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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교실 스크랩 조선 제9대왕 성종 (成宗 1457∼1494)
심상진 (호) 송정 추천 0 조회 15 14.02.17 14: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 제9대왕 성종 (成宗 1457∼1494(세조 3∼성종 25))

조선 제9대왕(1469∼94). 이름은 혈. 세조의 손자이고, 덕종의 둘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소혜왕후(昭惠王后)이고, 비(妃)는 공혜왕후(恭惠王后), 계비(繼妃)는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1469년 예종이 죽자 13세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 뒤 7년 동안 정희대비(貞熹大妃;세조의 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1476년(성종 7) 비로소 친정(親政)을 실시하였다. 1485년 세조 때부터 편찬하여 오던 《경국대전》을 완성, 반포하였다. 이어 1492년 《대전속록(大典續錄)》을 완성하여 법제를 완성하였다. 1470년에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여, 국가에서 경작자로부터 직접 조(租)를 받아들여 관리들에게 현물 녹봉을 지급하였다.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김종직(金宗直) 일파의 신진 사림세력(士林勢力)을 등용하여 왕권을 안정시켰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1492년에는 도승법(度僧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다. 경사(經史)에 밝고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어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였다. 1484년과 1489년에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學田)을 나누어 주어 관학(官學)을 진흥시켰으며, 홍문관을 확충하였다. 또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문선》 등 각종 서적을 간행하여 문운을 진흥시켰다. 한편, 국방대책에도 힘을 기울여 1479년과 1491년에는 국경지방의 야인들을 소탕하였다. 이렇게 하여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하였다. 능은 선릉(宣陵)이다. 시호는 강정(康靖).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결탁

 

예종이 병약한 몸으로 왕위를 오래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서부터 정희왕후는 왕권 찬탈을 우려하 고 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세조의 유명을 받든 한명회를 비롯한 원상들과의 결탁이었다. 이 결탁 과정에서 그 녀의 생각은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한다는 것이었고, 한명회는 자을산군을 내세 웠다. 논의 과정에서 정희왕후는 장손인 월산군을 지목했을 것이지만 한명회의 반대에 부딪쳐 자을산군으로 낙착을 보았다. 정희왕후와 권신들은 이러한 선택이 종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예종이 죽던 날 곧바로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구성군 유배 배경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장성하고 재질이 뛰어나며 인망이 있는 종친은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로 구성군 을 지목하게 되었고, 섭정을 하고 있던 정희왕후와 원로 대신들 역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몹시 우려했다. 이런 상황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대신, 대간들은 구성군을 집요하게 탄핵하기 시작했고, 1470년( 성종1년) 마침내 정희왕후는 그에게 유배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 10년 후 구성군은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이 사건은 성종초의 왕권이 불안정하였던 시기에 원로 대신들의 입김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이 후 종친의 관료 등용은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경국대전' 완성 이후 이 법은 정착되었다. 말하자면 구성군 사건은 신권 견제를 위한 왕의 종친 중용 정책의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신권이 정치를 주도하게되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성종의 성장 과정

 

성종은 1457년 세조의 큰 아들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와 세자빈 한확의 딸 한씨(소혜왕후로 추존)의 둘 째아들 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혈이다. 태어난 지 두 달도 못되어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자 세조의 손에 의해 궁중에서 키 워졌는데, 천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사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어느 뇌우가 몰아치던 날 옆에 있던 환관이 벼락을 맞아 죽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혼비백산하였는데도 그는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조가 이를 보고 그가 태조를 닮았다고 하면서 기상과 학식이 뛰어날 것임을 예견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성종은 다섯 살이 되던 1461년에 세조에 의해 자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 자을산군으로 개봉되었으며, 열 한살이 되던 1467년 한명회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그리고 1469년 11월 숙부인 예종이 죽자 열 세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정희왕후의 섭정

 

