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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9: 1 길을 가실 때 - 요 9: 3 하나님이 하시는 일
9장 :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심
1. 맹인을 치료하다. ( 9: 1-12 )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 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요한복음 9장은 8장에 대한 해설이다.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 된 자를 고치는 표적이야기로 시작한다. 예수께서 표적을 행했다. 표적을 행한 것이 안식일이었다.
요 5장과 같이 안식일의 율법적인 의미에만 집착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에 죄인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림으로서 예수와 논쟁하는 장면이다.
논쟁은 예수와 하는 것이 아니라 병 고침을 받은 자, 그 부모와의 논쟁으로 되어 있다. 그런 논쟁을 통해서 예수께서 병든 청년의 눈을 띄어준 사건이 무엇을 표적하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8장 12절에 의하면 ‘내가 세상의 빛이다’는 말씀에 대한 주석으로 요한복음 9장은 요 8: 12의 주석이다.
요 9: 1 길을 가실 때 -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우연히 그를 만나셨고 자신의 주된 사역이 병 고치는 일이 아니셨지만,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속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겪는 형제들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는 형제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자를 보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 푸른 하늘과 산과 들, 각양의 동식물들, 특히 사랑하는 가족들을 볼 수 없는 불행한 자였다.
세상에는 심신으로 병약자들, 가난한 자들, 외로운 자들, 특히 죄에 빠져 있는 자들이 많다.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으나, 죄와 질병은 흔히 관련이 있다. 사람은 죄로 인해 각종 질병을 당한다(신 28장).
그러므로 야고보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교훈하였다(약 5: 16).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 된 사람을 예수께서 알아보신 것은 예수의 신적 능력이거나 아니면 이미 그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알았던지 중요한 것은 그가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각장애인은 세상을 보기를 원하였으나 그는 포기하고 살았을 것이다. 자신이 시각장애인됨이 날 때부터였기 때문에 눈을 뜰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요 9: 2 누구의 죄로 -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
예수와 함께 길을 가던 제자들은 예수에게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누구의 죄로 출생하는지를 물었다.
1]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나면서 시각장애인된 자를 고치신 것은, 창조적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제자들의 물어본 말, 곧,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라고 한 것은, 한 번 생각할 만하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되었다 함으로 보아 제자들이 생각하기에는 부모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선생인 예수께 질문하여 그 원인을 확실히 알고자 한 것이다. 시각장애인된 자를 발견하고 그의 제자들은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 죄와 병과의 관계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우리는 육신적인 질병을 앓으면 죄와 관련이 된다고 생각하고 질병을 죄에 대한 형벌로 곧장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실 성경전체를 통해서 질병과 죄는 연결이 되어 있다. 죄에 대한 징벌로 병을 받는다. 그래서 죄를 용서해준다는 것과 병고의 상태로부터 구원해 준다는 것이 동의어로 쓰일 때가 있다.
가령 시 103편 3절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이것은 죄의 용서와 병 고침은 동의어로 한 가지 사건을 두 가지 표현으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 103편은 예수가 특별히 좋아하는 시편이다. 베자(betz)는 시 103편을 예수의 18번이었다고 한다. 노래 자리에서 자주 부르는 노래였다. 왜냐하면 시 103편의 가르침이 예수의 주기도문이 시 103편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예수의 많은 죄 사함의 비유나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시편 103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시편 103편이 예수의 사상의 아주 중요한 배경이다. 여기에 보면 죄 사함과 병 고침이 동의어로 쓰여 있다.
마가복음 2: 1-11절에 나오는 예수의 중풍병자 사건에서 병을 고치는 것을 죄의 용서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시편 103편에 근거한다. 죄를 용서하는 것이 곧 병을 고침이다. 그러므로 병을 고침이 주는 것은 바로 죄를 용서해 준 것이다.
이렇게 죄와 병고는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고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의 모든 병고는 계속해서 죄로부터 유발한다.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로부터 병고가 시작이 되었다. (예를 들면, 뿌리뽑힌 나무의 비유. 삶의 근원인 대지로부터 분리됨으로 죽음의 증상이 나타난다. )
모든 병고는 죄로부터 시작이 된다. 따라서 모든 병고는 죄가 우리에게 가져오는 죽음의 증상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눈이 먼 자가 누구의 죄 때문이냐? 많은 사람은 여기까지 밖에 모른다.
