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14-16, 성도는 세상을 비추는 빛.
어느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꿈은 의사였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를 했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돈잘버는 자리를 버리고 바다건어 먼~수단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젊은 선교사들은 가려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곳에 석기시대나 있을법한 곳에 그는 찾아 들었습니다. 원주민 마을은 각종질병으로 고통을당하고 죽어 가는 그들에게 이 젊은이는 치료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가르치고 악기 연주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일년에 한번씩 한국에 와서 자신의 사역지를 알리고 선교비도 마련하기위해 왔다가 검진을 했는데 말기 위암이었습니다. 그는 낙망했다고 했습니다. 일찍죽어서가 아니라 남겨진 수단에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아직 할 일이 많은데 갈수 없게 되어서 그리고 그는 실제로 수단에 갈려고 했는데 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전해 질 모금을 위해 콘서트를 합니다. 책자도 만들고 그렇게 열심히 최선을 하고 그젊은이는 죽었습니다. 제작진들이 그 젊은이의 사진을 들고 그 수단을 찾아가 그곳에 사람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남자나 여자나 절대로 울지 않는다는 관습이 있는데 그관습을 깨고 그날은 어른 아이할것없이 사진을 보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플때 치료해 주었고 벗었을 때 옷을 주었고 슬퍼할 때 노래를 불러주었으며 기도를 가르쳐 주었으며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천주교회의 의료선교사인 이태석신부의 실화입니다. 그는 떠났지만 그곳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어 주었고 그들의 가슴에 자라고 있습니다. 그곳에 아이하나가 자기도 열심히 공부해서 의료로 봉사하는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태석선교사는 소금으로 빛으로 살다간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라 했습니다. 13절에서 세상은 땅만을 의미하는 ‘게’를 사용했다면 여기에는 우주전체를 가리키는 ‘코스모스’라는 단어에서 나온‘코스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즉 성도는 우주공간에 빛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은 이 땅, 우주는 어둡다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죠. 예수님이 빛이신데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둠인 세상은 빛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 빛이신 예수님을 무시하고 배척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밝은 빛 앞에서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이 들어나기 때문에 싫었습니다. 오히려 훌륭한 의인이라고 스스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이땅에서 비추는 사람이 만든 빛은 예수님의 빛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빛되신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꺼져 버리하고 그러나 골고다 동산위에 십자가위에 그빛은 꺼지지 않고 지금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 빛이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세상을 비추어야 합니다. 어떻게 비추는 것일까요? 등잔불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등잔은 우리 몸입니다. 성령이신 기름을 넣어야 불을 켤수가 있습니다. 나혼자 힘으로는 안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 등불을 켜서 동네에 비추인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감추인것이 아닌 들어나게 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을받아야 불을 켤수가 있는데 어떻게 받나요?
첫째가 거듭나야 합니다.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빛되신 그리스도,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품은 즉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사람을 만나면 시들어지는 그리스도인이 생기를 얻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로부터 그리스도의 생기를 전이 받기 때문입니다.
14절에서 숨기우지 못 할것이요, ‘할 것이요’‘뒤나타이’의 명사형은 ‘뒤나미스’로서 이단어의 의미는 ‘권세’(6:13)‘능력’(13:54),‘힘’(히11:11)등의 뜻의 가지고 있습니다. 폭팔력이 강한 폭약을 영어로‘다이나마이트’로 쓰는데 이 단어가 헬 뒤나미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뒤나타이’가 ‘~을 할수 있는 능력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부정어 ‘우;와 함께 쓰이고 있어 자신을 숨기는데 전혀 무능한 상태를 말씀합니다.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은 걸까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면 자신을 감추고 싶어도 들어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처럼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고 나타내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바로 고 이태석 선교사처럼 말이죠,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가고 없지만 그곳 사람들은 수단에 슈바이처라고 한다 했습니다. 그 원주민에게 선교사들이 가려하지 않은 이유중 하나가 그들은 식인종이라는 소문때문이었습니다. 끊임없는 전쟁에 살아남기위한 방편으로 적장을 잡으면 주민이 다보는 앞에서 잡아 먹었다는 것이죠, 누구도 가려하지 않은곳에 그는 왜 갔을까요,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돌아 보았고 벗었을 때 입혀 주었고 굶주렸을 때 먹을것을 주었다, 우리 개신교처럼 주님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없어 보였지만 그러나 그는 몸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어 정말 그리스도의 제자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은 생명입니다. 에너지입니다. 그 빛을 성도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 되라 우리에게 있는 빛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빛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비추어야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한가지 더 살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유대인은 자기등불에 불을 붙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예루살렘은 이방에 비추는 빛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대인의 등불에 불을 붙이셨습니다. 이것은 유대민족이나 하나님의 사람이 비치는 빛은 반사하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걸까요, 너의 빛이 아니라 나의 빛을 받아서 비추라 그것입니다.
그 빛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의 마음에 켜주는 빛인것입니다. 잘 믿는 자를 볼 때에 그 사람의 얼굴에 빛이 난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의 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은총의 빛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 빛 생명을 받아서 인류를 향한 사랑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에 빛, 즉 우주인 ‘코스무’에 비출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최고의 빛을 비추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기 보다 장식품으로 목에 걸고 다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목에 달고 다니는 장식이 아니라 어깨에 지는 멍에라고
13절에 소금은 교회안에서 맛을 내는 것이라면 빛은 교회 밖에서 비추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 단어도 세상은 땅만을 가리키는 ‘게’를 사용했다면 14절에서 세상은 우주를 말하는 ‘코스무’를 사용했습니다. 성도는 교회안에서 빛이 아닌 교회밖, 세상 사람들에게 행함으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둘째, 빛은 어두운 곳에 비추어야 합니다.
등잔불의 본래적인 직능은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은 모든 사람에게 완전히 보일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교회 밖, 세속 생활에서 더 많이 보여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너회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우리 존재의 목적이 어두운 곳을 밝히는 데 있음을 말해줍니다.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어 사람들로 하여금 참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데 영향력을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우주를 밝히려고 애를 쓰는 것 보다는 오직 그리스도께만 충성하며 사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빛되신 주님의 뜻에 거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 빛이 널리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빛은 또한 인도자의 역할을 합니다.
빛은 길을 분명하게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길을 분명하게 밝혀 주어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에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세상은 말씀을 굳게 잡고 선을 위해서 굳세게 서서 진리와 생명으로 인도할 선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는 어두운 사회를 빛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생명을 걸고 감당해야 합니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지막으로, 우리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본문 "착한 행실"은 선하며 매력있고 아름다우며 사람의 마음을 끄는 행위를 뜻합니다. 성도는 "착한 행실"은 단순히 선할 뿐만 아니라 역시 마음을 끄는 매력과 힘, 그리고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선이 있고 사람에게 반발을 느끼게 하는 선이 있습니다. 소위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자기가 성취한 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로 말미암아 하게 하신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관심만 가질 뿐입니다.
성도는 사람들의 눈을 자기에게 집중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 영향력의 성격은 진실무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사람 됨됨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지 아니하면 세상을 비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올바르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코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 사회에서 소금의 영향력도, 빛의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성도들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세상에 영향력있는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인간됨됨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시기 축원합니다. 할레루야..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