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강요』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나왔습니다. 《1536년(초판): 라틴어/ 1539년(제2판): 라틴어/ 1541년(프랑스어 초판): 1539년 라틴어판을 칼빈이 직접 프랑스어로 번역/ 1559년(최종 결정판 - 라틴어): 우리가 흔히 접하는 4권 80장 체제의 완성본/ 1560년(최종 결정판 - 프랑스어): 1559년 라틴어 최종판을 프랑스어로 번역.// 》 구분선 아래에 타붙한 내용은 『기독교 강요 초판(1536년)』의 집필 동기에 관한 것인데요. 『기독교 강요 초판(1536년)』의 원래 의도는 ‘교리문답서’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이 더 급진적인 복음주의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변증서'로 저술되었습니다. 그 정황과 내용을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 교리문답서인가 혹은 변증서인가?
1. 원래의 의도는 교리문답서
칼빈이 회심한 후 새로운 성경연구에 착수했을 때 즉시 그가 직면한 임무는 참된 신앙을 갈구하는 자들을 지도해야 하는 것이었다. 참 교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별반 경험없는 자신에게로 모여들자. 그는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에서도 나를 조용히 있도록 두지 않으신다"고 결론지었다.
프랑스에서 행한 그의 초기 설교에 대해서는 자료의 불충분 때문에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없으나, 그의 마음이 훌륭한 교리문답서를 작성해야 할 필요성에 쏠려 있었음은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1535년과 1536년 초기 사이 바젤에서의 짧은 체류 기간에 자신의 신학적 연구의 첫 결실을 저술했다. 책의 긴 부제가 그 내력을 나타내 준다: “기독교 강요, 구원론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제반 사항과 경건의 개요를 거의 망라하였다. 경건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독할 가치가 충분한 저서이다…"
칼빈이 고안한 교리문답서 중 어느 만큼을 문서화했는가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일치된 견해가 없으며, 또 이 문제는 여기서의 당면문제가 아니다.
프랑스의 개혁주의적 전통에서 교리문답서 저술가는 칼빈 이전에는 드물었다. 루터의 책을 번역한 것 외에 불어로 된 것으로는 기욤 파렐(Guillaume Farel)과 프랑수아 랑베르(Francis Lambert)의 개요서들이 있었다. 파렐의 저서는 바젤의 개혁주의자 오이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의 권유로 1525 년 바젤에서 처음 발행된 후 인쇄를 거듭했다. 두 번째인 랑베르의 책은 1529년에 저술되었다.
그러나 파렐의 저서가 불어판 개혁신앙 문답서의 효시이며, 칼빈의 신학적 입장이나 관심을 동일하게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저작은 문체나 구성이나 내용 어느 것에서도 파렐의 것과 유사한 점이 없다.
칼빈은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는 서한의 첫머리에서 자신의 저술 의도를 분명하게 밝힌 바 있다.
| 오로지 본인의 목적은 종교적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확실한 기본원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고 초보적인 교리의 형태로 … |
이것이 칼빈이 교리문답서를 만들려던 의도였다. 그가 박해받는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위하여 외국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려고 당시 공용어인 라틴어로 썼기는 했으나, 분명히 동포들에게 적합하도록 불어판을 속간할 작정이었다. 현존하는 기독교 강요의 첫 불어판은 1541년에 출판되었다. 이것은 1539년의 라틴어 제2판을 번역한 것으로서, 제네바에서의 목회 경힘을 살려서 저술한 질의·응답식의 교리문답서였다.
2. 기독교 강요가 변증서로 되다
그러나 간단한 교리문답서를 만들려던 계획은 뜻대로 될 수 없었다. 의도를 변경시킨 학살사건의 중심에는 매우 기독교적인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시기에는 기존의 교회 내에서 정화운동을 하려는 온건한 노력에서부터 사회의 전 구조를 공격하는 급진적인 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운동이 분출되었다. 그러나 온건과 과격을 엄밀히 분류하기란 사실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프랑수아 1세는 당시 프랑스에서 발흥하고 있었던 모든 혁신적인 경향이 국가와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적인 것이라고 단정하는 소르본느 대학측의 견해에 동의했다. 이단을 숙청함으로써 자국 내에 거주하는 독일인 개신교도들에 대한 처리 문제로 외교상의 난처함에 봉착하더라도, 정책적으로 모든 문제를 국가의 안전과 연관된 문제로 상정하고, 프랑스의 복음주의자들과 외국의 복음주의자들을 격리시키고자 했다.
