담을 하고 떠들고, 휴대폰을 이용해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포용성’입니다. N세대는 사회적으로 배타적이 아닌 포용적인 성향을 갖습니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국경과 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뛰어 넘어 새로운 세계를 만듭니다. 그래서 그들은 획일적인 것을 싫어하고, 다양한 세계를 선호합니다. N세대들이 교복을 자기 나름대로 고쳐서 입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다양성을 거부하는 교회를 떠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상화는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31가지 이유’ 중에서 열 번째 이유가 “사랑의 메신저라고 자처하는 교회가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 교회 가기 싫다”라고 하였습니다. 넷째, ‘자유로운 표현과 강한 주장’입니다. 그들은 정보의 소유나 의사표현을 그들의 기본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연령이나 직책에 의해 형성된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할 말을 합니다. 이러한 특징이 어른들에게는 ‘예의 없는 아이들, 버릇없는 아이들’로 비쳐집니다. 다섯째, ‘혁신’입니다. N세대들은 새로운 것을 숨쉬며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곳으로 이동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동 통신인 휴대폰과 이동 컴퓨터인 노트북을 선호합니다. 자끄 아딸리(Jacques Attali)와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이러한 신유목민적 문화를 ‘노마디즘’(Nomadism)이라고 부르면서, 노마디즘이 미래 세계화의 문화적 비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여섯째, ‘성숙하기 위한 열정’입니다. N세대들은 그들이 ‘어른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성숙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단지 어리다는 이유로 의문시되는 것에 분개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터넷과 컴퓨터 통신에서 나이를 밝히지 않고, 자기 주장을 펴다가 자기의 주장이 인정을 받으면 나이를 밝힙니다. 나이와 경험이 옳고 그름의 잣대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N세대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일곱째, ‘탐구심’입니다. N세대들에게 새로운 웹사이트로의 링크 정도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웹사이트를 추구합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자유로운 주장을 하면서 탐구정신을 가지고 현재의 가치세계에 도전합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무조건 믿어라’고 강요하는 메시지는 설득력을 잃습니다. 이상화는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31가지 이유’ 중에서 두 번째 이유가 “성경 안에 서로 모순되는 듯한 말씀에 대해서 덮어놓고 믿으라니 답답해서 교회에 가기가 싫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덟째, ‘성급함’입니다. 디지털 세대인, N세대는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고, 자신들의 감정을 삭이지 않습니다. 이상화는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31가지 이유’ 중에서 열한 번째 이유가 “내가 겪고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당장 해결해주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 가기 싫다”라고 하였습니다. 아홉째, ‘기업적 이익에 대한 민감성’이고, 열째, ‘사실확인과 신뢰’입니다.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는 때로는 거짓 정보를 싣고 있습니다. 그래서 N세대는 사실을 확인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고, 사실이 확인되었을 때, 신뢰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사실적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이상화는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31가지 이유’ 중에서 여덟 번째 이유가 “이 세상과 너무 동떨어진 설교 때문에 교회 가기 싫다”라고 하였습니다.
돈 탭스콧이 주장하는 N세대의 문화적 특징은 미국의 N세대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돈 탭스콧이 주장하는 N세대의 문화적 특징은 한국의 N세대들의 문화적 특징과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2) 미래사회의 제4의 물결은 ‘영성의 물결’입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인류의 역사를 세 가지의 물결로 설명하였습니다. 제1의 물결은 ‘농경사회’입니다. 농경사회에서 인류는 땅에 씨앗을 뿌리고, 뿌린 만큼 열매를 거두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이후, 인류는 편리한 삶을 추구하면서 기계를 발명하였고, 인류는 제2의 물결, ‘산업사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기계는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였고, 사람들은 ‘많은 것’을 추구하면서 자본주의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자본보다 가치가 없는 존재로 전락하면서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었고, ‘많은 소비’는 환경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무형의 지식과 작은 것을 지향하게 되는데, 그것이 제3의 물결, ‘초 산업화의 물결’, ‘정보화사회’입니다. 정보화사회에서 작은 컴퓨터는 큰 기계가 하던 일들을 모두 해내고 있습니다. N세대는 바로 이 정보화사회가 낳은 인터넷 세대입니다.
