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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 홍혜문 소설집 『대암의 하늘』 작품론 ⑤
「해장라면」의 결핍과 자기회복의 서사
「해장라면」은 홍혜문의 소설집 가운데 가장 낮고 뜨거운 장소에서 시작한다. 그곳은 고속도로 휴게소의 라면 주방이다. 밤새 차량들이 오가고, 취객과 운전기사, 관광객들이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공간이다.
사람들은 번호표를 내밀고 음식을 요구하며, 민서는 쉴 틈 없이 냄비에 물을 붓고 불을 켜고 면과 콩나물, 떡과 북어살을 넣는다. 그녀의 몸은 피로와 부종, 화상과 굶주림에 시달리지만, 손님들은 기다림조차 참지 못한 채 라면이 왜 늦느냐고 소리친다.
이 작품의 세계에서 민서는 처음부터 한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그녀는 주문을 처리하는 손이며, 라면을 끓이는 노동력이고, 실수하지 않아야 하는 일일 종사자일 뿐이다. 손님은 그녀의 몸을 훑어보고, 총무는 이름표를 누르며 자존심까지 짓밟는다. 화상을 입어도 산재나 보험을 기대할 수 없고, 다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오히려 해고될지 모른다.
그런데 홍혜문은 이 고된 노동을 단순한 사회고발의 대상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휴게소 주방은 민서가 착취당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버려진 기억을 반복하고, 마침내 자신의 삶을 새로 선택하게 되는 내면의 공간이다.
「해장라면」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먹는 행위’이다. 이 작품에는 끊임없이 음식이 등장한다. 해장라면, 햇반, 생라면, 생쌀, 통조림, 햄버거, 크림빵, 딸기우유와 초코우유가 민서의 주변을 맴돈다. 사람들은 먹고 떠나고, 빈 그릇만 남긴다. 민서는 그 빈 그릇을 치우고 다시 음식을 만든다. 먹는 행위는 가장 본능적인 생존의 몸짓이지만, 작품 속에서는 사랑과 결핍, 버림과 돌봄을 동시에 드러내는 행위가 된다.
민서는 문득 인간이 왜 끊임없이 먹고 마셔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서로 헤어지고 가족을 버리며 상처를 주면서도 먹는 일만은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긴다. 이 질문은 단순한 사춘기적 사색이 아니다. 그것은 버림받은 아이가 세계를 향해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사랑이 없어도 사람은 먹는다. 가족이 떠나도 배는 고프다. 절망한 사람도 다음 끼니를 찾아야 한다. 먹는다는 것은 인간이 삶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가장 단순하고도 잔인한 증거이다. 감정은 무너질 수 있지만 몸은 계속 살아달라고 요구한다. 홍혜문은 바로 이 생물학적 본능 속에서 삶의 끈질김을 발견한다.
민서는 자신의 삶을 누군가가 먹고 남긴 빈 그릇처럼 느낀다. 어머니가 떠나고 자신과 동생만 남았을 때의 감각이 휴게소 탁자에 놓인 빈 그릇과 겹친다.
빈 그릇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아픈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릇은 원래 무언가를 담기 위한 물건이다. 그러나 비어 있을 때 그 그릇은 결핍을 드러낸다. 민서의 마음에도 어머니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다. 사랑받은 기억, 돌봄의 기억,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해줄 관계가 빠져나간 자리이다.
민서는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어머니를 기다린다. 어머니의 외가가 있던 자리에 휴게소가 들어섰다는 말을 믿고, 언젠가 어머니가 이곳을 지나갈지 모른다는 가능성에 자신의 시간을 건다. 따라서 민서가 끓이는 수많은 라면은 단순한 노동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기다림의 단위이다.
처음에는 천 그릇만 팔고 떠나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 그릇은 일만 그릇이 되고, 어머니가 오지 않자 그 숫자를 다시 거꾸로 센다.
이 숫자 세기는 작품의 매우 독특한 서사 장치이다. 시간은 달력이나 시계로 흐르지 않는다. 라면 그릇의 수로 흐른다. 한 그릇이 팔릴 때마다 민서의 하루가 사라지고, 기다림이 쌓인다.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어머니와 만날 가능성이 가까워지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민서의 삶이 기다림 속에서 소진되는 과정이다.
일만 그릇은 노동량을 보여주는 숫자이면서 동시에 민서가 삼켜온 원망과 그리움의 크기이다. 그녀는 매일 한 그릇씩 어머니를 기다리고, 한 그릇씩 버려진 자신을 확인한다. 그러나 기다림은 반드시 희망만을 뜻하지 않는다.
민서는 “희망을 가지는 것”이 시간이 흐르면 절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홍혜문은 이 작품에서 희망을 무조건 아름답게 그리지 않는다. 잘못 붙든 희망은 사람을 한자리에 묶어두기도 한다.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민서는 학교도, 꿈도, 자신의 미래도 뒤로 미뤄둔다. 어머니가 나타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는 듯 살아간다.