이런 방안의 지지자들은 프랑스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을 재세례파로 몰아 부치거나, 무식한 오합지졸로 보았다. 또는 그들의 운동을 국가의 내적 질서에 대항하는 무정부적 행동과 반란으로 정죄했는데, 이 관점은 프랑수아 1세가 독일 개신교도 군주에게 보낸 각서에 잘 나타나 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독일 개신교도들과는 달리 재세례파와 똑같아서 선동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이 각서는 독일인들의 염려나 불안을 진정시키기보다는, 프랑스의 온전한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급진적 개혁가들로부터 신학적·정치적으로 자진 이탈하여 여타의 동료들과 구분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면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은 더 급진적인 복음주의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칼빈은 두 가지 형태로 응답하였다. 먼저 그는 1534-5년에 써서 1542년에 출간한 「영혼수면설」(Psychopannychia)에서 가장 위험스런 국면의 신학적 문제를 다루었다. 그런 다음에 더욱 포괄적인 저술 작업을 하여 1536년에 「기독교 강요」를 펴냈다. 이 두 저서를 차례로 살펴보자.
칼빈은 자신의 첫 신학적 논문인 「영혼수면설」의 주제로서, 죽음으로 인해 야기되는 영혼과 육체의 문제를 택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죽음과 마지막 부활 사이에 영혼은 잠들어 있거나 죽는다고 하는 교리의 신봉자들이 많았다. 따라서 칼빈은 이 잘못된 교리로부터 동포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 프랑스의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은 이 이단적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톨릭교도들에게 확증시키기 위하여 이 교리를 반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같은 가톨릭 교리를 거부하는 것이 압제적인 면죄부 제도를 극복하는 열쇠이듯이, 영혼불멸설을 표방하는 것은 영혼사멸설을 주장하는 광신적 경향으로부터 복음주의자들을 구별짓는 필수요건이었다. 그리고 칼빈은 영혼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이 영혼불멸 교리의 신학적 전제로 삼았다. 하나님께서 항존하시듯이, 그 형상인 영혼 역시 잠시라도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혼수면설」 자체는 몇 단계를 거쳐서 저술되었다. 초고는 1534년 오를레앙에서 익명의 친구에게 헌정한다는 서문을 담고 있다. 이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글이 교회의 통일성과 사랑을 교란시킨다는 오해를 받게 될 것임을 내다보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통일이 있으며, 사랑을 유지하는 관건은 신앙을 신성하고 순전하게 보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해에 그는 초고를 복사하여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개혁주의자 볼프강 카피토(Wolfgang Capito)에게 보내어 출판 여부를 문의했다. 1534년 말에 칼빈에게 보낸 답장에서 카피토는, 종교분쟁이 들끓고 있는 때인 만큼 이 논문은 접어두고 건설적인 성경 주석을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겠다고 제안했다. 칼빈은 「영혼수면설」에 대한 카피토의 충고를 받아들였다(기독교 강요를 완성한 후 1535년 바젤에서 이 논문을 개정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칼빈은 자신과 동포들이 프랑스의 정치 질서를 파괴하고자 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문인 프랑스 왕에게 보내는 헌사에서, 원래는 교리문답서를 작성할 의도였음을 시사한 후, 그는 제2의 목적을 추가하게 된 까닭을 직접적이고도 열정적으로 피력했다. 여기에서 그는 사악한 무리들의 횡포에 직면하여 그들에게 건전한 교리의 본질을 가르쳐 교훈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시편 주석에서도 더욱 날카로운 어조로 동일한 내용을 서술했다.
그러므로 칼빈으로 하여금 그 유명한 기독교 강요를 쓰게 한 동기는 두 가지였다. 즉 신앙의 형제들을 위한 교리문답서의 필요성과 박해를 중단하도록 하기 위해 형제들의 실상을 왕에게 탄원해 알려야 하는 필요성이 그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목적 때문에 칼빈은 이중의 신학적 대응자세를 취했다. 제도화된 로마 가톨릭을 거부함과 동시에 극단적 분파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칼빈의 향후 신학의 행로가 결정되었다. 그것은 극좌와 극우 사이의 중도를 견지하는 것으로서, 현명한 절충이 아니라 독자적인 성경 연구에 근거한 확신이었다. 이후 그의 신학체계상의 발전은 이 초기의 경향을 확대하고 완성해가는 것이었다.
존 칼빈, 양낙흥 역, 『기독교 강요(초판)』(크리스천다이제스트), pp.17~19.
첫댓글 번역 양낙흥
역자 양낙흥은 서울대학교(영문과)와 고려신학대학원(신학)에서 공부했고, 미국 예일대학에서 교회사로 신학 석사, 풀러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운리학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현재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수로, 또 서울 영동교회 협동목사로 섬기고 있다. 그는 저서로 『개혁주의 사회윤리와 한국장로교회』, 『조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이 있으며, 역서로 『기독교 강요(초판)』, 『칼빈주의 역사와 성격』등 다수가 있다.