정보화사회가 낳은 N세대는 독립적이고, 진보적이고, 도전적이고, 개성이 강하고, 주체성이 강한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약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N세대들은 컴퓨터를 통하여, 인터넷을 통하여 ‘많은 것’을 보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하느님(天)과 자연(地)과 사람(人)을 보는 눈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가상 현실의 세계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속을 하지만, N세대는 더 고독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자연과 사람과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N세대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N세대는 삶의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보화사회’는 끝이 나고 이제 곧 N세대들은 ‘제4의 물결’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제4의 물결은 ‘영성의 물결’입니다. 영성이란 하느님을 섬기고, 자연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마음과 행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실천을 통틀어 ‘영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후정 교수는 “웨슬리 영성의 독특성은 체험에 대한 강조에 있다. 우리는 한 마디로 기독교 영성을 ‘성령 안에서의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미래사회에서 N세대들에게 하느님과 자연과 사람을 섬기는 영성의 물결이 밀려오지 않고서는 ‘생명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환경문제, 식량문제, 물 문제, 도덕적 타락의 문제 등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3) 미래사회의 N세대들에게 절실한 영성은 ‘한국적 영성’입니다.
미래사회의 N세대들은 이제 ‘제4의 물결’을 우리의 전통과 고전, 뿌리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이동만 하면 쉽게 지쳐 버립니다. ‘정착적 이동’, ‘정착적 노마디즘’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김지하는 고조선 문명이 ‘정착적 노마디즘’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북방 유목적 이동문화(환웅계)와 남방 농경적 정착문화(웅녀계)의 결합이 고조선 문명을 탄생시켰다는 것입니다. N세대(이동문화)는 한국적 영성(정착문화)과 결합할 때, 세계인들과 교류할 수 있는 진정한 N세대 문명을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N세대(이동문화)들이 찾아야 하는 영성은 ‘한국적 영성’(정착문화)입니다. 이 ‘한국적 영성’을 가지고 인터넷을 통해 세계인들과 당당히 교류할 때, 진정한 N세대가 되는 것입니다.
(1) N세들이 찾아야 하는 한국적 영성은 ‘나눔의 영성’입니다. (예수의 영성)
20세기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의 역사였습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의 대립은 수많은 하느님의 생명을 죽이는 ‘죽임의 놀이’였습니다. 클레어몬트 대학의 경영학과 교수인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Post-Capitalist Society)」에서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역사에는 수백 년마다 한 번씩 급격한 전환이 일어난다. 새로운 사회는 ‘비(非)사회주의 사회’이고, 또한 ‘탈(脫)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은 확실하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생산성 혁명의 결과 처음으로 풍요한 중산층이 되었다.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둘 다 모두 빠른 속도로 새롭고도 매우 다른 사회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 중이다.
