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김미라
할머니 댁
문지기로 사신다.
비밀번호,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신날이다.
-동시집 『하늘 시계 작동 중』 (2023 청개구리)
웃을락 말락
김미혜
철창에서 빠져나온 흰둥이
요리 폴짝 조리 폴짝
배롱나무 뒤로 갈락 말락 잡힐락 말락
마당 밖으로 발을 디딜락 말락
숟가락 내던지며 달려 나와
저놈 좀 잡아라, 할아버지가 소리치면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한테 오지 마, 제발, 제발, 흰둥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가, 멀리 가
어둑어둑 붉어지는 논둑을 가로질러 갑니다
흰둥이가 멀어집니다
개와 늑대 사이를 달립니다
울락 말락 웃을락 말락
밤이 옵니다
-《문장웹진 콤마》 (2024 2월호)
제일 예쁜 것
박두순
세계에서 일곱 번째 경치 좋다는
아프리카 테이블마운틴 산에
오른 어린이
-뭐가 제일 예뻐, 물음에
-음, 음, 음
숨을 고르고 생각을 가다듬더니
-나비요!
빼어난 경치도
기묘한 바위도
아찔한 절벽도 아닌
나비를 마음속에서
꺼내 놓았다.
-연간집 『내가 있잖아』 (2024 아동문예)
작은 모닥불
성명진
아빠는
노루 발을 내놓았고
엄마는
개구리 손을 내놓았어요
형은
토끼 얼굴을 내놓았고요
돈을 벌 때
공을 찰 때
가족들은 사나워 보여도
사실은 순해요
우리는 불 가에 둘러앉아
다정한 얘기를 하고
노래도 불렀어요
-《동시마중》 (2024 1·2월호)
거미의 시
유인자
난
바람 소리를 읽고,
새소리들을 읽고,
별들의 소리를 읽어
문득
읽은 이야기들을 새기고 싶을 때
한 줄 한 줄 써 나가
이야기는 줄을 타고, 줄을 타고, 줄을 타고
빙빙 타고 돌아 줄을 탱탱하게 익게 해
지나가던
이슬이 하나 둘 셋 모여들지
재밌고 재밌다고 동동,
동동동동동동동동동동동동동···
어느새 빼곡히 동동,
매달려 읽지
이 모습도 한 편의 시야
또 와 매달릴
이슬들을 위해
어떤 시를 쓸까, 오늘은
-동시집 『척하면 착』 (2023 고래책빵)
밀려난 기분
이성자
할머니 집에 갔는데
낯선 친구가 다가온다
-안녕하세요?
저는 간병로봇 로사에요.
친절한 인사에
당황해서
멍하니 서있는데
-할머니 약 드실 시각이에요.
물 갖다드릴까요?
나보다 먼저 할머니 챙긴다
할머니 도와드리러 왔는데
밀려난 기분이다
생각이 짧았어
이오자
바닷가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몽돌 하나
생각 없이 주워왔는데
점점 빛을 잃는다
수억 년 살던 자리
떠나온 슬픔일까?
맑은 물에 소금 한 수푼 풀어
몽돌을 담갔다
“바다라 생각하렴
돌아갈 날 있어.”
-《동시발전소》 (2023 겨울호)
늑대개
-두루봉 아이 8
전병호
늑대개를 길렀지.
낮에는 함께 산을 달리고
밤에는 동굴 입구를 지켰지.
어둠처럼 늑대가 오면
먼저 알고 짖었지.
나를 지키려고
늑대에게 달려들기도 했지.
사냥 나갔다가 돌아오는
아빠의 발걸음 소리도
먼저 듣고 알려주었지.
내가 아빠 팔을 베고
잠든 밤에도
늑대개의 눈은
화톳불처럼 타오르며
우리의 밤을 지켜주었지.
-동시집 『녹두꽃의 노래』 (2023 초록달팽이)
첨성대 접시꽃
정용원
신라 나라 서라벌에
밤마다 별들이 내려왔어요.
별을 관측하는 과학자들이
반갑게 맞이했던 그 자리
밤새 첨성대에서 놀던 별들이
하늘로 돌아가기 싫어
여기 무더기로 남았어요.
알록달록 접시꽃 되어
신라 아이들 눈동자처럼
반짝반짝 빛납니다.
콩들이 뭉쳤다
최지원
한 번 흩어지면
제 갈 길로 굴러가던 콩
캄캄한
시루에서
빈틈없이
몸을 맞대고
콩탑을 쌓더니
노란 등불
빽빽하게 밝히네.
-동시집 『항아리의 마술』 (2023 경북아동문학회)
출처: 한국동시문학회공식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이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