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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평구 선생 2주기 기념강연
소명으로 사신 일생과 직업에 대한 권면
임 세 영(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수)
제가 노 평구 선생의 성서연구지를 처음 접한 것은 1973년말입니다. 대전 문화동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독립전도를 하신 홍응표 선생이 성서연구 독자였는데 그댁에서 스가모도 선생의 승천 기념호로 간행된 성서연구를 처음 읽었습니다. 당시 대학 1학년생으로 기독교 신앙에 막 입문하였던 제게 성서연구는 살아있는 문자처럼 마음을 끌어당겼습니다. 그 이듬해 순창 복흥 초등학교에서 개최된 하계성서집회에서 선생의 카리스마가 넘치는 모습을 처음 뵈었습니다. 그후 76년경부터 선생께서 대전에서 한달에 한번씩 내려와 성서 강연을 하셨는데 저도 말석에 참석하였습니다. 1977년부터 서울 대학원에 입학한 다음 79년 군입대시까지 YMCA 집회에 출석하여, 선생의 성서 강의를 듣고 단테 신곡, 밀턴의 실낙원 등 고전 독회 및 희랍어, 히브리어 공부반에도 참석하였습니다.
당시 선생의 강연과 독서모임 등은 제게 기독교 신앙의 훈련장이었습니다. 집회 준비를 위해서 아침 식사도 거르시고 일찍 나오셔서 집회장소를 정리하시는 것을 돕고, 마치 불을 뿜으시는 것과 같은 열정적인 강의를 듣고, 이어지는 독서모임에서 고전의 심오한 세계를 탐험해 나가는 것은 대학원 공부 이상의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선생의 높이 충전된 영적 에너지를 나누어 받으며 일생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선생은 초지일관 한 길을 걸으신 분답게 기회만 있으면 높은 안목을 가지기 위해 고전을 읽고, 성서를 공부할 것을 역설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선생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전력을 다하여 그 길을 달리신 분이었습니다. 성서연구 간행이라고 하는 생애 사업을 경영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선생을 기념하는 이 자리에서 저는 선생의 ‘소명(召命)’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저의 전공인 직업교육과 관련되기도 하고 개신교 신앙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제가 직업교육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크게 유감으로 생각하고 반성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육의 영역에서 성찰을 통한 의미와 지혜의 발견이라는 주제가 설 땅이 없어지고, 소명으로서의 직업, 즉 Calling을 자각하고 전적으로 맡은 임무에 전념토록 하는 교육이 도외시되고 있다는 문제입니다. 인격의 가장 중심에 시공을 초월하는 영적 실재, 우주 삼라만상과의 관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인데, 이를 소홀히 함으로써 그야말로 얼빠진 교육이 된 것이 아닐까요? 물론 소명을 받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불신의 세상에서 소명적 인생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가 천만이 넘는다는 나라에서 이 문제를 논의의 대상에서조차 제외한다는 것은 곤란합니다. 선생은 제가 직업교육을 공부한다는 것을 아시고 가까이계신 교육학자들께 조언을 얻어와 소명을 일깨우는 직업교육에 관심이 있었던 독일의 케르쉔슈타이너(Kerschensteiner)를 공부해 볼 것을 권유하시기도 했습니다만 제 태만으로 지금까지 이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강의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주제인가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노선생님 자신에게 이것이 매우 심각한 주제였던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노선생님의 전집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는 선생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명령에 절대 순종하신 삶이라는 것입니다.
소명을 자각하고 끝까지 그 좁고 험한 길을 가는 사람은 극소수이기도 하려니와 하나님만을 상대로 조용히 보이지 않게 그 길을 가기 때문에 우리 눈에 뜨이지도 않습니다. 부, 명예, 권력이 보장되는 특정 직업에는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리고 정작 개인적, 사회적, 민족적으로 필요한 일에는 사람이 없는 현실에서 인간은 기능인이 되고 잘아지고 좀스러워집니다. 원대한 비전과 꿈을 꾸고 가꾸기보다는 현실의 이해득실 앞에 타협하고 꾀를 부리고 잘아져 땅에 붙게 됩니다. 그래서 땅을 박차고 벗어나 하나님과의 수직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며 가시밭처럼 험하고 모진 자신의 길을 걸어가신 선생의 일생이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유산입니다.
