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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배
Ⅰ.
동인문학지(同人文學誌)의 편집인으로부터 ‘중·고등학생을 위한 글’이라는 단서가 붙은 청탁서를 받았다. 생각 끝에 지난날 내가 어떤 선배의 도움으로 처음 문화에 눈을 뜨게 된 학창 시절을 회상하는 글이 무난할 것 같아서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한 것이다.
일제 말엽의 일이다. H형은 도쿄(東京) 시내의 공원길을 거닐면서 ‘문학의 길’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일깨워 주려고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제는 기억이 아득해서 그때 일을 잘 기억해낼 수도 없지만, 감수성이 강한 청소년 시절에는 선배의 영향력이 적지 않게 작용하는 것 같았다.
‘선배’의 뜻을 사전에서 뒤져 보니 나이나 학문과 기예가 앞서는 사람을 말하는 경우와 동문수학한 사람끼리 선·후를 따져서 앞서는 사람을 말하는 두 경우를 들고 있다.
어느 경우에나 나에게도 많은 선배가 있어서 일일이 헤아리기 어렵지만, 그중에서도 첫 번째의 경우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은, 중학교 시절에 알게 된 H형이다. 다 같이 서울에서 지내고 있을 때였다. 충남의 산골에서 태어난 내가 지방 학교를 외면하고 서울의 중학교에 다니게 된 것은, 진 외숙님의 호의 덕분이지만 촌뜨기가 서울로 진학하기는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그리 쉽지는 않았던 일이었다. ‘경성유학(京城留學)’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쓰이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전에 쓴 ‘고향유정(故鄕有情)’이라는 글에서도 적은 바 있지만 나는 공주군 정안면(公州郡 正安面)이 출생지다. 이곳의 보통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상급학교의 진학을 한 달쯤 앞두고 끓는 물에 발을 데었다. 대야 속에 발을 집어넣고 물을 기다리고 있는데, 일하는 아이가 끓는 물을 퍼다가 그대로 발등에 들이부었던 것이다. 그때 어른들은 ‘끓는 물을 퍼오는데 질펀이 대야에 발을 넣고 앉아 있는 녀석이나, 그대로 발등에 물을 들이붓는 녀석이나 똑같이 미련하기 짝이 없다’고 꾸지람하셨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들어 분 물'이 더 정확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는 ‘엎질러진 물’을 쓸어 담을 수도 있었지만, 그것으로도 깊은 상처가 바로 아무는 것은 아니었다.
읍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느라고 막바지 수험 준비에 차질이 생겼다. 발등에 들어부은 물 때문에 이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채 수험의 차비를 갖추고 허겁지겁 상경(?)을 했지만 낙방이었다. 그때는 낙방보다는 미역국을 먹었다느니 미끄러졌다느니 하는 속어를 더 많이 썼었다. 어린 시절에 나는 미역국을 한 대접 먹고 재수의 쓴 경험을 맛보게 된 것이다. 발등의 상처가 조금은 낙방의 체면을 세워 준 셈이지만, 첫 번째 ‘경성유학’의 꿈은 이렇게 해서 보기 좋게 깨지고 말았다.
서울을 그때는 경성(京城)이라고 불렀고, 지방에서 경성에 가는 것을 다들 상경(上京)이라고 말했다.
그때 경성에는 일제 침략 정치의 수괴인 조선 총독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상경(上京)’은 당치도 않은 말인데도, 지난날 우리나라의 도읍지였기 때문에 상경이 입에 발렸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모독하는 망언을 한 셈이다.
요즈음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들어간다’, 고국에 돌아오는 것을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것도 아마 지난날 일본 본토를 내지(內地)라고 부르면서 들어가네, 나오네 하던 부끄러운 입버릇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인 듯하다.
방송인들까지도 가끔 서슴없이 그런 말을 쓰고 있다. 또 며칠 전 신문 기사에는 어떤 문단의 원로도 그런 말을 쓰고 있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사실 들어가고 나오는 것은 방을 비롯해서 감옥이나 유치장, 아니면 구멍이나 굴 따위일 터인데도 말이다.
이제는 ‘저희나라’라는 말과 함께 스스로 우리를 낮추는 말들은 자취를 감추었으면 좋을 것 같다. 나 자신이 그런 부류지만 말을 바르게 쓰는 일이 쉽지 않은 것 같다.