정희왕후에 의한 7년 동안의 섭정기에 있었던 주요 사건을 살펴보면, 우선 성종 즉위 직후인 1469년 12월에 호패 법을 폐지하여 민간에 대한 관의 감시를 줄였던 것을 들 수 있다. 또 통치의 총체적 규범인 '경국대전'의 교정작업 을 완료했고, 2품 이상의 관원이 도성 밖에 거주하는 것을 금하여 조정 정책 결정의 신속성을 도모했다. 그리고 숭유억불 정책을 강화하여 불교의 장의 제도인 화장 풍습을 없애고, 도성 내에 염불소를 폐지하여 승려들 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였으며,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가 비구니가 되는 것도 금지했다. 한 편 외촌 6촌 이내에는 결 혼을 금하고, 사대부와 평민의 제사 이행에 차별을 두어 4대 명절에 이를 검사하였으며, 전국 교생에게 의무적으로 '삼강행실'을 강습케 하는 등 일련의 유교 문화 강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민간 경제의 안정을 위해서는 고리대업을 하던 내수사의 장리소를 560개에서 235개로 줄였다. 각 도에 잠실을 하 나씩 설치해 농잠업을 융성시켰으며 영안, 평안, 황해도에 대대적인 목화밭을 조성하고, 경상, 전라도에 뽕나무 종자를 심게하였다.
사림정치의 기반조성

 

성종은 조정의 서무 결재에 원로 대신들이 참여하던 원상제도를 폐지하여 왕명 출납과 서무 결재권을 되찾았으며, 김종직 등 젊은 사림 출신 문신들을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또한 2년 뒤인 1478년에는 참판 이하의 모든 문무신을 교차시켜 권력의 집중 현상을 막았으며, 임사홍, 유자광 등의 공신 세력들을 유배시켜 사림 출신 신진 세력들의 진로를 열어주었다. 성종의 세력 균형 정책은 1480년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고려 말의 대표적 학자인 정몽주와 길재 의 후손에게 녹을 주는 한 편 그들의 학맥을 잇는 사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철저히 견제하 였다. 이렇게 하여 신진 사림 세력은 왕을 호위하는 근왕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세조 때의 공신이 주축이 된 훈구 세력은 정치 일선에서 조금씩 후퇴하였다. 성종은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 균형을 이룸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또한 조선 중기 이 후의 사림 정치의 기반을 조성했다.
도학정치의 기틀

 

불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한 편 성리학의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1489년에는 향시에서 '불교를 믿어 재앙을 다스려야 한다'는 내용의 답안을 작성한 유생을 귀양보냈는가 하면, 1492년에는 도승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 고, 일정 숫자의 사찰만을 남긴 채 전국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였다. 한 편 성종은 성리학에 심취하여 도학적인 조예가 깊었으며, 경연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하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그는 심지어 경학이나 강의에 만 능해도 관리로 등용하거나 자신의 벗으로 삼기도 했다. 성종은 이와같은 도학 정치 사상에 입각하여 1475년에는 성균관에 존경각을 지어 경전을 소장하게 했으며, 향현 고에 관심을 가져 학문 연구를 후원하고, 1484년과 1489년에는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교육기간의 경비를 충당케 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과 서적을 나누어주어 관학을 진흥시키기도 했다. 또한 홍문관을 확충하고 용산 두모포에 독서당을 설치하여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고 독서 저술에 전념하게 하였다. 이 같은 정책은 편찬 사업을 융성시켰는데, 그 결과로 노사신 등의 '동국여지승람'과 서거정 등의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문선', 그리고 강희맹 등의 '오례의', 성현 등의 '악학궤범'이 간행되는 등 다양한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태평성대의 다른 면

 

성종 자신이 후기에 들어서는 유흥에 빠져들 었고, 이것이 확산되어 사회 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가고 있었다. 성종은 궁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 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해 결국 폐비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이 폐비 윤씨 사건은 연산군 대에 이르러서 정쟁의 불씨로 작용해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야사에 등장하는 어우동에 관한 이야기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함께 유흥 을 즐겼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성종이 얼마나 자주 야행을 즐겼는지를 알게 해 준다.
성종의 업적

 

1479년 좌의정 윤필상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들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함 경도관찰사 허종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였다. 이 결과 조선 초부터 끊임없 이 변방을 위협하던 야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또한 고려로부터 조선 초까지 100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 교지, 조례,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이 1485년에 완성 되었고, 각종 문화 서적들을 편찬해 민간 생활의 질을 높였다. 또 성리학자들을 정계에 진출시켜 학문과 정치를 하나로 묶었으며, 조선의 정치 이념인 유교를 완전히 정착시켜 민간 교화에 성공했다. 게다가 변방의 야인을 토벌 하여 전쟁의 위협을 없애고, 남방의 왜구들은 외교적으로 관리하며 지배하였다. 이는 민생의 안정과 태평성대로 귀결되었다.
경국대전의 완성

 