선생은 진정한 의미의 직업, 즉 소명을 발견하고 그 길을 가도록 젊은이를 이끄신 교육자였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당신께서 그렇게 자기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남달리 무엇이 값어치가 있는 것이고 무엇이 무익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입니다. 오늘은 먼저 선생이 받으신 소명은 무엇이었으며 그 소명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살펴보고 진로에 대해 번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앞길을 분별하고 나아가도록 권면하셨는지를 선생이 남기신 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약성서에서도 자주 인용된 이사야서 성귀중에는 “너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의 소란 가운데 살고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 형태와 신호로 전달되지만, 그 신호를 감지하고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세상의 소리가 달콤하고 그럴 듯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호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귀가 막힌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미세한 음성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미세한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소명을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도덕적 감각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노선생께서 생애 사업을 정하고 일을 시작하실 무렵 어떻게 도덕적 양심의 감각을 예리하게 가다듬으셨는지는 성서연구 창간 초기의 글들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성서연구 창간사에서 선생은 “성서만이 누적된 죄과로 땅바닥에 떨어진 민족의 도덕력을 다시 새롭게 살릴 수 있다”며 “성서위에 사랑하는 조선을 세우고자 작은 애국적 심지로서 이 잡지를 발간한다”고 천명하였습니다. 배재중학시절부터 민족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고민한 선생님께서 김교신 선생을 만나고, 일본에 가서 스가모도 선생 집회에서 성서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혈기에 의한 투쟁이나 빈민구호 운동과 같은 사회사업으로는 민족의 독립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각성하셨습니다. 그럼 무엇으로 가능할까? 선생께서 들은 위로부터의 미세한 음성은 ‘성서연구’였습니다. 이것은 잡지 발간 후에 겪게 되는 몇 가지 사건을 통해 분명해져 갔습니다.
선생은 1948년 4월 큰 화재를 당했습니다. 이 화재에서 일본에서 공부하며 모아두셨던 집회 참가기 및 강의 노트, 성서연구를 위해 정성껏 모으고 정리해 두었던 자료들과 소중한 참고서를 모두 잃으셨고, 본인은 다리 골절상을 입으시고 몸져누우셔야 했습니다. 이 사건은 추후 선생의 성서공부 방향에도 적잖이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 화재를 통해 선생이 얻으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신호였습니다.
화재의 원인
4월 20일 화재를 당했다. 아래층 간장공장에서 작업중 기름을 끓이다가 일꾼의 부주의로 발화된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은 화재의 화학적 설명은 되어도 나의 신앙적 양심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신의 자녀다. 그는 나의 머리털까지도 세신다. .. 만상은 그가 인류를 교육하는 교재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자연현상의 배후에 신의 성의지(聖意志)를 읽지 않으면 안 된다. 화재, 이는 나의 죄악에 대한 그의 분노요 심판이요 징계, 이것이 나의 신앙적 양심의 직감이었다. (...) 너희가 끝끝내 죄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이제 나의 분노가 너희 모든 집을 터도 안 남게 불사르고 말 것이다 라는 엄숙한 선언이었다. (성서연구, 1948. 6, 전집 제1권 p. 55)
같은 해 12월 선생은 또 한번의 심각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나이가 어린 아들의 실종사건입니다. 당시는 사회적 치안질서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우리가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도 보다시피 어린아이의 실종을 격은 가족들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아이의 실종을 처음 당한 부모는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큰 충격을 받지만 실종된 아이가 다시 돌아오면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리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아이의 실종을 일상의 일로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적극적 개입이며 강력한 메시지의 발신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선생의 남다른 영적 감각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이 ‘고난의 프리즘을 통하여’ 선생은 하나님을 처음 쳐다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욥에게 그랬던 것처럼 고난이 하나님과 인간 노평구 사이의 소통방식이었습니다.
