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8.4
이상하게도 이 세상엔 행복에 관해서 쓴 글은 많아도 불행, 특히 ‘고통’에 관해서 쓴 글은 거의 없다. 내가 악성 치조염(齒槽炎)에 걸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말도 제대로 못하고, 게다가 괴로운 두통으로 연일 고생할 때, 나는 ‘통증(痛症)’에 대해서 쓴 글이 없나 하고 찾아보았다. 그런데 고통에 관해서 쓴 글은 많아도 모두가 ‘마음의 고통’을 소재로 했을 뿐 육체적 고통을 소재로 한 글은 없었다.
꽤 유명한 행복론인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에는 인간을 불행으로 이끄는 여러 요인들이 열거되어 있었다. 그런데 ‘질투’나 ‘이기심’ 등 모두 다 마음에 관한 것들 뿐이었지 육체적 고통에 관계된 것은 하나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러셀의 책이 생각했던 것보다 엉터리라고 생각했다.
비극적 플롯을 택하고 있는 소설책을 봐도 대개가 다 주인공이 겪는 ‘마음의 고통’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설사 주인공이 병으로 일찍 죽는다 해도 모두 다 ‘곱게 죽는 병’만을 소재로 하고 있다. 폐병, 백혈병 등이 그것이다. 교통사고로 죽는 경우에도 ‘죽었다’는 표현만 나올 뿐 육체적 통증을 자세하게 묘사하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행복에 관해서 쓴 그토록 많은 글 가운데 육체적 느낌으로 오는 행복감을 묘사하고 있는 글은 드물다. 대개가 다 ‘마음의 행복’만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사랑을 줘 보세요. 그러면 행복해집니다” "촛불을 켜놓고 사색에 잠겨보세요. 그러면 행복해집니다." 등이 그것인데, 도무지 아리송하기만 한 거짓말들이다.
남에게 베풀어주고 나서 느끼는 행복감은 건방진 시혜의식(施惠意識)에 따른 사디스틱한 만족감일 뿐 진짜 행복감은 아니다. 촛불을 켜고 있을 때 느껴지는 행복감은 센티메탈한 마취 상태는 될 수 있어도 그리 오래 갈 수 없는 허망한 행복함이다.
사랑을 주기만 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광신적이고 마조히스틱(Masochistic)한 신앙심에 근거한 것이라면 혹 몰라도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들이라면 그런 행복감을 인간끼리의 애정 관계에서 찾아낼 순 없다.
고통에 관한 것이든 행복에 관한 것이든, 사람들은 대체로 진짜 핵심을 피해 가는 버릇이 있다. 이른바 지식인들일수록 그러한 현상은 더욱 심하게 나타나는데,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명예욕’을 통해 행복감을 성취해 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명예욕의 성취는 진짜 행복감과는 거리가 멀다. 진짜 행복감이란 글자 그대로 ‘감(感)’으로 전달돼 오는 것이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다. 명예욕은 정신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신적 만족감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육체적 행복과 고통에 대한 스스로의 갈구나 공포를 애써 잊기 위하여,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진짜 핵심을 피해 나가려고 기도하게 된다.
나는 『권태』라는 장편소설을 통해 똥 누는 행위를 20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묘사하고 거기에 곁들여 배변의 쾌감 역시 길게 묘사해 보았다.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배설 행위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은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묘사한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오랄섹스’ 행위와 거기에 따른 쾌감 역시 길게 묘사해 보았는데, 그런 것을 시도한 소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통증에 대한 묘사는 나 역시 너무 기분 나쁜 것이라 시도해 보지 못했는데, 앞으로 기회가 생기면 시도해 보리라 마음먹고 있다.
아무튼 내게 있어 ‘행복감’이란 일종의 육체적 쾌감만을 가리킨다는 얘기가 된다. 반면에 불행하다는 느낌은 육체와 정신 양쪽으로 온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도 굳이 경중을 따지자면 역시 육체적인 쪽이 더 강하다. 내가 <즐거운 사라> 사건으로 감옥에 갔을 때, 나를 괴롭힌 울화병의 증상은 심장 부근이 바늘로 찔린듯 몹시 쑤시는 육체적 통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