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친정아버님 돌아가신지 열다섯 해가 되었다. 한 달 전쯤, 아버님의 기일이 일요일(7월22일)인 것을 알고는 막내 동생한테 이벤트를 제의했더니 며칠 전에서야 등산준비를 해서 친정집에 모이라는 연락이 왔다. 막상 연락을 받고 보니 주말에 부부동반 모임 있는 날인 것을 깜박해서 남편은 모임 참석했다 일요일 아침에 내려오기로 하고 나만 금요일 저녁 늦게 친정집을 찾았다. 반가운 해후도 잠시 미뤄두고 내일 일정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나눈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토요일 아침 7시, 엄마를 모시고 오남매가 막내 동생의 차에 올랐다. 오늘의 일정은 막내 동생이 계획한대로 따르기로 했다. 가이드에 기사 까지 자처하고 나선 남동생은 오남매의 귀여운 막내이자 우리 집 분위기 메이커로 함께 있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동생이다. 첫 행선지는 집에서 가까운 대둔산 산행이었다. 싱그러운 초록빛들판을 가르며 싱싱 달리는 차안은 들뜬 분위기에 수다로 시끌벅적했다. 그동안의 외로움과 고달픔을 한 순간에 차창 밖으로 날려 버리신 듯 그저 ‘아이구 좋다’ 를 연발하시는 엄마를 보면서 우리 오남매도 아주 큰 효도를 해 드리는 것 마냥 의기양양 했다. 전혀 의도한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윤씨들만의 나들이가 되고 보니 감흥이 새롭고 아주 소중한 추억의 한 편이 되지 않을까 해서 기대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들떠서 일 년에 한두 번씩 종종 시행해봄도 괜찮겠다는 둥, 그러다 지네들끼리만 논다고 삐지면 그 감당 어떻게 하냐는 둥, 그러면 각자 알아서 둘러대고 모이면 되지 않겠냐는 둥둥 해서 모두 한 바탕 웃었다. 대둔산도 여러 개의 산행 코스가 있는데 우리는 운주방면 쪽 용문골에서 시작했다. 차는 한적한 갓길에 세워놓고 용문골 입구에 다다르니 낙석위험으로 입산을 금지한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한 번 가 본 경험이 있는 동생은 이를 아랑곳 하지 않고 그냥 따라오라고 했다. 우리가 택한 코스는 거리가 짧은 직선코스로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해서 계속되는 오르막에 돌도 많고 험해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77세의 엄마를 모시고 하는 산행인지라 쉬엄쉬엄 올라갔다. 다행히 다른 일행들이 없어 우리 마음대로 아무데서나 쉬고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오년 전에도 우리 남매들이 엄마를 모시고 대둔산 산행을 했었다. 수락계곡부터 시작해서 능선을 따라 7시간여를 탔는데도 힘든 내색 한 번 않고 잘 따라오셔서 우리를 쇼킹하게 하셨더랬다. 그때의 기억이 생생해서 거뜬히 따라오실 것만 같았는데 이번엔 많이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의 세월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실감했다. 많은 생각과 얘기들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오르다가 산 중턱에서 만난 운해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고, 실타래 같은 폭포수 한 줄기를 렌즈에 담으며 한정된 공간의 극대화로 눈속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무데나 없는 귀한 천마 꽃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칠성봉 전망대에선 마치 금강산을 보는 듯 거대한 암벽에 송송송 솟아 있는 앙증맞은 소나무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렇게 멋진 풍광에도 다른 일행들이 없어 가족단체사진을 찍는데도 삼각대를 세워놓고서야 찍을 수 있었다. 엄마를 중심으로 오남매가 나란히 서고 보니 비로소 빈자리 하나가 느껴졌다. 오늘 이처럼 소중한 시간을 마련케 해 주신 친정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널찍한 바위에 둘러앉아 저마다 준비해온 간식 보따리를 풀어 배를 불리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새로운 에너지를 얻은 힘으로 능선에 다다르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개척탑이 있는 곳까지 갔다가 내려올 때는 삼선계단과 금강 구름다리를 거쳐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직선으로 가파르게 세운 삼선계단은 오르막만 가능해서 하산 길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와야만 했다. 어찌나 가파른지 다리가 후들거려서 위만 쳐다보고 올라왔다. 금강 구름다리는 그 옛날 그물망 같은 걸로 사람이 걸어가면 흔들거려서 무서웠었는데 지금은 튼실한 철근 다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건널 수 있었다. 남은 하산 길은 힘들어 하시는 엄마 때문에 케이블카를 탔다. 시원한 나무 그늘을 찾아 자리를 잡고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날씨가 더워 일찍 서둘러선지 많은 일을 한 것 같은데 오후 1시가 조금 지났을 뿐이었다.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한다면서 동생이 차를 가지러 간 사이에 남은 사람들은 식후의 노곤함으로 달디 단 낮잠을 즐겼다.
