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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명성황후 (明成皇后) ... 閔妃
운보(雲寶) 추천 0 조회 479 10.05.19 11: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성황후 (明成皇后) ...그의 生家

 

 

 

  

 

 

 

 

 

 

 

본관은 여흥(驪興) , 성은 민(閔)씨이며, 아명(兒名)은 자영(玆映)이다. 1851년(철종 2)에 경기도 여주에서 영의정으로 추증된 민치록(閔致祿)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8세에 부모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가난하게 성장하였다.

 

 

1866년 (고종 3) 그 女가 16세 되던 해에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다. 부대부인의 먼 친척으로 외척정치를 배제하고자 하는 대원군의 뜻에 따라 부모가 없고, 가난한 그 女를 선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원군의 의도는 벗어나게 되는데, 민씨일족은 권력을 쥐락펴락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흥망은 있었지만..

 

 

 

 

 

 

 

                                                 反 대원군 세력

 

 

그러나 대원군과의 不和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그 녀가 1871년에  낳은 자식은 5일만에 죽었고, 반면 高宗의 총애를 받던 궁인 이씨(宮人 李氏)가 완화군(完和君)을 낳으면서 대원군은 이를 크게 기뻐하고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두 사람의 대립은 여기서 부터 시작한다.

 

 

명성황후의 배후에는 민승호 등 여흥민씨 삼방파(三房派)를 비롯하여 조대비(趙大妃)를 중심으로 한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력, 대원군에게 괄시받던 대원군 문중 내부의 세력 그리고 대원군의 서원철폐 등에 반대하는 유림세력 등 모론을 중심으로 하는 反대원군 세력이 있었다.

 

 

1873년(고종 10), 反대원군세력을 규합한 명성황후는 앞서 대원군을 탄핵한 바 있는 최익현(崔益鉉)을 동부승지로 삼고, 그 해 10월28일 최익현으로 하여금 대원군의 실정(失政)을 들어 탄핵하고, 高宗의 친정(親政)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이 때 조정의 의견이 서로 달랐지만, 그녀는 최익현을 감싸고, 그를 호조판서로 승진시켰다.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상소를 올리고, 대원군은 楊州  곧은골(直谷)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탄강구리비     誕降舊里碑 

 

 

 

 

 

 

 

 

명성황후의 生家에 남아있는비(碑)로, 이 자리는 명성황후가 어렸을 때에 공부방이 있던 터라고 한다. 탄강(誕降)은 왕이나 聖人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의미하며, 구리(舊里)는 고향을 뜻하므로, 이 곳이 명성황후가 태어난 곳을 기억하기 위하여 1904년에 세운 碑이다. 

 

 

 

 

 

 

 

 비(碑)의 뒷면에는 " 광무팔년갑진오월일배수음체경서 (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手飮涕敬書) "라고 써있는데, 광무 8년 갑진년 5월 어느 날에 엎드려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라는 뜻이다. 확실치는 않으나 명성황후의 아들인 純宗이 황태자시절에 썼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904년에 세웠다.

 

 

  

 

 

 

 

 

 

 

 

                                         

                                      명성황후, 사진에 대한 논란 

 

 

 

 

 

 

 

위 사진은 지금까지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많이 인용되었던 사진이다. 그러나 물론 이 사진에 대하여도 그 眞僞 여부에 논란이 많았었다. 당시 高宗, 純宗, 大院君 그리고 그들의 가족사진 기타 왕족들의 사진은 많이 남아있지만, 명성황후가 포함된 가족사진은 하나도 없다.  

 

비녀를 두개 꽂았다는 점으로 명성황후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宮女로 보는 견해가 더 많다. 그동안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거론되었던 사진들을 정리해보자.

 

 

 

 

                                                                                   사진.  1

 

 

 

  

 

이승만 전 대통령이  그의 저서 "독립정신"에서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평민이 입는 적삼을 입고 있다는 점에서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이 사진은 駐프랑스공사와 陸軍參將을 지낸 민영찬(閔永瓚. 1873~1948 ... 민영환의 동생)이 1930년 1월21일자 동아일보에 명성황후에 대한 글을 쓰면서 함께 실리기도 하였다.

 

 

민영찬은 명성황후의 친척으로, 그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유학할 만큼 각별한 사이이었는데, 만약 東亞日報에서 잘못된 사진을 인용하였다면 분명히 이의를 제기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며, 이 사진은 1933년 동아일보에 다시 게재되기도 하였다.

 

 

 

 

 

                                                       사진.  2

                      

  

                                      

 

이 사진은 그동안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많이 소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駐韓 이탈리아 공사를 지냈던 카를로 로제티의 " 꼬레아 꼬레아나. 1904년 "라는 책과 우리나라에서 오래 활동하였던 미국 선교사 헐버트의 " 대한제국 멸망사"에 실린 사진이다.

 

 

비녀를 두개 꽂았고, 옷도 화려해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나, 服飾史를 전공하는 전문가들은 .. 이 사진 속의 여인이 "독립정신"의 그 것보다 화려하기는 하지만 왕비의 의복으로는 오히려 초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머리도 어느 정도 장식은 하였지만 王妃의 그것은 아래 사진과 같이 이보다 훨씬 더 화려하다는 것이다.

 

 

 

 

              

                평상 시                        의식 (儀式) 시                      중요한 의식(儀式) 시

 

 

 

 

 

                                                                                   사진.  3

 

 

 

 

최근 독일사진작가의 사진첩에서 발견된 사진이다. 그는 1894 ~1895년에 한국에서 활동하였으며

이 사진에는 필기체로 " Die Ermodete Konigin .. 屍害된 왕비 "라는 소개가 되어 있다. 그동안의 유순한 모습과는 달리 차가운 눈빛에 예지력을 갖춘 느낌이 명성황후의 인상에 대한 기록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

 

 

  

 

 

 

특히 아래의 사진에서 보듯이 대원군과 같은 배경 하에 촬영한 사진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점이 명성황후의 사진일 가능성으로 보는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은 淸나라의 옷을 입고 있었고, 이 사진은 대원군이 淸나라에 인질로 잡혀 갔다가 귀국한 후에 찍은 사진인데...