이 때문에 「해장라면」은 재회를 기다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다림에서 빠져나오는 이야기이다. 민서의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그리움과 증오가 뒤엉켜 있다. 그녀는 어머니를 만나면 차갑게 “누구시죠?”라고 묻는 장면을 상상한다. 상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통쾌해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싶은 절박함이 있다. 교생 선생님의 약혼녀가 전화로 “누구시죠?”라고 물었을 때 민서는 어머니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요?”
이 질문은 작품 전체를 가로지른다. 민서는 어머니에게 버려진 딸인가. 학교를 그만둔 문제 학생인가. 휴게소에서 라면을 끓이는 일용직 노동자인가. 동생을 걱정하는 누나인가. 파티플래너를 꿈꾸었던 소녀인가.
타인이 붙인 이름과 역할은 많지만, 민서는 아직 스스로 자신을 정의하지 못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거울을 보고, 다른 여자들의 얼굴에서 어머니를 찾으며, 그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겹쳐본다.
작품 속 ‘거울’은 정체성을 확인하는 두 번째 중요한 상징이다. 거울 속에는 민서와 은영 아줌마, 그리고 보일 듯 말 듯한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있다. 민서는 분홍빛 립스틱을 바르고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처럼 웃어본다. 그러나 곧 그것을 비누로 지운다.
이 장면에는 어머니를 닮고 싶은 욕망과 어머니를 지우고 싶은 욕망이 동시에 존재한다. 민서에게 어머니는 사랑의 대상이면서 자신의 존재를 훼손한 사람이다. 그녀는 어머니를 닮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 닮음을 견디지 못한다.
홍혜문은 이러한 양가감정을 쉽게 화해시키지 않는다. 어머니에게도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하거나, 모녀의 감동적인 재회를 마련하지 않는다. 오히려 닮은 얼굴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게 함으로써 민서의 기대를 계속 좌절시킨다.
선글라스를 쓴 중년 여자를 어머니로 착각했다가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장면, 물방울무늬 옷을 입은 여자가 라면을 받아간 뒤 사라지는 장면, 분홍 원피스의 여자가 관광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은 모두 재회의 가능성을 열었다가 닫는다.
이 반복은 독자에게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한다.
민서가 찾는 것은 실제 어머니 한 사람만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을 버리지 않을 얼굴, 자신의 아픔을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줄 존재를 모든 여자에게서 찾고 있다. 그래서 어머니를 닮은 얼굴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결핍의 형상이다. 얼굴은 나타나지만, 관계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해장’은 술을 마신 뒤 속을 푸는 행위만을 뜻하지 않는다. 해장은 몸속에 남아 있는 독한 것을 풀어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서는 작품 전체에 걸쳐 자신의 삶을 해장하고 있다.
어머니를 향한 원망, 아버지에 대한 증오,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 학교에서의 상처, 교생 선생님에 대한 환멸, 가난과 노동의 굴욕이 그녀의 몸속에 숙취처럼 남아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민서는 날마다 타인의 속을 풀어주는 해장라면을 끓이면서도 정작 자신의 속은 풀지 못한다.
타인에게는 따뜻한 국물을 내어주지만 자신은 굶는다. 남의 허기는 채우지만 자신의 결핍은 돌보지 않는다. 수천 명을 먹이면서도 자신에게는 한 그릇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역설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을 더욱 깊게 만든다. 민서는 마침내 주방 모자와 앞치마를 벗고, 자신이 늘 서 있던 주방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계산대에서 해장라면 한 그릇을 주문한다.
이 장면은 겉으로는 매우 작다. 그러나 「해장라면」 전체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민서는 처음으로 라면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먹는 사람이 된다. 노동자가 손님의 자리로 이동하고, 타인에게 음식을 건네던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음식을 건넨다.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의 주문을 수행하는 손이 아니라, 배고픔을 지닌 한 인간이 된다.
이 자리의 이동은 곧 주체의 탄생이다. 그동안 민서는 자신의 욕망을 뒤로 미뤘다. 어머니가 오기를 기다리고, 동생을 걱정하고, 손님들의 재촉을 견디고, 은영 아줌마의 부탁을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녀는 스스로 주문 번호표를 들고 자기 몫의 음식을 기다린다.
그것은 자기 삶에 처음으로 번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해장라면이 나온다는 번호가 화면에 뜨자 민서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번호표를 건네고 한 그릇을 받아든다. 얼큰하고 따뜻한 향이 그녀를 감싼다. 여기서 라면은 더 이상 기다림과 노동의 상징이 아니다. 자기 돌봄의 음식으로 변한다.
그녀가 먹는 것은 단지 면과 국물이 아니다. 지금까지 타인에게만 건넸던 온기를 자신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뜨거운 국물은 오랫동안 얼어 있던 민서의 마음을 녹이고, 그동안 쌓인 숙취 같은 삶을 풀어준다.
제목이 「라면」이 아니라 「해장라면」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민서는 어머니와의 재회를 통해 치유되지 않는다. 어머니가 사과하거나 돌아와주었기 때문에 새 삶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먹이고, 자신의 상처를 돌보기 시작함으로써 과거의 독한 흔적을 풀어낸다.
