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화가야사 초석을 놓고 지평을 넓힌 향토사학 연구
비화가야 고분군(창녕 교동 송현동)
2006~7년 창녕 송현동 15호 고분 발굴조사 때 이 돌방무덤에서 4명의 순장자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순장된 10대 소녀의 유골이 온전하게 출토되어 그 후 복원하였다는 소식에 창녕 사람들은 대단히 놀라고 반가워했다.
― 2007년 12월 22일 발굴현장 설명회에서 정징원 문화재연구위원(매장분과)……각계 전문가 13명이 참석하여 ……대형고분인 송현동 15호분 내부에서 1500년 전 가야시대 사람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송현동 가야고분은 비화가야의 수장급 무덤으로 추정된다.”
그 후 유골 복원작업을 했던 고고학자들이 복원된 소녀의 실체에 대해 연구 검토하여 “비화가야 소녀”라 명명하고 고분발군 조사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서울에서 전시를 했다.
그런데 복원 소녀 형상이 창녕박물관에 도착 전시하려 하자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겨 뜻있는 사람들이 실망했다.
누군가 ’가야소녀‘라 함을 거부, 반발하자 그냥 출토된 땅이름 그대로 “송현이”로 부르기로 했다는 생뚱맞은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누가 의문을 제기하면 “창녕이 가야면 어떻고 신라면 어떻습니까.”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에야 창녕박물관에 전시된 복원상에 ‘꽃보다 예쁜 여자’ “비화가야 순장소녀, 송현이”라 명패가 붙었으니 <비화가야>란 창녕의 고대 땅이름을 찾았으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창녕군이 가야의 소국 <비화가야>라고 천명하며 비화가야사의 초석을 놓은 이는 『빛벌문화』를 지은 향토사학자 노대석 교육장이었다. 그 책은 창녕향토문화 연구서의 효시이기도 하다.
노대석盧大錫(1923~1975)은 이방면 출신으로 대구사범학교, 해인대학 법정학부 정경과를 나온 교육자로 1944년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하여 창녕초등학교 교감, 52년 이후에 창녕, 밀양, 마산, 경남교육청 초·중교장, 장학사를 지내고 1967년 창녕군교육장으로 부임하여 72년까지 재임하였다. 그 후 낙서중, 초동중학교 교장을 역임했으며 향토문화공로상(73년)을 수상하였다.
그가 창녕교육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창녕군 최초의 향토사 『빛벌문화』를 펴냈으니 곧 향토사학 초석을 놓은 연구자로서 쾌거였다. 1956년 초간 이후 1968년 9월에 재간하면서 노대석은 서문(1968. 7. 7)과 분문 첫머리에,
”창녕은 가야의 일 소국 「불사국」으로……“ 하고 가야 권역임을 밝히며 『삼국유사』에 <비화가야>가 창녕임을 기록하였다고 했다. 또 비화, 비사벌, 비자벌은 순수한 우리말 ‘빛벌’의 한자화라 밝혔다. 자료수집과 정리를 해준 당시 교육청에 근무하던 조정도, 김규태, 협조해 준 성낙의께 감사를 표하고 있다.
1970년 12월에 <빛벌문화 續>을 발간하였는데 역시 ”빛벌<비사벌>은 가야 강국이었다“고 확언하였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이 육가야 조의 큰 글자 <비화比火> 다음에 작은 글자 “창녕공고령와昌寧恐高靈訛(지금 창녕이니 의심컨데 고령의 잘못 같다.)”를 들어 창녕이 비화가야가 아니라니, 아예 가야 지역이 아니고 신라라는 주장들을 펴기도 하였다. 거기다 중국 사서인 하나인 「삼국지 위서」에 진·변한 24국 중 하나로 “불사국不斯國”으로 기록되었는데 그것을 근거로 해서 가야란 말은 무시하고 ‘불사국’을 내세우니 노대석의 주장을 아예 무시한 것이었다. 아마 중국이란 한자 문화 사대주의에 빠진 것이라 할 것이다.
가야에 대한 연구 논문을 많이 발표한 향토사학자 김세호가 김해에 있는 가야사연구회 인가 하는 단체에 창녕군 유일의 회원으로 참석하곤 했는데 거기서도 그런 주장을 하는 이가 있어 설움을 받았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1992년 비사벌사회문화연구소가 펴낸 『창녕군지명사』(김현곤·허규일·김현우 공동저)에 ”창녕공고령와“에 대한 연구 분석을 상세히 밝히며 창녕이 틀림없이 <비화가야=창녕>였음을 여러 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주장들을 인용하며 땅이름의 어원까지 상세히 밝혀 놓기도 하였다.
