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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추구성은 영의 것이냐, 육의 것이냐?
성경본문 : 에스라 1:1-4
고레스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동된 사람입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감동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하고, 마귀에게 감동이 되면 ‘바벨론에서 살자’ 하며 마음을 바벨론으로 기울이게 하고 바벨론에 정을 붙이게 마음을 설득을 합니다. 그런고로 ‘내가 누구에게 감동이 되었느냐’ 하는 이게 아주 중요하지요.
3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하고 나오는데 ‘참 신’ 할 때는 거짓 신, 가짜 신이 있다는 거지요. 참 신은 거짓말을 아니 하고 거짓 것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참이 되기를 원하고 참만 줍니다.
이 참 신, 진짜 신은 비물질적이요 비고정적이며 무형적이며 인격적이며 자존적이고 무형적 무한적인 신이십니다. 신령계와 물질계를 창조하신 이 분이 참 신이십니다. 그러나 거짓 신, 가짜 신은 절대자 자존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들어서 섬기는 신입니다. 그가 가르치는 교훈은 물질을 구하게 하고 물질을 구하는 사역을 시킵니다.
고레스가 하늘의 신에 감동이 되니까 성전을 건축하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4절에 ‘바벨론 왕을 통하여 숨겨놓았던 보배를 다 줄 것이다. 또 건축을 않다가 빼앗겨서 바벨론에 숨기고 보관해 있던 것을 도로 다 내어준다’ 하는 이걸 우리가 가만히 보면 하나님의 구원 작업은 무계획적이 아니고, 하나님 당신의 선택에서, 이거는 존재선택이 아니고 목적선택을 말하는 건데, 즉 궁극적 누림의 그 세계를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존재선택이 됐단 말이요. 존재선택은 믿는 우리들을 말함입니다.
그 목적선택에서 존재선택을 해가지고 그 역사를 해 나가는데, 당신의 백성이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지 않을 때에는 누구를 통해서라도 다 빼앗아 가게 만들었다 그 말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화구원을 입는 일을 하지 않으니까 바벨론이 와서 다 빼앗아 가도록 했어요.
그 다음에 끌고 가서 포로로 70년 동안 노예로 살게 하고, 그 다음에 이제 고레스 왕이 하늘의 신에 감동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을 지으라는 그 명령이 떨어졌단 말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국을 해서 성전을 짓는데 70년 전에 빼앗아 갔던 그 물건들을 성전을 짓도록 도로 다 내어주라고 한다 그 말이요.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오묘하다 그 말이요.
이 구원목적을 위해서 모든 물질계와 신령계를 창조하신 겁니다. 신령계도 수많은 종류가 있겠지만 우리가 물질계를 보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종류보다 알지 못하는 종류가 더 많이 있을 것이니 가히 무한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물질계의 존재가 무한하리만큼 많이 있지만 하나님 당신의 대 선택의 목적물은 우리 인간밖에 없습니다. 각자 자기밖에 없다 그 말이요. 그래서 우리 인간 자기를 하나님 당신의 모형대로 지었다 그 말이요.
‘형상이라. 모형이라’ 하는 말도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기 전에 ‘형상’이라고 말씀을 했으며, 또는 인간을 짓기 전에 ‘형상’이라고 말씀을 했다 그 말이요. 그런고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형상이다. 모양이다’ 하는 그 뜻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그 말이요.
형상이란 같은 속성 같은 인격성이란 의미로 하나님처럼 지성 의지 감성이 있는 인간으로 지었다는 것이고, 또한 형상이란 지혜지식성 도덕성 능력성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인격성이라고도 하는데, 하나님은 원형적 인격성이고 인간은 모형적 인격성입니다. 인간은 지음을 받았으니까 원형이 아닌 모형적 인격성이니, 모형적이라는 말은 비슷하다 그 말이요. 닮았다 그 말이요.
인간을 인격성으로 지은 것은 물질계를 다스리고 느끼라고 하는 이 목적보다도 인간에게는 당신의 영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인격성으로 지었다 그 말이요. 그런데 일반사람들은 세상에서 누릴 목적으로 살고 있지요?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신 목적은 천국을 맡기기 위해서.
우리가 일반적 계시적으로 보면 시어머니의 호된 훈련은 나중에 집안 살림을 며느리에게 맡기려고 하는 그런 게 들어있다 그 말이요. 또 아버지의 독한 훈련은 자식에게 기업체를 맡기려는 아버지의 뜻이 들어있다 그 말이요. 그런 것처럼 그 신령천국이 너무 좋기 때문에 그 천국을 우리에게 맡겨주기 위해서 우리를 지었고, 그 세계를 다스리고 누릴 수 있는 실력을 쌓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했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훈련을 시킨다 그 말이지요.
