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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장주의자이다
이재형
1. 나의 페친들은 진보적 성향을 가진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분들이 시장주의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내고, 그분들이 쓴 글 중에서는 시장주의자를 비난하는 내용을 적지않게 발견한다. 그렇지만 나는 시장주의자이다. 연구자로서 40년이 넘는 생활중 2/3 정도를 공정거래, 재벌문제, 기업지배구조, 규제개혁 등의 분야에 관해 연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2. 페친들이 시장주의자들에게 거부감을 보이는 것은 상당 부분 시장주의자가 혹은 경쟁시스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시장주의자란 오직 경쟁만능, 자유방임, 효율지상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듯 하다. 그것은 아니다. 시장주의자라 하는 사람 가운데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으며, 그속에는 가짜 시장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시장주의자란 우기는 경우도 적지 않게 발견한다.
3. 어떤 국가, 어떤 경제체제라도 두 가지의 경제목표를 추구한다. 하나는 효율성(efficiency)이며, 다른 하나는 형평(equity)이다. 여기에는 어떤 예외도 없다. 우리나라도 북한도, 미국도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모두들 효율성과 형평성을 추구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어느쪽에 조금 더 비중을 두는가의 문제에 불과하다. 그런데 문제는 효율성과 형평성은 서로 상충 관계trade-off)에 있다는 점이다. 효율성을 추구하자면 형평성을 희생할 수밖에 없고, 형평을 강조하면 효율성에 악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효율과 형평이 반비례 관계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노예해방 등과 같이 효율과 형평을 동시에 높이는 선택도 존재한다.)
4. 효율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국가 한 사회의 생산(혹은 소득)의 합계를 높이는 것을 말한다. 인구수가 같은 A, B 두 국가가 있다고 할 때 A국이 B국에 비해 GDP가 높다면 A국이 B국에 비해 효율성이 더 높다.
그러면 형평은 또 무엇인가? 한 나라의 부나 소득이 그 구성원들에게 "적절히" 분배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분배되는 것이 가장 적절한가? 거기엔 해답이 없다. 사람들마다 그 적정성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밖에 없다. 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A는 9, B는 1만큼 일을 하여 합계 10의 소득을 얻었다 하자. A, B 두 사람이 10의 소득을 어떻게 나누는 것이 형평성에 맞을까? 어떤 사람은 9:1이 맞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5:5가 정의롭다고 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분배비율이 있겠지만, 해답은 없다.
이 예에서 보듯이 효율성에 대해서는 최소한 개념적으로는 측정이 가능하지만, 형평성의 측정은 불가능하다. 결국 사회적 합의에 따라 정해질 수밖에 없다. 효율과 형평은 성장과 분배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5. 자본주의 경제체제 혹은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효율성을 달성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시장, 혹은 시장기능이다. 이것은 수학적으로 증명되는 논리로서 어떤 이의도 있을 수 없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국가 혹은 국가기능을 통해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이 주장은 이미 공산주의의 붕괴라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부정되었다. 공산국가인 중국조차도 효율성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시장경제를 채택하였다.
6. 시장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경제의 두 목표 가운데 "효율성"이다. 또다른 목표인 "형평성"을 추구하는데에는 시장은 무력하다. 그러므로 형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야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형평의 문제를 반드시 정부가 모두 담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형평을 위한 정책수단의 채택에 있어 부분적으로 시장기능을 도입할 수 있다. 요양시설의 공급에 있어 민간의 참여 확대 등이 그런 예에 속할 것이다.
시장주의자라고 해서 형평의 추구를 위한 정부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경제에 있어 형평성 역시 아주 중요한 목표이며, 그것은 정부가 담당하여야 할 일이다. 다만 효율성을 위해서는 시장이 중시되어야 하며, 형평을 위한 정책추구에 있어서도 시장기능이라 활용될 여지는 많다고 생각한다.
7. 시장은 어떻게 효율성의 문제를 해결하는가? 그것은 시장기능, 즉 경쟁에 의해서다. 시장은 경쟁기능이 효율적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효율성을 가져올 수 있다. 경쟁기능이 작동하지 못하는 시장은 "죽은 시장"이다. 죽은 시장은 바로 경제의 비효율성으로 연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활력있고 효율적인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시장, 살아있는 시장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건강한 시장, 살아있는 시장이란 경쟁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장을 말한다. 그런데 시장에서의 활발한 경쟁을 위협하는 요소는 너무나 많다. 사기, 거짓 등의 기만행위에서 시작하여 독점, 담합 등 수많은 시장교란 요인이 시장을 위협한다. 국가는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제도를 갖추어 놓고 있다. 공정거래제도를 비롯하여 자본시장관련법, 금융감독제도, 지적재산권 제도, 공업규격제도 등등 경제정책 내지는 제도의 거의 절반이 넓은 의미에서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라 할 수 있다.