피터 드러커의 주장대로 앞으로의 사회가 ‘탈자본주의 사회’라면, ‘자본주의적인 기독교’는 무너질 것입니다. 이제 미래 사회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을 극복하는 제3의 길은 ‘하느님 나라의 영성’, ‘나눔의 영성’입니다. 이 ‘나눔의 영성’은 한국적 영성이요, 피와 살을 나눈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입니다. 이 ‘나눔의 영성’의 물결이 밀려올 때 N세대들은 ‘평화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 N세들이 찾아야 하는 한국적 영성은 ‘살림의 영성’입니다. (성령의 영성)
20세기는 자연과 인간이 갈등한 역사였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대립은 지구를 죽이는 ‘죽임의 놀이’였습니다. 그래서 정현경 교수는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제7차 WCC 캔버라 총회 주제 강연에서 “인간중심주의로부터 생명중심주의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어머니를 존경하듯이 지구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정현경 교수는 성령을 ‘하느님의 생명의 숨’, ‘생명의 바람’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창조 때부터 우리와 함께 하여 왔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들과 온 우주를 ‘생명을 주시는 숨’, 곧 생명의 바람으로 탄생시키셨습니다. 이 생명의 바람, 곧 하느님의 생명을 주시는 힘은 이집트로부터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고,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부활하게 하시고, 교회를 해방공동체로서 출범 가능케 한 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 생명의 바람, 성령은 흙으로 빚은 아담에게 생명을 불러 일으켰고, 바람소리로 나타난 하느님은 모세를 만나주시고 이스라엘을 노예로부터 이끌어내었고, 에스겔 골짜기에 나타난 생기, 성령은 죽은 뼈다귀들을 큰 군대로 살려냈고, 오순절 다락방에 세찬 바람으로 나타나신 성령은 ‘교회’라는 생명을 탄생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현경 교수는 인간중심주의에서 생명중심주의로의 전환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문화’에서 ‘생명의 문화’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성령’이기에 인간중심주의가 아닌, 생명중심주의를 살아가는 사람이 성령을 모신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미래 사회에서 자연과 인간의 갈등을 극복하는 제3의 길은 인간과 자연이 서로 평등하게 서로를 살리는 ‘생태적 민주주의의 영성’, ‘살림의 영성’입니다. 이 ‘살림의 영성’은 한국적 영성이요, 우주를 창조하고 모든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영성입니다. 이 ‘살림의 영성’의 물결이 밀려올 때, N세대들은 ‘생명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N세들이 찾아야 하는 한국적 영성은 ‘어울림의 영성’입니다. (하느님의 영성)
20세기는 성, 인종, 지역, 세대, 이념의 갈등의 역사였습니다. 여성과 남성, 신세대와 기성세대, 전라도와 경상도, 북한과 남한, 동양과 서양의 대립은 인류의 행복을 죽이는 ‘죽임의 놀이’였습니다. 이어령은 한국 문화의 원형을 ‘仁의 문화’라고 주장하면서 “사람(人)이 둘(二)이지만 하나로 어울리는 仁의 문화가 미래를 지배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미래 사회에서 성과 세대와 지역과 인종의 갈등을 극복하는 제3의 길은 하느님(一)과 사람(人)과 자연(一)이 하나로 어울리는 ‘신명의 영성’, ‘어울림의 영성’입니다. 이 ‘어울림의 영성’은 한국적 영성이요, 인간과 어울리기 위해 성육신 하신 하느님의 영성입니다. 이 ‘어울림의 영성’의 물결이 밀려올 때에 N세대들은 ‘신명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정리
1. 우리는 한국적 기독교교육을 지향해야 합니다. (서구적인 교육을 넘어서서)
1) 감리교 제1차 총회에서는 세 가지 선언을 했습니다.
이 새 교회는 첫째, 남녀와 귀천의 차별이 없는 ‘진정한 기독교회’가 되어야 한다. 둘째, ‘진정한 감리교회’가 되어야 한다. 감리교회는 진보적이므로 편협한 교파주의를 넘어서 광범한 동정을 갖고 시대와 지방을 따라 자라기도 하며, 변하기도 해야 한다. 셋째, ‘한국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한국문화와 풍속과 습관에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2) 그러나 우리는 서구적인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교육은 서양의 “이분법적인 신앙”을 신앙의 모델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양의 방법론은 하나를 둘로 나누는 방법론입니다. 엘리트와 대중, 생산자와 소비자, 이성과 감성, 과학과 종교, 정신과 육체, 여성과 남성, 어린이와 어른, 죄인과 의인, 학생과 교사, 국민과 정치인, 북한과 남한, 전라도와 경상도, 노동자와 자본가, 신도와 목사로 나누어 대립을 시킵니다. 그래서 싸움을 하고 전쟁을 합니다.