우리로부터 당신이 제사를 받아먹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맡기기 위해서 우리를 지었다 그 말이요. 우리의 예배를 받아먹기 위해서 우리를 지은 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맡아서 통치 지배하게 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를 지었고, 이 세상은 이를 위한 실력을 준비할 수 있는 훈련장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또 한 편 이 세상은 보면 천국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무한한 세계가 있고, 같은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났지만 어떤 사람은 산삼을 먹고, 어떤 사람은 무를 먹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빈부의 차별이 있고, 능력에 차별도 있고, 고저의 차별도 있고, 감각의 차별도 있고, 희비의 차별도 있고, 안고의 차별도 있더라 그 말이요. 이것을 가만히 보면 자기의 자질대로 자기의 능력대로 되어지는 거더라 그 말이요. 이 세상에서도 자기 실력대로 그런 차별이 있는 것처럼 천국도 영적인 면에서 마찬가지다 그 말이요.
우리는 인격적인 존재이므로 보다 더 나은 것을 추구하기도 하고 소원하기도 합니다. 목석이나 금수는 그런 것이 없지요. 가난한 집에 심겨진 나무가 ‘부잣집에 심겨졌으면’ 하는 그런 건 없잖아요. 가난한 집에 사는 돼지가 ‘내가 부잣집에 가서 좀 살아봤으면’ 하는 그런 건 없다 그 말이요. 무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인격이 있기 때문에 가치 판단 평가하는 게 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이 세상보다 더 좋은 더 나은 영적인 세계, 영적인 실력들이 있다 그 말이요. 그 면에 대해서 알라 그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천국을 주시려고 우리 인간만을 인격적인 존재로 지었습니다. 고로 우리 인간은 이 물질세계에서 70여 년간 사는 동안에 하늘나라의 성품을 입을 곳이 이 세상이라 그 말이지요. 그래서 이 세상은 훈련장이라. 실력을 닦는 곳이라. 견습장이라. 숙련공이 되는 곳이라. 또는 미장원이라. 미모를 꾸미는 곳이라. 영적 미모를 꾸미는 곳이라. 그래서 진리도 주고, 크고 작은 사건도 주고, 환경들을 동원시키는 겁니다. 우리 기독자들은 이런 세상인 줄 알아야 한다 그 말이요. 이걸 잊어버리면 안 되지요.
참은 변질이 없습니다. 영원토록 변질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나가려고 할 때에 어떤 것을 참인 줄로 알았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니 그게 거짓으로 드러나는 것이 있더라 그 말이요. 또 내가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살다보니 부요가 왔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그 부요가 다 날아가 버렸다 그 말이요. 그랬을 때에 이것은 도금한 부요라 그 말이요. 입혀진 것이 벗겨져서 날아간다 그 말이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솔로몬이 노래 부르는 남녀들을 동원시켜서 아주 쾌락적으로 날을 지냈습니다. 남녀들을 불러다가 노래를 시킬 때는 즐겁고 ‘아, 이게 천국 같구나’ 했는데 지나고 보니 전도서 2장 2절에서 말하기를 ‘웃음은 미친 것이다. 그러한 세월, 그러한 즐거움의 웃음은 다 미친 것이로구나’ 그렇게 말을 했단 말이요. 말하자면 세상에는 참된 쾌락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솔로몬은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의 견본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모든 인류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든 인간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해 본 솔로몬이라 그 말이요. 그래서 궁녀들을 그렇게 많이 불러 모았다 그 말이요. 그런데 솔로몬은 말하기를 ‘헛되고도 헛되도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구나’ 그렇게 말을 했지요?
솔로몬의 이 얘기는 전 세계 각국 인류에게 하는 말이요, 또 전 세계 개인 개인마다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하는 많은 인간들은 ‘솔로몬처럼 좀 살아봤으면’ 그럽니까? 먼저 경험한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도다’ 하는데도 ‘헛되도 좋다’ 하고 그런 경험을 하려고 그러는 겁니까? 안 된다 그 말이요. 그런 걸 누리고 누리고 누릴수록 더 허무하고 더 허무하고 그래요. 인간은 그렇게 돼 있어요.
솔로몬이 전 세계 개인에게 하는 얘기가 하나는 ‘참되다’ 하는 그걸 가르쳐 주는 게 있고, 또 하나는 ‘헛되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 말이요.
목적이 돈 버는 목적에, 목적이 공부에, 목적이 미녀 차는 목적에 사는 자를 향해 솔로몬은 하는 말이 ‘헛되고 헛되도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 말이요. 하나님을 제쳐놓고 바벨론의 영광을 얻기를 원하는 것은, 종교적이던 비종교적이던 성경적이던 비성경적이던 뜻을 바벨론에 두고 추구성 목적성을 바벨론에 두는 것은 다 ‘헛되고 헛되도다’ 하는 겁니다.