 

 

당시 대원군은 임오군란 시 명성황후가 죽었다고 거짓 國喪을 치른 인물인데, 청나라에서 갓 돌아와서 같은 곳에서 명성황후와 같이 사진을 찍을 리가 없다는 점 등에서 역시 아니라는 주장이 많다. 특히 이 사진은 미국국립박물관에는 조선 宮女의 사진으로 수록되어 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대원군에게는 초선(椒璇)이라는 기생이 妾으로 있었는데, 대원군의 복장, 그리고 뒷 배경이 같으며 바닥 또한 동일하다는 점 등으로 보아 초선의 사진일 가능성이 많다.

 

 

 

 

 

 

 

 

 

 

                                                                                사진.  4

 

 

 

 

 1894년 12월. 고종과 함께 일본공사 이노우에를 접견하고 있는 명성황후의 모습을 그린 일본 신문의 삽화이다. 명성황후를 본 후의 모습을 스케치한 최초의 그림이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에도 발을 쳐놓고 그 뒤에서 대화를 하였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비녀

 

 

 

 

 

 

 

 

 

 

 

                                       명성황후는 과연 사진을 찍었을까 ?

 

 

 

高宗은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에 의하여 시해되기 전에 궁중에서 사진을 촬영한 사실을 기억하고 그 사진을 얻기 위하여 수만원의 현상금을 걸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명성황후의 사진을 둘러싼 논란은 이미 그때부터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아직 명성황후의 사진만 발견되지 않았을 뿐, 고종, 대원군, 순종 등의 사진자료는 충분히 많다. 즉 명성황후는 사진 촬영이 가능하였던 시기에 살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고종, 대원군 등의 사진은 대한제국이 성립한 1897년 이후의 것으로 명성황후가 숨진 1895년 이전의 것은 없다.

 

 

전문가의 대부분은 명성황후가 사진 찍기를 거부하였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우선 당시의 한국인 의식구조에는 사진을 찍으면 혼(魂 ..넋)이 나간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때문에 선교사들이 아이들 사진을 찍다 몰매를 맞는 일도 자주 있었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친정부모가 암살된 뒤 대인공포증에 시달리며 암살에 대한 두려움에 떨었고, 그로 인해 궁중을 좀처럼 벗어나려 하지 않을 정도로 신분의 노출을 꺼렸던 만큼 사진 촬영에 응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어의(御醫)로서 왕실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던 언더우드여사 조차도 수 차례 사진촬영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고 말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과연 누가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명성황후는 언더우드여사나 영국의 이사벨라 비숍같은 외국 여인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즐겨 했다고 한다. 이사벨라 비솝도 결국 사진을 남기지 못하고, 명성황후에 대한 느낌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눈매가 날카롭고 이지적이며 창백하였다고 표현하였다. 독일작가의 사진이 이 모습에 가장 가까운 사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진위여부를 떠나서...

 

 

 

 

 

 

 

                                         외국 여인들이 본 명성항후

 

 

 

1883년 서양 여성으로는 최초로 명성황후를 알현한 주한 미국공사의 부인 "로즈 푸트"는 그 녀를

" 뛰어난 침착성(mastertful poise)과 언제나 무엇인가를 탐색해 내려는 듯한 눈빛(searching eyes)을 지닌 총명한 여인 "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명성황후를 만난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이렇게 썼다. " 당시 왕후는 40세가 넘은 여인으로서 몸이 가늘고 美人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에다가 피부는 진주가루를 이용해서 창백했다. 눈은 차갑고 날카로웠는데, 그것은 그녀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카내 주는것이었다 " 명성황후를 御醫로서 자주 만났던 언더우드부인의 기록은 좀 더 분석적이다. " 그 분은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가장 신랄한 그 분의 반대자도 항상 그 분의 기지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

 

 

 

 

 

 

 

 

 

                                        

                                        명성황후는 누구인가?

 

 

 

 

명성황후는 1851년 여흥민씨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태어났고, 어릴적 이름은 자영(玆瑛)이었다.여흥민씨는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와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명문가이었지만 당시는 몰락한 상태이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8살에 부모를 여의고, 고향 여주를 떠나 서울 친척 집에서 자랐으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1864년 高宗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대원군 이하응(李夏應)은 부패의 온상이었던 安東金氏 일족의 세도정치를 뿌리 뽑고, 이름뿐인 왕권을 강화하여 쇠락해진 봉건왕조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개혁조치를 단행하였다.

 

 

대원군은 외척의 세도정치를 원천 봉쇄할 계산으로 가난한 집안의 고아 소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이기로 한다. 孤兒이었던 점이 오히려 왕비로 간택되게 하였던 것이다. 1867년 高宗의 나이 15세, 민자영(명성황후)의 나이 16세 때의 일이었다. 

 

 

 

                                           하마비  下馬碑

 

 

이 곳에 도착하면 누구나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 하마비의 상처는 6.25전쟁 시, 피아간의 교전으로 총에 맞아 깨진 흔적이다. 

                                          

 

 

 

 

 

 

 

                                           

                                                            대원군과의 갈등 그리고  집권 

 

 

 

閔妃가 高宗과의 혼인 후 이듬해, 高宗의 총애를 받던 상궁이 완화군(完和君)을 낳으니 고종과 대원군은 손이 귀한 왕실에서 오랜만의 아들이라 크게 기뻐하였고, 특히 대원군은 완화군을 世子로 삼으려 하였다. 왕자생산에 선수를 빼앗긴 민비는 위기의식과 함께 욕망의 화신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민비는 자신의 확고한 지위 확보를 위해 왕자를 낳아야겠다고 결심하는 한편 시아버지 대원군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야겠다고 작정하였다.