성종은 즉위하자 '경국대전'을 수정하여 1471년 1월 1일부터 공포하여 시행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신묘대전'이다. 하지만 이 책은 누락된 조문이 많아 다시 개수하여 3년 뒤인 1474년 2월 1일부터 시행하였는데, 이 책이 '갑오대전' 이다. 이 대전에 수록되지 않은 법령 중에 시행의 필요성이 있는 72개 조문은 따로 속록을 만들어 함께 시행하였다. 그러나 1481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있자 감교청을 설치하고 대전과 속록을 대대적으로 개수하여 1485년 을사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이것이 '을사대전'이다. '을사대전'을 시행할 때는 앞으로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이 '을사대전'은 최종적으로 확정된 조선왕 조 영세불변의 만세성전이 되었다. 25년 동안의 참으로 끈질긴 노력의 결실이었다.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전해오는 '경국대전'은 바로 이 '을사대전'을 가리키며 '신묘대전', '갑오대전'을 비롯한 그 이전의 법전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을사대전'은 현재까지 우리 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일한 법전이 되는 셈이다. '경국대전'은 경제육전과 같이 6분 방식에 따라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각 법전마다 필요한 항목으로 분류하여 규정되어 있다. 또 조문은 경제육전과는 달리 추상화, 일반화되어 있어 유권해석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20여 년에 걸친 탁마의 결정체로서 손상이 없는 것이며, 명실상부한 조선의 최고 법전으로서 면모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경국대전의 구성

 