서구 문화는 ‘개인주의’ 문화입니다. ‘개(個)’라는 말은 ‘사람(人)이 나에게서 고착(固)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너’가 없습니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위급할 때, “help me!” 라고 외칩니다. ‘나’를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나’는 있지만, ‘너’가 없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위급할 때, “다스케데구레”, “살려줘”라고 소리지릅니다. 일본 문화의 중심 사상은 ‘화(和)’인데 ‘곡식(禾)을 한 입(口)으로 먹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문화는 ‘집단주의’ 문화, ‘전체주의’ 문화입니다. 사무라이들은 집단을 위해서는 할복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전체는 있지만, 개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위급할 때, “사람 살려” 라고 소리지릅니다. ‘나도’ 살아야 하지만, ‘너’도 살고 ‘사람’은 다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문화는 ‘공동체’ 문화입니다. ‘인(仁)’의 문화입니다. ‘인(仁)’이라는 말은 ‘사람(人)이 둘(二)이지만, 하나’라는 뜻이고, ‘하느님(위의 -)과 사람(人)과 자연(아래 -)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서양의 문화는 개인주의 문화이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은 소고기 한 근으로 스테이크를 만들어 혼자 통째로 먹지만, 한국의 문화는 공동체 문화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소고기 한 근으로 국이나 탕을 끓여 열 사람이 먹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일인칭 문화이기 때문에 돈까스를 쓸어서 내놓지 않고 통째로 내놓지만, 한국 사람들은 깍두기를 무우 통째로 내놓지 않고, ‘너’를 위해 먹기 좋게 쓸어서 내놓습니다. 한국의 문화가 서구 문화보다 훨씬 더 기독교적입니다.
서구 문화는 ‘침략 문화’, ‘정복 문화’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식사를 할 때도 전쟁 연습을 합니다. 나이프-칼로 쓸고, 포크-창으로 찌르기 연습을 합니다. 그 연습의 결과, 그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침략하고, 정복하여, 식민지 지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젓가락으로 절대로 음식을 찌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음식을 감히 찌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계속 침략을 당하고, 고난을 받았습니다. 침략과 정복을 좋아하여 이제 화성까지 정복하려는 서양보다 늘 언제나, 오른 뺨을 때리면, 왼쪽 뺨까지 내놓는 한국이 예수의 ‘고난받는 종’의 모습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적인 것을 무속적인 것으로 여기며, 서구적인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실 때에, 한국도 지으셨습니다. 한국인도 지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적인 것’은 하느님이 한국인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하느님은 한국인을 자식으로 지어 놓으시고 버리지 않았습니다. 돌보고, 아끼고, 교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선교사들이 한국에 기독교의 제도를 전해 주기 전에도 하느님과 한국인이 교통했던 ‘영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가 놀란 한국교회의 부흥은 목회자들의 능력에 있기보다는 하느님이 한국인들에게 ‘기독교적인 영성’을 주셨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놀라운 부흥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선물을 버리고 있습니다. 김광식 교수는 감리교와 기독교장로회는 선비적 특성(사회참여적)이 강한 교회이고, 예수교 장로회는 스님적 특성(제사장적)이 강한 교회이고, 순복음교회는 무당적 특징(치유적)이 강하다고 하면서 한국적으로 토착화가 잘된 교회들이 부흥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3) 그러나 우리는 자랑스러운 감리교회의 전통을 계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서양의 악기만 연주될 뿐, 우리의 악기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아닌, 서양사람들의 신앙고백을 서양의 가락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에 경건은 있지만, 영적인 힘이 샘솟는 축제와 신명의 요소는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예배시간에 (통일 찬송가) ‘미국의 복음가’ 가락을 269편이나 빌려서 부르고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부르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는데, 통일 찬송가의 48%가 미국 복음가의 가락입니다. 