 

 

1871년 11얼 드디어 첫아들을 낳았으나 며칠 뒤에 죽고, 3년 뒤에 두번째 아들 척(拓 .. 뒤에 순종)이 태어났다. 이 과정에서 시아버지 대원군과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틈이 벌어졌고, 아들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여 무당을 가까이 하고, 전국의 名山 大刹에 아들의 장수를 기원하느라 엄청난 재물을 축내었다.

 

 

 

 

 

 

1873년 유생 崔益鉉이 서원을 철폐하고 양반에게 세금을 내게 한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리자 민비는 이를 빌미삼아 高宗으로 하여금 섭정을 폐하고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하였다.

그 후 민비는 민승호,민규호 등 민씨일족을 대거 등용하여 요직에 앉힘으로써 高宗의 親政이 아니라 모든 권력이 민비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이로써 10년에 걸친 대원군의 세도정치 혁파정책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이후 을미사변(1895년)까지 약 20년 동안 조선은 閔氏一族의 집권기를 맞게 되었다. 

 

 

 

 

                  生家의 전경 ... 1번 안채만 원형 그대로이고, 나머지는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대외 정책 

 

 

 

 

대원군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민비는 대원군의 쇄국정책 대신 문호개방정책을 택하였다. 1876년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 수교를 맺었다. 조선에서의 전통적인 淸나라의 기득권을 지키고, 서양세력을 끌어들여 日本의 독주를 막아보자는 계산이었다.

 

 

이른바 오랑케를 오랑케로 물리 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이었다. 하지만 민비가 주도한 조약들은 명백한 불평등조약이었다. 이러한 민비의 행적을 두고 " 탁월하고 영민한 판단력으로 서양 여러 나라와 동등한 입장에서 보약을 맺어 以夷制夷정책으로 일본을 견제했다 " 고 그의 외교력을 극찬하지만, 내 나라를 각축장으로 만드는 것은 이이제이의 본래 면목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민비 및 민씨세력들은 어느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하였다. 개화 반대를 외치며 임오군란에 참여한 군중들은 민비를 표적으로 삼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나 동학혁명군 모두 민씨일파의 타도를 외쳤다. 결국 어느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한 민비는 외부세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볼 때 민비의 개화정책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그 일족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참고로 동학혁명 때 민영준(閔泳駿)이 청나라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을 청하면서 보낸 편지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 저희 나라 전라도 관할에 있는 태인, 고부 등 고을에 사는 백성들은 습성이 사납고 성질이 교활해서 평소에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 백성을 진압하기 위하여 청나라 군대를 끌어 들였는데 민비의 외교력을 칭찬해야 옳은가? 나라의 왕비가 이런 착각 속에서 외교정책을 펼쳤다면 어찌 그 것이 영민함인가? 결국 閔妃의 정치는 조선의 당면 과제인 自主的 近代化를 지향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바람 그리고 시대적 사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민비가 집착한 것은 오직 왕권 강화와 왕실의 보존이었는데, 이는 자신의 명예와 富와 권력과 같은 세속적인 욕망을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임오군란   任午軍亂

 

 

 

 

 

1882년(고종 19) 6월 일본식 軍制 도입과 閔氏정권의 횡포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구식군대의 군변(軍變)으로, 이 사건으로 인하여 대원군과 고종,명성황후의 대립 심화 및 집권과 축출이 반복되며,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의 개입이 확대되고, 일본과는 제물포조약을 맺게 된다.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이 마련되었다.

 

 

 

 

                                              당시의 역사적 환경 ...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은 점차 붕괴되고, 조선은 개국, 개화로 향하게 되었다. 정권은 大院君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守舊派)와 高宗과 명성황후측의 척족(戚族)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開化派)로 양분,대립하게 되고, 외교노선은 민씨정권이 추진한 문호개방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제국과의 통상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백성들은 도외시되어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거듭되었다.

 

 

개화파세력은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新式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고, 이듬해에는 종래의 훈련도감, 용호(龍虎), 금위(禁衛), 어영(御營), 총융(摠戎)을 무위영(武衛營), 장어영(壯禦營)의 2營으로 축소 개편하자 여기에 소속하게 된 舊營門의 군대들은 자신들보다 월등히 좋은 대우를 받는 신설 별기군을 왜별기(倭別技)라고 하며 중오하였다. 특히 별기군은 대부분 양반의 자제들로 구성되었으며, 그들의 신식 제복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구영문의 군인들에게는 13개월이나 군료의 지급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別技軍의 초기 모습 ... 총을 들었다

 

 

 

 

                                                   임오군란의 발단.....

 

 

 

좋은 대우의 別技軍과는 달리 舊軍營 소속의 군인들에게는 13개월 동안 군료(軍料)가 밀려 불만은 고조되었고, 군인들은 그 원인을 민씨정권 이후의  궁중비용의 남용과 척신들의 탐오에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특히 군료관리의 책임자인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 겸 병조판서인 민겸호(閔謙鎬)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金輔鉉)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구식 군인                                           별기군

 

 

 

 

1982년 6월 초, 전라도에서 조미(漕米)가 도착하자, 6월5일 선혜청 도봉소(都捧所)에서는 우선 구(舊)훈련도감의 군인들에게 1개월분의 급료를 지불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혜청 관리들의 농간으로

모래와 겨가 섞였을 뿐만 아니라 斗量도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군인들은 군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그 是非를 따지게 되었다.  