'이전'에는 통치의 기본이 되는 중앙과 지방의 관제, 관리의 종별, 관리의 임명, 사령등에 관한 사항이 마련되어 있다. '호전'에는 재정 경제와 그에 관련되는 사항으로서 호적, 조세 제도를 비롯하여 녹봉, 통화, 부채, 상업과 잠업, 창고와 환곡, 종운, 어장, 염장에 관한 규정과 토지, 가옥, 노비, 우마의 매매와 오늘날의 등기 제도에 해당하는 입 안에 관한 것, 그리고 채무의 변제와 이자율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예전'에는 문과, 무과, 잡과 등의 과거 규정과 관리의 의장 및 외교, 제례, 상장, 묘지, 관인, 그 밖에 여러 가지 공문서의 서식에 관한 규정을 비롯하여 상복제도, 봉사, 입후, 혼인 등 친족법 규범이 마련되어 있다. '병전'에는 군제와 군사에 관한 규정이, '형전'에는 형벌, 재판, 공노비, 사노비에 관한 규정과 재산 상속법에 관 한 규정이, '공전'에는 도로, 교량, 도량형, 식산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이 책은 1481년(성종12년) 50권으로 편찬되었다. 내용은 1477년에 편찬한 '팔도지리지'에다 '동문선'에 수록된 동국문사의 시문을 첨가한 것이다. 편찬 체제는 남송의 '방여승람'과 명의 '대명일통지'를 참고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의 1차 수교는 1485년 김종직 등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 때 시문에 대한 정리와 연혁, 풍속, 인 물 편목에 대한 교정, 그리고 '대명일통지'의 구성에 따라 고적 편목이 첨가되었으며, 중국의 지리지에 없는 성 씨, 봉화불을 꽂던 봉수의 양조 등이 신설되었다. 그 뒤 1499년 임사홍, 성현 등이 부분적인 교정과 보충을 가 하였으나 내용상으로는 큰 변동이 없었다. 제3차 수정은 증보를 위한 것으로서 1528년(중종23년)에 착수하여 15 30년에 속편 5권을 합쳐 전 55권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를 '신증'이라는 두 자를 삽입하여 '신증동국여지승 람'이라고 했다. 이 중종시대본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희귀해져, 현재는 일본 경도대학 소장본이 유일하며, 161 1년(광해3년)에 복간한 목판본이 규장각도서 등 국내에 소장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책머리에는 진전문, 서문, 교수관원직명과 구본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노사신의 진전문, 서 거정의 서문 및 교수관직명, 찬수관직명, 목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책의 끝에는 홍언필, 임사홍, 김종직 의 발문이 실려 있어 간행 과정과 의도를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책의 몇몇 권에는 경도, 한성부, 경기도, 개성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 도 등 각 지방의 군현이 수록되어 있는데, 경도 앞에는 조선전도인 팔도총도가 실려 있으며, 각 도 첫머리에는 도별 지도가 삽입되어 있다. 이 지도들은 실측 지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지극히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한결같이 동서의 폭은 넓고 남북의 길이는 짧아 기형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팔도총서의 모양은 꼭 실제 지형을 위에서 꾹 눌 러놓은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당시의 지도들이 이같은 모양을 띠게 된 것은 남북의 교통로에 비해 동서의 교통로가 전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한반도의 지형이 동고서저, 즉 서쪽에 평야가 모여 있고 동 쪽에 산악이 집중되어 있기에 동서쪽의 거리는 멀게 느껴지고 남북쪽의 거리는 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어쨌든 지도의 정확성 여부를 떠나 지리지에 지도를 첨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편집이었다. 또한 내용 에서도 각 도의 연혁과 총론에서부터 성씨, 인물, 풍속, 봉수, 능묘, 교량위치 등 세세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비 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인물 속에는 관원뿐 아니라 효자, 열녀 등이 포함되어 있고, 행정 구역에 관해서도 지역의 변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주목할 만 하다. 여기에는 세종 대의 지리지가 지녔던 장점인 토지의 면적, 조세, 인구 등 경제, 군사, 행정적인 측면이 약화된 반면에 인물, 예속, 시문 등이 강조되어 있는 데 이는 세종 대에 비해 성종 대가 그 만큼 평화스러웠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동국통감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 등이 신라 초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 사서로 총 56권 28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편찬 사업은 1458년 세조에 의해 시작되어 1476년 성종 대에 와서 비로소 고대사 부분이 완성되었다. 이 고대사 부분은 '삼국사절요'라는 이름으로 따로 간행되었으며, 이 후 1484년에 고려사를 완성해 '동국통감' 으로 합본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1485년에 성종과 사림 세력이 중심이 되어 개찬한 '동국통감'만 남아 있다. 이 책의 편찬 사업에 대한 세조의 원래 의도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권근의 '동국사략'으로 대표되는 고대 사 관련 사서에 탈락된 것이 많아 보완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이미 골격이 형성된 고대사 부분을 다시 손질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삼국사절요'는 원래 신숙주가 거의 완성했으나 그가 미처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노사신을 주축으로 서거정, 이파, 김계창, 최숙정 등이 완성시킨 것이다. 그 명칭으로 보아 '고려사절요'와 연결시키려 했던 것 으로 짐작되며, 이 속에는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많은 설화와 전설을 '삼국유사', '수이전', '동국이상국집' 등에서 채록하고 '동국사략'의 사론을 수록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세조가 중점을 두었던 상고사류들을 참고자료에서 제외시킨 상태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삼 국사절요'는 세조 때 골격이 잡힌 것이지만 세조가 의도하던 역사책과는 성격이 다른 책이라는 점을 알 수 있 다. 그러나 이 책은 이전의 사서들이 신라 중심의 서술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삼국을 대등한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 편 '동국통감'은 편년체로 되어 있으며,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외기, 삼국의 건국으로부터 신라 문무 왕 9년(669년)까지를 삼국기, 669년에서 고려 태조 18년(935년)까지를 신라기, 그 이후부터 1392년까지를 고려기로 편찬하고 있다. 삼국 이전을 외기로 처리한 것은 자료가 부족해 체계적인 왕조사를 서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기 를 독립시킨 것은 신라통일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삼국이 대등하다는 균적론을 내세워 어 느 한 나라를 정통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은 권근의 '동국사략'에서 신라를 정통으로 내세운 것과는 대비되는 점이다. 또한 왕의 연대 표기도 '동국사략'에서는 유년칭원법을 쓰고 있지만 여기에선 즉위년칭원법을 쓰고 있다. 그러나 '동국통감'의 사론이 지나치게 성리학적 관점에 치우쳐 있다는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중국에 사대한 행적이 있으면 칭송되는 반면에 대항했거나 사대를 소흘히 한 행정이 있으면 철저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불교, 도교, 민간신앙 등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사론이 심해졌다. 또한 기자조선과 그 후계자인 마한, 신라 등의 역 사적 위치를 높이고, 반면에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낮게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지나친 유교적, 사대적 역사관은 낭만적이고 신화적인 역사관을 받아들여 조선사를 재구성하려 했던 세조의 의도를 매몰시키고 말았다. 이에 반해 신숙주 주도 하에 만든 '삼국사절요'에는 낭만적, 신화적 서술 체가 남아 있어 그나마 세조의 민족주의적 관점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1484년 서거정이 주도 하여 찬진된 '동국통감'은 편자들이 훈신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지나친 명분론에 입각한 사서는 아니었을 것으 로 판단된다. 하지만 성종과 사림 세력에 의해 개찬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1485년판 '동국통감'은 엄격 한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준엄한 포폄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이는 세조 및 그를 보좌하던 훈신들을 공격하는 의미로 해석되며, 조선 초기에 추진되었던 부국강벽책을 간 접적으로 비판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사림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역 할을 했을 것이며, 그것은 곧 훈신의 압력을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는 성종의 왕권 신장에도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국통감'의 기초는 훈신들이 확립한 것이므로 비록 여기에 명분론 중심의 사론이 가해졌다 해도 이 책은 훈신과 사림, 그리고 성종의 합작품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때까지 조정 세력의 대립적인 양상 으로 역사관이 하나로 모아지지 못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동국통감'은 조선 초기의 역사 서술의 완성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동문선

