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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사랑 여행 스크랩 소주방, 궁중음식의 맛과 멋이 탄생한 곳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88 14.08.06 17: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0월 5일 오후 2시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 경복궁에서 소주방 복원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경복궁 복원 사업은 어떻게 진행될까?

 

경복궁은 일제 강점기 때 대부분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1990년, 문화재청은 조선총독부 철거를 시작으로 하여 경복궁 복원 사업을 단행하였습니다. 2010년까지 진행된 사업을 통해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정전(正殿)과 편전(便殿), 침전(寢殿), 동궁(東宮), 빈전(殯殿), 광화문, 건청궁 장안당과 같은 경복궁 중심 건물들을 복원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문화재청은 2030년까지 총 6차에 걸쳐 복원 사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올해부터는 2020년까지 2차 복원 사업이 추진되며, 2016년까지는 소주방을 포함하여 56동 건물이, 2020년까지는 66동 건물이 복원될 것입니다.

 

 

 

2차 사업으로 복원될 소주방은 어떤 곳일까?

 

소주방 복원 기공식은 경복궁 2차 복원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였습니다. 소주방이란, 궁중음식을 만드는 곳입니다. 음식 조리를 위해 불(불 사를 소: 燒)’을 사용하는 곳이라고 하여 소주방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죠. 소주방은 수라간(水剌間)이라고도 불리며, 안소주방과 밖소주방으로 나뉩니다. 안소주방은 평상시에 왕에게 올리는 수라상을 준비하던 곳이고, 밖소주방은 생과방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특별한 날에 올릴 잔치음식을 만들던 곳입니다.

 

경복궁 소주방의 복원 조감도

 

 

소주방 기공식 행사

 

이번 행사에서는 건물 신축 시 지내는 전통의식인 개기고유제(開基告由祭), 집터를 닦는 지경다지기, 전통 장 담그기 시연행사 등이 열렸습니다.

 

김 찬 문화재청장은

 "20년 동안 지속되는 경복궁 2차 복원 사업에 지속적인 관심과 격려를 바란다"고 밝혔다.

 

 

▲  위사진: 개기고유제 모습, 아래사진: 지경다지기 모습

 

 

대장금은 실존 인물일까?

 

소주방은 드라마 대장금을 통해 익숙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흔히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장금이는 과연 실존 인물일까?”라는 것이죠. 장금이는 실존 인물입니다. 장금이는《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합니다. “의술이 탁월할 정도로 뛰어난 중종의 주치 의녀”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소주방 궁녀였다는 설정은 허구(fiction)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진 출처: MBC

 

 

소주방(수라간) 궁녀들은 어떻게 상궁이 되었을까?

 

장금이와 같은 수라간 궁녀들은 10년에 한번 씩 선발되었습니다. 궁녀가 되려면 10살 무렵에 입궁해야 합니다. '생각시'라고 불리는 어린 궁녀들은 도제식 교육을 받으며 업무를 배우고 실무 이외에도 기본 소양을 쌓기 위해 한문을 익혔습니다. 생각시들은 견습 기간을 거쳐 견습나인이 되고 성년식을 거쳐야만 비로소 정식 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년식을 치르면서 견습 나인들은 “평생동안 임금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다짐합니다. 성년식을 거친 이후 15년 동안 수련을 받고 일하면 상궁이 될 수 있습니다. 35세에서 40세 정도에 전문의가 되듯이 여성에게 전문직이었던 궁녀 역시 3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궁녀가 오를 수 있는 최고 높은 신분인 상궁(정5품)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상궁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자리를 얻기 위해 권력 쟁탈이 비일비재할 정도로 경쟁적이었기 때문이죠. 나인들 대부분은 상궁이 되지 못했습니다. 궁녀 중 승은을 입어 신분 상승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소수에 해당되었지요. 수라간 궁녀들의 생활은 드라마 대장금에 비추어지는 것처럼 그리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궁궐에서의 엄격했던 법과 형식을 철저히 지켜야 했던 점을 물론이고, 유교주의 영향으로 자연재해가 발생하거나 국가의 재정이 빈약할 경우에는 죄가 고스란히 이들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이따금 궁궐 밖으로 내쳐지는 상황도 있었지요. 하지만 재가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평생 정절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처럼 수라간 궁녀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한 책임의식을 필요로 했습니다. (참고: 히스토리아 블로그(http://historia.tistory.com/)