이때 작품 속 ‘불’도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초반의 불은 꺼질 듯 흔들리고, 민서는 가스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위험에 빠진다. 빈 냄비가 검게 타고, 화상을 입은 손은 노동의 폭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같은 불은 라면을 끓이고, 찬 몸을 데우고, 생명을 유지하게 한다. 불은 파괴와 생명의 양면성을 가진다. 민서가 통제하지 못한 불은 그녀를 해치지만, 자신의 삶을 선택한 뒤 마주하는 불은 따뜻한 국물을 만들어낸다.
상처 역시 마찬가지이다. 달걀 껍데기가 깨지고 부서졌다가 인간의 상처도 다시 아문다는 생각, 마지막에 화상 입은 손의 물집에 새살이 돋는 듯 가렵다는 감각은 작품의 회복 서사를 섬세하게 뒷받침한다. 새살은 상처가 없어진 상태가 아니다. 상처를 통과한 자리에 새롭게 돋는 살이다. 민서가 얻는 미래 또한 과거를 지운 깨끗한 미래가 아니다. 버림받은 기억과 가난, 노동의 상처를 몸에 지닌 채 새로 시작하는 미래이다.
작품 마지막에 등장하는 조리전문학교는 그래서 단순한 취업 기관이 아니다. 민서는 과거에 파티플래너가 되고 싶다고 적었다. “남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일”을 꿈꾸었고, 교생 선생님은 자신만의 일을 개척하는 것이 새로운 세계를 향한 모험이라고 격려했다.
그 꿈은 교생 선생님에게 상처받은 뒤 사라진 듯 보였다. 그러나 휴게소에서 수많은 라면을 끓이는 동안 민서는 자신도 모르게 음식과 사람을 연결하는 능력을 몸에 익혔다. 착취적인 노동 속에서도 손님의 뜨거운 국물 마시는 소리를 들으면 피로가 조금 풀리고, 자신이 만든 해장 국물을 마시는 듯 마음이 훈훈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즉 휴게소 노동은 민서를 소모시키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를 발견하게 하는 작은 씨앗도 있었다. 문제는 음식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 노동이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민서는 라면 끓이는 일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선택과 꿈의 영역으로 되찾는다. 주방의 일일 종사자에서 조리를 배우는 학생으로 이동하려는 결심은 노동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노동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녀는 더 이상 타인의 명령으로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사람을 먹이고, 자신의 삶도 함께 먹여 살리고자 한다. 마지막에 ‘부산’행 버스의 문이 열리는 장면은 이 작품의 세 번째 중요한 공간 변화를 완성한다. 휴게소는 머무는 곳이면서 떠나는 곳이다. 모든 사람이 잠깐 들렀다가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지만, 민서만은 그곳에 남아 떠나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어머니가 탄 듯한 버스도, 관광객도, 화물차도 모두 그녀 앞을 지나갔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민서가 버스를 탄다. 기다리는 사람이 떠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변화는 중요하다. 그동안 민서의 삶은 어머니가 나타나야 움직일 수 있는 삶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어머니가 오지 않아도 떠난다. 어머니를 찾는 방향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가 있는 부산을 향한다.
「해장라면」의 결말은 모녀의 화해를 마련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정말 휴게소에 왔는지도 확정하지 않는다. 분홍 원피스의 여자가 어머니였는지, 물방울무늬 여자가 민서를 알아보았는지도 끝내 분명하지 않다. 이 모호함은 결핍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의 윤리이다.
민서의 미래가 어머니의 진심이나 귀환 여부에 좌우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아도 민서는 살아야 한다. 사과를 받지 못해도 자신의 삶을 시작해야 한다. 상처를 준 사람이 상처를 해결해주기만을 기다리는 동안 한 인간의 시간은 계속 소진되기 때문이다.
홍혜문은 여기에서 매우 단단한 회복의 방식을 제시한다.
회복은 상처가 없던 때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떠난 사람이 돌아오는 일도 아니다. 자신을 버린 사람에게 복수하는 일도 아니다. 회복은 더 이상 그 사람의 선택에 자신의 미래를 맡기지 않는 것이다.
「안개그물」에서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함으로써 인간이 되었고, 「비행하는 자전거」에서는 흔들리는 삶의 균형을 되찾으며 자기 선택에 이르렀다. 「대암의 하늘」에서는 자신을 타인의 미래를 위한 바위로 내어주었다. 「해장라면」의 민서는 그보다 훨씬 작고 일상적인 자리에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한 그릇의 따뜻한 음식을 허락한다. 이 작은 행동은 어떤 영웅적 결단보다도 근원적이다. 자신을 먹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미래도 지켜낼 수 없다. 타인을 돌보는 일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민서는 오랫동안 자신을 버려진 음식 찌꺼기나 불어터진 면발처럼 여겼다. 그러나 작품의 끝에서 그녀는 버려질 존재가 아니라 따뜻한 한 끼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다시 바라본다.
인간은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해장라면」은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은 자신을 버린 사람을 끝없이 기다림으로써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타인에게만 건네던 온기를 자기 자신에게도 건네고, 자신 역시 먹고 돌봄받아야 할 생명임을 받아들일 때 인간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