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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27장 57-66절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 양 옆에 있던 강도들의 죽음과는 분명 다른 죽음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한 형벌이었지만 예수님은 결코 자신의 죄로 인한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여러 면에서 예수님의 죄 없음에 대하여 증거하는데,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를 통해서, 그리고 세속 권세자인 빌라도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를 통해서도 그가 죄 없는 의인임을 증거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을 통해서는 그가 죽음에 이르자 예수님을 처형한 자들, 로마의 백부장과 및 함께 지키던 자들도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일어나 기이한 현상들을 보면서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 하였습니다.
때문에 그의 죽음은 결코 정당한 죽음, 합당한 죽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올무를 놓고 거짓된 증거들을 가지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였는데,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매우 억울할 수 있는 죽음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경은 그 모든 일이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바요, 하나님의 뜻으로 있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마치 죄인처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도록 하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지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하여 있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악인들은 그들 스스로의 뜻을 따라 악을 행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끌어내신다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고통을 다 받으셨고,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서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 죄에 대한 형벌로써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육신적으로도 고통을 받으셨고, 영혼으로도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육체적인 고통보다 영혼의 고통을 더욱 힘들어하셨는데, 왜냐하면 인성을 취하셨지만 여전히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는 분이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외면 받은 것처럼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될 수 없는 분이 마치 하나님과 단절된 것처럼 실제로 느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숨지시기 전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한다고 말했습니다(눅23:46 참조). 하나님을 부르면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느냐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지만, 결코 불신앙적인 태도로써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만큼 그의 영적인 고통이 컸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영적인 고통이 컸다고 할 만큼 하나님 편에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죄에 대하여 예수님은 친히 택자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것이고,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대신하여 치르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한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죽으시기에 앞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19:30 참조), 예수님은 지상에서 생활하시는 동안 자기 백성이 이루지 못한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완전한 순종을 보이셨고, 율법 앞에서 정죄 받을 수밖에 없던 자들을 대신하여 친히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예수님의 죽음과 마태복음 28장으로 넘어가면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사건 사이에 있는 것으로, 예수님을 장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통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관련하여 그의 삶과 그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언급할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전한 증거들을 보면 주로 그의 죽음과 부활을 언급할 때가 많습니다. 예외적이라면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장사된 바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는데(행13:29), 어떻게 보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경우도 그의 죽음과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분이 분명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결코 거짓된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말하는 것처럼 죽은 척 했다든가, 아니면 기절했다든가 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자면 그의 죽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의 부활 역시 거짓일 수 없다는 것까지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오늘 본문 57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여기서 저물었을 때란 안식일 전날입니다. 마가복음 15장에 보면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막15:42)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날이 언제냐 하면 마태복음 28장 1절에 보시면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금요일 오후쯤입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제 삼시, 우리 시간으로는 오전 9시쯤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12시에 어둠이 임하고 오후 3시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을 외쳤습니다. 그러니까 오후 3시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죽으신 겁니다. 바로 그날이 저물었을 때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온 것입니다.
그럼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우선 그에 대하여 부자라고 소개합니다. 물질의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요, 그분을 쫓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자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람에 대하여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도 말합니다(막15:43). 공회원이라는 것은 유대 사회 속에서 어느 정도 신분을 가진 자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신분만 가진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하여 증거 하기를 존경 받는 공회원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도 언급하고 있는데, 예수의 제자라고 한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합당한 그런 나라를 기다리는 자인지, 아니면 소위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도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고 할 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누가복음에서는 그에 대하여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그리고 공회 의원으로써 당시 유대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로 설명하기도 합니다(눅23:50-51).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했을 때 그는 그것을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에 기록하지 않은 사실을 요한복음에서 언급하는 내용이 있는데, 요한복음 19장 38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로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죽기까지는 유대인이 두려워서 그것을 숨겼던 것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통해 그는 어떤 자로 있게 되었는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넘겨주기를 요구하는 인물이 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58절에서 60절의 내용입니다.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그러니까 그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 제자로 있었지만 그런 사실을 밝히 드러내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자고 결의할 때 그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여겨 반대의 표를 던지긴 했지만, 그때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지는 않았던 겁니다. 그러다 예수 그리스도가 잡히고 심문을 받는 과정 속에서 결국 죄인의 누명을 쓰고 십자가 형벌로써 죽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전에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지 않다가, 그의 죽으심을 통해 이제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아리마대의 요셉과 예수님 곁에서 3년 동안이나 동거 동락한 열한 제자를 비교해 보면 어떤 면에서는 마치 대조를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는 자기 목숨까지 버릴 각오를 하였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결코 주를 버리는 일은 없다고 장담하였습니다(마26:31,33). 