유어 출신 이철환(1944~2012) 경남향토사 연구협의회 이사가 <창녕신문>에 <창녕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제하에,
―우리의 향토 역사 선구자들인 노대석, 김현곤, 김세호 선생 등이 이미 창녕의 가야역사를 밝혀 놓았었다. 더군다나 창녕의 정사(正史라 할 창녕군지에 1984년도 판에는 창녕의 가야역사를 자랑스럽게 기록하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003년도판 군지에서는 가야역사를 부정하였다…….
고 하면서 고대사 가야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의 논저를 20여 회 인용 소개하면서 ”비화가야가 낙동강 동쪽에 700여년 존속하였다“.고 주장하는 글을 연재하였다.
이철환은 <창녕신문>에 연재한 글을 모아 2012년에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비화가야역사』를 펴냈다. 그는 머리말에서,
비화가야는 ”초등학생들까지 다 알고 있는 상식 중에 상식에 속한다.”고 하면서 그 연구 결과를 책으로 엮었다고 하였다. 이철환은 군내 여러 단체에 다니면서 자신의 주장을 거듭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인지 2010년, 2012년 학술 용역에 따른 발표회를 창녕군에서 가졌다.
이철환은 가야사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바꾸도록 역설하였다. 어디를 가든 피를 토하는 비화가야 사랑 주장이 결국 건강을 해쳤든지 2012년 68세로 별세하였다.
『비밀왕국 비화가야』(2005), 『창녕 진흥왕비 신설』(2007)을 펴낸 창녕읍 출신 오석문吳錫汶(1946~ ) 향토사학자가 2012년 『비화가야史』를 도서출판 경남에서 펴냈다. 그는 "비화가야사 부정은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뺀 격"이라 주장하며 ”비화가야 연표“를 상세하게 정리 수록해 향토사학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
비화가야 유물(창녕신문 보도)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나라에서 ”가야문화권 조사연구 및 정비사업“ 과제 중 하나로 창녕의 비화가야도 포함되어 ’비화가야 역사문화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창녕이 가야 영역이 아니라고 고개를 내젓던 사람들이 비화가야가 포함되었다는 천둥소리 같은 소식에 기함을 하였겠지만 정부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라 반대나 부정적인 소리는 쑥 들어가 버렸다.
창녕의 고분군이 가야 대표적 유적으로 인정받아 2018년에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대상으로 선정되고 2023년 9월 드디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니 찬란한 비화가야 역사가 크게 드러나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최근 <창녕신문>(2026년 9월 15일자) 노창재 기자가.
<고향 떠난 비화가야 유물, 이제 창녕의 역사로 돌아와야 한다>는 기사를 취재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5~6세기 비화가야 지배층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공간이다. 이 고분군은 2023년 다른 여섯 곳의 가야고분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무덤의 형태뿐 아니라 그 안에서 나온 부장품이 가야 여러 정치체의 자율성과 문화적 공통성을 증명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정작 창녕에서 출토된 상당수 유물은 고향을 떠나 있다.……. 사실은 주요 비화가야 유물이 창녕 밖의 기관에서 관리 · 연구되고 있다.
진작 노대석의 <빛벌문화續>에서 군내 산재한 고분군과 출토품을 보아서 ”권위와 부력富力이 타 가라제국에 비하여 우월하였“다고 주장한 바를 되새겨보면서 비화가야의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여야 할 것이다.
최근 <창녕신문>(2026년 7월 28일자) 노창재 기자가 취재 보도한,
<낙동강을 지배한 나라, 비화가야> "가야의 중심은 왕이 아니라 길이었다“
기사에 의하면 ”타 가라제국에 비하여 우월하였다.’ 하는 노대석 주장을 상기시키게 한다. 노 기자는 비화가야는 대가야, 아라가야 세 나라가 만든 가야 네트워크로 세 나라가 ’경쟁했지만 공동운명체‘였으며 그 중심에 나라의 ’왕이 아니라 길이었다.’고 했다.
곧 낙동강의 동쪽 현풍에서부터 창녕 계성 영산에 이르는 그 영역 안의 해운을 좌지우지한 권력을 가진 비화가야였다고 밝혔다. 이 기사는 비화가야 역사 지평을 넓히는데 기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