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이주실”
교보생명이 발행한 “다솜이 친구”7월호에 게재된 감동적인
스토리를 동문님들께 소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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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는 기쁨으로 암 극복한 배우 이주실.”
배우 이주실(64) 암을 이겨낸 배우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암을 이겨 냈는지
그 자세한 내막은 별로 알려진바 없다.
그가 말하는 이 기적의 치료약은“나눔의 기쁨”
결혼전인 60년대부터 고아등 어려운 아이들을 돌 봐 온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상처받은 아이들과 어울리며
“봉사중독”에 빠져 사는 그의 인생을 취재했다.(김광숙 자유기고가)
춤추며 노래하는 뮤지컬도 힘들지 않아.
“10년 만에 처음 무대에 오르는데 아주 좋내요“
충무 아트 홀에서 공연중인 뮤지컬 ‘스핏파이어 그릴‘ 에 공연을 마치고 나타난
배우 이주실은 이렇게 말 했다. 그의 무대 공연은 지난 97년 이후 10년만이다.
게다가 이번 무대는 뮤지컬, 춤과 노래, 연기 세가지를 모두 소화해야 하는
뮤지컬은 환갑이 지난 노배우가 소화하기엔 벅차다. 게다가 그는 암 후유증으로
한쪽 눈과 귀가 제 기능을 하지도 못한다.
그가 뮤지컬 무대에 오른 이유는 ‘도전과 봉사공부’ 두 가지 때문이다.
그에 나이 올해 64세 뮤지컬 무대에 주연으로 케스팅 되기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의 인생전부라고 해도 무방한 봉사활동에 뮤지컬 무대경험은 큰 도움이 된다.
이주실은 오래전부터 소년원(지금은 특성화 고교로 이름이 바뀌었다.)원생등
상처받은 아이들을 역할극등 “연기”를 통해 마음을 치료하는 일을 계속 해 왔다.
연기에 노래와 춤이 합쳐진 뮤지컬이 아이들의 마음문을 열기엔 최고라는 생각에
몸이 힘들더라도 “배우려는 자세”로 도전 하게 된 것이다.
전쟁고아와 함께 자란 나에게 봉사는 “생활”
그의 봉사 활동 이력은 이미 40여년이 넘었다.
그에게 봉사 활동을 시작 한 계기가 무엇이냐고 묻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짧게 말 했다.
“제 나이 또래는 전쟁을 겪었습니다.
어린시절 미군이 주는 초콜렛과 분유를 핥아 먹으며
허기를 때울 정도로 힘겹게 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남을 돕지 않으면 결국
내가 불행 해 진다는 것을 피부로 체험 했습니다.“
그가 기억하는 첫 봉사 활동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당시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점심도시락을 싸 가야 했다.
그러나 반 아이들 절반 이상이 도시락을 준비 해 오지 못 했다.
그때 이주실은 짝꿍이었던 수양이의 도시락을 6학년
졸업할 때 까지 싸 주었다.
“제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었던 분이 어머니 입니다.
어머니는 3년동안 제게 도시락 2개를 싸 주시면서 그 이유를 묻지 않았어요.
사정이 어려운 친구와 함께 점심을 나누고 싶은 제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그렇게 우정을 나누었던 수양이는 결국 가난을 원수 갚는다며
돈을벌겠다고 동두천 기지촌으로 흘러들어가 미군과 결혼 한 뒤
알콜 중독자인 남편에게 맞아 숨지고 말았다.
그 뒤로 이주실에겐 동두천기지촌을 비롯해
소록도 나병환자들, 고아원, 빈민촌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주업”이 되었다.
부모에게 상처받은 아이들은 “엄마”라는 말도 못 해.
그의 봉사 활동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암 진단을 받던 93년 그는
“전부터 계속 해 오던 것인데 암 수술 받은 뒤에도 계속 봉사 활동을 하니까
그게 신기했던 모양이에요” 라고 쉽게 말한다.
그는 특히 소년원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았다.
이들은 대부분 부모에게 상처를 받아 나쁜길로 빠진 경우,
평범한 부모 밑에서 사랑받고 살았다면
훌륭하게 성장했을 아이들이라 가슴이 아파 온다.
“별명이 “봉다리”인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아버지의 제혼 등으로 이리저리 얼킨 어머니가 다섯이었어요.
그래서 평소 “엄마”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할 정도 였습니다
이 아이가 치료하기 위해 상황극을 구성 했다.
아이의 대상은 “엄마”라고 부르며 흐느껴 우는 것
그러나 그 한마디 대사를 말 하지 못 했다.
“저는 아이가 스스로 ”엄마“라고 말하며 마음을 열 때 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무대에서 “엄마”라고 부르며
통곡을 하는 것을 보며 가슴이 미여 졌습니다.“
“봉다리”는 그 뒤 마음의 문을 열고 컴퓨터회사에 취직 해
성실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뒤 늦게 시작한 “봉사공부” 어느새 예술치료 박사과정.
“한 겨레 학교” 아이들도 자식들이나 다름없이 사랑을 쏟고 있다.
“한 겨레 학교” 탈북한 아이들이 모인 곳.
이들은 목숨을 건 탈북과정에서 수 많은 폭력들을 접하며 마음의 상처를 받아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부모와 함께 탈북한 아이들은 그래도 사정이 낫다.
혼자서 탈북 한 아이들은 누구에게도 마음을 둘 곳이 없어 더욱 굳게 마음을 닫는다.
깊이 상처받은 아이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필수다.
그는 2002년 꽃동네 현도사회 복지대학에 늦깎이 새내기로 입학 한 뒤 지금은
원광대학에서 예술치료박사 과정을 밟을 정도로 “봉사”공부에도 열심이다.
돈 없어도 세상은 나눌 수 있는 것 천지.
배우 이주실의 전 재산은 17평 다세대 주택과 낡은 승용차가 전부다.
그러나 노후 걱정은 하지 않는다.
자신은 이려운 이웃들이 있는 시설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누는 것은 마음이지 돈이 아니에요.
어떤 중국집 사장님은 매달 자장면 봉사를 합니다.
어떤 분은 미용봉사를 하고, 기술이 없는 사람은
노인이나 아이들 목욕을 시키고 청소를 합니다.
노인은 더 불편한 노인을 돕는게 나눔의 길이라고 생각해요.“
배우 이주실은 “봉사”라는 말이 지금도 불편하다.
남을 돕는 것은 봉사가 아니고 상식이다.
“저는 세상에 에너지가 돌고 돈다고 생각 합니다.
실제로 남을 도울 때 마음속에 충만 해 지는 깊은 에너지는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그 기쁨을 알아가다 보면 나눔의 중독이 되어 그래서 결국
그 마음속에 넘쳐나는 행복 에너지가 암에 걸린 저를 살린 것 이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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