그리고 잠시나마 그들이 장담한 것처럼 보이는 행동도 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베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내어주셨을 때 제자들은 다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심문을 받는 과정 속에서 베드로와 및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멀리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알기 위해 따라갔지만, 베드로의 경우는 그 과정 속에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의 경우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 숨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마음 가운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두려워 숨기는 것을 이제는 담대하게 자신의 신앙을 드러냈던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에서 그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할 때 열 한 제자와는 대조적인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으로만 생각하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은혜와 영광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을 믿고 소망할 수 있도록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아리마대 요셉 외에도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도 그와 같이 하였다고 증거하고 있는데(요19:39), 니고데모 역시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경우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지도자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는 다른 사람들 이목을 생각해서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밤중에 찾아와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성경은 그가 그런 가르침으로 통하여 곧바로 변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아리마대 요셉처럼 예수님을 장사하는 일에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어렵다고 할 수 있는 순간에 자신의 신앙을 드러낸 자들에 대한 내용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칭찬을 받아 마땅합니다. 비록 살아계실 때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죽음으로 마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다 흩어져 와해된 것처럼 있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드러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가 아니라 여전히 소망을 가지고 있는 자의 행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이끄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 하필 유대인들 가운데 높은 신분이라 할 수 있는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장사하게 했는가? 이전에는 자신의 신앙을 숨기고 있었는데, 그것도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숨기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들로 하여금 담대함을 주셔서 예수님의 죽음을 장사하게 했는가? 그의 죽음은 결코 수치스러운 죽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죽음이 수치스러운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곧 죄 있는 자가 처형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죄가 있어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죄와 상관없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짐을 짊어 지셨기 때문에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의인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런 분의 죽음이 어떻게 귀하지 않겠습니까?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물론 요셉의 노력을 높이 평가 해야겠지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야겠다. 곧 하나님께서 그 민족 가운데서 고귀한 신분의 사람을 선택하셔서 정중한 장례로 십자가의 수치를 감싸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리마대 요셉을 사용하신 것은 그의 장례를 통해 그의 죽음이 결코 수치스러운 죽음일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인 겁니다. 그가 부자인 이유, 그가 유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신분을 가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그의 신분을 통해 그는 빌라도에게 좀 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고, 그가 부자여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새 무덤에 안치될 수 있었던 겁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무덤에 갖다 놓기 전에 먼저 세마포로 쌌다고 말하는 마태복음의 증거 외에 방부처리를 위한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되는 것을 니고데모가 가져왔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매튜 풀 주석에 보면 이런 설명도 있습니다. “요한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라는 말도 덧붙이지만, 요셉과 니고데모가 우리 주님을 장사지낸 방식은 통상적인 것은 아니었고, 단지 그렇게 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지극히 낮아지시고 비천하게 살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높이셔서 존귀와 영광을 더하시는 과정의 시작일 뿐이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를 사용하셔서 예수님의 장례를 행하도록 한 것은 그의 죽음이 결코 수치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존귀한 죽음이요 영광스러운 죽음이라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 그를 높이시고자 하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면, 안식일 전에 시체를 거두고자 한 것은 안식일에는 시체를 두지 않도록 하는 율법 때문입니다(신21:23).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요한복음에 보면 장사하기에 앞서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1절부터 보시면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요19:31-37) 안식일에는 시체를 두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안식일 전날 사형수들은 죽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좀 더 빨리 죽도록 하기 위해서 다리를 꺾도록 하는 일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경우는 양 옆에 있던 강도들보다 빨리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다리를 꺾지 않았는데, 이것도 무엇을 성취하는 것인가? 구약에서 예언한 바를 성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 속에서 빌라도가 아리마대 요셉이 요구한 예수님의 시체를 줬다는 것은 그의 죽음이 거짓이 아닌 사실로 있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죽지도 않았는데 내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본문을 통해 밝혀주고 있는 것처럼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간 것 역시 그가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61절을 보시면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지난 시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도 갈릴리에서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였는데, 그의 장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눅23:55-56) 이때 여자들이란 마태복음에서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갈릴리에서 따라온 많은 여자들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죽음에서부터 장사에 이르기까지 지켜본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이 결코 거짓된 죽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로 있으며, 그것을 증거 할 증인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맨 처음 보이신 인물입니다(막16:9). 이전에는 일곱 귀신이 들려 귀신에게 매인 바 된 인물이었지만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 주심으로 자유하게 된 여인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가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하는 자리까지 쫓아간 것은, 심지어 부활하시는 날에까지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막16:1), 그런 열심은 주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모습으로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았다면 우리의 마땅한 자리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모습으로 열심을 가져야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여인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그의 죽음이 누구를 위한 죽음이냐? 그만큼 연약한 자, 소외된 자들을 위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경우 부자입니다. 유대 사회로 볼 때 신분이 높은 자입니다. 그럼 그는 하나님 앞에서 연약하고, 소외된 자가 아닌가? 그도 역시 동일합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자요, 가난한 자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자인 겁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만이 아니라 원수들까지 증거 한다고 할 수 있는데, 62절 이하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62절부터 66절을 보시면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57절에서 ‘저물었을 때’란 안식일 전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날을 준비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62절에서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고 해서 안식일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 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어떤 일을 하느냐?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께서 장사되신 무덤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들은 바가 있기 때문에, 혹이라도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부활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부활한 것처럼 속일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속이면 살아생전에도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는데, 더더욱 그렇게 되지 않을까 염려해서 빌라도에게 무덤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이런 모습은 굉장히 의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전통에 따르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지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저들은 전에 주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따먹는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았습니다(마12:13).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크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 자신은 안식일에 빌라도를 찾아가서 그를 움직여 제3일까지 예수의 무덤을 단단히 지키도록 요구하고 있으니, 얼마나 모순적입니까!(매튜 풀 주석 참조).
