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법문
2025 1월 지안큰스님 법문
新年福運滿天地 신년복운만천지
새해의 복과 운이 천지에 가득하니
大地風流氣浩然 대지풍류기호연
대지의 풍류 그 호연한 기운으로
宿障舊殃盡消滅 숙장구앙진소멸
숙세의 업장과 옛 재앙 다 소멸해 버리고
神光遍照日昇天 신광변조일승천
신령스런 빛 두루 비춰 해처럼 솟으소서.
오늘은 새해를 맞은 지 닷새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 법회는 새해 첫 법회이니까 신년 하례 법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해마다 새해를 맞이해서는 누구 없이 새로운 어떤 계획 같은 걸 세우려 하고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되지요. 한자로는 새‘新(신)’자(字)는 새롭다는 말인데 이 말이 지니는 뉘앙스가 매우 미묘한 것 같아요. 새로 오는 봄을 ‘새봄’이라 하고, 또 오늘이 가고 내일을 맞이하면 ‘새 날’이 되지요. 계절도 우리 일상생활에 ‘새’자를 붙여서 생각하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게송을 읊었습니다.
新年福運滿天地 신년복운만천지
새해의 복과 운이 천지에 가득하니
새해의 복운이 천지에 가득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새해 복을 비는 마음이 하늘과 땅에 가득하다는 뜻으로 보아도 되고 천지의 덕이 충만하다는 뜻으로 보아도 되겠습니다. 예로부터 하늘을 덮어주고 땅은 실어주는 덕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부재지덕(覆載之德)’이라 했습니다. 이 덕 속에 사람의 소망도 실릴 수 있습니다.
大地風流氣浩然 대지풍류기호연
대지의 풍류 그 호연한 기운으로
대지 풍류의 기운이 호연하다는 말입니다.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은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로 원래 사람의 마음에 차 있는 넓고 큰 좋은 기운을 일컫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에 지닌 원력(願力)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宿障舊殃盡消滅 숙장구앙진소멸
숙세의 업장과 옛 재앙 다 소멸해 버리고
숙세의 업장과 옛적의 남아 있는 재앙의 잔재가 모두 소멸되라는 뜻입니다. 알고 계시다시피 불교는 사람마다 숙세의 업장을 가지고 있다 합니다. 지난 세상에 내가 잘못되게 지은 업을 참회하여 없애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고 내 스스로가 그 업의 장애를 받는다고 합니다.
神光遍照日昇天 신광변조일승천
신령스런 빛 두루 비춰 해처럼 솟으소서.
신령스러운 빛이 두루 비춰 해가 하늘에 떠오르듯 하소서 라는 뜻의 새해의 축원입니다. 신광은 결국 마음의 빛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광명이요 法身(법신) 자체인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의 광명을 사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합니다.
아직 음력설이 남아 있습니다마는 올해 을사년(乙巳年)이 복된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작년 갑진년(甲辰年)이 청룡의 해라고 했는데 올해도 푸른 뱀(靑蛇)의 해라고 합니다. 푸른색이 좋은 기운을 나타내는 색이라 합니다. 120년 전 을사년에는 을사늑약 – 예전에는 을사보호조약이라고 했지만 요즘은 우리 입장에서 ‘을사늑약’으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 이 있던 아주 좋지 않은 해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해마다 ‘푸른 해’라는 말을 붙이는 경우도 있으니까 좋은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항상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잘 되어 생활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이죠. 그래서 누구에게나 그 소박한 본래 마음은 똑같다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불교는 아시다시피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예요.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인데 한자로 각(覺)이라 씁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세 가지로 설명하여 삼각(三覺)이라 합니다.
첫째, 자각(自覺)이라 하여 스스로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을 잘해서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경계에서 말해볼 때 내가 뭔가 생각을 잘하면 나 자신에 대해서나 주변에 대해서는 새로운 걸 깨달을 수 있어요. 불교에서 도를 깨치는 그런 차원의 깨달음이 아니지만 우리 생활 속에 항상 깨달음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다시 생각하면 새로워지는 거 - 미처 못 느꼈던 것을 느낄 수 있는 - 그래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느끼게 되는 것으로 自覺(자각)이 있습니다. 주로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의 깨달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자기 번뇌를 끊고 편안해지는 것으로 아쉬운 점은 利他(이타) 정신이 부족한 것입니다.
두 번째, 각타(覺他)입니다. 남을 깨닫게 한다는 뜻이죠. 보살들의 깨달음입니다.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들은 자각(自覺)만 하는데 보살들은 자각(自覺)과 각타(覺他)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있다면 이것을 나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알도록 해주는 것 이것이 각타(覺他)입니다. 그래서 보살들은 자각(自覺)과 각타(覺他)를 동시에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나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이 알도록 도와준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 부처님 경계에 나아가면 각만(覺滿)이 됩니다. 각(覺)이 꽉 찼다는 뜻인데 이것은 네 글자로 말할 때는 각행원만(覺行圓滿)이라고 합니다. 깨달은 행동이 원만하다·모나지 않고 모든 데 두루 통하게 된다는 뜻이지요.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깨닫고 나서 그 깨달음의 행이 원만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한 의미예요. 그래서 구경의 부처님 깨달음 경계를 覺滿(각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행의 본뜻에서 볼 때는 깨달음은 본래 내가 원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자리 - 自性(자성)의 성품 본체가 깨달음이에요. 그 깨달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것을 계발(啓發)해야 합니다. 개발(開發)이라는 말도 많이 쓰이지만 계발(啓發)이라고 합니다. 누구나가 깨달음을 가지고 있는데, 나한테 있는 깨달음이 계발이 안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각(不覺)의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깨달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 자신을 계발하여 그 깨달음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여기 반야암 들어오는 입구에도 청보리공원을 새로 조성했잖아요. 공원을 개발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을 계발하는 것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입니다.