8. 시장주의자가 가운데에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 이들은 자유로운 시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의견을 같이 하지만, 어떻게 자유로운 시장을 지킬 것인가 하는 점에서 생각이 갈린다. 첫번째 유형은 시장이란 수많은 요인으로부터 위협받고 있으므로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가 필요하며 이를 위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한다. 미국 민주당 주류의 시각이다. 이와 반대로 다른 한 유형은 시장은 스스로 자정기능과 방어기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개입이 필요없다는 시각이다. 이들은 리버럴리스트라 불리기도 한다. 미국 공화당의 전통적 입장이다.
9.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시장주의자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사이비 시장주의자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스스로를 리버럴리스트로 자처하며 자유로운 시장을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하고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에 반대한다. 시장경제에 걸맞는 선진국형 기업지배구조를 지향하기 위한 제도에 반대한다.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도둑질을 규제하는 제도에 대해 도둑놈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반대하는 꼴이다.
한국경제에 있어서 가장 반시장적 요소가 무엇인가? 바로 "재벌체제"이다. 이는 상품시장뿐만 아니라 요소시장, 자본시장, 기업지배구조시장 등 여러 시장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 이러한 반시장적 폐해는 이른바 코리언 디스카운트의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상속세가 코리언 디스카운트의 원인이라는 어떤 얼간이의 정신나간 소리도 있었지만, 코리언 디스카운트의 핵심은 재벌체제에 있다. 진정한 시장주의자라면 시장을 위협하는 재벌체제의 종식,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한 제도개혁, 소비자 권리확보를 위한 제도의 정착 등을 주장하여야 할 것이다. 모두 활력있고 투명한 시장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제도일 것이다.
10. 시장주의자보다 더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가 "신자유주의"라는 말이다. 이전에 현역시절 정책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내게 신자유주의자라며 도전적인 모습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특별한 경제이론은 아니다. 1980년부터 시작되어 세계적으로 전개된 자유무역, 규제개혁, 공기업민영화 등의 자유화 현상을 뭉뚱그려 표현한 말이다. 나는 이 신자유주의 조류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급격한 자유화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결과 적지 않은 부작용이 발생하였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급격한 변화에 대한 보완장치가 준비되지 못한 것이 문제였지 자유화 그 자체가 나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11. 10여년 전부터 세계경제의 흐름이 갑자기 바뀐 것 같다. 이차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도도한 큰 흐름은 자유화였으며, 그 선두에는 미국이 서있었다.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자유무역, 자본 및 금융이동 자유화, 세계화 등이 전후 60년 세계경제의 큰 흐름이었고, 이것은 GATT 체제를 거쳐 WTO 체제로 완성되었다. 개방된 시장, 평등한 시장이 강조되었고 자유로운 시장접근을 방해하는 제도나 자유롭고 평등한 경쟁을 제한하는 산업정책등 등은 죄악시되었다.
그런데 중국이 세계경제의 강자로 부상하면서 이러한 자유화의 흐름은 한 순간에 그 방향이 바뀌었고 그 선두에는 역시 미국이 있었다. 국제무역에서 중국에 대한 견제가 노골적으로 나타났고, 내부적으로는 지금까지 그렇게 금기시해왔던 산업정책을 미국이 앞서 서둘러 도입하고 있다. 나의 눈으로는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왔던 경제의 글로벌화가 일순간에 과거의 냉전체제, 블록화 시대로 회귀한다는 느낌이다. 우리는 그 맨 앞자리에서 철없는 춤을 추고 있다.
12. 우리나라 역대정권에 대해서는 시장경제라는 기준점에서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하나? 이승만은 전쟁후 복구과정에서 경제에 대해 방임적인 자세를 취했으므로 별로 말할 거리가 없다. 평가할 것 자체가 없다는 의미이다.
박정희는 최악의 반시장적 정책을 견지하였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는 공산주의 계획경제와 대척점에 선 극우 전체주의적 경제이다. 독일 나치시대 경제와 일본 군국주의 통제경제의 아류, 아니 그 이상의 통제경제였다. 우리나라 사이비 시장주의자들이 그러한 박정희 시대를 찬양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시장경제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전두환의 경제정책은 역시 반시장적 극우 전체주의적 통제경제로서 박정희 시즌2에 불과하다. 노태우의 경제정책은 전두환에 비해서는 확실히 전체주의적 색체가 옅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는 역시 박정희 시즌3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13. 김영삼은 노태우에 비해서 확실히 시장친화적으로 움직였다. 가격규제의 철폐, 경제에 대한 정부개입의 축소, 금융실명제의 도입 등 확실히 이전 정권에 비해 시장주의로의 큰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여기에 다른 비극이 싹텄다. 정부는 시장주의의 방향으로 선회하였으나 국민들이 이를 따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박정희이후 3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통제경제의 속에서 살아와 거기에 익숙해졌던 국민들이 새로 맞이한 "자유" 시장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IMF 경제위기도 이로 인해 발생하였다고 생각한다.
