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
열반송(涅槃頌)
만월청산무촌수滿月靑山無寸樹
현애철수장부아懸崖撤手丈夫兒
팔십칠년사八十七年事
칠전팔도기七顚八倒起
횡설여수설橫說與竪說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
춘성선사<春城禪師>
만월 청산에 한그루 나무도 없으니
절벽에서 손을 놓으니 대장부로다.
여든일곱 해의 일이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번 꼬꾸라졌다가 일어남이라
횡설하고 수설함이여!
붉은 화로 위의 한 점 눈송이로구나!
춘성(春城) 선사(禪師) 열반송(涅槃頌)은 오언절구(五言絶句) 측기식(仄起式) 게송(偈頌)이다. 압운(押韻)은 상성(上聲) 지통(紙統)의 기(起)와 입성(入聲) 설통(屑統) 설(雪)로 작게(作偈)했다. 평측(平仄)은 근체시(近體詩)의 작시법(作詩法)과는 거리가 멀다. 선사(禪師)들의 게송(偈頌)은 문자 틀에 갇히지 않고 자유분망(自由奔忙)이다. 열반게송(涅槃偈頌)을 보면 87세에 입적(入寂)하신 것 같다. 칠전팔기(七顚八起)는 살아오신 삶의 역경(逆境)을 말씀하신 것 같고 횡설수설(橫說竪說)은 일생을 통해 법석(法席) 설법(說法)을 이른 말씀이고, 붉은 화로 위에 한점의 눈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말씀함이다. 선사(禪師)는 그 흔한 오도송(悟道頌)도 없다. 달랑 열반송(涅槃頌)만 남기셨다. 선사는 한용운(韓龍雲) 스님의 제자이다. 깍듯이 스승을 모셨고, 옥바라지도 했다고 전한다. 말년에는 도봉산 망월사(望月寺) 조실(祖室)로 계시면서 대중(大衆)과 같은 방에서 기거(起居)하면서 참선수행(參禪修行)을 지도하셨다. 망월사 선원에서는 이불 없이 좌복(坐服)이 전부다. 참선(參禪)할 때는 좌복이고 누워 잘 때는 이불이었다고 한다. 선사의 수행과정을 보면 보통 수좌들은 상상(想像)도, 못할 정도로 용맹정진(勇猛精進)으로 일관(一貫)하셨다. 수마(睡魔)를 쫓으려고 큰 항아리에 물을 붓고 겨울에도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서 잠을 쫓았다고 한다. 성철(性徹)스님이 성전암(聖殿庵)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직접 가서 확인하고, 젊은 수좌도 저토록,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데, 발심(發心)이 나서 선사도 그날부터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했다는 일화(逸話)다. 춘성(春城) 선사(禪師)는 일화가 아주 많은 선사(禪師)다. 거침없는 육두문자 욕 법문으로 유명하다. 지난번에 욕법문(辱法門) 일화(逸話)는 소개하였기에 이번에는 욕(辱) 법문(法門)은 생략(省略)을 한다. 출생(出生)은 강원도 백담사(百潭寺) 아래 마을에서 태어나셨고, 13세에 백담사로 출가하여 한용운 스님의 제자가 된다. 9세 때 모친(母親)을 따라 신흥사(神興寺)에 가서 불공(佛供)을 드리다가 법당 부처님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고 부모님 허락을 받으려고 하였으나 부모님이 허락(許諾)을 하지 않자 13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을 설득하여 승려(僧侶)가 되려고 백담사 한용운 스님을 찾아갔으나 나이가 어리다고 받아주지 않자, 밤을, 세워 출가 뜻을 굳히지 않자, 한용운 스님은 제자로 받아들이고 삭발을 시켜 춘성(春城)이란 법명(法名)을 주었다.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에서 동선(東宣) 스님에게서 비구(比丘)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경학(經學)은 연변(沿邊) 석왕사(釋王寺)에서 전문강원(專門講院) 대교과(大敎科)를 수료(修了) 하고 경학(經學) 강연(講演)으로 이름을 날려 강백(講伯)도 하면서 특히 화엄법사(華嚴法師)로 명성(名聲)을 날렸다고 한다. 화엄경을 책 덮어놓고 옳게 거꾸로 다 외웠다고 한다. 선사(禪師)의 화엄경(華嚴經) 설법(說法)으로 또 다른 일화(逸話)는 독일(獨逸)에서 서양(西洋) 철학(哲學) 실존철학(實存哲學)을 전공하고 불교학(佛敎學)으로는 대승불교(大乘佛敎) 논서(論書)인 원효대사(元曉大師) 기신론(起信論)까지 전공(專攻)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동국대학교에서 교수직에 있을 때 전국 사찰 스님들을 만나보니, 안중(眼中)에도 차지 않아서 그만 학만(學慢)이 돋쳐 스님들을 무시(無視)를, 하였는데, 춘성(春城) 선사(禪師)께서 화엄경설법(華嚴經說法)을 눈을 감고 책도 없이 설 하는 법문을 듣고 감탄(感歎)하고 그만 학만(學慢)을 내려놓았다는 일화다. 학자(學者)들은 화엄경(華嚴經)을 펴 놓고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눈 감고도 팔십권(八十卷) 화엄경(華嚴經)을 과판과목(科判科目)까지 쳐 가면서 법문을 하시는 춘성선사(春城禪師)를 보니, 학자로서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초라한가를 알게 되었다는 일화다. 춘성선사(春城禪師)는 선교(禪)를 겸한 선지식(善知識)이다. 선사께서는 스승인 한용운 스님의 옥(獄)바라지를 하면서 조선독립서(朝鮮獨立書)를 옥중에서 받아다가 몰래 범어사 스님에게 전달해서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로 보내 한용운 스님과 연락원도 하셨다고 한다. 선사는 서울 대각사에 주석하신 백용성(白龍城) 선사(禪師)를 모시고 10년간 수도 정진(精進)도 하셨고, 덕숭산(德崇山) 수덕사(修德寺) 만공선사(滿空禪師) 문하(門下)에서 겨울에도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방에 불도 때지 않고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용맹정진(勇猛精進)하셨다고 한다. 선사는 평생을 대중방(大衆房)에서 똑같이 먹고 자고 수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절에서 법랍(法臘)이 조금 있으면 각방(各房)에서 따고 사는데, 춘성선사(春城禪師)는 따로 조실방(祖室房)이 없이 대중처소(大衆處所)에서 함께 수행한 선지식(善知識)으로 알려져 있다. 요즘 총림(叢林)에 방장(方丈) 조실(祖室)스님들이 본받아야 할 실천덕목(實踐德目)이라고 본다. 불교계(佛敎界)에 이렇게 몸소 대중과 함께 수행정진(修行精進)하는 눈 밝은 선지식(善知識)이 그리워지는 세상이다. 오늘은 춘성조실(春城祖室)의 열반송(涅槃頌) 운목(韻目)을 맞추어 보았다. 여여법당 화옹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