 

 

더욱이 군료의 지급 담당자가 민겸호의 하인이며, 그의 언동이 불손하여 군인들의 격분을 유발함으로써, 군료의 수령을 거부한 舊훈련도감의 砲手 김춘영(金春永), 유복만(柳卜萬), 정의길(鄭義吉), 강명준(姜命俊) 등을 선두로 하여 선혜청 관리와 무위영 영관(營官)을 구타하고 投石하여 도봉소를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에 군인들의 주된 표적인 민겸호(閔謙鎬)는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조정은 별파진(別破陣)을 동원하여 군변을 진압할 것을 추진한다. 구군인들은 더욱 흥분하며, 이에 도봉소의 군료시비사건은 정변으로 확산되었다. 이 후에는 김장손(金長孫)과 유복만의 동생인 유춘만(柳春萬)의 주도로 진행되며, 일반 백성들도 참여하게 된다.

 

 

 

 

 

 

 

 

                                     임오군란과 대원군 그리고 명성황후

 

 

 

김장손과 유춘만 등의 주동세력은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운현궁에 물러나 있던 대원군을 찾아가서 진퇴를 결정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표면상으로는 밀린 군료를 지급할 것을 약속하며 해산을 권유하지만, 한편으로는 김장손과 유춘만 등 주동자를 불러 밀계(密啓)를 지령하고, 자신의 심복인 허욱(許煜)을 군복으로 변장시켜 軍民들을 지휘토록 하였다.

 

 

 

 

                                 군민들과 일본군의 전투 ... 일장기가  보인다

 

 

 

대원군과 연결된 軍民들은 더욱 대담해지고 조직적인 행동을 개시하여 민씨일족 등 개화파의 집을 습격 파괴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일본 공사관을 포위 습격하자 공사 하나부사(花房) 등 공관원은 전부 인천으로 피신하여 일본으로 도망갔다. 군민들은 일본군 교관을 비롯하여 순사, 일본 민간인 13명을 살해하였다.

 

 

 

 

                            도망하여 일본 나가사끼에 도착, 기념사진을 찍은 일본 공사관 직원들

 

 

 

 

더욱 강력해진 軍民들은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이최응(李最應 .. 대원군의 형) 등을 살해하고, 곧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하여 궐내로 난입하였다. 군민들은 궁궐 안 여기저기에 흩어져 명성황후와 민씨일족들을 수색하던 중, 선혜청당상 閔謙鎬와 경기도 관찰사 金輔鉉을 발견하여 살해하고 계속 명성황후의 행방을 찾았다.

 

 

이러한 위급상황에서 宮女의 옷으로 변장한 명성황후는 무예별감(武藝別監) 홍재희(洪在羲)의 등에 업혀 충주 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에 당황한 고종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대원군의 입시를 명하였고, 이에 따라 대원군은 재집권하게 되며, 高宗은 " 自今 이후 대소 公務는 대원군 전에 稟決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대원군의 큰아들 이재면(李載冕)을 무위대장에 임명하였다.

 

 

 

                                                                    임오군란의 수습

 

 

 

高宗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자책교지(自責敎旨)를 반포하여 軍變의 정당성이 합리화되었고, 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군민을 무마시켜 사태의 수습에 나서, 우선 군민들의 요청에 따라 별기군을 혁파하고 5營을 복구시켰으며, 밀린 軍料를 지급하고, 민씨일족을 제거하기 위한 인사조치를 단행하여, 자신의 큰아들인 이재면(李載冕)으로 하여금 훈련대장, 호조판서, 선혜청 당상을 겸임하도록 조치하여 병(兵)과 재(財) ..兩權을 장악하게 하였다. 그리고 시정개혁을 꾀하여 민심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임오군란 以後

 

 

 

그러나 일부 군민들은 명성황후의 처단을 주장하며 해산을 거부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실종을 홍거(홍去 .. 왕족의 죽음)로 단정하고 명성황후의 상(喪)을 공포하였다. 이러한 대원군의 조치로 타격을 받은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자신의 생존사실을 몰래 알리는 동시에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였다. 청나라는 이에 응하고, 일본과의 대항을 위하여 군대의 파견 필요성을 느끼고 吳長慶을 대장으로 4,500명의 군사를 조선에 출동시켰다.

 

 

명성황후에 대한 國喪을 강제로 진행함에 따라 대원군의 정치적 입지는 다시 흔들린다. 淸나라는 종주국(宗主國)의 자격으로 속방(屬邦)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갖고 있어, 이 기회에 일본에 빼았겼던 조선에 대한 우월적 기득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이에 군사를 이끌고 입경한 청나라 오장경은 서울 요소에 군사를 배치하고 조선의 내정에 직,간법적으로 간섭을 하며 군령(軍令)을 찾아온 대원군을 납치하여 중국 천진(天津)으로 호송함으로써 대원군은 다시 정권에서 축출되었다.

 

 

한편 일본으로 피신, 도착한 하나부사(花芳)공사는 조선 軍變의 사실을 일본 정부에 보고하자, 일본은 곧 군함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청나라의 신속한 군사행동에 대항하지 못하였고, 대원군이 제거되었음을 기화로 조선에 강력한 태도로 책임을 물어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였다. 그 조약의 주요 내용은 조선은 軍亂의 주모자를 처단하고, 일본인 피해자 유족에게는 위문금을 지불할 것 그리고 일본정부에 손해배상금 50만원을 지불할 것, 일본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킨다는 것 등이다.  이렇게 군변으로 시작한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국제문제로 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임오육월일기   壬午六月日記

 

 

 

 

 

 

최근에 壬午日記가 발견되었다. 일기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난 6월9일의 5일 후인 6월13일부터 8월1일까지 .. 명성황후가 궁궐을 나와 서울, 여주, 장호원을 거쳐 충주까지 피신하였던 51일간의 행적을 붓글씨로 기록한 일기이다.