14.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슬로건으로 정권을 쟁취한만큼 시장경제에 대해 상당한 이해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소위 "빅딜"이라는 반시장적 정책도 있었지만, 경제는 전반적으로 시장친화적인 방향으로 옮겨갔다. 재벌개혁, 금융개혁, 규제개혁,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 시장경제의 기반을 위한 제도 개혁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세계적으로 기업지배구조 개혁, 경제의 글로벌화, 규제개혁 등의 자유화의 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김대중은 외부로부터도 제도개혁의 동력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노무현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노무현은 당초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수위를 거치면서 그의 생각은 완전히 바뀐다. 시장주의자로서 재탄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은 내부에서 싹텄다. 그의 참모, 지지자 등 그의 권력의 기반이 되고 있는 그룹이 그의 생각을 따라오지 못한 것이다. 그의 시대 우리 경제의 뿌리깊은 폐단이었던 정경유착은 거의 퇴색되었다. 반면 재벌개혁 등 시장경제의 기초를 닦기 위한 제도개혁은 계속되었다. 한미 FTA 등 개방화, 자유화 정책도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저항도 적지 않았다. 사이비 시장주의자들은 시장경제의 확립을 위한 제도, 정책들을 오히려 반시장주의라고 매도하며 막아섰고, 이러한 주장에는 재벌기업을 비롯하여 주요 언론이나 학자들도 동조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시장주의에 반감을 가진 노무현 진영 내부 그룹에서도 시장주의로의 방향에 대해 반발이 나왔다. 이렇게 하여 노무현의 시장경제는 안팍으로부터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15. 이명박은 전형적인 사이비 시장주의자이다. 그는 박정희 시대 전형적인 반시장적 통제경제 속에서 특혜 그룹이 일원으로서 개인적 성공을 이루었다. 그가 생각하는 시장경제란 통제경제 속에서 특혜를 받아온 극소수의 정경유착 기업의 "자유"였던 것이다. 김영삼으로부터 지금까지 하나씩하나씩 어렵게 쌓아왔던 시장경제를 위한 제도적 인프라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박근혜는 경제민주주의를 기치로 정권을 잡았디만, 그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다. 경제민주화의 실체와 내용이 무엇인지 제시하지도 못하였고 그녀 스스로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그냥 갈팡질팡하다가 끝이나 버렸다.
16. 문재인도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는 그다지 깊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성적 판단보다는 연민이 앞서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그는 기본적으로 아주 "착한 사람"이지만 결단력과 뚝심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게다가 그의 개혁정책을 돕는 참모들이 현실 정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들은 사회운동가로서는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정책참모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주축이 되었던 두 참모가 스캔들로 꺾이면서 개혁의 동력도 사라져버렸다. 이후는 직업관료들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정권 후반부에 닥친 코로나 사태로 제도개혁에 대한 이슈는 사라져 버렸다.
17. 윤석열은 시장경제에 전혀 이해가 없는 사이비 시장주의자이다. 그는 프리드만의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프리드만은 앞에서 설명한 두번째 유형의 시장주의자로서, 그는 시장은 자정 기능 및 스스로의 회복 및 방어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제도는 필요없다고 주장한다.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개입이 오히려 시장을 위험에 빠트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리드만은 세계적인 경제학자이다.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따르고 있다. 미국정부도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정부가 그의 주장만큼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줄이는 것은 아니다.
얼마전 금리의 예대차이가 너무 크다는 여론이 나오자 금감원장은 은행장들을 소집하여 대출금리 인하를 압박한다. 윤석열은 엑스포 유치실패를 변명하기 위해 재벌회장들을 병풍으로 이용한다. 전형적인 반시장적 작태이다. 정부보조금+아부할인으로 875원이 된 대파를 "적절한 가격"이라고 한다. 프리드만의 들었으면 통탄할 말이다. 자괴감으로 자신의 책을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윤석열은 박정희의 전체주의적 통제경제를 시장경제로 이해하고 있는 얼간이이다.
18. 나는 나야말로 진짜 시장주의자라 생각한다. 옛날 신자유쥬의가 세계경제를 지배하던 시절이 몇가지 부작용은 있었지만 지금의 블록화되어가는 세계경제 질서에 비해서는 훨씬 나왔다고 생각한다. 우리 경제도 더욱 시장이 중시되는 방향으로 바뀌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이비 시장주의자들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페친 분들이 시장경제, 시장주의자들에게 대한 인식을 바꾸었으면 좋겠다.
출처: 이재형 박사 페이스북 2024/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