고난의 프리즘을 통하여
어린 자식의 실종, 그것은 실로 다른 모든 부모에게나 마찬가지로 나에게 있어서도 자기 자신의 죽음보다도 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 나는 끌리고 몰려 드디어 자식을 잃은 살인자로서 오늘까지의 모든 죄책을 지고 그의 심판대 위에 섰다. 그 순간 나는 죄의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엄숙한 얼굴을 처음 쳐다봤다. 오늘까지 남의 말로 귀로만 듣고 있던 하나님을 고난의 사도 욥과 같이 처음 이 나의 눈과 귀로. 그러나 내가 나의 죄를 자복하는 순간 그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사랑으로써 그의 품에 나를 안아 주시는 자애의 아버지였다. 그렇지 않으면 실로 나는 그를 대면하여 살지 못하였을 것이다. (...)
하나님은 다음날 저녁 문간으로 나의 자식을 돌려보내시고 떠나셨다. 그 순간 또 나는 아브라함같이 그를 저에게 바치지 못한 불신을 크게 뉘우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대면치 못한 너에게 이는 될 수 없는 일이다. 다음부터는 순종의 자식이 되라”고 자애의 말씀을 주셨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고난을 통하여 속죄를 깨달은 나는 고난과 세상적인 불행을 인생의 8복으로 선언, 인류사회 가치를 완전히 전도시킨 예수의 복음적인 위대와 행복을 처음 깨달을 수 있었으며, 처음 이에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난과 절망으로 회개와 눈물을 통한 감사, 이 진정 하나님의 구원이요 은혜였다.(성서연구 1948. 12)
도덕적 나태에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진노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순종하니 하나님은 어린 아들을 돌려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평상심을 가지고 이삭을 제단위에 올린 것을 상기하고 처음부터 평상심을 지키지 못한 것을 뉘우치자 또 하나님은 “다음부터는 순종의 자식이 되라!”고 위로하셨습니다. 고난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개입을 느끼고 눈물로써 통회하고 감사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을 대면하였다는 것입니다. 개인사적, 가정사적 범위에서 진노하시고 또 용서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제 민족사적으로 확대됩니다. 그것은 6.25의 발발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그의 민족을 위한 복음 사역의 소명은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다음에 인용하는 속간사라는 글은 한편의 예언적 서사시와 같습니다.
속간사 - 고난가운데서(부산 피난지에서)
작년 6월 27일 아침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하던 전날 고영춘 형이 성서조선 구호를 구하기 위해 찾아 왔기에 함께 정릉리 김선생 댁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창경원 앞에서 전차는 정지되고, 한편 돈암동 방면에서 수많은 피난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다시 종로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아 철시된 종로 그것은 과연 명조(明朝)의 이 바빌론의 함락과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수만 군중들의 장송행렬 그것이었습니다. 마치 엄친의 운명을 돌보는 가족들의 모습과도 같은, 아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민족과 인간의 심각한 얼굴을 나는 보았습니다. (...) 아, 이때부터 예레미야의 애가가 또한 나의 애가, 나의 고뇌가 되었습니다: 『내 눈은 눈물 때문에 상하고 내 창자는 꿇으며 내 간은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내 백성이 패망하였음이라』
나는 처자를 데리고 연기와 화염속에서 무수한 시체를 넘어 소돔 고모라의 롯 그대로 아현동 송두용 선생댁에 일시 난을 피하였습니다. 그날 석양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화염이 충천하는 용산 일대를 바라보며 이 성에 열 사람의 의인이 없음을 한탄하였습니다. 그날 석양무렵 이우건 선생이 나의 식구를 찾아주신 것을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심신은 극도로 피로하고 설상가상으로 아내의 해산이 임박하였습니다. 나는 어린 것들과 처를 손수레에 싣고 경기도 용인 조성진 형 댁에 갔습니다. 나는 여기서 조용히 성서를 읽으며 전쟁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6.25의 재난은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친상을 당한 사람들의 얼굴표정을 너머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선 민족과 인간의 심각한 얼굴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선생은 이 전쟁의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직감하였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전쟁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 것인가? 그것은 회개를 촉구하는 사랑의 혹독한 매였습니다. 