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장, 국내어획량의 60% 차지
- 남해안보다 씨알 굵고 단단해
- 현대 다양한 요리 개발로
- 당당한 주연급 물고기 대접
- "그물마다 멸치…전국서 넘쳐나"
- 조선 때도 다량으로 잡혀
- 성질 급해 물 밖서 금방 죽어
- 기름 짜거나 낚시미끼 쓰기도
어서나 털고 가자/정든 님이 기다리네
멸치 한 통 담아 이고/부산자갈치 가니
멸치 한 통 담아 이고/달도 밝네 보름달이가
-기장군 일광면 칠암리 '멸치 터는 소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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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장 멸치는 수심이 얕은 곳에 서식하는 남해안 멸치에 비해 크고 굵어 식감도 좋고 고소한 맛도 일품이다.왼쪽 사진은 지난달 열린 '기장멸치축제'에서 찍은 생멸치. 오른쪽은 건멸치. 장경준 제공·국제신문DB |
지난달 24일 모처럼 시간을 얻어 찾아간 부산 기장 대변항(大邊港). 때마침 포구에선 '기장멸치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포구는 막바지 멸치 축제를 즐기려는 인파로 가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입을 유혹하는 음식들의 냄새, 즐거운 기억을 담기 위해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 봄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비릿한 바다 내음, 고깃배의 물고기를 호시탐탐 노리는 갈매기들의 분주한 몸놀림이 한데 어우러지며 포구의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졌다.
축제를 즐기던 중 포구를 향해 들어오는 고깃배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걸음을 재촉해 배가 닿을 선착장에 가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배가 선착장에 닿자 배에서 예닐곱 명의 선원들이 내려 선착장에 일렬로 섰다. 잠시 후 배에서 그물이 내려지자 선원들은 이를 잡고 일정한 소리에 맞춰 털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물 위로 물고기들이 튕겨 올랐고 공중에서는 화려한 군무(群舞)가 펼쳐졌다. 이내 선착장에 모인 사람들도 환호성으로 응답했다. 축제의 주인공 멸치가 수많은 환영 인파 속에 은빛 자태를 한껏 뽐내며 화려하게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기장에선 멸치도 주연급 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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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치 |
우리에게 멸치는 국물을 우려내는데 사용하고 버리거나, 혹은 말리고 삭혀 다른 음식의 감칠맛을 내는 정도의 '조연급' 물고기로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기장에서는 사정이 좀 다르다. 멸치도 당당히 '주연급' 물고기로 인정받는다. 기장의 대표 먹거리인 멸치회, 멸치찌개, 멸치구이 같은 음식들이 말해주듯이 이곳에서 멸치는 어엿한 요리의 주연배우다.
멸치의 흰 비늘을 벗겨내 술지게미를 푼물에 담가 기름기를 제거한 뒤 뼈를 발라내 쑥갓과 함께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멸치회, 생멸치에 미나리, 우거지, 방아잎 등을 넣고 얼큰하게 끓여 낸 멸치찌개, 생멸치에 소금을 얹어 석쇠에서 구어 낸 멸치구이는 기장처럼 멸치의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고선 결코 맛보기 어려운 음식이다.
기장에 멸치 음식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바로 우리나라 '멸치의 메카'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기장에 이런 수식어가 붙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910년 발행된 '한국수산지'에 1892년 일본에서 이주해 온 어민들이 조기, 갈치, 청어, 복어와 함께 멸치를 잡았다고 하고, 1942년에 간행된 '조선어업조합요람'에도 기장에서 잡힌 주요 어류로 정어리와 멸치가 함께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100년 이전부터 기장에서 멸치 조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이후 오영수(吳永壽, 1914~1979)가 1953년에 발표한 '갯마을'이란 소설이 세간의 인기를 끌면서 기장 멸치도 전국적 유명세를 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갯마을'은 멸치 터는 작업을 도와주고 연명하는 젊은 미망인의 애환을 다룬 소설이다. 발표 후 영화와 드라마 대본으로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데, 이 소설의 무대는 기장군 일광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장구포(機張九浦)'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장에는 포구가 많고 모두 멸치로 유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대변항이 유명세로는 단연 으뜸이다. 매년 봄 멸치 축제가 열리고 있는 대변항은 우리나라 멸치 어획량의 60%를 차지하는 말 그대로 멸치의 항구다.
기장 대변의 멸치는 좀 특별하다. 우선 크고 굵다. 수심 깊은 동해에서 자라 수심 얕은 남해안 멸치보다 크고 굵다. 또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물살 센 곳에서 서식하므로 육질이 단단하다. 그래서 다른 지역 멸치에 비해 식감도 좋고 맛도 더 고소하다.