 

1478년 성종의 명으로 편찬된 우리 나라 역대의 시문선집으로 총 130권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문학 총서이다. 이 책은 목록만 해도 3권이나 되며 합본은 45책으로 되어 있다. '동문선' 편찬 작업에는 서거정이 중심이 되어 노사신, 강희맹, 양성지 등을 포함해 총 23명이 참여하였다. '동문선'은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 외에도 신용개 등에 의해 편찬된 것과 송상기 등에 의해 편찬된 것이 있 는데, 이 세 가지중 서거정의 것을 '정편 동문선', 신용개의 것을 '속동문선', 송상기의 것을 '신찬 동문선'이라고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이 책에는 신라의 김인문, 설총, 최치원 등을 비롯, 고려를 거쳐 당 대까지 약 500명에 달하는 작가들의 작 품 4,302편이 수록되어 있다. 서거정은 취사선택의 기준을 '사리가 순정하고 치교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우리의 시 문이 삼국시대에서 시작되어 고려를 거쳐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고 쓰고 있으며, 역대 에 빛나는 시문이 중국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특질을 가진 우리의 것임을 강조하고 이를 집대성하여 후세에 전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동문선'에는 오언율시, 칠언율시, 오언절구 등 총 55종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어 중국 '문선'의 39종보다도 많으며, 뒤의 '속동문선'의 37종보다도 많다. 그 가운데 단 1편의 작품만으로 된 단락도 있는 것으로 봐서 당 시의 여건이 허락하는 한 많은 작품을 수록하려 했음을 읽을 수 있다. 작가의 경우에도 최치원 등의 신라 인물에서부터 이색, 권근 등 이 책의 편찬 시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시 기의 인물들까지 차례로 싣고 있다. 이들 이외에 승려 29명과 저자를 밝히지 않은 작품을 포함해서 도합 500 명에 육박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 중에 1편만 실린 작가가 220여 명에 이른다. 이 4,302편의 시문 가운데 시는 약 1천편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문장이다. 문장을 종류별로 구분하면 조칙, 축문, 첩 등 의례성이 강한 문장이 1,130여 편인데 특히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인 표전 한 분야만 460여 편에 이른다. 문장의 선택 방향에서 알 수 있듯이 '동문선'은 지배층의 봉건적 상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고 통치층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형적인 관료적 문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량문, 재사, 청사 등 도교와 불교 관계의 의례문을 195편이나 싣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당시 지배층 의 이념이 철저한 유교주의에 입각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작품의 선정 기준에 내용은 포함 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는데, 최충헌 부자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시문이 많이 실려 있기도 하고, 또 승려의 비 명이나 탑명, 불교의 교리를 설파한 원효의 불서 서문이 승려의 시 82편과 함께 실려 있는 것도 특징이다. '동문선'은 철저히 지배층의 시문만을 망라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삼국시대 이래 조선 초까지의 문 학 자료를 나름대로 책 한 권에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우리의 문학 전통을 중국의 그것과 병행하여 독자적인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신라, 고려시대의 기록과 도교, 불교 관계자료는 중요한 문화물로 인식되고 있다.
악학궤범

 

