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구로구 주민들은 최근 구 예산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구로구가 지난 6월부터 동별 지역회의를 구성해 내년도 예산 편성·심의에 관한 주민의견을 수렴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와 함께 두 차례에 걸쳐 예산학교도 열었다. 주민들은 구청 홈페이지 등을 통해 직접 의견을 개진했다. 올해 4월 주민참여예산제 조례안이 제정된 후 변화된 모습이다.
구로구는 주민참여예산위원회를 만들어 이달 들어 100여명의 위원까지 위촉했다. 다음달이면 내년도 예산안을 두고 본격적인 민관 논의가 시작된다. 주민참여예산위는 구의회에 넘길 예산안을 총괄 심의하는 기구다. 자치단체장 등 공무원과 시민·직능단체 대표들이 참여한다.
안병순 구로자치시민연대 공동대표(전국공무원노조 교육위원장)는 "올해 처음 시행하는 주민참여예산제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시민사회는 물론 구청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며 "예산학교에 연간 800여명의 공무원·주민이 참가할 정도로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구로구뿐만이 아니다. 서울지역 25개 구 중 20곳이 올해 주민참여예산제 운영 조례안을 만들었다. 개정 지방재정법이 지난 9일 발효되면서 이날부터 16개 광역시·도를 포함해 전국 244개 지자체가 주민참여예산제를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국회는 올해 3월 지방재정법을 개정하면서 주민참여예산제를 "시행할 수 있다"는 임의규정에서 "시행해야 한다"는 강행규정으로 바꿨다. 지자체 예산 편성 과정에 주민 참여를 보장해 재정운영의 공정성·투명성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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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전국 지자체 중 79.9%인 195곳이 주민참여예산제 조례를 제정했다.<표 참조> 울산시가 이달 20일 조례안을 제정하는 등 나머지 지자체들도 조례 제정을 서두르고 있다.
지방자치의 꽃, 주민참여
지방자치의 꽃은 주민참여다. 95년 자신이 사는 동네를 책임지고 운영할 자치단체장을 지역주민이 직접 선출하는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첫 시행된 후 16년이 지난 2011년 현재. 이제는 자신이 낸 세금을 어디에 쓸지, 자신이 사는 곳의 주거나 복지·교육 환경은 어떻게 개선하고 얼마만큼의 예산을 투여할지를 직접 참여해 논의할 수 있는 통로까지 마련된 셈이다.
주민참여예산제는 국제연합(UN) 등 국제기구로부터 예산행정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혁신적인 방법의 하나로 평가받았다. 우리나라 정부 역시 “주민참여로 재정책임성을 확보하고 건전한 재정운영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주민참여예산제 확대·시행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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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체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보통 주민참여예산제는 읍·면·동별 기초 논의기구인 지역회의를 거쳐 주민의견을 수렴한 뒤, 공무원과 지역주민·직능단체 관계자가 참여하는 주민참여예산위원회에서 예산안을 총괄 심의·조정하는 방법으로 운영된다. 이후 자치단체장과 각 주민(시민)·직능단체 대표들이 참가하는 민관협의회를 열어 지자체 의회에 넘길 예산안을 최종 확정한다.<그림 참조>
제도 정착, 주민 관심·참여가 관건
주민참여예산제는 대다수 지자체에서 올해 처음 시행된다. 때문에 제도 정착을 위해서는 주민참여를 이끌어 내고 지자체 예산에 대한 지역사회의 종합적인 이해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오관영 좋은예산센터 상임이사는 “제도 시행 초기에는 다소간의 시행착오는 불가피할 것”이라며 “제도 정착의 성패는 자치단체장의 진정성과 시민사회·주민의 참여 정도에 달렸다”고 말했다.
주민참여예산제는 주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업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지자체 장이나 의회의 전시·선심성 예산 편성을 감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나아가 지자체 운영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바탕으로 가장 중요하거나 시급하게 시행해야 할 사업이 무엇인지를 가리고, 우선순위에 따라 어느 정도의 예산을 편성할지 심의·결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주민참여예산제 시행 과정에서 ‘예산학교’ 등 교육과정은 필수다. 예산에 관한 기본적 이해 없이 공무원(지자체)과 시민·직능단체들이 제기하는 수많은 요구사항을 조정하기가 쉽지 않다. 예산학교를 통해 주민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할 수도 있다.
심의기구와 별도로 구성되는 예산연구회는 1년 동안 주민참여예산제 운영과정과 제출된 예산안의 타당성 등을 평가한다. 이를 통해 제도나 운영에서 개선해야 할 부분을 찾는다.
형식적 조례안, 주민참여예산제 가로막나
그러나 주민참여예산제 확대·시행 초기부터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일부 지자체들이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다가 의무 시행일에 맞춰 형식적인 조례안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달까지 조례를 제정하지 못한 지자체들은 내년도 예산안 작성에 주민참여를 보장하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제도의 실질적 운영을 위해서는 조례 제정 후에도 주민참여예산위(시민위원회) 구성과 위원 선정, 사업계획 수립과 예산 편성·심의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그에 따르는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부작용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해 10월 ‘주민참여예산제 운용조례 모델안'을 제시했는데, 거기에 형식적 수준의 조례안도 포함돼 있었다. 행안부는 당시 “주민참여예산제는 주민·전문가의 참여를 보장해 지방재정 운영의 공정성·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한 제도”라며 “지역주민의 의견을 재정운영에 반영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자치단체가 이러한 조례를 제정하도록 권장하기 위해 표준모델을 제시한다”고 밝혔다.