다음은 앞의 속간사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물론 전쟁의 책임은 인류와 역사에 대해 직접 우리 민족 자신이 져야 할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4천년 우리의 죄악에 기인한 것을 부정하여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신 앞에 또 인류 앞에 회오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를 하지 않는다면 신께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이를 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이를 다만 신의 가혹한 매로만 받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의 구원과 사랑에서 즉 신께서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있어서 이 위대한 고난으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여 우리를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 아, 고난의 겨울이 갔을 때 그는 다시 나에게 명하셨습니다. “이제 고난 가운데서 ‘성서연구’를 통한 네 천직, 사명을 하라” 이것이 몇 달을 주저하다가 피난도시 부산에서 부족한 아니 무거운 나의 펜을 다시 드는 소이입니다. (성서연구 1951. 8, 24호; 전집 제1권 p. 150)
묵묵히 피난생활을 견디고, 서울 수복후 복귀하였다가 다시 1.4후퇴를 맞아 피난대열에 합류합니다. 주시는 고난의 잔을 묵묵히 받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뚜렷하게 들려옵니다. 그것은 “고난가운데서 성서연구를 통한 네 천직, 사명을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소명을 선생은 기회가 날 때마다 다시 점검하고 다지셨습니다. 이듬해 1942년초 41세의 생신을 맞아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작은 소원
연말 연초를 통하여 나에게 크고 쓴 통회와 작고 뜨거운 기원이 있었다. (...)인하여 금년은 아니 금후는 나의 전 생활을 잡지의 월간 간행과 나의 조그만 가정 집회로써 오직 나에게 허락되는 한도 내에서 성서공부로 성서진리를 분명히 하는 데만 모든 힘을 집중하려는 바이다. 지금까지 경제 곤란 운운하였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나 자신이 나의 일에 대해 밥을 굶고 죽을 각오로써 내 심신을 희생하고 정말 하나님과 진리와 민족을 사랑하여 손해와 모욕을 당하고 박해와 십자가를 지지 못한 이상 하나님 앞에 불평을 말할 자격도 없다. 나는 실로 사람은 자기의 일로써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하신 나의 선생의 교육을, (아니)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불신과 나태, 안일로써 모독하였다. 이제 나는 육신의 밥을 잊을 정도로 나의 일에 충실해야 하며 아사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이제 1953년 나의 40세의 고개를 넘은 새해를 맞아 여기 육신의 노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후로 나는 오직 바울 선생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작은 일을 위하여 살려고 합니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말기를 바라며 또 육신의 노를 상대하지 말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성서연구, 1952. 12)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선언하고 외길을 걷기로 작정한지 1년이 되어갈 무렵 선생에게 한 번 더 연단의 매가 가해졌습니다. 이 사건은 피란지 부산을 떠나 어디에 가서 “최소한의 생활의 독립과 보장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자”는 생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부인과 함께 기차로 올라와서 대전역 앞의 시장터에 판잣집을 계약하고 약방을 경영하기로 한 것입니다. 며칠 후 이삿짐을 싸가지고 대전에 도착하고 보니 판잣집이 철거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그 집을 해약할 수도 있었지만 설마하는 마음에 처음 뜻대로 밀고 나가기로 결정하고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머지 안아 철거가 추진되었고 하루아침에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 살림을 시작한 판잣집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선생은 여기에 하나님의 손길이 개입되었음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희망을 거절하시고 우리의 계획을 완전히 부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를 저 앞에서 철회하게 하셨다.”
소명의 길을 가기로 작정한 선생을 하나님께서는 모질게도 안내를 하셨습니다. 이 때의 소회를 담은 ‘신앙을 배우는 괴로움’이라는 제목의 글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아! 매로써만 그의 사랑을 배우고 진리를 배우고 믿음과 순종을 배우는 나의 우둔함이여, 괴로움이여.” (성서연구, 1953. 9/10)
선생에게 소명은 있었기에 화재, 자녀의 실종, 고난, 좌절 등 일상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진리를 배우는 중심이었습니다. 고난은 소명을 최대한 살려내려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믿었습니다. 소명이 있음으로 하나님과 관계와 소통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이 길로 몰아가고자 길을 열기도 하시며 닫기도 하심을 보았습니다. 선생의 투철한 하나님 중심 역사관은 그가 민족사를 조망하는 방식이기도 하였습니다.