조선시대의 의궤와 악보를 정리하여 성현 등이 편찬한 악서이다. 총 9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이 치밀하고 정확하여 조선 초기의 음악 전반을 자세히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책이다. '악학궤범'은 1493년 성종의 명에 의해 예조판서 성현, 장악원제조 유자광, 악원주 신말평, 전악 박곤, 김복근 등이 편찬하였는데, 당시 장악원에 있던 의궤와 악보가 너무 오래되어 헐었을 뿐만 아니라 요행히 남은 것은 모 두 잘못되어 있어 새로운 악규집을 편찬한다는 취지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수록 내용을 살펴보면 1권에서는 음조를 60가지로 나눈 60조도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궁, 상, 각, 치, 우의 오성의 높이를 한정짓는 오성도설이나 연향에 쓰이는 당악의 28조를 악서에서 인용하여 5음 12율 로 설명한 오음율려 28조도설 등이 독특한 일면으로 평가되고 있다. 2권은 아악진설도설과 속악진설도설을 설명 한 것으로 당시 사용되던 제악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3권은 당악과 속악을 설명하고 있고, 4권 에서는 성조 대의 당악을 일괄시킨 당악정재도의를 설명하고 있다. 5권은 주로 향악을 다루고 있어 속악에서 중 요한 의미가 있는 '처용가', '동동', '정읍' 등을 수록하고 있다. 6권에는 아부악기도설을, 7권에는 당부악기도 설을 싣고 있는데 악기의 전체 모양을 그림으로 볼 수 있어 당시 악기를 재현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8 권의 당악정재의물도설은 당악정재에 쓰이는 복장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그 부분 부분의 치수까지 기록하고 있어 당악에 사용되는 의상 복원을 가능케 하고 있으며, 향악정재악기도설은 당시에 사용하던 악기에 대한 그림, 악 기에 쓰인 재료, 치수 등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악기를 복원할 수 있도록 해준다. 마지막 9권의 관 복도설은 악공들의 관복을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9권의 악집에서 특히 5권에 실린 훈민정음으로 된 '동동'과 '정읍' 등은 '악장가사'에도 없고 오로지 '악학 궤범'에서만 볼 수 있는 귀중한 국문학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악학궤범'은 당시의 음악에 필요한 사항들을 빠짐없이 총 망라한 것이며 특히 아악, 당악, 향악 등에 차별을 두지 않고 잘 서술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악기와 악제가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으나 요행히 '악학궤범'을 되찾은 덕분으로 모든 악기와 악제를 복원했던 역사적 사실이 바로 이 책의 중요성을 대변하고 있다 하겠다.


1470년(성종 1, 庚寅)

2월 화장(火葬)의 풍속을 금지함.
4월 직전세(職田稅)를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로 함.
7월 경국대전의 이전(吏典) 병전(兵典)을 시행.
11월 경국대전을 교정함.
12월 각 도에 누에치는 잠소(蠶所)를 1개씩 설치.
* 구치관(具致寬, 1406-1470) 죽음.

1471년(성종 2, 辛卯)

6월 외친(外親) 6촌의 혼인을 금지.
6월 도성안의 염불소(念佛所)를 금지하고 무격(巫覡)을 도성밖으로 쫓아냄.
10월 신숙주가 영의정이 됨.
11월 유구국 사신이 옴.
11월 세조실록(世祖實錄)을 편찬.
12월 간경도감을 폐지.

1472년(성종 3, 壬辰)

1월 음사(陰祀)를 금지함.
1월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 325개소를 혁파함.
2월 구월산(九月山) 삼성당(三聖堂)에 제사함.
3월 의학(醫學) 장려 10조를 제정함.
4월 과거(科擧)의 식년제(式年制)를 개정.
5월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
6월 주자가례에 따른 사중삭(四仲朔) 제사 이행을 검찰함.
11월 수군(水軍)의 대립(代立)을 엄금함.

1473년(성종 4, 癸巳)

6월 경기수군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를 설치함.
8월 사족 부녀자가 승려가 됨을 금지함.

1474년(성종 5, 甲午)

1월 경국대전 반포 시행.
1월 경상 전라도에 당목면(唐木棉)을 경작케함.
11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완성.
12월 서거정의 동인시화(東人詩話) 간행.
12월 경복궁 근정전, 광화문에 청기와를 올림. 경회루와 종묘를 보수함.
* 최항(崔恒, 1409-1474) 죽음.

