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슬픔
한명희
파란시선 0146
2024년 8월 20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35쪽
ISBN 979-11-91897-84-5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의문은 질문의 사생아
[기쁨의 슬픔]은 한명희 시인의 네 번째 신작 시집으로, 「이불 속을 드나드는 새소리」 「아주 잠깐 찾던 이름처럼」 「달리는 사막」 등 61편이 실려 있다.
한명희 시인은 2009년 [딩아돌하]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마른 나무는 저기압에 가깝다] [마이너리거] [아껴 둔 잠] [기쁨의 슬픔]을 썼다.
한명희는 서정시의 오랜 전통을 허문다. 한명희에게 정서적 동화작용은 거짓으로 다가온다. 그가 볼 때 어떤 대상도 주관성에 동화되지 않는다. 주체가 대상을 자신과 동일시할 때, 대상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다. 한명희의 시들은 서정시의 오랜 문법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그가 볼 때 독자에게 자신과 동일한 감정이입을 요구하는 것은 착각이다. 어떤 꼬심에도 독자는 현혹되지 않는다. 독자는 저마다 다른 생각과 정서를 가지고 있다. 공감이란 동일한 감정의 일시적 소유에 지나지 않는다. 한명희는 독자에게 공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가 볼 때 예술의 역할은 공감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 Brecht)가 ‘소외 효과(alienation effect)’를 통해 관객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한명희는 독자가 자신의 시에 아무 생각 없이 매몰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처럼 한명희의 시들은 관객(독자)들을 무대(텍스트) 밖으로 자꾸 밀어낸다. 그는 독자가 수동적 소비자가 되어 공감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려면 시인은 독자의 감정이입을 막고 독자를 텍스트 밖으로 계속 밀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는 그가 배열한 문장들을 보고 따지기 시작할 것이다. 한명희는 예술이 도달해야 할 곳이 바로 이 지점이라고 본다. 예술은 일방적인 명령의 전달도, 수동적인 감동・감화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향유하는 자의 딴지 걸기가 발생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한명희의 시에서 돋보이는 것은 부정의 도저한 힘이다. 그는 서정성을 지운 자리에 삭막하게 사물화된 현실을 배치하고 그것을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그의 문법에 의하면 진정한 서정성은 그것을 부정한 다음에야 비로소 온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쓴다면, 그것은 야만”이라고 했던 아도르노의 말을 염두에 두면, 또 다른 비극의 시대에 서정시를 쓰는 것 역시 야만이거나 허영일 수 있다. 한명희는 서정적 공감이 아니라 비판적 질문을 유발하면서 ‘서정 이후의 서정’을 찾고 있다. (이상 오민석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설렘과 떨림 사이”에 “눈물과 한숨 사이”에 “바람과 바람 사이”에 “이승과 저승 사이”에 “그대와 나”의 광휘로운 비탄의 휘장이 걸려 있다. 생의 슬픔과 아픔과 기쁨을 감싸안는 시집을 연다. “꽃잎을 쥐고 흔드는” 바람이 시의 경계를 넘어 넘어 불어 간다.(「간(間)」) 나비 날갯짓 같은 시 편편(片片)이 영롱하게 반짝인다. 시의 빛이 넘실 넘실거린다. 하나의 언어가 단독적인 이미지를 획득하여 새로운 시가 되는 길. 한명희의 언어는 세필이었다가 망치와 정이었다가 봄날 벚꽃잎 스쳐 지나가는 한없이 부드러운 바람의 손길이었다가 직정 흘러넘치는 웅혼한 외침이 된다. 천변만화의 광폭(廣幅)을 펼쳐 낸다. “나는 돌이다 가지치기 당한 가로수이며 비 오는 들길을 걷다 납작 엎드린 민들레꽃이며 바람에 흔들리다 바람에 주저앉은 나비이다”(「이렇게」). 언어의 운동이 가닿은 곳에서 독자는 찬란한 ‘이미지-사건’을 목도한다. “죽은 자의 몸에서 그림자를 떼어 내”면(「타동사의 시간」) “나를 두고 간 사람”을 잊을 수 있을까(「아마도 사월」). 아니, 버릴 수 있을까. 이별과 사별이 있었다. 남겨진 사람과 떠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도 있다(「시인의 말」). 망각이 시인을 포식한들 그가 사랑 없이 살 수 있을까. “사랑할 게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날”이 우리를 기다린다(「짱돌」). 우리는 오늘도 바로 그날을 살고 있다. 이 시집을 압축하는 구절 “기쁨의 슬픔”은 음악이 되어 따스한 불빛처럼 우리를 위무한다(「질문은 의문의 사생아」). “내게 온 모든 음악은 헤어지고 싶은 것들의 미래”가 되겠지만, “새로 태어나기 위해/우리가 뭔가를 찾아 헤맬 때 떨어져 소멸을 기다리는 꽃들의 상처”만 남겠지만(「녹턴」), 한명희의 시는 생의 깊은 어둠을 따스하게 껴안는다. 먹먹해진다.