Ⅱ.
낙방을 한 나는 모교에 돌아와서 1년간 재수를 했다. 나의 한 평생 이것이 유일한 재수 생활인데, 그때를 회상하면 지금도 낯이 뜨겁게 느껴지는 일이 있다. 재수를 부탁한답시고 졸업 후 처음으로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을 찾아뵈었다. 그런데 나는 변변하게 인사도 차릴 줄 몰라서 몹시 선생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린 기억이 난다. 낯이 뜨겁다는 것은 그 때문인데, 나는 무슨 자랑스러운 결과라도 보고하러 온 사람처럼 불쑥 “재학하러 왔습니다”라고 불퉁스럽게 말씀을 드렸던 것이다. 그때는 ‘재수’ 대신 ‘재학(再學)’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인사성을 들먹일 때면 나는 이때의 회상과 함께 앞서 말한 나의 선배 H형이 가끔 머리에 떠오른다. 그의 흠을 잡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 그지없지만, 그는 인사성이 없다고 처가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 일쑤였다. 가령 어떤 개재에 가끔 그의 집에서 처가댁에 음식을 보냈던 것 같다. 처가는 서울역에서 경의선 쪽으로 몇 정거장 거리의 교외에 있었는데, 그는 음식 꾸러미를 처가댁 마루에 펼쳐 놓기가 바쁘게 변변한 인사도 없이 먼저 꾸러미를 차지하고 앉는다는 것이다.
모음이라는 영국의 작가는 이런 경우를 빗대서 “영신(神)에게는 음식의 냄새만 피워서 콧구멍만 간지럽게 해놓고 정작 제물은 제사 꾼들이 독식한다”라고 빈정거리고 있다. H형의 경우도 처가 사람들에게는 냄새만 맡게 하고 그가 제사 꾼 노릇을 한 셈이었다. 줬다 뺏는 격이라고나 할까. 이런 경우 우리의 속언에는 ‘이마에 소나무가 난다’고 경고한다. 얼마나 얄미우면 이마에 풀도 아닌 나무가 난다고 악담하는 말이 전해 오는 것일까.
H형의 누이는 자색이 뛰어난 직장 여성이었다. 지금의 다동(茶洞) 뒷골목에서 살고 있었는데 내가 한 번 그 집으로 초대받은 일이 있었다. 어린 중학생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호화스럽게 차린 식탁이었는데, 그때도 H형은 주빈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혼자서 상을 독차지할 자세를 취했었다. 그의 자당님과 누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차던 일이 생각난다. 편모슬하에서 교동(驕童)으로 본 데 없이 자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음식 타령만 늘어놓아서 쑥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인사성이 없는 것을 따진다면 나는 더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입학시험에 낙방한 것만으로도 선생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렸는데, 공손하게 사과 한마디 못 드린 생각을 하면, 지금도 무안하기 이를 데 없다. 그때 선생님은 “겨우 그 말 밖에는 더 할 말이 없느냐?”라고 따끔하게 나무라셨지만 재학은 곧 허락을 해 주셨다.
지금 기억으로는 그 자리에서 재학을 승낙하신 것 같은데 절차가 있는 일이어서 그건 아마 나의 착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선생님의 훈계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다음 해에는 나는 천신만고 끝에 동경하던 백선모(白線帽)를 쓸 수가 있었다. 그때는 상급학교를 흔히 ‘높은 학교’ 니 ‘윗 학교’니 하는 말로 부르고 있었으며 대개 흰 테 두른 모자를 썼었다. 지금도 가끔 높은 학교라는 말과 백선모에 대한 향수를 잊을 수가 없다.
중학교 2학년 때에 H형을 만난 것 같은데 기억이 분명치 않다. 그는 인척의 매형이 되는 사람인데 일본에 유학 중인 대학생이라는 소개를 받았다. 중학생도 귀하게 여기던 시절에 소모사 모직물인 세루 양복에 사각모(四角帽)를 쓰고 있던 그의 해맑은 첫인상은 나를 압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첫인상과는 달리 붙임성이 있어서 나와는 쉽게 가까워졌다. 방학 때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학기 도중에도 그는 수시로 경성에 나타나서 나를 만나러 오고 또 그의 처가로 불러내기도 했다. 서울을 그때는 경성이라고 불렀던 것은 앞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그래서 때로는 경성(京城)과 함경북도의 경성(鏡城)을 혼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차차 지내는 동안에 눈치챈 일이지만 H형은 경성 거리를 다닐 때는 대개 모자를 벗어서 손에 들거나 아니면 아예 호주머니에 구겨 넣고 다녔다. 그런데 시골인 우리 고향에 오면 때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짓궂게 모자를 잘 쓰고 다녔던 것이다.