“먹는 것 자체를 인생의 목적, 이상, 사명으로 하는 그렇듯 인생의 의미와 존엄성을 모독하는 자는 개인이건 민족인 먹고 살 생존의 권리가 도덕적 우주율(宇宙律)에 의해 박탈되기 때문이다. 굶어 죽더라도 직분과 책임과 천직에 대한 충실, 근면, 정직 등 도덕적 자각과 책임을 사수하는 정신이 없는 한 영원히 경제적 충족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사명이 있는 한 죽지 않는다고 한 리빙스턴의 말이 관연 진리라면 우리 민족의 장래와 희망도 오직 민족 사명의 자각에만 있다는 것을 단언하여 둔다. 허위, 공허한 소위 애국적 언설에는 절대 아니다. 그리고 조선 민족의 천부의 사명은 우주의 창조자, 역사의 섭리자, 또한 완성자인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관의 확립, 즉 종교적 자각 이외에서는 나올 수 없음을 단언하는 바이다.” (아기와 조선사람, 1947. 9)
선생은 젊은이를 만나거나 결혼 주례를 맡으실 때면 항상 소명을 다할 것을 권면하시곤 했습니다. 성서연구의 권두언에 자주 올려졌던 주례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선생의 눈에는 작은 일이라도 소명과 관계된 결단이나 성과는 크게 보였고, 대단한 기쁨이었습니다. ‘사명의 실천’이라는 제목의 글은 경북 일직에서 공민학교를 시작한 이중일 선생의 일화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김교신 선생의 감화를 받고 청년시절부터 농촌교육에 뜻을 품고 있던 이 선생이 중학교장 자리를 사직하고 공민학교를 시작한 것을 ‘근래 처음 크게 감격과 충격을 받은 이야기’라고 소개합니다.
“(...) 가정생활과 자녀들 교육문제 등으로 좀처럼 출발을 못시키다가 ‘가정은 가정이고 자식은 자식들이다. 언제까지 어물어물할 것인가. 나는 나의 일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모든 것을 딱 끊고 지난 봄 공민학교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렇다. 우리는 가정을 위하여 생활을 위하여 자식들을 위하여 우리의 천직, 즉 사명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가정이란 천직, 사명을 하기 위한 가정이지 그저 생활하기 위한 가정은 아닐 것이다. 사명 없는 생활은 실로 죽은 생활일 뿐이다. (...) 하나님의 자녀로서 책임과 천직을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자녀에 대한 최상이 교육이며, 또한 이들에게 이것만이 영구적인 최대의 유산이 될 것이다.” (1953. 7/8호)
천직이 최대의 봉사라고 가르친 선생은 ‘인생의 방향’이라는 글에서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남겼습니다.
첫째, 명예나 돈은 피할 것.
둘째, 재능과 성격을 무시하지 말 것.
셋째, 의미 있는 일을 찾았다면 돈 걱정을 하지 말 것. 돈의 부족은 정신력의 촉발제 역할을 할 수도 있음.
넷째, 이기적인 것, 낮은 것을 택하지 말고 목표를 높은데,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닌, 남을 위한 일에, 가치 있고 정신적, 도덕적인 일에, 하나님의 뜻에 둘 것. 이것이 우리 심중의 모든 선의와 사랑과 희생정신을 이끌어내고 이를 성장시켜 우리 인생과 일을 빛나게 할 것임.
다섯째, 한국 사회에서 특히 정치계, 연예계는 피할 것.
초중등 교육은 사회생활을 위한 기초소양을 습득하는데 목적이 있다면, 청장년기의 교육은 소명을 각성하고 그에 응답하기 위한 준비에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직업교육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능력개발이라는 차원에서 한 단계 비약하여 소명을 각성하고 준비하도록 도와주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영역에서 일을 하든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하는 일의 진실한 가치를 발견하고, 산제사로 드리는 예배로써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이 직업교육의 궁극적 목적이어야 합니다. 노평구 선생은 이러한 직업교육의 가능성을 스스로 실험하시고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체계화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