 

 

그러나 이 일기는 명성황후가 직접 쓴 것은 아니며, 그를 護從하였던 어느 친족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앞으로 이 일기에 대한 검토 결과, 새로운 사실이 밝혀 질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일례로 지금까지는 명성황후가 淸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고 알려져 있으었으나, 아닐지도 모른다는 등등...

 

 

 

 

 

 

 

 

 

 

                               

 

                                  

                                을미사변   乙未事變 ... 명성황후 시해

 

 

 

 

 

 

 

                    

                                      일제는 왜 명성황후를 죽였는가?

 

 

1895년의 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는 이완용, 민영환, 윤치호 등을 앞세워 親美, 親러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일제는 7월13일 이노누에(井上馨) 대신에 군국주의 군벌인 미우라(三浦)를 주한일본공사로 임명하였다.

 

 

 

 

 

 

 

 

한편 조선은 민영환을 주미전권공사로 임명하는 한편, 日軍 將校가 훈련시키던 훈련대를 해산하고, 미군장교 다이(Dye)가 훈련시킨 부대를 중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親日係인 어윤중(魚允中)과 김가진(金嘉鎭)을 면직시키는 대신 친러시아계 이범진(李範晉)을 등용하는 등 排日政策을 더욱강화하였다.

 

 

일제는 조선에서 러시아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명성황후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판단하고 방책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미우라(三浦) 등은 대원군이 궁중을 감독관리하되, 내각에 간섭하지 않으며, 김홍집,어윤중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고, 이재면(李載冕)과 이준용(李埈鎔)을 중용할 것 등을 조건으로 대원군세력의 협조를 얻었다.

 

 

이와는 별도로 미우라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한성신보사(漢城新報社)의 수십명 일본 낭인(浪人)들, 일본 수비대와 경찰관들을 하수인으로 고용하고 기타 친일파들을 포섭하였다. 훈련대의 해산으로 다급해진 미우라는 명성황후 제거 예정일 8월22일을 앞당겨 8월20일 새벽에 행동을 개시하였다. 

 

 

 

 

 

 

 

 

1895년 (을미년) 10월8일 새벽 5시30분경..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미명에 정체불명의 한 무리가 경복궁 정문인 光化門으로 들이 닥쳤다. 일본군과 일본인 복장을 한 이 괴한들은 궁궐을 수비하고 있던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일행을 살해하고는 곧바로 근정전을 지나 건청궁(乾淸宮)으로 쳐들어 갔다.

 

 

 

 

 

 

이들은 고종의 침전(寢殿)인 곤령전(坤寧殿)에 난입,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高宗은 옷이 찢겨지는 등 수모를 당하였고, 또 왕세자(후일 순종)는 일본군 장교복장을 한  폭도에게 상투를 잡힌채 그가 휘두른 칼에 목을 맞고 쓰러졌으나 다행히 칼등으로 맞아 목숨을 건졌다.

 

 

 

 

 

 

이들 중 한 무리는 인근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로 내달렸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景稷)이 길을 막고 나서자 폭도들은 이경직을 총으로 사살하고는 高宗이 보는 앞에서 다시 칼로 무참히 베었다. 이어 왕비의 침전에서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고 울려 퍼졌다.

 

 

 

 

 

                    일제는 민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마져 부셔버렸다. 최근에 복원하였지만...

 

 

 

궁녀 3명과 왕비 (閔妃 .. 시해사건 발생 2년 후인 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됨)의 비명소리이었다. 폭도들은 궁녀와 왕세자 (李拓 .. 純宗의 본명)를 통해 피살자 중 한 사람이 왕비임을 확인하고는 왕비의 시신을 홑이불에 싸서 인근 녹원(鹿園 .. 人工으로 만든 山, 지금의 청와대 춘추관 자리) 솔밭에서 석유를 뿌리고 불에 태워버렸다.

 

 

 

 

 

 

 

 

                                           명성황후의 시간 (屍姦)

 

 

 

 

일본인 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逸健太郞)은 당시 舊한국정부의 고문으로 있던 "이시즈카 에이조

(石塚英藏)"가 사건 직후 본국으로 보냈던 보고서 내용 ... " 왕비를 끌어내 2~3군데 도상(刀傷)을 입히고 또한 발가벗겨 국부검사(局部檢査)를 했다. 이는 가소우가노(可笑又可怒 .. 웃을 일 또는 화날 일)이다 이는 차마 글로써 표현 못할 일이었다 ...을 인용하여 폭도들이 死體를 능욕(능욕)하였다..라고 폭로하였다.

 

 

                     일본잡지에 실린 삽화. 한 폭도가 閔妃의 그 곳에 머리를 박고 있다.

 

 

 

그러나 문맥으로 보아 능욕이라는 표현도 부족한 듯하다. 궁궐의 닌입에 앞서 이미 술에 만취한 그들은 칼은 맞았지만 아직 살아있는 민비를 강간하였거나 또는  시간(屍姦 ..시체 강간)도 서슴치 않았음이 분명한 듯하다.

 

 

 

                                     석총영장(石塚英藏)의 보고서 원문

 

 

 

 

 

 

                                                                     

                                                                      親日派의 협조

 

 

 

이 치욕스러운 사건에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씨 없는 수박을 발명한 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의 아버지 우범선(禹範善 .. 1857~1903)이었다. 당시 훈련대 제2대대장이었던 우범선은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포섭되어 이 사건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왼쪽이 우범선, 가운데가 우장춘박사 그리고 일본인 아내

 

 

 

 

이 일에서 그가 맡은 임무는 훈련대 병력의 동원이었다. 그는 당초의 임무대로 훈련대 2대대 병력을 차질없이 동원한 것은 물론 명성황후의 屍身 처리도 그가 맡았다. 폭도들에 의하여 살해된 후 불태워진 屍身의 타고 남은 재는 궁궐 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의 일부는 禹範善의 지시에 따라 휘하의 윤석우(尹錫禹)가 땅에 묻어버렸다. 증거 인멸을 위해서이었다. 

