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한 문장력으로 그려진 육화된 삶의 여로
- 강숙련 수필집 <얼추왔제>를 읽고 -
권대근/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강숙련은 199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수필이 당선되어 등단한 수필가다. 그리니까 처녀 수필집 <얼추왔제>는 등단한 지 10년째 되는 해에 내는 셈이다. 등단 이후 문학 공부에 대한 열정을 그냥 둘 수 없어 부산예대 문창과를 다니며 쏟아 부었다. 오랜 숙고 끝에 한 권의 책을 묶어 내는 그녀는 지난 10년 동안 줄곧 수필문단과 독자의 각별한 관심을 모은 작가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동인지 <동백수필> 특집에서 그녀의 작품을 다룬 바 있지만, 이 한 권의 책을 읽어 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참빗>, <나비>, <달을 보며>, <종소리>, <꽃밭에 앉아서>, <서랍을 열어 놓고>, <대숲에 바람이 일면>, <실과 바늘>, <빈집>, <쇄석실에서> 등 주옥 같은 작품들이 38편이나 실려 있다. 이들 작품을 중심으로 그의 수필세계를 진단해 결과, 몇 가지 측면에서 그 문학적 특성을 살필 수 있었다. 그것은 강숙련 수필이 지니고 있는 성격에의 구분일 수 있고, 또한 주제적인 지향성이나 내적 구조의 유형일 수도 있고, 특성의 범주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강숙련의 수필은 1) 낯설게 하기와 서사정략 2) 참신한 관조와 시적 기법, 3) 순수한 서정과 인간구원 4) 견고한 인성과 구도미학 5) 전통적 정감과 정신문화의 특징으로 대별된다.
강숙련의 수필을 관통하고 있는 큰 줄기는 첫째, 낯설게 하기와 서사전략으로 볼 수 있겠다.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품은 <나비>다. 이 작품은 서사의 매력을 힘껏 발휘한 수작이다. 미국에서 누드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이승희가 빼어난 몸매로 한국 남성의 눈을 쏙 빨아들이고 있을 즈음, 작가는 아마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래. 바로 이거야'하면서, 작가는 틀림없이 나비를 제재로 그 상징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한 편의 작품을 구상했을 것이다. 이승희 신드롬을 시니컬한 필체로 쓴 작품 <나비>는 서두부터 "낯설게 하기" 전략이 동원된 작품이다. '누드'의 의미를 '다시 태어나는 미래지향의 과정'으로 상승시키는 수법도 일품이다.
두 번째 특성은 참신한 관조와 시적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빈집>은 시골에서 볼 수 있는 빈집을 통해 우리 시대의 소외 현상을 꿰뚫어 보는 작가의 예리한 관조가 돋보이는 수필이다. '빈집'의 쓸쓸한 느낌을 구체적으로 물화하는 시적 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 아궁이 속의 잡초며, 비껴가며 서성대는 까치의 모습에다 미동도 않는 먼지의 관조는 일품이다. 비수가 되는 바람 그리고 휘청거리는 낡은 벽 그리고 북풍에 몸서리치는 마지막 남은 쪽문의 묘사가 썰렁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며, 정신이 빠져버린 앙상한 육신의 처참함을 적절한 수사법으로 멋드러지게 잘 묘사해내고 있다.
세 번째로 강숙련의 수필들의 특징 중 하나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서정성이다. 그의 글에는 한결같이 다정다감한 인정이 녹아 있고, 그 인정으로부터 삶의 의의를 깨닫는 작가의 인간적 체취가 드러난다. 멋진 수필가는 제재를 가지고 주제를 겨냥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강숙련은 제재를 가지고 주제를 겨냥하는 솜씨가 보통이 넘는다. 사물을 포착하여 관조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그것은 곧 현실의 삶에 투사된다. 이를테면 자연의 대상 앞에 선 작가는 자연의 완상을 즐기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진지한 모습의 철학자가 된다는 것이다. <달을 보며>는 보름달을 맏며느리의 자리에 견주어서 우리 사회에 아직도 남아있는 유습 때문에 힘들어하는 맏며느리의 애환과 그 역할을 서정성에 기대어 잘 그려내고 있다.
네 번쩨 특성은 견고한 인성과 구도미학으로 볼 수 있겠다. 대표작은 <바늘과 실>이다.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려는 몸짓이다. 바로 자연의 섭리에 따르려는 삶에 대한 겸허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면서 야기된 조작된 행복관, 전도되고 도치된 가치관으로 인간의 역사는 갈등의 연속이 아닌가.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조화'요, '공존'이다. 바늘과 실의 조화와 공존을 통해 내리는 부부 관계의 의미를 말하는 예시 부분은 참신한 비유와 암시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미학적 형상화가 잘 되었다. '따로따로'가 아닌 '서로 함께'를 외치는 작가의 견고한 인성은 전통적인 가치관의 수용임과 동시에 동양적인 사상에 기반을 둔 듯하다. 그는 서랍을 정리하며 투명한 삶에 젖고자 한다. 바로 구도의 자세다.
다섯 번째로 들 수 있는 강숙련 수필의 특성은 전통적 정감과 정신문화의 추구다. 한국적 혼과 미를 발견하려는 것은 결국 '우리 것'의 재발견과 재해석을 의미한다. <참빗>은 참빗을 소재로 하여 여인의 정조의식을 다룬 작품이다. 참빗에다 수절하며 사랑을 지켜 가는 수많은 미망인의 자존심이란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이기에, 그는 '옛 여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하나쯤은 가슴에 참빗을 품고 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반듯하고 아름다운 새 삶이 동서에게 다시 열리기를 바라면서도 혹여 허방을 딛지 않을까 걱정'을 한다. 같은 여성으로서 여성에게 보내는 따뜻한 정이다. 작품 <참빗>에는 대세에 밀려 그 존재적 가치와 의미를 잃어 가는 것에 대한 작가의 한없는 애정이 녹아 있는 반면에 빗살 하나 부러진 참빗마냥 몸과 마음이 헤퍼 허방을 디딘 여성에 대한 질타가 담겨 있다.
강숙련 수필집 <얼추왔제>는 읽는 맛이 있다는 점이 가장 큰 강점이다. 지금이 수필의 시대라 하지만, 수필에 대한 세인의 평판은 썩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다. 우리 수필이 독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강숙련의 수필과 같이 재미가 있어야 하고, 새롭고 참신한 인식의 세계를 독자에게 제시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의 수필세계는 활기에 찬 싱싱한 언어들의 놀이터다. 싱그러운 감성과 순수 서정이 조화를 이룬 인정의 샘터다. 그윽한 종소리 들리는 새벽이 여는 아침 햇살 같은 따스함의 세계다. 그의 문학적 바탕이 견고한 만큼 그가 보여줄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기대를 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