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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와 찔레 울타리로 덥힌 세상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라.”
성민 이스라엘의 정탐꾼 열두 명은 같은 땅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결론은 달랐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강한 데다 당시로서는 첨단의 무기로 무장하고 쉽게 함락하기 어려운 견고한 성읍까지 가진 가나안 원주민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은 성민 이스라엘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만나보지 않았던,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미지의 적에 대한 두려움에 완전히 압도되었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두 명은 그들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여호와에 대한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13:30)라고 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해 주시기만 한다면 대적이 제아무리 강력하게 무장했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14:7b-8)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성민 이스라엘이 강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능성의 근거를 자신들의 능력에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은혜에 두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과 그들의 말에 이미 혼비백산해진 백성들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현실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치 해가 뜨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아침 안개 같은 절망에 가려져 있었던 희망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결과, 무려 삼백만 명에 가까웠던 사람들 가운데 오직 그들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절망만 보이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참된 희망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선지자는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미7:1)라고 탄식했습니다. 기대했던 포도 열매가 없었습니다. 기다렸던 처음 익은 무화과도 없었습니다. 아니 간절하게 찾았지만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여름 과일과 포도를 거둔 후 곧 수확하는 철이 지나고 나서 먹을 만한 열매가 하나도 남지 않은 상황 같았습니다. 재앙이었습니다. 이는 개인적인 낙담이나 탄식이 아니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악과 타락의 결과를 바라보는 애통이었습니다.
선지자의 탄식은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 도다.”(미7:2-3a)라고 이어집니다. 경건한 자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실하게 살려고 몸부림치던 사람들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정직한 자들도 없었습니다. 진실한 자들도 없었습니다. 올바르게 행하는 자들도 없었습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서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단순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적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을 떠나서 죄에 완벽하게 홀려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또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끼고, 사랑하며, 보호해 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알량한 이익 추구를 위해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호시탐탐 제거할 기회를 엿봤습니다. 피 흘리기 위해서 매복했습니다. 각자 은밀하게 준비한 그물 곧 미끼를 던졌습니다. 형제를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반드시 이용해 먹어야 할 대상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들의 손놀림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매우 능숙하게 사용했습니다. 대단히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사용했습니다. 선이 아니라 악을 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의 악은 우연한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익숙한 하나의 습관처럼 몸에 완전히 배어있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사회적인 혼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결과였습니다. 그 결과 소중하게 지켜야 할 인간관계까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처음 사람의 타락은 영적 죽음을 불렀습니다. 인간관계의 단절을 불렀습니다. 육체적 죽음을 불렀습니다. 환경적 저주를 불렀습니다. 개인의 타락은 사회 제도는 물론 지도층까지 부패하게 만드는 상황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실제로 선지자의 탄식은 “그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미7:3b)라고 이어집니다. “구하며שָׁאַל(샤알)”는 원하는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지도자와 재판관은 하나님 대신 자신의 이익을 구했습니다. 공의로 판단하기 전에 먼저 뇌물을 요구했습니다. 노골적으로 요구했습니다.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판단의 내용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뇌물을 받고 판단을 팔았습니다.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자들도 그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 마치 솟구치듯 거침없이 올라오는 통제되지 않은 욕망, 타락한 욕망, 사악한 욕망, 파괴적인 욕망을 조금도 숨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다른 사람 또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해 주신 공동체 전체에 해를 끼치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주어진 권력을 하나님과 성민 이스라엘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을 밖으로 가감 없이 분출하고 이루어내기 위해서 악용했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 재판관, 권세 자가 서로 결합했습니다.
“서로 결합하다עָבַת(아바트)”는 “굵게 하다, 두껍게 하다, 함께 꼬다 또는 엮다.” 등의 뜻입니다. 문맥에 따라서는 “서로 결탁하다, 서로 얽히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손을 잡았습니다. 서로 얽혔습니다. 서로 쉽게 끊을 수 없는 단단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악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결탁했습니다.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뇌물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실이 한 가닥일 때는 쉽게 끊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닥이 서로 얽히면 다릅니다. 쉽게 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집니다.