1475년(성종 6, 乙未)

2월 여진 우량합이 경원에 침입. 건주위 이만주의 잔당이 침입.
4월 황해도 평안도 영안도에 면화(棉花)를 경작케함.
5월 대소인원의 가사(家舍)제도를 강화.
* 인수대비(仁粹大妃) 한씨의 내훈(內訓) 간행.
* 어효첨(魚孝瞻, 1405-1475),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죽음.

1476년(성종 7, 丙申)

1월 아오지(阿吾地)에 만호(萬戶)를 둠.
5월 원상(院相)을 폐지함.
10월 왜인이 가져온 황금의 사무역을 허가.
12월 노사신(盧思愼) 등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

1477년(성종 8, 丁酉)

1월 일본 통신사의 사목(事目)을 제정.
3월 일체의 사찰 건립을 금지함.
5월 의방유취(醫方類聚) 간행.
6월 유구국 사신이 옴.
7월 부녀자의 재가(再嫁) 금지를 논의.
7월 주(州), 부(府)에 사관(史官)을 두기로 함.
9월 윤자운(尹子雲)이 몽한운요(蒙漢韻要)를 올림.
10월 성균관 유생이 외출시 청금단령(靑衾團領)을 입게 함.
* 이석형(李石亨, 1415-1477), 조석문(曹錫文, 1413-1477) 죽음.

1478년(성종 9, 戊戌)

2월 홍문관 학사(學士)에게 교대로 숙직하여 시강(侍講)케 함.
3월 예문관원을 홍문관직에 배치함.
5월 유자광(柳子光) 임사홍(任士洪)을 유배보냄.
11월 서거정(徐居正) 등이 동문선(東文選) 편찬.
* 정인지(鄭麟趾, 1396-1478), 5월 윤자운(尹子雲, 1416-1478), 김질(金石+質, 1426-1478) 죽음.

1479년(성종 10, 己亥)

3월 당도종(唐稻種)을 경작시킴.
4월 일본에 통신사 파견.
5월 세조의 훈사(訓辭) 및 병법(兵法)을 편찬.
6월 왕비 윤씨(연산군 생모)를 폐함.
6월 유구국 사신이 옴.
10월 명의 사신이 건주여진(建州女眞) 정벌에 도움을 청함에, 11월에 윤필상(尹弼商)을 도원수(都元帥)로 하여 여진을 정벌.
* 구성군 준(龜城君 浚, 1415-1479) 죽음.

1480년(성종 11, 庚子)

4월 향교에 학전(學田)을 내림.
6월 유구국 사신이 옴.

1481년(성종 12, 辛丑)

3월 언문삼강행실(諺文三綱行實) 열녀도(烈女圖)를 간행 반포.
3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50권 편찬.
8월 왜인에게서 호초(胡椒) 종자를 구함.
* 두시언해(杜詩諺解)를 간행. 정극인(丁克仁)이 상춘곡(賞春曲)을 지음.
* 김수온(金守溫, 1409-1481), 박중선(朴仲善, 1435-1481) 죽음.

1482년(성종 13, 壬寅)

2월 양성지가 서적의 간행 반포를 진언함.
4월 일본국 사신이 와서 대장경을 구해감.
7월 노사신 등에게 강목신증(綱目新增)을 찬수시킴.
8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림.
10월 삼국사기(三國史記)를 간행 반포.
11월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를 다시 세움.
* 한계희(韓繼禧, 1423-1482) 죽음.

1483년(성종 14, 癸卯)

2월 왕자(연산군)을 세자로 책봉.
3월 세조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 승하함.
9월 여진족이 조정에 올 때는 영안도를 경유해서 오게함.
10월 홍문관원의 사가독서제를 부활함.
10월 건주(建州) 여진인이 옴.
12월 유구국 사신이 옴.
12월 양현고(養賢庫)를 다시 설치함.
*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죽음.

1484년(성종 15, 甲辰)

1월 교서관(校書館)을 부활.
6월 진서(陣書) 1천본을 간행하여 무신에게 배포함.
9월 창경궁(昌慶宮) 준공.
10월 활자 갑진자(甲辰字) 30여만자를 주조함.
11월 서거정 등이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진.
12월 성균관에 학전(學田)를 지급함.

1485년(성종 16, 乙巳)

1월 왜의 동(銅) 철(鐵) 무역을 관에서 관리하게 함.
1월 상인(商人)의 왜인과의 교역을 허가함.
3월 윤필상이 영의정이 됨.
4월 노사신 등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교정함.
7월 서거정 등 신편동국통감(新編東國通鑑) 57권을 편찬.
11월 경주(慶州) 길가의 동불(銅佛)을 헐어 군기(軍器)를 제조함.
12월 경기수군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를 폐지함.
* 불정심다라니경언해(佛頂心陀羅尼經諺解) 간행됨. 오대진언집(五大眞言集) 간행.

