矗石樓(촉석루)
李滉(이황)/조선
落魄江湖知幾日(락백강호지기일) 넋이 떨어져 강호에 떠돈 지 몇 날이던가
行吟時復上高樓(행음시부상고루) 길을 걷다 때로는 시 읊으며 높은 누각에 오르네
橫空飛雨一時變(횡공비우일시변) 공중을 비껴 날던 비도 일시에 변하는데
入眼長江萬古流(입안장강만고류) 눈에 들어오는 긴 강은 만고를 흘러가네
往事蒼茫巢鶴老(왕사창망소학로) 지난 일들 아득하고 둥지에 깃던 학도 늙어가니
羇懷搖蕩野雲浮(기회요탕야운부) 마음은 흔들려 어지럽고 들판의 구름은 하늘을 떠도네
繁華不屬詩人料(번화불속시인료) 번화(복잡)한 세상 일은 시인이 뜻하는 바(요량에 속한 일) 아니니
一笑無言俯碧洲(일소무언부벽주) 한번 웃고는 말없이 푸른 물가를 내려다 보네 (번역 한상철)
* 矗石樓: 경남 진주 진주성내 남강 변 절벽 뒤편 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은 촉석루는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을 자랑한다. 호정浩亭 하륜河崙이 지은 <촉석루기矗石樓記>에 의하면 남강 가에 뾰족뾰족한 돌들이 솟아 있는 까닭에 그 모습을 따서 누각의 이름을 촉석루라고 지었다고 하나, 다른 일설에 의하면 촉석산에서 돌을 캐다가 누각을 지었으므로 촉석루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 혹은 장원루壯元樓라고도 불리는데, 전자의 남장대라는 이칭異稱에서는 지휘 장대로, 후자의 장원루라는 별칭에서는 시험장으로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 졸작 정격 단시조 한 수 올린다.
27. 촉석루(矗石樓)(2020. 3. 9)
웅장한 고래 누각 붕새로 비상하면
남강은 파도 일고 의암(義巖)에 숨는 잉어
용 서린 층층바위 위 선비 상투 우뚝해
* 촉석루(矗石樓);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 (본성동) 진주성내. 경남 문화재자료 제8호(1983.7.20 지정)이다. 남강(南江) 가 벼랑 위에 장엄하게 솟아, 영남(嶺南)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임을 자랑한다. 1241년(고려 고종 28)에 창건하여 8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던,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향시(鄕試, 初試)를 치르는 고시장(考試場)으로 사용되었다. 6.25때 불탄 것을 시민들의 힘을 모아 ‘진주고적보존회’를 만들어 1960년에 복원하였다. 건물은 팔작지붕에 다락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누각 밑의 돌기둥은 창원의 촉석산에서 채석하였고, 목재는 강원도 오대산에서 가져왔다. 루에는 4개의 현판과, 시인 묵객들의 시판이 걸려있다. 매년 가을 진주성에서는 '진주남강유등축제'가 열려, 독특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강변 바위에는 명문 석각(石刻)이 많다.(대한민국 구석구석 인용 수정)
* 붕새; 날개의 길이가 삼천 리이며 하루에 9만 리를 날아간다는, 매우 큰 상상의 새다, 북해의 곤(鯤) 이라는 물고기가 화(化)한 것이다.(장자 소요유편)
* 논개(論介 1574~1593); 또는 주논개(朱論介)는 조선 선조시대의 의기(義妓)이다. 충절을 기려 의암(義巖)이라 한다. 관기인 그녀는 재주가 뛰어나고,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승리한 왜군의 축하연 옆자리에 앉은 왜장 ‘게다니’(일본 기록에는 없음)를, 촉석루 밑 의암(원래는 危巖, 경남기념물 제235호) 바위까지 유인해 함께 남강(南江)에 투신하였다. 경상우병사 최경회의 첩실이라 함.
* 상투: 머리카락을 모두 올려 빗어, 정수리 위에서 틀어 감아 맨 머리모양. 혼인한 남자의 전통적인 머리이다. 한자어로는 ‘추계(推髻)’ 또는 ‘수계(竪髻)’라고 한다. 중국의 『사기(史記)』에 위만(衛滿)이 조선에 들어올 때, ‘추결(魋結)’을 하고 왔다는 기록과,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 한조(韓條)에 ‘괴두노계(魁頭露紒)’, 즉 관모를 쓰지 않는 날상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졸저 『연비어약』 정격 단시조집(9) 제1-27번(37면).
* 촉석루 설경. 사진 다음카페 한시평론에서 인용.(2013. 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