 

 

소주방의 마지막 상궁 한희순과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한복려

 

1910년에 순종이 창덕궁에서 승하하자 윤비는 낙선재에서 1966년까지 몇몇 상궁을 거느리고 궁중의 법도를 지켰습니다. 1940년부터는 주방상궁 한희순이 홀로 남아 낙선재 주방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국가에서는 1970년 궁중음식법을 전승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로 조선왕조 궁중음식을 지정하고, 그 기능보유자로 1971년 한희순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받은 이듬해인 1972년에 한희순 보유자가 타계하면서 이후 조선왕조 궁중음식은 단절위기에 처합니다. 다행히도 어려서부터 궁중음식으로 보고 듣고 배워온 황혜성 선생님이 그 기능을 인정받아 1973년 보유자로 인정됩니다. 그 이후 황혜성의 따님인 한복려 선생님께서 그 기능을 전수받았고, 황혜성 선생님이 타계하시자 한복려 선생님이 기능 보유자가 되었습니다. 현재 궁중음식 연구와 전수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참고문헌: 중요무형문화재 조사 보고서, 한복진 『조선시대 궁중의 식생활문화』)

 

▲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한복려

 

 

조선시대의 남자 요리사, 대령숙수

 

그렇다면, 소주방 궁녀들이 궁중 내 모든 음식을 준비했을까요? 아닙니다. 임금의 수라상을 책임지는 이들이 소주방 궁녀라면, 잔치 음식을 장만했던 장본인은 따로 있었지요. 바로 남자 요리사인 '대령숙수(待令熟手)' 입니다. 대령(待令)은 왕명을 기다린다는 뜻이고, 숙수(熟手)는 요리사를 일컫습니다. 이들은 궁궐 밖에서 살면서 궁중의 잔치인 진연 때 입궐하여 숙설소(熟設所)라는 임시 주방에서 잔치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큰 잔치에는 보통 40-50여명 되는 대령숙수가 음식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영화 <식객>에서도 대령숙수가 등장합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소주방에서 만들어지는 일상식은? 

 

소주방에서는 주로 임금님이 드시던 일상식, 즉 수라상이 준비되었습니다. 임금님은 하루에 총 5번의 식사를 하셨습니다. 아래 시간표를 통해 임금님이 무엇을 드셨는지 알아보겠습니다.

 

07:00 : 초조반을 드십니다. 초조반이란, 아침 수라 전 간단하게 드시던 죽과 보약을 의미합니다. 흰죽, 잣죽, 깨죽, 우유죽, 흑임자죽, 타락죽을 드셨지요. 여기서 타락죽(駝酪粥)'이란 생소한 죽이 있네요. 타락죽은 물 대신 우유를 넣은 죽입니다. 특별히 송아지를 낳은 암소의 젖을 짜서 쌀과 함께 쑨 죽입니다. 임금님은 죽과 담채(김치), 굴조치, 무조치, 명란조치와 함께 드셨다고 합니다.

 

10:00 : 아침수라를 드십니다. 수라는 일반적으로 기본 수라상과 12첩 반상을 말합니다. 기본 수라상은 수라(밥), 탕, 조치, 찜, 전골, 침채, 장류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외에도 12개의 반찬이 더 있으니까요. 12첩 반상은 더운 구이, 찬구이, 전유화, 편육, 숙채, 생채, 조림, 장, 젓갈, 마른찬, 육회와 같은 열 두 종류의 반찬을 의미합니다.

 

13:00 : 점심에는 반과상이 차려집니다. 반과상은 수라상보다는 간단한 상차림입니다. 임금님은 보통 국수 종류인 면이나 만두, 떡국, 그리고 다과를 드셨습니다.