모든 병고는 죄와 1:1로 연결이 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중요하다. 예를 들면 운전하는 사람들 중에 다른 사람의 실수로 사고가 날 때 내 죄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연대성 속에서 살기 때문에 이웃의 죄가 나에게 고난을 가져오기도 하고 이웃의 선이 나에게 유익을 가져오기도 한다.
또는 나의 죄가 이웃에게 고난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나의 선함이 이웃에게 복을 가져오는 상관관계 이렇게 되어 있다. 한 사람 히틀러가 잘못함으로 온 세계가 고난을 당하게 되었고 한 사람 전두환이 잘못해 가지고 온 민족이 고난을 받았다. 한 사람 선한 사람이 잘하면 온 민족이 온 인류가 복을 갖게 된다.
더 나아가 온 피조물이 연대성 속에 있기에 천재지변도 어느 정도 이와 관련시켜 생각할 수 있다. 모든 피조 세계가 연대성 속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피조물이 고난을 받고 피조물의 황폐함이 인간에게 고난을 주고 등등으로 피조물도 죄와 고난의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스스로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불교 용어로 내가 전생애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하는가? 하는 생각이 곧장 나온다. 꼭 나의 죄 때문에 내가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을 한다.
우리 주위에 어떤 사람이 고난을 받으면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고난을 받는가 하는데 그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니고 혹시 내 죄 때문에 고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고난은 죄로부터 유발이 되나 1:1의 관계는 아니다.
2] 자기니이까? 그 부모니이까?
유대인들은 병이 걸리는 것은 부모나
* 출 20: 5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 출 34: 7 -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 민 14: 18 -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 시 79: 8 –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 사 65: 6-7 – 6 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7 너희의 죄악과 너희 조상들의 죄악은 한 가지니 그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나를 능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들의 행위를 헤아리고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자신에게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 레 16: 15 -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 신 28: 61 - 또 이 율법책에 기록하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네가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 대하 21: 15 - 또 너는 창자에 중병이 들고 그 병이 날로 중하여 창자가 빠져나오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 시 107: 17-18 – 17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18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 전 5: 17 -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
* 미 6: 13 - 그러므로 나도 너를 쳐서 병들게 하였으며 네 죄로 말미암아 너를 황폐하게 하였나니
* 고전 11: 30 -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자가 무슨 죄를 지었겠기에 "자기니이까"(자기 죄 때문입니까)라고 하였을까?
이것은, 유대인 랍비들의 그릇된 교훈대로, 사람이 나기 전에 그 영혼이 벌써 있었다는 사상에 근거한 말이다. 어쨌든 이런 말은 진리에 합당치 않은 것이다.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에 납득될 수 없는 그릇된 말을 한 것이다. 인간의 질병이나 불행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성경상으로 보아 확실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본인의 죄악으로 말미암지 않는 불행이나 고통도 있으니, 그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답변에서 그런 의미를 밝히신다.
요 9: 3 하나님이 하시는 일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
그러나 이 시각장애인의 경우는, 자신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고침 받음으로 그를 믿게 하시는 것을 가리킨 것 같다.
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3절 말씀은, 마치 나면서 시각장애인 된 것이 하나님의 하실 일을 위하여 계획된 불행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사람의 불행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다는 의미까지는 아니다.
이에 대해 예수는 그 사람의 죄 때문도 아니고 그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이 된 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자기가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이다.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스스로 드러내도록 하기 위한 의미가 있다.
2]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것은 그 불행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론을 붙이는 것보다, 불행을 상대하고 하나님의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다행한 일들만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인간의 불행을 고쳐서 복이 되게도 하시는 사랑과 능력을 가지셨다.
인간들은 불행한 것을 보고 피하며 저주하기에 급급하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상대하셔서도 자비를 베푸신다.
여기 "일"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복수명사(*)로서 "일들"이란 뜻이다.
이 "일들"은,
(1) 이제 예수님의 고쳐주시는 은혜(그것도 하나님의 일)로 나타났고,
(2) 그 고침 받은 자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일로도 나타났다.
하나님의 섭리 적인 사역 즉 '구원 사역'을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영광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말쿠스 다즈(Marcus Dods)는 말하기를, "불행(고통)은 하나님의 일을 증진시킨다. 곧, 그것을 극복하는 데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