그들이 그랬습니다. 선지자의 탄식은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미7:4a)라고 이어집니다. “찔레 울타리מְשׁוּכָה(메수카)”는 가시가 있는 울타리입니다. 가시나무로 만든 담입니다. 사회는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총체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죄와 부패는 일부 사람이나 한 부분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공동체 전체에 퍼져 있었습니다. 죄가 삶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생각, 마음, 말, 행동, 관계, 권력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을 오염시킨 상태였습니다. 성민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야말로 전적 부패의 온상 같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지극히 선하게 보이는 사람이 찌르고 상처를 입히는 가시 같았습니다. 먹을 포도송이와 처음 익은 무화과를 찾았는데 오히려 가시만 넘쳤습니다. 그 가시들이 서로 얽혀 있었습니다. 울타리를 이루었습니다. 또 겉으로 보기에 지극히 정직해 보이는 사람이 찔레 울타리보다 훨씬 더 강했습니다. 가시가 하나면 지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지나가다 찔릴 수는 있습니다. 가시나무가 서로 얽혀서 울타리가 되면 다릅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도와주거나 보호해 주기는커녕 찌릅니다. 통행을 방해하는 담 곧 장애물로 변합니다. 안으로 들어가기도 어렵습니다.
밖으로 빠져나오기도 어렵습니다. 죄로 부패한 사람이 이렇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열매를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상처를 줍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습니다.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바른길을 막습니다. 안전을 담보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안전을 파괴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민이라고 불리고 있었던 사람들이 어쩌면 그럴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죄는 항상 그렇습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중국에 있을 때, 시장에서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사과를 한 상자 샀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를 꺼내 보니 밑부분이 완전히 썩어 있었습니다.
한두 개 정도는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상자 안에 들어있던 사과들 가운데 위에 있던 몇 개를 빼고 대부분이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썩어 있었습니다. 먹을 수 있는 사과를 찾았는데, 기대했던 온전한 사과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출장을 가지 않을 때는 거의 매일 산에 올랐습니다.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산자락은 길고 깊었습니다. 산밑에서 정상까지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그날은 평소 가보지 않았었던 길로 들어섰습니다.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없었습니다. 크지 않은 산이니 계속 걷다가 보면 길이 나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숲은 생각보다 깊었습니다. 정상은커녕 하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습니다. 앞으로 가도 숲이 막고, 옆으로 가도 숲이 막았습니다. 이제까지 길을 만들며 걸었기 때문에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 비까지 내렸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무작정 아래쪽을 향해서 뛰듯 걷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산 밑으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낯선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그 마을까지 내려오는데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더 걸렸습니다.
거의 쓰러질 정도로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선지자가 본 시대 상황은 훨씬 더 험악했습니다. 앞으로 가도 가시였습니다. 옆으로 가도 가시였습니다. 어느 쪽으로 가도 가시였습니다. 피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선하게 보이는 사람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찌르는 가시 같았습니다. 가장 정직하게 보이는 사람은 들고나지 못하도록 사방을 완전히 차단해 버리는 찔레 울타리 같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가시와 찔레 울타리가 몇 개 있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 공동체는 가시와 찔레 울타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남녀노소는 물론 빈부귀천의 구별도 없었습니다.
하나같이 가시였습니다. 찔레 울타리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아내고 있는 현실도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평소 가까이 지내는 사람을 믿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고 싶지만, 손해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양보하면 손해 볼 것 같고, 정직하게 살면 이용당할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서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합니다. 사업에서는 이익을 얻기 위해서 사람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필요할 때는 간과 쓸개까지 빼줄 것처럼 살갑게 지내다가도, 필요가 없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냉정하게 돌아서기도 합니다.
가시처럼 찌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아픕니다. 찔레 울타리처럼 길을 막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에 찌들어버린 세상은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미7:5-6)라는 선지자의 탄식대로, 가시와 찔레 울타리로 가득 찬 사회에서는 서로에 대한 불신이 하루가 다르게 깊어지고 극대화됩니다.
이웃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오래전부터 마음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욕망과 이기심이 소중하게 생각하던 관계보다 앞섭니다. 마음이 답답하거나 어려울 때는 언제든지 찾았었던 친구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이익이 공유할 수 있을 때는 친구지만, 이익이 사라지게 되면 관계도 함께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가깝고 내밀한 관계인 배우자에게조차도 속마음을 다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사회적인 신뢰가 무너집니다. 저와 여러분의 입에는 문이 있습니다. 말을 밖으로 내보낼 수도 있고, 닫아둘 수도 있습니다. 그 입의 문을 쉽게 열지 말고 단단히 지켜야 합니다.