기장에서는 멸치를 봄, 가을로 나누어 잡는다. 봄에는 3월부터 6월까지, 가을에는 10월부터 다음해 음력설까지 잡는다. 멸치는 물 밖으로 나오면 바로 죽어 쉽게 부패한다. 그래서 어지간히 물 좋은 녀석이 아니고선 대부분 끓는 물에 넣고 건져낸 뒤 말려 건멸치를 만들거나 소금에 재워 멸치젓을 만든다. 멸치젓은 봄 멸치는 주로 액젓으로, 굵은 가을 멸치는 육젓으로 담근다.
■몸집 작고 성질 급해 '멸치'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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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석(1686-1761)이 그린 '어선도'. 중국 명대 화가 당인의 화풍을 계승했다. 오른쪽 위에 표암 강세황(1713-1791)의 그림 평이 적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멸치는 현재 우리나라 전 연안에서 나는 다획성 물고기다. 조선후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서유구(徐有榘,1764∼1845)는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서 "동해에서 산출되는 멸치는 방어 떼에 쫓겨 대량으로 몰려온다. 어부가 이를 큰 그물로 둘러싸면 온 그물이 온통 멸치이므로 방어를 골라 낸 후에 남은 멸치는 모래사장에서 말려 판매하는데 전국에 넘쳐흐른다"고 했다. 또 이규경(李圭景, 1788~1856)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한 그물로 만선(滿船)하는데 어민이 즉시 말리지 못하면 썩으므로 이를 거름으로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한 그물로 산더미처럼 많은 양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조선후기에도 멸치는 다량으로 포획된 물고기였다.
멸치 이름은 지역에 따라 행어(行魚), 말자어(末子魚), 멸아(鱴兒), 기(幾), 멸이, 멜 등으로 다양하다. 행어와 멜이란 이름은 제주도에서 쓰인다. 16세기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제주목 정의현(旌義縣)과 대정현(大靜縣)의 토산품으로 행어(行魚)가 보이는데, 이 행어는 멸치의 제주 방언이라고 한다. 멜 또한 멸치를 이르는 제주 방언이다. 지금도 제주에서는 멸치젓을 '멜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말자어, 멸아, 기, 멸이는 경상남도 진해 부근의 방언이다. 1803년에 김려(金鑪, 1766∼1822)가 지은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에는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말자어'라는 근연종도 있다. 정어리와 같지만 아주 작다. 바닷가의 여러 고을과 서울에서 팔리는 건 '멸아'와 비슷하니, 진해에서도 생산된다. 멸치를 이곳 사람들은 '기'라고 하는데, '기'라는 말은 방언으로 '멸(鱴)'이다"고 했다.
한편,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자산어보(玆山魚譜)'에서 중국 문헌에 기록된 멸치의 이름들을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사기(史記)'에는 '추천석(鯫千石), '정의(正義)'에는 '잡소어(雜小魚)', '설문(說文)'에는 '추백어(鯫白魚)', '운편(韻篇)'에는 '소어(小魚)'라고 멸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멸치는 한자로 멸치(蔑致), 멸어(蔑魚), 멸어(滅魚)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는 멸치의 외형과 급한 성질에서 비롯된 표기로 보인다. 멸치는 '자산어보'에도 기록되었듯이 몸이 매우 작고 큰 놈도 서너 치에 불과하다. 또 성질도 매우 급해 물 밖으로 나오면 바로 죽고 만다. 작다고 업신여겨 '멸(蔑)'자가, 또 성격 급해 바로 죽어 '멸(滅)'자가 붙은 것은 아니었을까.
조선시대에도 요즘처럼 멸치를 여러 방법으로 조리해서 먹었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멸어는 회를 할 수 있고, 구워 먹을 수 있고, 말릴 수 있다"고 했다. 또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국이나 젓갈을 만들며 말려서 포도 만든다. 요즘 멸치는 젓갈용으로도 쓰고 말려서 각종 양념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멸치를 회, 구이, 건조, 젓갈 등으로 조리해 먹었다고 하니 요즘과 별반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멸치를 말려 기름을 짜거나 고기잡이 미끼로도 사용했다. 하지만 타인에게 주는 선물용으로는 사용을 꺼렸던 것 같다. 정약전이 밝혔듯이 멸치는 '천한 물고기'라 선물용으로 적당하지 않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즘은 이와 달리 멸치가 명절 인기 선물로 꼽히고 가격도 만만치 않으니 이만하면 멸치 신세도 퍽 좋아진 게 아닌가 싶다.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