중학생과 대학생의 수준 차이라고 생각해서일까, 나에게는 그의 짓거리가 모두 돋보였다. 모자 벗어들고 다니는 것조차도.
나도 그의 흉내를 낸다고 가끔 모자를 벗어들고 다녔는데 한번은 동행하시던 아버님께서 크게 꾸중하셨다. 가짜 대학생이나 모자를 벗어들고 다니는 법이라고 언중유골의 꾸중을 하셨던 것이다. H형을 겨냥한 꾸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H형의 필적은 한 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쓴다기보다는 그린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터였다. 그는 사상관계 피의자로 유치장에서 손가락의 주리를 틀려서 글씨를 못 쓴다는 알쏭달쏭한 변명을 했다. 그리하여 글씨 쓸 일이 있으면 자주 나에게 대필을 시켰다. 내가 보기에는 그의 손가락은 여느 사람의 그것과 별로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았는데도.
그 당시 ‘사상’이라면 두말할 것 없이 ‘항일(抗日)’을 뜻하는 말이었다. 나의 글씨도 별 수는 없었지만 대필을 별로 귀찮게 여기지는 않았다. 대학생의 대필이어서 도리어 자랑스럽게까지 느꼈던 것이다.
그는 가끔 영어로 된 원서를 끼고 다녀서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읽는 일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꼭 한 번 그가 영어 단어를 쓴 일이 기억이 나는데 그것은 ‘animal’이라는 낱말이었다.
그가 어느 해의 여름방학을 나와 함께 고향 집에서 지내고 있을 때였다. 밤중에 불쑥 이 마을 뒷산에도 ‘아니마루’가 있느냐고 물어 온 것이다. 나는 그 ‘아니마루’라는 낱말을 땅띔을 못 해서 어리둥절했다. 그는 ‘짐승’ 말이라고 부연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생이면 다 아는 영어 단어를 모르느냐면서 큰 소리를 쳤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우리는 ‘짐승’의 발음은 ‘아니마루’가 아니라 ‘애니멀’로 배웠다고 반박해 줬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어디선가 아마 일본인의 서투른 발음을 익혔는지도 모른다. 그가 진실성이 부족하고 학적도 애매하다고 느끼기 시작했지만 교분을 끊지는 않았다. 나에게 큰 마
음의 상처나 물질적인 손상을 입히지 않는 이상, 한 번 사귄 사람과 모지락스럽게 관계를 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바닥이 거의 다 드러난 것 같아서 흥미를 잃어갈 무렵이었다. 어느 겨울밤에 그의 처가 댁에서 H형을 다시 만난 것이다. 온 가족이 한 방에 모여서 잡담을 하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항상 말수가 적던 H형이 그날따라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순색으로 「허생전」의 이야기 자루를 슬슬 풀기 시작했다. 성우 뺨치는 화술과 능숙한 연시(演示)를 섞어가며 말이다. 실제로 이제까지 몰랐던 그의 다른 면이 엿보여서 신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어떻게 저런 재주를 그토록 오랫동안 숨겨둘 수가 있었을까 하고.
……허생이 곱단이와 사랑에 빠져서 밤마다 밀회를 한다. 이웃 사람들이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허생이 뼈다귀를 끌어안고 복에 겨운 양 달콤한 말을 속삭인다. 다음날 이웃 사람들이 허생에게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유령이라고 귀띔을 주지만 허생은 귀담아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끝내는 곱단이와 함께 꾸민 신방에서 정사(情死)를 한다. 허생이 신방으로 생각했던 곳은 곱단이가 묻혀 있는 어느 후미진 무덤이었다…….
간추리면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밖은 칡흙같은 어둠이 깔려 있어 H형의 모노드라마는 오싹 소름이 끼치게 했다. 박진감이라고나 할까. 입담과 연시가 너무 실감이 나서 다들 식은땀을 흘리며 이야기에 열중하던 기억이 난다.