한낮의 열기 속에 차를 몰던 동생은 시원한 계곡물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로 안내해서 우리들의 시야를 시원하게 해줬다. 임도를 따라 숲속을 달릴 때는 길이 갑자기 끊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과 오지를 찾아가는 설렘을 동시에 주기도 했다. 야생화에 푹 빠져있는 동생은 전국 곳곳을 헤매고 다녀선지 지리에 아주 밝다. 지도책 보고 찾아다니는 게 재미있다는 동생이니 더 말해 무엇 하리. 그렇게 동생의 야생화 찾아다닌 얘기를 들으며 도착한 곳은 전북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에 있다는 화암사였다. 맨 처음 사진 찍는 오빠가 다녀온 후, 친정 식구들도 두세 번씩 갔다 와서 내게 자랑하던 절이었다. 오늘의 방문은 오로지 나를 위한 배려였다. 주차장에서 내려 20분정도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해서 엄마와 운전하느라 고생한 남동생은 차에 남아 쉬기로 했다. 조그만 개울물이 흐르는 계곡에선 물놀이 하는 사람들이 간간히 보였다. 외진 산길의 막다른 지점에 이르자 하얀 철계단이 우뚝 솟아있는 게 거북스럽게 다가왔다. 철계단 밑으론 시원한 폭포수가 요란하게 소리를 내고 있었고, 계단을 오르니 ‘화암사’ 라는 안도현 시인의 시가 큼지막하게 걸려있었다. 천천히 읽어 보고는 살짝 모퉁이를 돌아가니 조그만 절이 보였다. 쪽 문 들어가 듯 절 입구로 들어서자 한 눈에 들어 온 네모반듯한 마당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선지 푸른 이끼로 덮여 있었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극락전과 우마루는 단청의 색깔이 거의 나무색으로 보일만큼 흐릿한 게 오랜 세월의 무게를 잘 견뎌 온 듯 의연해 보이면서 안도현 시인이 ‘잘 늙은 절’이라고 극찬한 의미가 와 닿았다. 1605년에 중건 되었다는 극락전은 국내에서 유일한 하앙식건축물로 가치가 높아 최근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하앙은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바깥쪽에 하나 더 설치해 일반건축물보다 처마를 더 길게 내밀 수 있도록 한 것이라는데 건축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엔 무슨 소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양간 툇마루에 앉아 무심히 올려다 본 하늘은 네모난 마당처럼 네모 난 하늘이었다.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세속의 시간이 멈춘 듯, 한낮의 정적만이 가득했다. 신도도 별로 없을 것 같은 조용한 절에 스님 한 분과 보살님 한 분이 거주하고 있다니 깊은 산중의 밤을 어떻게 보낼까 싶은 생각에 갑자기 온 몸이 서늘해졌다. 내려오는 길에 폭포의 시원한 물줄기속으로 동생의 등을 떠밀어 놓고 구경하면서 물맞이 한방으로 더위를 날려 버릴 수 있는 남자들의 생태적인 편리함이 부럽기도 했다.
