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탁월한 영남성(嶺南性), 밀양아리랑
지난 6회 <밀양아리랑의 수수께기>에 대해 두 분의 독자와 한 학생으로부터 문의를 받았다. 필자도 미처 주목하지 못한 부분도 있고, 지면 관계상 생략한 부분이어서 이번에는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우선 학생의 질문은 지난 회에서, 이재욱이 청송 지역 조사 기록에 단지 ‘날좀보소’ 한 마디를 <경북아리랑>이라고 표기 한 것을 근거로 이 사설이 원래는 밀양아리랑이 아닌 경북의 다른 아리랑에서 불려진 사설 일 것이라고 한 것은 무리가 있는 것 아니냐라는 취지였다.
이는 지면 관계상 부연을 하지 못한 부분인데,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면에서 답할 수 있다. 즉 하나는, 문헌으로 확인 되는 <밀양아리랑>의 존재는 1926년 10월초의 레코드 광고인데, 이 음반이 서울에서 발매되었기에 이재욱이 조사 할 1930년도에는 아직 영남 곳곳에 유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재욱의 기록은 음반 발매 이전부터 불려오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둘은 이 사설이 단지 이재욱 조사 <경북아리랑>에서만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요에서도 불렸다는 사실이다. 1969년 조동일교수가 영양군 일원면에서 조사 한 <삼삼는 소리>에 “···문경새재 밥바구리 해 이고서/딸 찾어 헤맨다//날좀보래요 날좀보래요 날 쪼금보래요/저기가는 저처녀야 날 쪼금보래야···”에서 확인 된다. 두 말할 여지없이 <삼삼는 노래>는 그 연원이 아주 오랜 노래다. 정리하면 이 두 가지 사실에서 밀양아리랑 첫 사설은 이미 경북지역에서 불려오던 사설을 수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독자의 질의는 ‘아랑’ 처녀의 이름이 음전(音轉)하여 ‘아리랑’이 되었다는 설은 근거가 없는 것이냐는 질문이다. 그리고 또한 ‘아랑’처녀 설화와 밀양아리랑이 관계가 없다면 어떤 배경에서 오늘날처럼 널리 불리게 되었느냐는 질문이다.
밀양시 내일동 ‘영남루’ 윗 쪽에는 박시춘선생 기념비와 생가가 있고, 여기서 밀양강 쪽으로 가면 시립박물관을 오르는 돌계단 옆에 <밀양아리랑> 노래비가 세워져 있고, 다시 돌계단을 내려가 대숲 쪽으로 오르면 ‘아랑각’과 안내 현판이 있다. 그런데 이 현판 내용에서나 노래비 어디에서도 ‘아랑처녀 설화’와 <밀양아리랑>과의 관계를 언급한 대목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처녀 이름 ‘아랑’이 변해서 ‘아-리-랑’이란 민요 이름이 생겼다는 주장에 대해 현지 기록에는 없다는 말이 된다. 이는 아랑처녀 설화가 <밀양아리랑>의 배경설화가 아니라는 것이기도 하다.
두 번째의 질의는 서로 연관되는데, <밀양아리랑>의 유명세가 조선 중기 정절을 지킨 아랑 처녀의 정신을 기리려는 밀양지역의 정서와 또한 3백여년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유명해진 것 아니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에서 살폈듯이 설화와 관련이 없어 이 두 가지 조건의 결과는 아니다. 결론은 <밀양아리랑>의 첫 사설과 가락이 탁월하게 영남적이라는 점이 우리나라의 대표아리랑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날좀 보소’라는 경상도적인 반말투, 여기에 모든 아리랑 중 가장 활달한 경상도적인 선율이 <밀양아리랑>을 우리들에게 널리 불리게 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곧 탁월한 영남성이 브랜드 파워를 발휘했다는 것이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