 

 

우범선 그는 누구인가 ? 그는 20세가 되던 해에 武科에 급제하여 황해도에서 근무하다가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자 여기에 참여한다. 그의 親日은 여기서 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친일 개화세력과 교류하면서 개화파에 가담한다.  그리고 일본공사 미우라에게 포섭된다. 그는 미우라에게 "조선의 정치 개선은 당우(黨羽)를 일소하지 않으면 어렵다 "라고 하며 민비(명성황후) 시해를 통한 친일정권의 수립을 역설하였다.

 

 

이어 우범선은 훈련대 제1대대장 이두황(李斗璜), 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등을 포섭하였고, 이에 미우라는 당초의 계획날짜를 앞당겨 민비를 시해하게 되는 것이다. 사건 후 우범선은 이두황 등과 함께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동경에서 망명생활 하는 도중 사카이(酒井)이라는 일본여자를 만나 결혼한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03년 구레市(吳市)로 거처를 옮겼다가 그해 말 자객 고영근(高永根)에게 암살당하였다.

 

 

우범선의 무덤은 그가 살해된 구레시와 동경 두군데에 있다. 도꾜 아오야마(靑山)묘지에 있는 묘는 일본인 후원자가 우범선의 유골을 분골(分骨)하여 그의 사후 1년 후에 다시 도꾜에 묻었다고 한다.우범선의 아들 우장춘박사는 6.25 와중에 귀국하여 일생을 조국의 농업발달을 위하여 전념하였다. 그 길이 아버지의 과오를 속죄라도 하듯이....

  

 

 

 

 

 

 

 

 

 

                                                         명성황후의 친필 편지 .. 오빠에게

 

 

 

 

 

명성황후가 1874년 오빠 민승호에게 보낸 2통의 한글편지이다. 당시 24세의 나이였던 명성황후는 정적이었던 시아버지 대원군이 1873년 실각한 이후 어수선한 정세로 편치 않은 심경을 드러낸다.

 

 

(오빠)의 편지에서 밤 사이 탈이 없다하니 다행이다. 주상과 동궁(훗날 순종)은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니 좋지만 나는 몸과 마음이 아프고 괴롭고 답답하다.....................

 

 

예쁜 색지와 깔끔한 글씨체로 눈길을 끌고 있다. 정갈한 궁서체로 씌어진 이 지글은 색지에 그려진 대나무, 꽃과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편지지는 수입품.. 청나라 것이라고 한다.

 

 

 

 

 

 

                                 명성황후의 친필  ... 최근 경매로 나왔다.

 

 

 

 

 

 

 

 

                                      시해 당시 지니고 있던 향주머니

 

 

 

 

 

명성황후의 시해에 가담한 폭도 한명이 시해 후 명성황후가 품에 지니고 있던 향주머니(香袋)를 기념으로 가지고 가서 후손에게 남겼다. 그 후손은 후에그것을 잃어버리고 똑같은 향주머니를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 ..일본 방송에 소개되었다 

 

 

 

 

 

 

 

                                   부패의 中心  그리고  東學혁명

 

 

 

 

" 고순종실록(高純宗實錄) " 고종32년(1895년) 8월20일 기록에 의하면 閔妃가 곤녕합(坤寧閤)에서 세상을 떴다고 전하고, 그 다음날에는 " 내가 (고종) 왕위에 오른지 32년에 정사와 교화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있는데, 왕후 민씨가 자기의 가까운 무리들을 끌어들여 나의 주위에 배치하고 나의 총명을 가리우며 백성을 착취하고 나의 정령(政令)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고 탐욕과 포악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워졌다 "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高純宗實錄이 일제에 의하여 왜곡되었을 기록이지만, 민비에 대한 부정적 행적은 놀랍게도 당시의 많은 野史들, 특히 매천 황현(梅泉 黃玹 . 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과 너무나도 일치하고 있다. 곧 가까운 무리를 배치(민씨일족의 세도정치), 백성 착취(탐관오리), 벼슬을 팔고(매관매직),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고(民亂 및 동학혁명) 등 당시 역사적 상황과 일치한다. 

 

 

 

 

 

                                               동학혁명과 민비

 

 

 

우리 역사에 있어 동학혁명(1894)이란 "百姓"이 "民衆"으로 잠을 깬 사건이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홍경래의 난(1811)에서부터 민중봉기는 전국의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같은 民亂은 그때마다 주모자의 처형으로 막을 내리게 되니 민중들은 힘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다. 

 

 

이처럼 안에서 봉건지배층이 민중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 있을 때 일본 및 서구열강의 침략은 민중을 한층 불안하게 하였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군에 의하여 淸나라 수도 北京이 함락되더니, 조선도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강화도늑약(1876)이 차례로 조인되어 본격적으로 淸, 러, 日, 美, 佛, 英 등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렇게 나라가 안팎으로 혼돈에 빠져 있을 때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에 의해 東學이 창도되자 민중들 속으로 들불처럼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동학은 민간신앙에 도교와 불교 나아가 천주교의 사상까지 함유하고 뿐만아니라 조선후기 몇차례에 거듭된 民亂 실패를 통해서 얻게된 현실적 요소들을 반영하면서 현실 변혁사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1894년, 민씨일족의 부패정치로 인해 " 더는 살 수 없는 세상"에 이르러 마침내 동학민중이 일어났다. 4월27일에 동학군이 전주성을 함락하고, 5월5일에 조선의 청병(請兵)에 따라 청나라군대가 아산에 상륙한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날 일본군도 인천에 상륙하였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동학의 지도자들은 5월7일 서둘러 전주화약을 맺는다. 그러나 마침내 5월27일 淸日戰爭이 발발하고, 6월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탈한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청나라군사를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戰利品으로 요동반도를 차지한다.  이러한 회오리 속에  국권이 일본에 유린되니 나라의 운명이 마치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9월18일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의 명에 따라 조선팔도의 동학혁명군이 부패한 정권과 倭軍에 대항하여 다시 일어난다.