 

17:00 : 오후 5시가 되면 저녁수라를 드십니다. 아침수라와 마찬가지로 기본상과 12첩 반상이 차려집니다. 단, 반찬 종류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겠지요.

 

21:00 : 반과상이 차려집니다. 간단하게 국수나 다과가 준비됩니다.

 

▲  골동반(비빔밥), 갈비찜, 구절판, 신선로(출처: 한국의 집)

 

 

검식과 세 상궁들의 역할

 

임금이 수라상을 드실 때 함께 하는 세 상궁들은 막대한 임무를 수행합니다. 한 명의 상궁은 ‘검식’이라는 것을 합니다. 검식이란, 임금이 드실 음식의 독의 유무를 검사하는 행위를 의미하며, 또 다른 용어로 “기미를 보다”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저번에 제가 소개했던『신주무원록』에서 독의 유무를 검사할 때 가장 유용했던 도구가 무엇인지 기억하시나요? 바로 은비녀였지요. 은수저는 은비녀와 마찬가지로 독과 산소가 반응할 때 파란 형광 빛을 냅니다. 기미 상궁 외 다른 상궁은 임금이 국이나 찜을 다 드셨을 때 전골을 끓여 덜어드리는 역할을 하고, 나머지 상궁은 임금 가까이에서 시중을 듭니다.

 

 

식혜와 고종의 독살설

 

고종 황제는 술을 전혀 못하시고 대신 야참으로 식혜를 즐기셨어요. 그 날도 여느 때처럼 식혜를 한 잔 잡수시곤 하루 일과를 시작하려고 하셨지요. 누구도 비극을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식혜를 마신 후 갑작스럽게 복통과 갈증을 호소한 고종 황제는 30분 만에 돌아가셨고 기미를 보았던 궁녀 2명이 의문사 합니다. 고종 황제의 팔 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오르고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었다는 점을 보아 독살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궁중음식은 궁중에서만 먹었던 음식일까?

 

궁중음식은 의외로 보편화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반가와의 교류 때문이었어요. 여기서 반가란 양반의 집안을 뜻합니다. 궁중 잔치가 끝나면 고관과 종친들은 서둘러 하인들에게 남은 음식을 궁궐 밖으로 가지고 가도록 했어요. 그 예로 ‘고임떡’을 들 수 있습니다. 고임떡은 높게 쌓아 올려 만든 떡인데요. 신하들은 잔치가 끝나면 고여진 떡을 골고루 나눠 집으로 들고 갔습니다. 반가에서는 잔치에서 가져온 궁중음식의 본을 받아 반가음식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반가 음식은 민가까지 전해지면서 점차 보편화되었습니다. 

 

▲  고임떡(출처: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안타까운 점은, 궁중음식의 재료, 조리도구, 종류 등은 여러 문헌 자료에 현재까지 전해지지만 조리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소주방 상궁들이 나인들에게 직접 비법을 전수하는 ‘도제식 교육’이 수 백 년 간 이어져왔기 때문에 그 누구도 기록화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했던 것이죠. 마지막까지 소주방을 지켜왔던 한희순 상궁이 궁중음식 비법을 전수한 덕분에 오늘날까지 궁중음식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궁중음식은 단순히 궁중에서 먹었던 음식 차원에서 나아가 문화적인 것입니다. 그 가치는 비단 음식의 종류와 맛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약식동원 사상(“음식은 곧 약이다.”), 탕평채에 녹아있는 화합 정치의 의지, 정성이라는 지극한 배려, 멋과 자부심, 그리고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궁중 음식을 조리했던 소주방은 얼마나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소주방 복원으로 더 많은 이야기들이 발굴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참고문헌>>

중요무형문화재 조사 보고서 궁중음식편

한복진,『조선시대 궁중의 식생활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히스토리아 블로그(http://historia.tistory.com/)

궁중음식연구원 홈페이지(http://www.food.co.kr/)

 

 

 

 

 

▲제3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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