이런 저들의 요구에 빌라도는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들은 누구도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경비병을 세우고,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분명한 사실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이후, 마태복음 28장으로 넘어가면 무엇이 증거 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증거 되고 있습니다. 1절부터 보시면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마28:1-3) 그리고 바로 그 천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다음 주에 다시금 살필 것인데, 지금 무엇을 확인하고자 하느냐 하면 이 사실을 그곳을 지키던 경비병들도 본 것입니다.
바로 그 본 사실을 대제사장에게 아뢰는데, 마태복음 28장 11절 이하를 보시면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마28:11-13)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갔다는 것을 통해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자들이 단지 한 두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 27장 66절에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켰다는 것을 통해 철저히 지킬 수 있도록 인력을 어느 정도 배치해 두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켰지만 안식 후 첫날,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날이 되자 큰 지진이 일어나면서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무덤의 돌을 굴렸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던지 지키던 자들이 무서워서 떨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오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언제 나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덤을 나가셨던 겁니다. 경비병들이 천사로 인하여 두려워서 예수님이 나가시는 것을 봤는지, 안 봤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무덤을 굳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무덤이 비었다면 누군가 예수의 시체를 가지고 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만이 남게 되는가? 예수님께서 그의 말씀을 따라 친히 부활하셨다는 것만 남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들 편에서는 분명 악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한 의도로 무덤을 지키게 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 그리스도에게 유익하도록 하는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자 하는 의도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할 수 없는 증인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튜 풀 주석을 좀 읽어드리면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아무도 이 대목을 기록하고 있지 않는데, 오직 마태만이 이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를 한 가지 더 추가적으로 제공해 준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하여 사기를 칠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아주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지독하게 꼼꼼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막고자 한 것은, 그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분명하게 확증해 주는 것이 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어리석음으로 바꾸어 놓으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꾀에 빠져 그들 자신의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얻게 하심으로써, 자신이 세우신 왕이 거룩한 산 시온 위에 우뚝 서게 하셨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것을 분명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말을 들었기 때문에 혹이라도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가지 않을까 하고 삼엄하게 경비를 섰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졌다는 것은, 그리고 그 사이 천사들이 내려와 돌을 굴리고 지진이 나는 등의 일을 통해 그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도록 하신 것이란 겁니다.
칼빈의 주석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부활을 입증하고 엄청난 섭리를 거울로 비추듯 우리에게 보여 주는 데 있다. 영리한 사람들은 함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곧 사기와 위증에 잘 숙달된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말끔히 씻어 없애 버리려고 생각을 짜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성취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 기억을 고의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곧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돈주고 고용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일을 이용하셨다는 점이다. 그들이 빈 무덤을 발견하고서도 그것을 부정하고 거짓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악한 의도조차 선으로 바꿔놓으신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롬8:28). 그러므로 여러분, 악인의 악함이 아무리 대단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저들의 악함에 대하여 전혀 미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어떤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도 전혀 방해를 받지 않으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기를 좋아하느냐? 마치 나의 무엇이 있어야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준비된 자를 쓰신다는 등 인간에게 공로를 돌리는 식의 말들을 하지만, 결코 인간에게 돌아갈 영광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창1:1).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십니다(롬4:17). 그런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의 준비를 필요로 하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준비된 자가 아니라, 준비케 하셔서 쓰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의 어떤 인물도 스스로 준비되어 쓰임 받은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셔서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하여 있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우리는 수많은 죄악들을 내놓습니다. 수많은 오류들 또한 내놓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진리와 그분께 속하는 것들이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진리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들 속에서, 우리의 오류들 속에서 선을, 진리와 참된 것을 내놓으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악들도 괜찮다, 우리의 오류들도 괜찮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들입니다. 악한 것이기에 성도는 그런 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연약함이 분명 있다는 것이고, 그런 연약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에 방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악인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시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야 어떻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리마대 요셉을 그렇게 사용하신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지는 않지만 요한복음을 통해서 언급되고 있는 니고데모 역시 동일합니다. 저들은 다 자신의 신앙을 숨겼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함이 마땅하지만 그들의 연약함은 그런 자리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장사할 수 있는 부와 사회적인 위치를 준비해 놓으셔서 그의 죽음이 결코 수치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죽음임을 나타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악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개혁주의를 지향한다고 해서 그에 걸맞은 것만 내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악한 자들이 악한 의도로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하였지만, 도리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더욱 확증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것만큼 위로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만큼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도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행하시는 겁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을 친히 악인의 입을 통해 드러내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 인생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자들이고,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