―장석원(시인)
•― 시인의 말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다
변화를 바라던 길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꽃에서도 땀내가 나는 곳을 찾았고
나와는 다른 기분과 감정 속에
머물기를 바랐으므로
너를 믿는다 열두 개의 감정과 기분 속에
태양을 만나고 온 것처럼 말했으므로
•― 저자 소개
한명희
대전에서 태어났다.
2009년 [딩아돌하]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마른 나무는 저기압에 가깝다] [마이너리거] [아껴 둔 잠] [기쁨의 슬픔]을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이불 속을 드나드는 새소리 – 11
다정도 어깨동무를 하고 – 12
이국으로 가는 비행기 – 14
못다 쓴 일기―거기 – 16
망상어―잠자는 남자 – 18
아마도 사월 – 20
이렇게 – 21
검정은 폭군 – 22
짱돌 – 24
그친 비처럼 – 26
마네킹 – 28
퍼즐 게임 – 30
나는 누가 버린 저녁인가 – 32
221129 – 33
바깥 – 34
제2부
영영―조치원 – 37
타동사의 시간 – 38
질문은 의문의 사생아 – 40
쑥골 – 42
그 집 – 43
술독 – 44
아주 잠깐 찾던 이름처럼 – 46
새벽은 어제를 다녀간 길들을 기억한다―폐가 – 48
못다 쓴 일기―풍선 – 50
흑백영화 같은 밤 – 52
산책 – 54
가로수 혹은 풍선 사이 – 56
준치 – 58
물고기와의 하룻밤 – 60
연산홍 – 61
제3부
물의 나라 – 65
못다 쓴 일기―적산가옥 – 66
번개 – 68
알러지 – 69
최후의 만찬 – 70
덜컥 – 72
프리즘 – 74
달리는 사막 – 76
이건 또 뭔 소린지 – 78
깜보 – 80
지구는 둥그니까 – 81
바나나로 인한 빨간 고추의 모노드라마 – 82
프로시니엄 – 84
밤길 – 86
간(間) – 88
제4부
졸음을 견딘 눈꺼풀처럼―욕지도에서 – 91
가출 – 92
통영 – 94
오늘도 어제처럼 – 96
억새, 여름 이후―희규에게 – 98
못 다 쓴 일기―사슬 – 100
여우비 – 102
깃털만 남아서 – 104
숲이 숨어 있는 나무 – 106
나도샤프란 – 108
해변의 카프카 – 110
녹턴 – 112
병풍 – 114
이후 – 116
도약 – 118
지갑에서 꺼낸 스무 살―오월 – 120
해설 오민석 불화하는 세계와 서정 이후의 서정 – 121
•― 시집 속의 시 세 편
이불 속을 드나드는 새소리
빗자루를 들고 분주하다 서랍을 열어 보던 손은 장롱을 넘어뜨리고 이불을 끄집어낸다 해바라기 그림과 물망초 무늬의 벽들은 여전히 수직이고 수평이고 위아래 없이 평편한데 끄집어낸 이불 속을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새소리 행운목이 있는 창문 너머 교회 앞에서 찍힌 사진은 누가 줬더라! 야구 배트랑 글러브랑 앵무새 깃털이 달린 모자랑 꿈을 꾸듯 서랍을 뒤지면 없던 아이 하나 목각 인형처럼 웃고 낯익은 일기장엔 얘들아 밥 먹고 학교 가야지 귀를 잡아 일으키던 알람 시계, 꼬리를 흔들며 따라오던 강아지 토담을 끼고 숨바꼭질하던 골목들 보이는데 머리카락 휘저어 놓는 바람처럼 쓸데없이 분주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손과 빗자루는 좀 치워 주시지 먼지 풀풀 날리는 장롱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새소리 ■
