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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강의 스크랩 선경후정(先景後情)의 원리 - 유용선
김명 추천 0 조회 348 14.05.31 08: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선경후정(先景後情)의 원리 - 유용선

문학작품을 읽다보면 앞부분이 서로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문예창작법에 있어 선경후정(先景後情)의 원리 때문입니다. 선경후정(先景後情)이란 우선 정황이나 배경을 제시하여 독자의 주의를 환기 시킨 후에 서정과 인식을 펼쳐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손짓, 몸짓, 눈짓, 표정 따위의 보조 수단을 활용하고, 듣는 상대방 또한 사이사이 질문을 통해 뜻을 명확히 이해하려는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글은 다릅니다. 글쓰기는 철저히 문자만으로 상대에게 의사와 느낌을 전달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에는 말과 달리 퇴고의 과정이 반드시 뒤따릅니다. 말은 일단 밖으로 나오면 뒤이어 말을 덧붙이는 방법 외에 달리 말의 흐름을 바꿀 도리가 없지만 글은 아직 상대에게 보이기 전이라면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일장이라든지 경시대회나 문예창작과 실기 시험 등에서는 퇴고할 시간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이 때에 퇴고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선경후정(先景後情)의 원리를 지켜야 합니다. 선경후정(先景後情)이란 우선 정황이나 배경을 제시하여 독자의 주의를 환기 시킨 후에 서정과 인식을 펼쳐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배경에는 시간과 장소와 정황 따위가 있습니다. 배경의 묘사나 진술은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생각이나 생생한 느낌을 적을지라도 독자의 주의를 끌어들이지 못한 채로 진술한다면 글 쓰는 자신만 이해하는 작품이 되거나 지나치게 관념적인 작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함정에 빠지는 일은 산문을 쓸 때보다 시를 쓸 때 더욱 빈번히 발생합니다. 실제의 작품을 감상하며 선경후정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합시다.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

반찬이 강을 건너왔네
당신 마음이 그릇이 되어
햇살처럼 강을 건너왔네

김치보다 먼저 익은
당신 마음
한 상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              - 함민복의 만찬(晩餐) 전문

이 시의 한 줄짜리 첫 연은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입니다. 한 사람이 혼자 살고 있는 정황을 시인은 첫 연으로 따로 떼어 밝히고 있습니다. 즉 1연은 전체 시에서 선경(先景)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연에서는 "반찬이 강을 건너~"로 먼곳에서 소포로 반찬이 넘어왔다는 두번째 정황을 밝힙니다. "반찬이 곧 당신의 마음"이라는 인식이 들어가 있습니다. 3연에서는 익은 김치보다 보내준 이의 사랑이 먼저 익었다고 하더니, 4연에 이르러선 그것을 반찬으로 식사를 하며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인식으로 전체 시를 깔끔하게 마무리합니다. 여기에서 지극히 평범해보이는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가 없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시의 감동은 절반 이하로 줄어버릴 것입니다.


다음 작품은 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폐타이어’입니다.
이 작품을 예로 드는 까닭은 비록 신선미는 다소 떨어져 읽기에 지루한 감이 있지만 전개과정이 매우 교범적이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자주 바뀌는 공중의 표정 앞에서는
잽싸게 꼬리를 사려야 했다
검고 딱딱한 세계 위에서 세월을 소모하며
제한된 영역만 누려야 했다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들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신 한계였을 뿐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매달린 세월

그가 속도의 덫에서 풀려나던 날
온몸이 닳도록 달려온 일생을 위로하듯
바람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잠시 뒤의 어떤 바람은 풀씨랑 꽃씨를
데리고 와서 놀아주었다
벌레들의 따뜻한 집이 되었다
잃어버린 속도의 기억 한 가운데
초록의 꿈들이 자란다
노란 달맞이꽃은 왕관처럼 환히 피어 있다     - 김종현 ‘폐타이어’

이 작품은 한 장의 삽화 같은 묘사와 진술로 첫 연을 시작함으로써 시 전체에 선경후정(先景後情)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습니다. 아파트 공터의 한 귀퉁이에 폐타이어가 땅속에 반쯤 묻혀 있습니다. 폐타이어인데다가 땅 속에 묻혀 있으니 이제 더 이상 속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타이어 밑으로 햇볕과 그림자가 둥근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떠올리며 독자는 ‘왜 하필이면 폐타이어일까? 왜 하필이면 땅속에 묻혀있는 것일까?’ 등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독자의 주의를 효과적으로 환기 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충분히 주의를 끌고 난 뒤에 비로소 폐타이어의 과거(2연)를, 회한(3연)을 거쳐 다시 정경으로 돌아옵니다. 마지막 연의 풍경 속에는 첫 연에서는 보이지 않던 따스한 서정이 스며 있습니다. 만약 첫 연의 정경 묘사가 없었더라면 마지막 연의 정경이 과연 지금처럼 따뜻하게 느껴졌을까요?

오늘날 많은 예비시인들의 작품에서 마치 앞서 예로 든 ‘폐타이어’에서 첫 연이 없는 것과 같은 성급한 호흡의 시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아마도 ‘화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독자는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는 글의 함정에 쉽게 빠지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선경후정(先景後情)의 원리에 입각한 훈련을 쌓고 그 효과를 잘 알고 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선경후정의 원리에 입각해 다음 순서대로 실제 창작을 해보도록 합시다.

(이야기가 있는 시를 쓸 경우에 택할 수 있는 자유시의 형식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1. 중심소재를 어떤 시간과 장소, 정황에 배치할 것인가를 결정해 첫 연을 이룹시다. 이 때는 인식을 암시적으로만 드러냅니다.
2. 소재로부터 끌어낸 주제와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전개합니다. 글이 입체적이 되려면 설명하거나 토로하지 말고 영상으로 보여주고 들려주듯이 써야 합니다.
3. 마지막 연에서는 첫 연에서보다 더욱 깊이 있고 격조가 있도록 정경을 묘사하여 마무리합시다.

이렇게 형성된 작품에 대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퇴고입니다. 퇴고를 할 때는 다음 두 가지 부분에 주의하여야 합니다.

첫번째, 선경(先景)의 단계가 너무 장황하고 지지부진하면 이미 어딘가에서 읽은 글 같아서 지루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아직 본격적인 인식이 들어가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독서를 폭넓게 하고 창작의 연륜이 더해지면 비슷한 정황이라도 전혀 다르게 독창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것은 눈이 좀더 밝아져서 독특하고 시적인 정황을 찾아내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발견이 발달된 젊은 시인으로 김기택, 나희덕, 이윤학 등이 있고 아직 시집이 나오기 전이지만 마경덕 시인의 시도 아주 모범적입니다.

두번째, 퇴고를 통해 자칫 들어가 있을지 모를 편협함을 제거해야 하는데 여기서 편협함이란 연민, 비판정신(문제의식), 재치 따위의 한 가지에 지나치게 편중됨을 뜻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연민과 비판정신(문제의식)과 재치를 조화롭게 드러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난 뒤에 언어에 대한 섬세하고 세밀한 조탁이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명품 도자기 같은 작품이 여러분에 의해 세상에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건필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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