집에 오니 4시, 샤워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저녁식사는 시청 공무원인 동생의 추천으로 칼국수를 먹었다. 손으로 직접 밀어내어 만든 국수라는데 면발이 부드럽고 담백한 국물 맛이 깔끔했다. 고기 먹는 걸 은근히 기대했던 조카 빼고는 모두 맛있다고 했다. 둘째 올케와 조카까지 합류한 오늘의 마지막 여정은 부여 궁남지였다. 부여를 향해 달리는데 왼 종일 불덩이 같았던 둥그런 해가 우리를 따라 같이 달리더니 어느 순간 산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한 시간 넘게 걸리던 부여도 도로의 확장으로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다. 궁남지는 그늘이 없어 한 낮에는 사람이 없고 저녁 무렵부터 구경나온 사람들로 북적적인다고 했다. 대부분 연꽃이 진 뒤였지만 몇 군데는 여전히 자태를 뽐내고 있어 뒤늦은 발걸음을 위로해 주었다. 주변이 점점 어두워짐과 동시 줄을 늘어 트려 설치한 가로등 불빛들이 장관을 이루면서 오빠는 멋진 야경을 렌즈에 담느라 바빴다. 우리는 주말마다 열리는 공연을 보기위해 모기의 극성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8시 반에 시작한 공연은 단소, 춤. 창극, 설장고등의 우리국악공연이었다. 단소의 연주곡은 귀에 익은 곡이라 친근했고, 여자 무용수 혼자서 추는 고전무용은 무대가 낮고 가까워서 표정부터 손짓, 발짓까지 세심하게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고개까지 젖혀서 흠뻑 빠져 있는 막내동생의 모습을 보며 둘째 올케는 우스워 죽겠다고 내게 소곤댔다. 창극 ‘화초장’ 장면은 두 명의 배우와 관객들이 어우러져 함께 하는 공연이라 더 재미있었다. 건장한 남자 네 명이 서서 하는 설장구는 어찌나 열정적으로 치던지 땀이 범벅이가 된 모습에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오랜만에 좋은 구경하셨다는 엄마는 ‘니들 아버지도 장구를 잘 치셨는데’ 라며 말끝을 흐리셨다. 오늘은 이래저래 아버지를 추억하게 했다.
일요일이자 아버지 기일인 날 아침, 식구들이 모인 김에 약을 쳐야 한다고 해서 엄마와 남자형제들은 논으로 나가고 여동생은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나는 서울서 일찍 내려온 남편을 만나 시댁으로 갔다. 어머님이 안 계셔서 찾았더니 밭에서 풀을 뽑고 계셨다. 우리 온다고 밥을 해 놓으셔서 밥상을 차려 어머님과 아침식사를 하고는 집안 대청소를 했다. 남편은 피곤한지 잠을 자고 나는 어머님 얘기를 들어 드렸다. 점심엔 어머님과 큰댁 형님 내외분을 모시고 가서 민물매운탕을 사 드렸다. 다시 집까지 모셔다 드리고 친정에 갔더니 오후 세시가 넘었다. 올케들은 한창 음식 만드느라 분주했지만 날씨가 더운 관계로 제사 음식도 간소화 하고 양도 줄이자고 해선지 전에 보다 할 일 이 많지 않아나는 그냥 앉아 얘기만 했다. 큰 딸이지만 시댁에서 맏며느리 노릇 하기 버거운 탓에 친정일은 잘 나서서 하지 않는다. 때론 올케들의 눈치가 보이기도 해서 하는 체 하지만 좋은 시누이 소리 듣는 거 포기한지 오래여서 별로 신경 안 쓰는 편이다. 오늘은 비가 오락가락 변덕을 부렸지만 더위는 여전했다. 조금 선선해질 무렵, 세 모녀가 아버님 산소를 찾았다. 어제 화암사 들렀다 집으로 오는 길에 아버님 산소에 들르자고 했더니 풀이 우거져 안 된다고 해서 아쉬워했던 게 맘에 걸렸던지 의좋은 삼형제는 추석 때만 하던 벌초를 했다는 것이다. 무더위에 애쓴 것도 고맙고, 대통령이 참배하러 온다는데 더위 따위가 문제냐면서 우리 집의 대통령은 딸들이라고 치켜 세워주는 빈말에도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찾은 아버님 산소는 아들들의 수고스러움으로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맨 위에 계시는 증조부모님께 먼저 인사 올리고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님과 곱고 단아하셨던 할머님을 떠올리며 인사 올리고 마지막 아버님께 그동안 잘 계셨냐는 안부를 여쭈며 절을 했다. 많은 시간동안 잊고 지냈던 송구스러움으로 가슴이 울컥 했다. 시간적으로 용이하게 맞은 아버님의 기일 덕분에 좋은 추억도 쌓고, 온 가족의 살뜰한 마음으로 정성껏 모신 아버님의 15주기 기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9시 넘어 제사 올리고 늦은 시각 집으로 왔지만 마음만큼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뿌듯했다.
첫댓글 부러운 가족산행 나들이가 너무 보기 좋읍니다. 어머니께서 장시간 산행을 하시는 모습이 부럽고 또한 고맙군요. 미스 윤은 행복 하시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