국내 신학계에서 학부 학벌이 좋은 분 같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저작 동기
칼뱅은 기독교 강요를 통하여 단순히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요약하고 교리화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의 저작의 동기 속에서는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었다. 이런 그의 목적은 그 삶의 정황에서 나왔다. 장 칼뱅이 보기에 그의 고향 프랑스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모든 사회가 어두워져서 진리를 떠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했다고 여겨졌으므로, 장 칼뱅은 참된 경건의 삶을 살지 못한 자들을 돕기 위하여 이 책을 통하여 자신의 사랑의 외침이 들어 있다. 이 작품에서 칼뱅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강조하면서도 하나님과 인간 자신을 아는 것이 참된 지혜이라고 하며, 참된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고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회와 국가를 변혁시키기를 바라는 강한 열정을 보여준다.
위키 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8%B0%EB%8F%85%EA%B5%90_%EA%B0%95%EC%9A%94
이미 어느 정도 나왔던 내용이군요. 잘 알겠습니다.
칼뱅은 1536년 ≪기독교 강요≫ 초판을 발행한 후 1539년, 1543년, 1550년의 개정판에 이어 1559년 최종판을 출판했다. 칼뱅이 ≪기독교 강요≫ 초판을 출판한 목적은 교회 개혁에 동참한 신앙인들에게 기독교 교리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판에서는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성례를 다루었고, 다섯 가지 거짓 성례전, 기독교인의 자유,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첨가했다. 초대 교회부터 초신자들에게 세례를 받도록 신앙 교육을 시킬 때 성도들이 믿어야 할 내용으로 사도신경을, 신앙생활의 표준으로 십계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표준으로 주기도문을, 교회의 표준적인 성례로 세례와 성찬을 가르쳤다. 칼뱅은 이러한 내용을 기본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로마 가톨릭이 시행했던 일곱 성례 가운데 세례와 성찬을 제외한 다섯 가지 성례전이 왜 잘못되었는지 가르쳤고, 기독교인들이 믿음으로 구원받아 기독교인의 자유를 얻었는데, 이 자유가 교회 및 국가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행사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네이버 지식 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730978&cid=60608&categoryId=60608
기독교강요는 일반 사회의 국어사전에조차 등재될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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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基督敎綱要
책명 1536년에 프랑스의 종교 개혁자 칼뱅이 지은 신학서. 십계명ㆍ사도 신경ㆍ주기도문 따위의 기독교 교리를 해설하고, 종교 개혁의 근본 사상인 복음주의를 제창하여 신의 주권은 절대적이며 신의 의사가 세계를 창조한다고 하였다. 1559년에 결정판이 간행되었다.
네이버 국어사전
칼빈이 신학자로서 첫발을 내딛으며 '영혼의 불멸성'을 변호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성경적 진리를 왜곡하는 이단적 사상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려는 그의 목회적 책임감과 복음주의의 정체성을 수호하려는 단호한 의지가 돋보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혼의 신비로운 상태를 명확히 정립하여,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지막 부활에 대한 소망을 더욱 굳건하게 해주는 귀한 통찰이라 생각합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좋은 내용 알차게 잘 써졌네요. 기독교강요가 기독교 교리 문답의 성격을 띤 변증서로 나오게 된 배경을 소상히 역사적 관점에서 알기 쉽게 알려주어 좋습니다. 로마 가톨릭도 거부하고 극단적 분파도 배제하는, 극우와 극좌 사이의 중도적 신학 노선을 걷게 된 칼빈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 주는 것 같습니다.
네, 적절한 분별이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영혼 불멸의 존재로서 그 영혼이 잠을 자거나 멸실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으로 증명하려 했다는 것도 잘 이해가 됩니다.
재세례파의 영혼수면설이 안식교와 여호와증인의 영혼 명절설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영혼이 자거나 죽다니? 천당 가기는 어려운 자들입니다.
두 분 말씀에 공감합니다.
단순한 신학 서적인 줄 알았는데, 박해받는 성도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결백을 증명하려 했던 칼빈의 절박함과 목양적 마음이 느껴져 뭉클합니다.
동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국왕에게 변증서를 올리며 교육과 변론을 동시에 수행한 그 치열한 시대적 고민이 초판의 문장마다 녹아있는 것 같네요.
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을 넘어, 오해받는 신앙을 당당히 수호하려 했던 『기독교 강요』의 탄생 배경을 알고 나니 책의 무게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좋은 댓글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