아주 잠깐 찾던 이름처럼
화면이 켜지자 남자는
가방에서 서류 대신 사과를 꺼내 놓는다
저문 밤 혼자 먹던 밥처럼 홀쭉해진 가방을 드는 순간
이미 여러 번 겪은 꿈처럼 여자는 있다가 없고
푸른 사과가 시퍼렇게 멍이 든 사과가
꺼내 놓은 사과와 화면 속에서 굴러다닌다
광폭한 신의 모습이 저럴까 싶게 눈보라 휘몰아치고
폭죽처럼 우박이 터지던 날 그리스 신전 같은
오페라하우스 앞에서는 운명의 힘 서곡이 울려 퍼지고
남자의 손을 빠져나온 가방과 굴러다니던 사과가
눈보라 휘몰아친 족발집을 나와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있다
차에 치이고 사람들의 발길에 차인 듯이
식탁 위에 있던 술잔이 떨어진다 붉으락푸르락
사과나무 아래서 아주 잠깐 찾던 이름처럼
으깨진 생을 떠먹다가 우편배달부가 나타나서
속이 텅 비다 못해 쭈글쭈글해진 가방을 희망처럼 끌어안고
남자는 엎질러진 술이 되어 여자를 기다리는데
예측은 빗나가기 위해 존재하듯이
샹들리에 불빛이 별처럼 반짝이는 라운지에서
검은 망토를 두른 바람의 말이 히이잉 울지도 않고 달려온다
사람을 찾던 전단지처럼 서류를 날리며
시끌벅적한 시장 한 귀를 잡고 사과나무가 있는 언덕을 거쳐서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이미 여러 번 겪은 꿈처럼 있다가
아파트 너머 들판에는 시퍼렇던 사과가 빠알갛게 익고 ■
달리는 사막
나는 수혈증 환자다
내가 목이 마를 때 그래서 물보다 먼저 혈육이 나를 끌어당기는지도 모른다 청주 근처 북일면 외평리 그녀 집 과수원에는 피보다 진한 우물이 있었다 나는 그 우물 속으로 들어가 내 이름을 달리는 사막이라고 바꾸고 싶었다
어린 시절에도 피를 나눈 가족들의 서사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목도리도마뱀이 살고 있는 사막에 대해서는 알고 싶은 게 많았다
목도리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따뜻했으므로 도마뱀이 사는
호주 북부와 뉴기니 남부로 가는 지도를 펼쳐 놓고
이놈의 자식 공부는 안 하고 회초리를 든 엄마가 가방을 뒤지고 책장을 넘길 때면 나는 언제라도 목도리도마뱀처럼 잽싸게 달려가 그녀의 우물 속으로 숨는 법을 배웠다 우물에는 언제나 맑은 피가 솟고 투명하게 살아서
그래서일까 그녀가 떠 준 목도리를 두르고 수혈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는 나는 지금 한겨울 과로로 쓰러진 택배 기사다
나를 쥐 잡듯 하던 엄마는 판사나 의사가 되길 바랐지만 함박눈 밤새 내려 수혈이 필요한 길은 길임을 하얗게 잊은 듯 길가 나무들 뼈만 남은 서로의 핏줄처럼 서 있고 지금은 흔적도 없는 그녀 집엔 사막을 달리던 이름만이 남아서 과수원 우물 속을 드나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