행안부는 그럼에도 세 가지 표준모델 중 1안에서 주민참여예산제 핵심기구인 주민참여예산위원회를 "둘 수 있다"고 권고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2안과 3안을 "둔다"는 의무사항으로 정하긴 했지만, 문제는 대다수 지자체가 1안을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행안부 자료만 살펴봐도 지난달 말 기준 주민참여예산제 조례를 제정한 195개 지자체 중 절반 이상인 116곳(59.5%)이 1안을 택했다.
김충조 의원 "행안부 조례모델안이 문제"
조례 제정을 둘러싼 지역사회 갈등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관련조례를 제정한 울산에서는 시와 지역시민단체가 조례 제정을 두고 석 달간이나 다툼을 벌였다. 울산시는 행안부 모델 1안을 근거로 조례 제정안에서 주민참여예산위(시민위원회)를 "둘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에 울산 시민·사회단체들은 "조례에 위원회 구성과 관련된 구체적 조항을 두지 않는다면 단체장이 임의대로 주민참여 범위나 수준을 결정할 것"이라며 "조례에 주민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 핵심 위원회 구성 규정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맞섰다. 그러나 울산시의회는 지난 20일 시가 제출안 원안대로 조례를 통과시켰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김충조 민주당 의원은 최근 행안부 국정감사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주민참여예산제를 독려해야 할 행안부가 형식적 수준의 모델안을 제시해 오히려 주민참여를 저해하는 것 아니냐"며 "지금이라도 주민참여예산제가 예산 편성의 공정성·투명성 확보라는 입법취지에 맞게 작동하도록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광주 북구, 주민제안사업에 136억원 투입
그렇다고 주민참여예산제 확대 시행이 의미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주민참여예산제를 시행했던 지자체가 적지 않은 데다, 주민참여만 이끌어 낸다면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울산 동구에서는 2005년 조례가 제정된 뒤 지난해까지 모두 375건의 사업이 주민들로부터 발의됐다. 이 중 38.4%인 144개 사업이 그 다음해 예산에 반영됐고, 112개(29.9%) 사업은 장기과제로 채택됐다.
광주 북구 역시 2004년 주민참여예산제를 시행한 후 지난해까지 6년 동안 701건의 사업이 주민 발의됐고, 이 중 56.8%인 398건이 사업으로 채택됐다. 북구는 채택된 주민사업을 추진하는 데 6년 동안 136억5천만원의 예산을 사용했다. 대전 대덕구는 주민들이 2006년 이후 5년 동안 발의한 329개 사업 중 90건을 채택해 76억4천만원의 예산을 투여했다.
안병순 구로자치시민연대 공동대표는 “주민제안사업 채택 여부도 중요하지만 주민참여예산제를 꾸준히 시행한 지역은 지역재정·행정에 대한 주민 이해도가 높아졌고 주민·공무원 모두 인식이 상당히 변화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구로구와 지역시민단체들이 이러한 사례연구를 통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주민참여를 유도한다면 주민참여예산제를 안착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자 인터뷰] 안병순 전국공무원노조 교육위원장
"주민참여예산제 정착, 공무원이 핵심 역할해야"
"지역이 모든 운동의 출발점입니다.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변화를 이룬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주민참여예산제는 지역운동을 활성화하면서 자치단체 운영에 주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변화의 기제이자 훌륭한 배움터입니다."
안병순(50·사진) 전국공무원노조 교육위원장은 구로자치시민연대 공동대표로, 구로구 주민참여예산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비록 해직자이지만 공무원 출신으로 주민자치·주민참여예산 운동에 발 벗고 나선 것이다.
그는 공무원노조 안에서도 "지역주민들이 효율적으로 지자체 예산편성 과정에 개입할 수 있도록 공무원들이 나서야 한다"며 주민참여예산제 참여를 당부하고 있다. 지자체 정책을 입안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공무원만큼 해당 지자체 사정에 밝은 이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까지 공무원과 시민사회(주민)의 거리는 멀다. 공무원은 시민사회의 개입을 귀찮은 일로 치부하고, 시민사회는 공무원을 무사안일 철밥통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안 교육위원장은 "공무원노조는 권력이 아닌 국민을 위한 행정을 펼치겠다고 공무원 노동자들이 만든 조직"이라며 "주민참여예산제는 그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라고 강조했다. 이어 "지자체 행정의 전문가인 공무원들이 주민참여예산제 정착·확대를 위해 힘을 보탠다면 지역사회의 신뢰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체 노동계에도 주민참여예산제 적극 참여를 당부했다. 노동계가 거대한 변화에만 골몰하지 말고 작지만 실제적인 변화를 이뤄 낼 수 있는 지역사회 밀착형 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공무원과 노동자 모두가 노조의 조합원이자 지역사회의 주민"이라며 "지자체 운영 과정에 개입하고 변화를 이뤄 내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출발점이자 자신과 가족들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드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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