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연정(戀情) / 정재홍
오늘은 산책길에서 몽우리를 터뜨린 연분홍 진달래꽃을 만났다. 걸음을 멈추고 동심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침으론 냉기가 도는 바람이 불지만 어느새 봄은 성큼 다가와 꽃을 피워낸다. 매년 봄을 기다리던 마음을 세어보니 반세기를 훌쩍 넘어버렸다. 해마다 봄바람을 타고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이 오면 마음이 바빠진다. 봄 햇살을 품어 화사하게 피어나는 진달래꽃을 맞이하기 위해 마음은 벌써 저만큼 앞서 달려간다.
나는 봄에 피어나는 꽃들 중에 진달래꽃을 가장 좋아한다. 동산에 피어난 분홍빛깔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즐겁다. 어린 시절 봄이 오면 친구들과 어울려 들로 산으로 쏘다니기를 즐겼다. 고향 뒷동산에서 진달래를 꺾어다 빈소주병에 꽂아놓으면 집안 분위기가 살아났다. 심성 좋은 아이들은 선생님의 책상위에 진달래꽃을 장식해 칭찬을 듣기도 했다. 진달래꽃을 따서 먹으면 특유의 향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지금도 눈감고 생각하면 그 상큼한 맛과 향이 입안을 맴돈다. 어른들은 진달래 피어나는 산골에는 문둥이가 있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협박 아닌 충고를 했지만 악동들은 산으로 향했다. 찹쌀가루에 진달래꽃잎을 붙여 만든 예쁜 화전은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고급스러워 보였다. 할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여닫이문의 창호에 진달래꽃을 붙이면 오래도록 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진달래꽃으로 인한 사건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혈기 넘치는 청년시절이었다. 두 젊은 청춘은 춘천의 원창고개 정상에서부터 자전거 핸들 앞에 진달래꽃을 한 아름 매달고 신나게 페달을 밟았다. 봄바람을 맞으며 구불구불 이어진 아스팔트길을 달리는 기분은 자전거를 타는 본인만이 알 수 있다. 가속도가 붙어 브레이크를 잡으면 쇠 소리가 났다. 기분 좋게 산을 내려갔는데 검문소에 근무하는 경찰에게 제지를 당했다. 앞서 내려간 버스 기사가 위험상황을 알렸고, 위태롭게 달려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자전거타이어의 바람을 모두 빼는 바람에 언성이 높아졌고, 그때부터 자전거를 끌며 걸었다. 군 시절엔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는 날인데 귀대 시간을 맞추지 못한 사건도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비포장도로를 걸어가는데 부대 근처에서 퇴근하는 부사관을 만났다. 그 분은 동향(同鄕)이라 가끔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잠시 쉬었다 가라고 하여 그분 댁에 들렸는데 조촐한 술상이 나왔다. 술의 정체는 진달래꽃을 넣어 만든 담금 주다. 한잔 두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귀대 시간을 넘기고 말았다. 상황실에 불려가 주번사령에게 꾸중을 들었고, 오랜 시간 무릎을 꿇어 반성의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담금 주를 마시는 기회가 있으며 그 시절 진달래술이 떠오른다.
봄이 되면 산에 피어나는 꽃들 중에서 가장 한국적인 꽃은 단연 진달래다. 진달래꽃은 ‘먹는 꽃’이라는 의미가 있어 ‘참꽃’이라고 불렸고, 두견새가 밤 새워 피를 토하면서 울다가 꽃을 분홍색으로 물들였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여 두견화라 부르기도 한다. 천상의 꽃밭을 가꾸는 선녀가 인간 세상에 내려와 겪게 되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전설도 많다. 혈액순환에 효능이 좋다하여 감기, 고혈압 등의 민간요법으로도 널리 쓰였다고 전한다. 진달래의 꽃말은 신념, 애틋한 사랑, 사랑의 기쁨이다.
우리나라 한반도 방방곡곡 어디서나 피어나는 진달래는 수천 년을 지나오며 우리 민족의 정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녹아있다. 시인들은 꽃말처럼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사랑의 기쁨을 노래했고, 묵객들은 그림으로 남겼다. 시인 김소월은 이별의 아픔을 진달래꽃에 빗대어 노래했다. 조선시대 기녀(妓女)였던 강아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인간다움에 반해 유배지였던 강계를 향해 불원천리 달려간다. 유배에서 풀려난 정철과 또다시 이별하지만 여심이 이루어낸 애틋하고 고귀한 사랑이야기는 진달래 피어나는 강계에 남아있다. 동요와 대중가요에 많이 등장하는 꽃이 또한 진달래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고향의 봄’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기 진달래를 떠올리며 남녀노소가 함께 소리 높여 부르면 하나가 된다. ‘진달래 먹고 다람쥐 쫓고 물장구치던 어린 시절에’로 시작되는 가수 이용복의 ‘어린 시절’이라는 가요는 옛 추억을 불러온다. 진달래꽃을 꺾어 오다가 떨리는 손으로 건네주었던 어여쁜 소녀의 때 묻지 않은 모습이 그립다. 가수 정훈희가 불렀던 ‘꽃길’이란 노래를 읊조리며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진달래 피고 새가 울면은/두고두고 그리운 사람/잊지 못해서 찾아오는 길/그리워서 찾아오는 길/꽃잎에 입맞추며/사랑을 주고받았지 …….’
생각해보면 지난 세월 속에 나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좋은 인연으로 만났고, 함께 호흡하며 생활했다. 그런데 어느 날인지는 몰라도 애틋한 사랑의 메시지도 없이 슬며시 하나 둘 나의 곁을 떠나갔다. 어쩌면 살아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일지라도 지금은 어느 하늘아래서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얼큰하게 술에 취해 나에게 발길질을 하던 친구는 불의의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었고, 암 진단을 받고 힘겹게 투병 생활하던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 함께 뛰놀았던 옛 친구들의 무덤 앞에 진달래꽃을 바치고 싶다. 아! 인생은 한편의 꿈이런가. 삶이 있어 꿈을 꾸고, 꿈이 있어 삶은 보다 높은 이상(理想)을 향해 빛나는 도전을 하나보다.
분홍빛 진달래 연정이 봄바람에 휘날린다. 이제 앞으로 남은 세월에 진달래꽃을 닮은 사람들을 또 만나리라. 어떤 인연으로 만날지는 몰라도 그들과 함께 애틋한 마음으로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리라. (끝)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어제 저도 진달래 꽃을 따 먹으며란 시화를 그렸지요. 참꽃에 대한유래도 간직하고 있지요.
대학시절수학여행을 모두 한차에 타고 가다가 진달래꽃을 발견 친구가 진달래다-라고 했고, 나는 아냐 저건
참꽃이야, 진달래는 함박꽃이라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교수가 중재를 해 주었지요.
-지역에 따라 다르게 부른다.참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함박꽃은 진달래가 아니다라고 ㅎㅎ
정족리에서는 유년기 때 참꽃이라 했다. ㅎㅎ 지금도 내가 우기던 게 생각난다. 봄만 되면 ㅎ
감사합니다.
연세드신 분들은 누구나 진달래꽃에 대한 추억이 하나 둘 쯤은 있을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그린 진달래꽃을 따 먹으며란 시화를 상상해 봅니다.
요즘은 어딜가나 진달래가 한창입니다.
올해는 코르나 바이러스 때문에 진달래 사랑이 덜할것 같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