 

 

이 같은 동학혁명의 전개 과정은 민씨일파의 부패한 정치 행로와 맞물려 있다.흔히 동학혁명의 불을 당겼다고 보는 고부군수 조병갑이나,고부 안핵사로 파견되어 동학군을 과잉 진압하므로써 새로운 불을 지핀 장흥부사 이용태는 모두 민비의 매직(賣職)에 의하여 임명된 인물들이다.

 

 

특히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 들임으로써 일본군대가 상륙하였고, 결국 청일전쟁은 온 국토가 유린되는 빌미가 되었다. 쇠약한 민씨정권은 동학혁명군이 다시 일어났을 때, 일본군에게 동학혁명군의 토벌을 맡기고, 일본은 그 전리품으로 조선의 민심 수습과 국권 탈취의 두 요건을 동시에 만족시켜 줄 "민씨정권의 목"을 요구하게 된다. 민비의 삶이 어찌 동학혁명과 무관하단 말인가.

 

              

                                                            

 

 

 

 

 

 

 

 

 

 

 

 

 

 

 

 

 

 

 

 

 

 

 

 

 

                                   

                                 어느 환관 (宦官)이 본 명성황후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명성황후에 대한 기록이 최근 발굴되었다. 고종과 명성황후를 가까이에서 모신 환관(宦官)의 기록이니 더욱 절절하고 사실일 듯하다.

 

 

 

상감(高宗)이 1864년 즉위한 뒤,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까지 곤궁(坤宮 .. 명성황후)는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 하시어 배우들을 궁중에 데려다 노래를 부르게 하고, 기생들로 하여금 묘기를 부리게 하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러니 그 賞으로 하사한 금품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극도로 곤궁해지고, 국고는 탕진되어 바닥이 드러났다. 그러나 배우들은 배가 불러 죽을 지경이었고, 군인들은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궁중에서는 비록 태평세월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민간인은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빈사세상이었다.

 

이 때를 당하여 천경(天警 .. 하늘의 경고)이 여러번 나타나고 人心이 흩어졌으니 武臣의 변란인들 일어나지 않겠는가 ? 한마리 개가 짖으면 두마리 개가 따라 짖는 법이고, 일시에 짖어대면 천마리의 개가 떼를 지어 짖어대는 법이다. 한 사람의 군졸이 주동하여 일어나면, 두 사람의 군졸이 주창하여 일어나고, 일시에 제창하여 일어난다면 5,000명의 군졸이 호응하여 일어나게 된다.

 

 

원래 5營의 군인은 5,772명이었다. 이와같은 다수의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면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 ? 군료(軍料 .. 급료)를 여덟달치 지급받지 못한 군사들의 분통과 원망이 쌓여 동심동력으로 일시에 들고 일어나니 고함지른 소리와 하나로 합친 형세가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과 같고, 비가 거꾸로 쏟아 붓는 것 같았으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 것과 같았다.

 

 

이에 곤궁께서는 크게 놀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어찌 해야랄 지를 몰랐다. 드디어 옷을 갈아입고 대궐을 빠져 나와 어둠컴컴한 마을로 달아났다. 나라의 운명이 어지러워 어쩔 수 없는 이 때에 어디서인지 팔척장신의 사나이가 홀연 나타나더니 땅에 엎드려 말하기를 ... 위험이 눈 앞에 닥쳐 왔아오니 황송하오나 빨리 저의 등에 업히소서 ...하고 두세번 재촉하였다. 경황이 없는지라 곤궁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나이의 등에 업혀 수구문 밖으로 나갔다. 이 때는 날이 아직 밝지 않았다. 가까스로 가마 한 대를 불러와서 숭례문을 빠져나가 곧바로 남태령고개를 향해 한강가로 나갔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에는 몹시 가물어 논의 벼가 말라 죽고, 고을마다 화적떼가 들끌었다.그래서 이 것을 하늘의 경고 즉, 천경(天警)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필이면 이럴 때에 섣부른 군제개혁을 단행하여 신식군대인 別技軍을 창설하고, 구군(舊軍) 병사들을 70%나 감축하여 실업자로 만들고, 더욱이 그들에게는 여덟달치의 봉급도 주지 않았다. 이러함에도 명성황후는 연일 풍악을 즐기고 있었다. 이때 군인들은 궁궐을 향해 돌진하면서 곤궁(坤宮 ..민비)를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임오군란의 책임소재가 민씨일족에게 있었음을 말해주는 형세이었다.

 

 

 

 

 

 

 

                       민비의 친필글씨 ...一片丹心이 아니라 一片丹忠이다.

 

 

 

 

 

                       뮤지컬 "명성황후" ..  지나친 美化 그리고  냉정한 평가

 

 

 

 

뮤지컬 명성황후의 作品性은 차치하고 거기에 " 歷史 "는 없다. 민비의 죽음이라는 비극성에만 초점이 맞춰진채 史實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지나친 美化.. 가히 신드롬이다. 그저 픽션만 좆재할 뿐, 아직까지 호칭마저도 온전치 못한 상황에서 "명성황후"로 미화되고 왜곡되고 있다.

 

 

그동안  민비 시해사건의 실상을 밝히는 일에  앞을 다투어 해왔지만, 그 죽음에 대한 비극성에만 의미를 두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민비가 집권한 20여년 동안에 일어난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과 같은 사건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살펴서 총체적 의미를 규명해야 한다.