1486년(성종 17, 丙午)

4월 양계(兩界)의 수령은 문무관을 교대로 임명케 함.
9월 영안도에 장성(長城)을 쌓음.
12월 김종직 등의 동국여지승람 수교(수校) 완성.
* 어세공(魚世恭, 1432-1486) 죽음.

1487년(성종 18, 丁未)

1월 각도의 공한지(空閑地)에 둔전(屯田)을 둠.
2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간행.
4월 손순효(孫順孝)가 식료찬요(食療纂要)를 지어올림.
8월 경상도의 각 포(浦)에 석보(石堡)를 쌓음.
* 정창손(鄭昌孫, 1402-1487), 한명회(韓明澮, 1451-1487) 죽음.

1488년(성종 19, 戊申)

1월 대마도주가 황금과 구슬을 진헌.
윤1월 원각사 중수.
4월 각도의 군적(軍籍)이 완성됨.
5월 유향소(留鄕所)를 다시 설치함.
8월 최부(崔溥)가 수차(水車)를 제작함.
*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죽음.

1489년(성종 20, 己酉)

3월 이말(李末)이 만든 격수기계(激水機械)를 경기현에 설치하여 시험함.
5월 윤호(尹壕) 등이 신찬구급간이방(新撰救急簡易方)을 올림.
8월 일본 사신이 대장경을 요청함.
9월 복호(復戶)는 전세공부(田稅貢賦) 및 잡역(雜役)을 면제하게 함.
* 정난종(鄭蘭宗), 어유소(魚有沼, 1434-1489) 죽음.

1490년(성종 21, 庚戌)

1월 도첩(度牒)이 없는 승려를 충군(充軍).
2월 전국에 서적을 널리 구함.
4월 병오년 군적이 이룩됨.
5월 울산 염포성(鹽浦城), 6월 거제도 조라포성(助羅浦城), 8월 동래(東萊) 부산포성(釜山浦城), 9월 남해(南海) 평산포성(平山浦城) 등 남해안에 성을 쌓음.
10월 순천(順天) 오동포(梧桐浦, 현재의 여수)에 전라도 좌수영(左水營)을 설치함.

1491년(성종 22, 辛亥)

1월 여진족 우량합이 경흥에 침입.
3월 사사전(寺社田)의 전세(田稅)를 관에서 거두게 지급함.
3월 김중보(金仲寶)가 주사(朱砂)로 수은(水銀)을 제조함.
8월 홍문관원의 사가독서를 부활함.
10월 강변(江邊) 제진(諸鎭)에 축성을 명함.
11월 도원수 허종(許琮)이 두만강방면의 여진 우량합을 정벌.

1492년(성종 23, 壬子)

1월 소(牛)의 도살을 금지함.
2월 공사천(公私賤) 소생을 보충대(補充隊)에 편입하여 종량(從良)케 함.
3월 유구국에 대장경 1부를 보냄.
3월 왜인의 사무역을 허락함.
4월 이극균(李克均)이 편전(片箭)을 새로 제조함.
7월 대전속록(大典續錄) 완성.
7월 경기 충청도 양전.
* 평해(平海)읍성, 양산(梁山)읍성을 쌓음.
* 김종직(金宗直, 1431-1492), 남효온(南孝溫, 1454-1492) 죽음.

1493년(성종 24, 癸丑)

1월 재산 청송(聽訟)의 기간을 5년으로 함.
2월 의방요록(醫方要錄) 간행.
5월 용산강(龍山江)에 독서당(讀書堂)을 만듦.
8월 성현(成俔) 등이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완성.
9월 경상 전라도 양전.
* 심회(沈澮, 1418-1493),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죽음.

1494년(성종 25, 甲寅)

2월 삼포(三浦)에 거주하는 왜인의 경작지에 과세(課稅)함.
3월 쌀값이 올라 빈민들이 봉기.
8월 강목교정청(綱目校正廳)을 다시 설치함.
12월 성종 승하, 세자(연산군) 즉위.
* 허종(許琮, 1434-1494), 이극증(李克增), 유호인(兪好仁, 1445-1494)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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