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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쟁이 예수 / 마 12:34-35
은퇴하고 설교를 안하니까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일지키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듭니다. 솔직히 말해서 예배 드리러 갈 곳이 없습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를 가자니, 성도들의 시선이 담임목사가 아니라 제게 향하니까 담임목사 목회에 지장을 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를 가면 후배 목사들 부담을 주니까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어느 후배 목사는 우리 교회 오려면, 미리 연락하고 설교할 준비하고 오라고 하더군요. 은퇴목사 갈 곳없다는 걸, 은퇴하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요즘 은퇴하고 할 일은? 운동하고(축구, 요가, 걷기) 책읽고, 악기 좀 배우고 그러려고 했는데, 게을러서 아직 손도 못댔습니다. 대신 운동과 책읽기는 꾸준하게 한다. 요즘 욕쟁이 예수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지금은 목사가 됐지만, 대학 때 보수적인 써클에서 훈련을 받고 카나다 유학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안수받은 보수측 목사가 쓴 책이다. 내용이 심플하고 개혁적이다. 보수에 머물러 성장이나 외치지 않고, 성서를 제대로 알리고 교회를 개혁하려고 애를 쓰는 목회자이다. 이 책을 읽고 작년 총회의 일을 생각하면서, 글자 하나 하나를 따지는 일부 총대들의 모습에 기장 목사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미 8군 영내에서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성탄절을 앞둔 12월 어느 날 퇴근 시간이 임박한 때에 미국 민간인 차 한대가 들어와 수리를 요청했습니다. 정비공들은 늦은 시간에 왔다고 짜증을 냈습니다. 정비반장은 투덜거리며 욕을 했습니다.“자식이 말야, 짱구같이 생겨가지고 도무지 눈치가 없어. 지금이 몇 신데 와서 귀찮게 굴어!”이렇게 상소리를 하는데, 그 손님이 의자에 앉아 신문을 꺼내 읽는데, 우리나라 신문이었습니다. 정비공들은 모두 당황했습니다. 그때 한 정비공이 그 차에 “불동액”을 넣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한 직원이 “야, 불동액이 아니라 부동액이야”라고 말하자, 그 미국인이 말하기를 “원래 ‘不’자인데 그런 경우 부동액이라고 읽는 거죠”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정비반장은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를 보고 미국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원래 내 별명이 짱구예요. 그리고 자식이라는 말이 뭐 나쁜가요? 자식이란 말은 아들이란 말인데,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석했어요.”그러면서 껄껄 웃었습니다. 모두가 그 너그러움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이며 연세대학교 교수인 원일한 박사였습니다.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말이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너무 쉽게 함부로 말을 합니다. 그리스 속담에 “혀는 뼈도 없고 약하지만, 많은 사람을 찌르고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수많은 말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이웃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상처를 싸매기고 합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싸움을 일으킬 수도 있고, 말 한마디로 평화를 이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3:2~6절에 말의 중요함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언어의 실상은 어떤 것일까요? 성경이 밝히는 인간의 말의 실상은 철저히 타락한 것입니다. 마 12:34-35절에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했습니다. 근본이 악한 인간의 입에서 어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하셨습니다. 독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독밖에 달리 나올 것이 없듯,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독사의 자식같은 인간의 입술에, 무슨 선한 말이 나오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타락한 인간의 입술에 대해, 로마서 3:13~14절에 기록하시기를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3:7~8절에는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입술의 말에 대해 “열린 무덤” “독사의 독” “저주와 악독” “쉬지 않는 악” “죽이는 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밝히는 인간의 말의 현주소입니다.