이는 아무도 믿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배신과 갈등이 만연한 시대에는 자신이 하려는 말을 분별하라는 현실적인 경고입니다. 세대 간의 존경과 권위도 무너집니다. 깊은 불신이 조장됩니다. 가장 안전한 울타리였던 가정도 물듭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고,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는 등 여러 관계가 서로 대립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집니다. 가족 구성원 가운데 특정한 한 사람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죄와 불신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인 가족관계까지도 사정없이 흔들어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아직 절정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부패의 범위는 점점 더 넓어집니다. 가족 구성원이 서로 원수가 됩니다. 급기야 가족이라는 단위까지 해체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아내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 가운데에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미7:4b)라는 선지자의 탄식에 따르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더 이상 미래의 경고로 끝나지 않습니다. 현실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악을 행하던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그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당황합니다.
자신들이 의지하던 것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다 처참하게 무너지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고 지배하던 사람들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아내고 있는 현실 역시 대단히 요란합니다. 과거 어느 시대도 경험하지 못했던 첨단의 문화 문명을 향유하고 있는 현대인들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엄청난 기근이 있습니다. 손쓸 틈도 없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붙이는 대홍수가 있습니다.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쓰나미를 일으켜 화려한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지진도 있습니다.
거기다 나라들은 형벌의 날 곧 파멸의 날을 하루라도 앞당기겠다는 듯 쉬지 않고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미래에나 있을 일이라고 생각했던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도래한 것 같은 엄청난 두려움과 긴박감 속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당황스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죄와 따르는 행위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찾아서 심판하시는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피부로 느끼면서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물론, 형벌의 날이 임하게 되면 두려워하던 약한 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두렵게 만들었던 악한 자들이 사시나무처럼 떨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래도 절망, 저래도 절망입니다. 성민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총체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죄에 찌들었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형벌의 날을 자초해 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렵게 하던 자들이나, 두려워하던 자들이나 하나도 다르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들의 형편까지 달라져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탄식은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7:7)라는 결단으로 마무리됩니다.
“오직 나는וַאֲנִי(바아니)”을 직역하면 “그러나 나는”입니다. “나אֲנִי(아니)”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의역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나는”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 속에 던져질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라도 자신만큼은 절대로 타협하거나 뒤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선지자의 강한 의지 곧 신앙적인 결단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의인이 사라졌습니다. 사람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가족과 친구 사이의 신뢰도 무너졌습니다. 심지어 가까운 사람까지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선지자는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자신은 무너지는 세상이 아니라 그 너머에 계시는 여호와를 우러러보겠다고 선포했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자신을 얼마든지 안전하게 구원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전히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겠다고 선포했습니다. 한편,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라는 그의 선포는 단순한 외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백을 반드시 하나도 빠짐없이 귀를 기울여 들어주실 뿐 아니라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가장 적당한 때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리라는 확신입니다.
그는 두렵고 떨리는 파수꾼의 날, 자신은 여호와를 바라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형벌의 날 곧 심판의 날 자신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심판의 시대 한복판에서 심판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시선을 고정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람을 바라볼 수 없는 시대에, 나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상황을 의지할 수 없는 때에,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기다린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것을 믿는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큼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지자가 여호와를 경외하고, 바라보고, 기대한 이유는 상황을 완전히 바꿔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단 한 분 뿐인, 유일무이한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고해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환경과 사람을 바라보면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결국은 절망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에 찌들어 있는 인생에게는 필연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모든 순간, 소망입니다. 당장 절망이어도 소망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워도 소망입니다. 하는 일들마다 되지 않아도 소망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도 변하고 환경도 변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까지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사람은 약속을 수시로 깨뜨려도 아니 깨뜨릴 수밖에 없어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반드시 지키십니다. 호흡하는 모든 순간,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린 것 같은 아찔한 순간,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수고했음에도 열매를 찾기는커녕 가시와 찔레 울타리만 보이는 순간, 낙심하거나 절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 여호와를 경외하고, 바라보고, 기대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여호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야말로 끈끈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무엇보다 가시와 찔레 울타리로 가득 찬 세상에서 상처받아도 용서하고, 미움을 받아도 사랑하고, 억울하면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기꺼이 못 박히시고, 생명의 창조주이신 당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온 세상에 드러내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