이 자각(自覺)하고 각타(覺他)하고 각만(覺滿)하는 삼각(三覺)으로 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 각행원만(覺行圓滿)이 참된 깨달음이 됩니다. 깨달음은 모든 것이 다 좋은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과거도 좋고 현재도 좋고 미래도 좋은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보면 여기도 좋고 저기도 좋아 사방, 팔방, 시방까지 모두가 좋은 것입니다.
『아함경』에도 나오지만『법화경(法華經)』에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는 말이 나옵니다. 중생들은 이게 잘 안 되죠. 내가 만나는 인연도 처음은 좋았는데 나중에 변해서 싫어지는 상태로 되지요. 언젠가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因緣(인연)의 힘이 두 가지로 작용한다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말이 인연(因緣)입니다. 이 인연 속에 두 가지 힘이 있다고 합니다. 인력(引力)과 척력(斥力)라고 하는데 인력은 끌어당기는 힘을 말하고 척력(斥力)은 밀어내는 힘을 말합니다. 자석이 같은 극끼리 밀어내고 다른 극은 서로 당기는 것처럼 인연에도 그러한 작용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 좋았으면 중간도 좋고 끝도 좋아야 되는데 처음 좋았는데 변해서 싫어지는 수도 있습니다. 흔히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다고 하지요. 무상하다는 것은 변하여 달라지고 나중에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좋은 상태가 안 좋은 상태로 되었다가 나중에 사이가 멀어져서 관계가 끊어지는 수도 있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고 나면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아지도록 노력할 수 있는 자기 힘이 계발된다는 거예요. 이게 중요한 말이죠. 아침에 제가 휴대폰에 저장돼 있는 전화번호를 정리하다 돌아가신 사람의 번호를 모두 지웠습니다. 돌아가셨는데 남아 있는 전화번호가 20개가 넘었습니다. 그중에는 스님들도 여러 명 있고 일반인도 여러분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전화번호가 이렇게 숫자가 많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또 한 번 무상감을 느꼈습니다.
어쩌다 보면 누구나 무상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병원에 여러 날을 입원해 있을 때도 인생무상이 느껴지기도 하였습니다. 무상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신에 대한 반성도 하였습니다. 궂은 일을 당할 때, 안 좋은 일을 당할 때 반성을 하게 됩니다. 반성한다는 말이 참회한다는 뜻 아닙니까. 그래서 불교 신행을 가르칠 때 기도하기 전에 먼저 참회하는 마음이 되어 기도하라고 가르치기도 하지요. 그냥 사행심을 가지고 뭐 주십시오 라고 하지 말고 내가 참회하는 마음이 되어서 기도를 하면 부처님의 가피가 빨리 온다는 것입니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도록 노력하는 이것이 인연을 관리하는 겁니다.
인연에는 세 가지 인연이 있는데요. 우리는 이 세 가지 인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세 가지 인연 중 첫 번 째는 것은 사람과 맺어지는 인연 사람인 자 인연(人緣)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사람은 사람 안 만나면 못 살아요. 홀로 살 수는 없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시간과의 인연 시연(時緣)입니다. 항상 시간을 맞춰야 됩니다. 하루하루 라는 말이 몇 월 며칠이 시간 아닙니까. 새해니 지난 해니 하는 게 시간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장소와의 인연입니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무슨 일로 어디를 가야 되겠다 라고 하여 그때그때 장소를 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인연과 시간과의 인연과 장소와 인연인 이 세 가지 인연이 우리 생활에 구체적인 어떤 행위랄까 해야 될 일거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간도 잘 맞춰야 되지요. 내가 기차 타고 서울에 갈 때 차가 막혀 차 시간이 넘으면 기차를 탈 수 없었을텐데 다행히 딱 그 시간에 도착하여 가까스로 탄 적이 있습니다. 나는 시간관념이 철저한 편인데 시간관념이 사람마다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모임이 있을 때 늦게 오는 사람은 항상 늦게 옵니다. 일찍 오는 사람은 꼭 일찍 와요. 그게 그 사람의 습관이라고 볼 수 있는데, 습관은 업이 모여 밖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장소도 그 선택이 중요합니다. 절에 오는 것도 장소 선택인데 찻집에는 자주 가면서 절에는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 와도 1년에 12번 아닙니까. 그런데 2024년 일요 법회에 한 번도 안 빠지고 12번 다 참석한 분이 5명 밖에 안 된다고 해요. 12번 이렇게 참석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일상생활에 다른 데 가는 일이라든지, 차 마시러 가는 일이라든지, 밥집에 가는 일은 하루에도 두 번 갈 수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그 선택 되어지는 일의 의미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가.
오늘은 새해 첫날이지만 법문은 간략히 하고 제가 아파보니 우리 다 같이 살아있는 동안 건강해야 되겠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모두 건강하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새해 한해 다들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게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첫댓글 귀중한 법문 잘 들었습니다.
구구절절이 가슴속에 깊이 새겨집니다.
자리이타각행원만하기를 기도하고요,
한번이라도 반야암 법회에 참석할 수 있기를 발원해봅니다.
감사해요. 늘 건안하세요~!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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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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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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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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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순리대로 삽시다
아둥바둥하지 말고 초연하게 살아요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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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