인간은 인격성이 있고 추구성이 있고 지향성이 있고 소원성이 있는 자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염세주의 고행주의 극복주의 극기주의 초절주의는 아닙니다. 명예 영광 권세가 필요가 없다고 하는 그런 주의도 아닙니다. 삭발주의도 아니요 남루하게 옷을 입어야 만이 되는 남루주의도 아닙니다. 양복보다 한복을 입으면 거룩해 보입니까? 걸음걸이가 아주 거룩해지는 겁니까? 예수 믿는 내가 나의 지향성이 무엇이냐? 나의 추구성이 무엇이냐? 나의 소원성이 무엇이냐 그 말이요.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피동 될 수 있고, 피동성 동화성 영구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런 자로 하나님께서는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으로 만들어 놓고 만물을 사용하고 지배하고 지키고 정복하라고 그랬지요? 그런데 타락 후에는 인간 속에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신령계의 추구성 지향성 욕망성 소원성이 다 없어져 버렸어요. 어찌 사람이 이렇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 만물 이하로 떨어져 버렸다 그 말이요. 그렇기 때문에 만물을 보고 부러워하고 그런다 그 말이요.
학을 배우는 학사가 노름을 하면 이건 타락입니다. 그의 신분이 있고 신분의 위치가 있는 건데 그건 타락이요. 가치적 타락이요 욕망적 타락이요 평가적 타락이요 추구적 타락이요 지향적 타락이 된 거지요.
아무리 인간이 타락이 되었어도 인격적인 면에서 감각적인 면에서 본능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영의 추구성이 따로 있고, 이성의 추구성이 따로 있고, 본능의 추구성이 따로 있습니다.
본능이 뭐냐? 본능의 추구성은 뭐냐? 본능적으로 욕구성이 있고 욕망성 지향성 추구성이 있지요? 본능은 먹고 마시고 남녀 간에 성 하는 거. 그러니까 목적이 그 목적으로 살면, 사는 위주가 그 목적으로 살면 이거는 본능으로 사는 사람이라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본능적으로 사는 사람이 상당히 많지요? 위주가 그렇고 목적이 그렇고.
그 다음에 이성의 추구성이 있고 욕망성이 있고 욕구성 지향성이 있어요. 본능에서 초월이 되면 세상지식이라든지 세상의 도덕성을 찾는다 그 말이요. 이건 조금 더 고상하지요?
여기서 이제 또 초월이 되면 영의 추구성이 있습니다.
영이 욕망성 욕구성 지향성이 있어요. 이 영의 추구성은 본질적으로 또 종별적으로 분량적으로 시간적으로 완전하고 영원하고 참된 것을 찾게 되는 겁니다. 우리 기독자들은 이 영의 추구성 영의 욕망성 영의 욕구성 영의 지향성으로 가야 된다 그 말이요.
본능성이라든지 이성이라든지 영적인 영의 추구성이라든지 이런 것이 우리에게 다 있어요. 그런데 ‘그 중에서 어느 것을 이용하고 무슨 목적으로 사느냐’ 하는 여기에서 이제 달라진다 그 말이요. 우리는 영을 추구하면서 살아야지요. 딴 것은 전부 다 영의 성장에 이용물이니까.
안 믿는 사람들을 보면 본능의 추구성이 있고 이성의 추구성이 있지요. 그런데 대부분 보면 본능적으로 많이 살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국민은 본능으로 떨어진 사람들이고 이성으로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또 가만히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바벨론으로 떨어졌단 말이요. 그게 타락이라 그 말이요.
하나님이 고레스 왕을 감동시켜서 ‘그 백성 된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하는 그 명령을 들을 때에 바벨론 각 구석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 그래. 맞다. 나도 이스라엘 백성이다. 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지’ 이게 있을 거라 그 말이요.
‘그 백성 된 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네가 그 백성으로 느껴지거들랑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이 말의 뜻은,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성은 추구성 지향성 욕망성 욕구성 목적성을 바벨론의 것으로 갖지 말고 신령한 영의 것, 하나님의 것으로 전부 다 바꾸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사상이 ‘이 땅에 일하는 자는 하늘의 일로 바꾸고, 남이 볼 때는 땅의 일을 하는 것 같으나 목적이 이 땅에서 일하는 자는 하늘의 일로 목적을 바꾸고, 바벨론 신앙에서 영적 신앙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그 신앙으로 바꾸라’ 그 말이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고레스 왕을 감동시켜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사상입니다. 신앙사상이라 그 말이요. 진리이치라 그 말이요. 구원도리라 그 말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