또 우리는 외국의 세속음악의 가락을 빌려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외국 국가의 가락을 빌려서 부르는 곡이 5곡입니다.(77장-러시아 국가, 79장-영국 국가, 127장-독일 국가, 245장-독일 국가, 521장-하우슈카의 국가) 영국 찬송가에는 우리가 빌려서 부르고 있는 영국 국가의 가락이 없습니다. 독일 찬송가에도 우리가 빌려서 부르고 있는 독일 국가의 가락이 없습니다. 외국의 대중가요 가락을 빌려서 부르는 곡이 10곡입니다.(117장-영국 가요, 1장-프랑스 가요, 145장-독일 가요, 88장.264장.314장.390장.407장.482장.545장-미국 가요) 박영미는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라는 우리 대중 가요의 가락을 ‘앉으나 서나 주님 생각’이라는 가사로 바꾸어 찬송가로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외국 오페라의 가락을 빌려서 부르고 있는 곡이 7곡입니다.(58장-오페라 ‘알렉서지스’ 서곡, 61장-가극 ‘마을의 점쟁이’, 94장-가극 ‘마을의 점장이’, 124장-오페라 ‘시로’의 아리아, 371장-오페라 ‘루치아’, 431장-오페라 ‘마탄의 사수’, 520장-중세가극 ‘나귀의 잔치’) 371장은 민족 운동을 하였던 우리 감리교회의 장로인 남궁 억 선생님이 작사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는 찬송인데, 외국 오페라의 가락에 실어 부르고 있습니다. 외국의 교향곡에서 가락을 빌려 부르고 있는 곡이 3곡입니다.(13장-베토벤의 심포니 9번, 17장-하이든의 교향곡 D장조의 느린 악장, 287장-베토벤의 심포니 9번) 외국 민요에서 가락을 빌려서 부르는 곡이 21곡입니다.(21장.173장.467장-영국 민요, 80장.338장-스코틀랜드 민요, 533장-아일랜드 민요, 14장.33장.48장.57장.225장.430장.517장-독일 민요, 125장.160장-프랑스 민요, 32장.39장-네덜란드 민요, 40장-스웨덴 민요, 454장-핀랜드 민요, 113장.405장-미국 민요) 그러나 우리 민요 가락에 실어 부르는 찬송은 한 곡도 없습니다. 오히려 미국 연합 장로교회에서 우리의 대표적인 민요인 ‘아리랑’의 가락을 찬송가로 부르고 있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미국의 소방대원 행진곡 가락도 빌려서 부르고 있습니다.(388장-소방대원 행진곡으로 작곡한 가락을 남북전쟁 때, 북군(Yankee)이 “남군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를 신 사과나무에 목을 달고” 라는 가사로 노래하였습니다.) 외국의 피아노곡 가락을 빌려서 부르고 있는 곡이 3곡입니다.(126장-멘델스존의 작품 68 ‘축제의 노래’, 176장-고트솨크의 독주곡 ‘마지막 희망’, 267장-슈만의 야상곡) 보스턴 공립학교 노래 책의 가락을 빌려서 부르고 있는 곡도 있습니다.(370장) 본래 제목이 'Work Song'으로서 현재 우리 찬송가에 있는 가사에도 신앙적인 용어가 전혀 없습니다. 타종교 찬송의 가락을 빌려서 부르고 있는 곡이 9곡입니다.(1장-유대교 찬송, 67장.68장.70장.81장.104장.147장.479장.548장-카톨릭 찬송) 일본 찬송가의 가락을 빌려서 부르고 있는 곡도 있습니다.(278장, 416장)
그러나 한국인 찬송은 16편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외국의 복음가와 세속 음악의 가락들을 빌려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우리의 가락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찬송가가 없다는 것은 ‘종교 사대주의’, ‘문화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영적인 기운을 살리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의 삶과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한국인들의 신앙고백을 한국의 가락에 실어 부를 때에 가능합니다.
4) 우리는 이제 ‘자본주의, 합리주의, 서구 문화’라는 낡은 문명을 넘어서서, 하느님이 우리 민족에게 선물로 주신 나눔의 영성, 살림의 영성, 어울림의 영성을 다시 살리는 한국적 기독교교육을 해야할 것입니다. 나눔의 영성을 지닌 ‘하느님의 나라의 시민’, 살림의 영성을 지닌 ‘영적 인간’, 그리고 어울림의 영성을 지닌 ‘멋진 한국인’을 길러내는 한국적 교육을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이 한국적 기독교교육은 세계에 대하여 폐쇄적인 교육이 아니라, 하느님이 구원하시려고 하는 세계를 위한 교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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