 

 

민비는 누가 뭐래도 당시 부패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갑오일기"는 민씨정권 당시 충청도 청풍 북노리에 사는 이면재(李冕宰)라는 가난한 선비의 기록인데...

 

 

민비가 충북 제천의 월악산 골짜기에 벌인 어마어마하게 큰 피난 궁터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부패한 민씨일파의 실태와 동학혁명군의 움직임을 낱난히 밝히고 있다. 지금도 그 곳에는 월악궁터 주춧돌이 남아 있어서 당시의 이야기를 묵묵히 전해주고 있다.

 

또한 閔妃는 아들을 얻기 위하여 왜(倭) 상인에게 돈을 빌려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제물(祭物)을 뿌려서 탕진하였으며, 모자라는 재물을 채우기 위해 매관매직(賣官買職)을 일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野史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임오군란 때 亂을 피해 천신만고 끝에 궁중을 빠져나와 신행행렬을 가장하여 한강을 건너 주막으로 숨어 들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가마를 들여다 보며 딱하게 여겨 " 새색씨가 민비인지 여우인지 고년때문에 고생한다 "고 말을 했는데, 민비는 이에 앙심을 품고, 뒷날 환궁하여 그 여인을 찾아내라고 명하니 죽음 앞이라 모두 시치미를 뗐다, 결국 온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일제의 민비 시해사건에 국민적 공분(公憤)은 당연하지만, 민비에 대한 근거없는 미화는 안된다. 민비에 대한 미화는 구천을 떠도는 숱한 민중들의 원혼을 고려한, 역사의 총체적 의미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일순전광자노호  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다

 

 

 

 

 

 

 

 

 

 

일본의 호쿠오까의 쿠시다神社에 명성황후를 살해한 칼이 보관되어 있다.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를 제거하려는 日帝의 작전명이 "여우작전"이었는데, 이 칼에는 "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 전광석화로 일순간에 늙은 여우를 베다)라는 글귀가 써져 있다.

 

 

토오 가쓰야키 (藤勝顯) ... 그는 명성황후를 살해하기 위하여 그녀의 침소에 최초로 난입한 세 낭인(浪人) 중의 한 사람이다. 나카무라 다테오, 데라사끼 그리고 토오 가쓰야키...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계획대로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풀려난 토오 가쓰야키는 가슴 속에 남아있는 양심의 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듯하다. "閔妃를 베는 순간, 그 눈길을 잊을 수 없다"며 후회와 고통의 나날을 보내다가 1908년 평소 할머니가 다니던 절신원(節信院)이라는 사찰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명성황후의 영혼을 기리기 위하여 불상(佛像)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많은 돈을 들여 구리로 만든 觀音불像을 세워 바치고 " 세상에 다시 나와서는 안 될 물건이다 "라며 그 칼까지 절신원에 맡겼다고 한다. 그러나 절신원에서는 관음상은 모실 수 있으나, 살생의 무기인 칼은 사찰에서 보관할 수 없다고 하며, 근처의 쿠시다神社를 소개시켜 주었고, 쿠시다神社는 이를 승락하여 보관하게 되었다.

 

 

 

 

 

 

 

 

 

 

 

쿠시다神社의 봉납부(奉納簿)에는 칼을 기증한 토오가쓰야키(藤勝顯)의 이름과 명성황후를 살해할 때 사용한 칼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쿠시다신사에는 이 칼의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쿠시다神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명성황후의 영혼을 기리기 위하여 바쳤다는 관음상이 있었다는 절신원(節信院)이 있는 성복사가 있다. 지금은 구리로 만든 관음상 대신에 돌로 만든 관음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 관음상에 대한 사연도 구구절절하다.

 

 

節信院에 바쳐진 청동관음상은 수년간 잘 모셔져 왔는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또 한번 새로운 사연을 만들어 낸다. 전쟁말기 부족한 전쟁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쇠붙이라면 모조리 징발해 가던 그 때 이 곳 절신원의 청동관음상도 몰수당하고 말았다. 후쿠오까도 미군이 대공습으로 초토화되고 절신원도 파괴되면서 관음상은 물론이고 絶信院마져 역사에서 사라질 운명이 되었다. 

 

 

 

 

 

 

 

그런데 후쿠오까 대공습이 있던 다음 날, 어는 부부가 節信院의 관음상이 있던 자리에서 홀로 버려진 여자아기를 발견하였다. 그 부부는 그 여자아기를 데려다 친딸처럼 애지중지 키웠으나, 그 아이마져 19살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 부부는 안타까운 딸의 죽음에 명복을 빌어주기 위하여 불상을 세우기로 하였다. 딸을 주워 온 그 자리에 관음상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원래 관음상의 형상에 자기 딸을 형상화한 여자아기상을 함께 복원하여 석상(石像)으로 만들었다. 한 손에 여자아기를 안고, 한손에 연꽃을 들고 인자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고, 그 유래를 적은 비석이 서 있는데, 여기에 민비(閔妃)에 관련된 칼과 청동관음상에 대한 얘기가 소개되어 있다.

 

 

 

 

 

 

 

   

 

 

 

 

 

 

 

 

                                       민유중(閔維重)의 신도비 

 

 

 

 

민유중(閔維重)은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이다. 그의 묘소 앞에 서 있는 신도비로 이 곳에서 약150m올라가면 그의 묘가 나온다.

 

 

 

 

 

 

민유중(閔維重)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로 즉 숙종의 장인이다. 민유중은 1650년(효종 1)에 과거에 급제한 뒤 승문원과 예문관 등의 요직을 거쳐 충청도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신도비에는 민유중의 업적을 소개하고, 그를 찬냥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의 기단석의 몸통은 거북이 형상이며, 머리를 龍의 모양으로 오른쪽으로 틀어져 묘소를 향하고 는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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