악한 말이 무엇입니까? 남을 비방하고 헐뜯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책망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선민이요, 경건한 자요, 거룩한 사람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선하지 않았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헐뜯고 비난하기를 좋아하고, 모함하며 남을 멸시하는 말을 좋아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마음이 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독사처럼 남을 죽이려는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하고 독한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 아비가 마귀라고 했으니, 너희는 마귀 새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심한 욕, 강한 저주가 어디 있습니까? 요 8: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세례 요한도 거친 말을 했습니다. 마 3:7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 3:7절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사도바울도 거친 말을 했습니다. 빌 3:2절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자, 일부 교인들이 그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개들’, ‘행악하는 자들’, ‘몸을 상해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부정적인 측면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또한 ‘삼가라’는 명령을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그들을 극도로 경계하라고 합니다. ‘개들’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가리켜 사용하는 혐오 표현인데, 바울은 이를 역으로 율법주의자에게 적용합니다. 여기서 개들은 애완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거처 없이 쏘다니면서 쓰레기와 오물을 먹고 자기들끼리 싸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떠돌이 개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고 하면서, ‘선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율법을 따르는 ‘행위’에 의지해서 구원을 받으려 했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에게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마음의 할례를 중시하지 않고 할례의식에만 집중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할례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고, 단지 율법의 껍데기만을 붙들고 있는 무리들을 비꼬는 의미에서, ‘살을 베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1:8)을 가진 바울이, 율법주의로 왜곡된 구원관을 가진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만일 그들의 주장과 같이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보혈이 필요 없습니다. 육신의 할례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아 심령으로 거듭날 때만이, 사함을 얻고 구원에 이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를 보겠습니다. 렘 15:16-18절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예레미야도 입이 걸죽하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전하라는 말씀을 그대로 전했는데, 백성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살해 위협까지 받자,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과는 다르게, 하나님이 자기에게 사기를 쳤다며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대부분의 번역은 얌전하게 옮겼지만, 18절은 좀 심한 말로 하자면 ‘당신 때문에 좆됐다’라고 옮기시는 것이 더 옳은 번역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실망이 클 때는 괜히 쿨한 척하지 말,고 그분에게 좀 과격할 정도로 솔직해 져야겠습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시 109:5-15 “5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6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7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8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9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11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12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13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14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15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다윗이 이렇게 저주를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음에도, 하나님은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이런 저주를 거침없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주님과 두터운 신뢰를 나누었기 때문에, 그런 상과 칭찬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등으로만 익숙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분노를 봅시다. 성전 정화하실 때 뭐라하셨을 거 같은가요? 거친 욕설을 하지 않았을까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들고 내려왔다가 십계명 돌판을 내던지며 인자하고 부드럽게 말했을까요? 우리나라는 근본주의, 보수주의, 경건주의의 틀에 묶여 있어서, 얌전한 윤리와 도덕에 갇혀 있어서, 이런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 보수주의, 경건주의, 윤리와 도덕의 틀(규칙)을 벗어나면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거친 정직함이 미끈한 경건함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성서해석을 다양하게 할 수 있다.
김용민 목사가 신학하기 전에 쓴 쓴, 김어준 평전에 보면 욕에 대해 김어준이 한 말이 나옵니다. ‘욕은 잘못 사용할 때 문제가 되는 거야. 욕을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언제 해도 되고, 언제 하면 안 되는지 그걸 구분하는 방법을 길러주는 것이 욕에 대한 교육이라고 봐. 친구들하고 아무리 심한 욕을 해도 그 욕이 통용되는 분위기와 공간과 상황이 있다고. 어릴 때는 잘 몰라. 그런데 어릴 때 처음 욕을 배운 이는 상황에 안 맞는 심한 욕을 많이 한다고. 그러다가 얻어터지고, 욕도 먹으면서 배워가는 거야. 그러면서 언제 욕을 써야 되는지를 알게 되는 건데. 내가 보기에는 그게 욕에 대한 교육이야.’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욕을 하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하거든, 은혜가 안된다고 정죄하는 대신, 그 사람의 분노와 아픔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욕을 거치지 않고서는, 자신의 감정을 전달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이들의 정서가, 얼마나 황폐한지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 사회인지, 얼마나 여유가 없고 거친 사회인지, 좀 깨달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하나님 닮은 의분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우리가 예수님 닮은 의분을 가진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바라기는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처럼, 욕설을 내뱉을 정도로 강한 의분을 품을 수 있었으면, 그리고 골방에서는 에레미아처럼 하나님 앞에서 막말로 감정을 토로할 정도로, 친말함과 진솔함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에 대해 시험에 드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은혜롭지 못한 모습이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성숙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것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종교라는 껍질을 벗고 자유로워졌으면 합니다. 다른 교단은 제외하고라도, 우리 기장만이라도,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을 향해 진실하고 진솔하게, 거침없이 표현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