그가 속해 있는 대학생 서클에서는 담력을 기르기 위해서 가끔 후미진 곳에 모여서 이런 괴담들을 즐긴다고 했다. 언뜻 H형의 실체가 엿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제까지 이 사람을 확실한 근거도 없이 가짜 대학생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고.
Ⅲ.
이야기가 장황하게 빗나가서 정작 그가 들려준 문학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내가 중학교 5학년 때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간 일이 있었다. 말이 수학여행이지 거의 신궁(神宮)이나 신사(神社)를 돌고 오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때 H형은 도쿄(東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도쿄의 변두리 어떤 직장에서 격일제로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곳에서 며칠 체류하는 동안 나는 일행과 떨어져서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우리는 공원의 한적한 길을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이국땅에서 둘이 호젓하게 만난 것이다. 그는 나에게 ‘문학의 길’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납득시키려고 애를 썼으며, 우리의 작품도 여러 권 추천해 주었다. 그는 학창 시절에는 요령 위주의 ‘점수 벌레’ 보다는 폭넓게 인생의 토대를 닦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간곡하게 타일러 주었다. ‘문학’이 바로 그런 공부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요즘처럼 대학입시에 관심이 많은 시대에 그런 말을 했었다면 당치도 않은 수작이라고 학부모님의 힐책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그때는 내가 아직 대학 진학을 확실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때여서 H형의 충고는 그렇게 무리한 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며칠 동안의 도쿄 체류 중에 나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그동안에도 도서관을 자주 드나들었지만 이때에 어렴풋이 ‘문학’이라는 이름의 딴 세상에 대해서 눈이 트인 것이고, 어떻게 보면 학업에는 열이 식은 문제 학생이 되어서 돌아온 셈이다.
하여간 나는 학교의 모범생보다는 ‘문학의 길’에 더 매력을 느끼며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것이다.
그때 H형이 추천해 준 작품 중에는 이태준의 ‘제2의 운명’을 필두로 ‘상록수’, ‘영원한 미소’, ‘마도의 향불’, ‘먼동이 틀 때’ 등 주로 우리나라 인기 작가들의 작품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제2의 운명’을 강력하게 추천했기 때문에 나는 학교로 돌아오는 맡으로 도서관에 들렀다. 다행히 내가 다니던 학교는 당시로서는 극히 드물게 단독 건물의 아담한 도서관을 갖추고 있었고, 장서도 알찼던 것으로 기억된다. H형이 추천한 책들을 차례로 찾아 읽기 시작했다.
도서관의 대출대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잠언(箴言)이 있지만 이곳에서 보낸 세월을 나는 결코 무의미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몇 차례 선생님들의 눈총을 맞았던 일만 뺀다면 매우 흡족하고 유쾌한 시절이었다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첫 번째로 읽은 ‘제2의 운명’은 나를 말할 수 없이 감동을 시켰다. 지금까지도 그때의 감동은 별로 줄어들지 않은 것 같다. 모 대학의 학장과 수필가 K씨, 그리고 해방 뒤에 도쿄대학(東京大學)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는 김모 박사 등이 그 책에 관해서 전적으로 나와 의견을 같이 해 주었다. 가장 감명 깊었던 책이라는 점에서. 그 작품의 주인공 ‘윤필재’는 젊은 날의 나의 가슴 속을 가득ㅠ채운 우상 같은 존재였다. 해금이 풀리면 어딘가에서 빌려서 꼭 한번 다시 읽어보고 싶다.
변변하게 문학 활동 한 번 못하면서 ‘문학’을 들먹인 것이 겸연쩍기 이를 데 없지만, 그래도 그나마 내가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H형에게 영향을 받은 바가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목에서 대학에 적을 두고 안 두고는 큰 문제가 아닐는지 모른다. 원서를 읽고 못 읽는 것도 그렇고,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얼마나 진실하게 인간성을 탐구하며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가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H형과는 해방을 전후에서 소식이 끊겼다. 오래전에 경기도 어딘가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는 소식을 어렴풋이 들었을 뿐이다. 인사성 없던 사람끼리 이제 늘그막에 한 번 또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며 어느 한적한 공원길을 거닐면서 문학을 들먹이며 다시 한 번 노변담화(路邊談話)나 즐기고 싶다. 그리고 그의 십팔번인 「허생전」도 한 번 더 들어보고 싶고.
(公州文學, 198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