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莽卓操懿
중국 역사상 한나라 이후부터 조위 때까지의 4명의 역적을 가리키는 역사용어로, 왕망, 동탁, 조조, 사마의의 4명을 말한다. 망탁조의는 이 4명의 성을 제외한 이름을 따온 말이다.
당나라 사람 조인(趙璘)의 저서 《인화록》(因話錄)에 처음 등장하는 표현으로,《송사》(宋史)에도 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 넷 모두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조정에 출사해 봉록을 받아 먹던 국가를 무너뜨린 자들로,
왕망은 선양의 시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찬탈(簒奪)의 시조'로 이 멤버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동안에 황제가 되었다.
동탁은 제위를 노렸으나 헌제의 선양이란 미끼에 걸려 죽음을 맞았고,
조조와 사마의는 생전에 황제가 되지 않았으나 그 자손들이 황제가 되면서 황제로 추존되었다.
아예 조조는 '나는 오히려 주문왕을 따르겠다'는 말을 자주 하며 자신 스스로가 천자가 되지는 않겠으나 후대에 결국 조씨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노골적으로 하였다. 역심이 없는 순수한 발언이라고 보기엔 이미 조조가 헌제를 수없이 겁박하였고, 순욱이라는 희대의 명신이자 조조 자신이 "나의 장자방"이라 스스로 불렀던 인물을 숙청하면서까지 위왕에 오르는 야욕을 보였으므로 의도는 명확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황제의 자식을 회임한 후궁 동귀인을 죽이고, 효헌황후 복씨를 죽였으며, 복씨 소생 아들들까지 죽인 행위는 결코 신하의 행위라 볼 수 없다.
원술은 뽑히지 않았다. 다른 네 명의 경우 중앙 정부를 장악하고 황제를 압박하여 선양을 받아냈으며, 이를 통하여 이전까지의 황제를 폐위시키고 왕조를 교체한 데 비해, 원술은 지방 군벌로서 자의로 황제를 참칭하였기에 자기 지배 지역 바깥에서는 황제로 인정받지 못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 구성에서 실제 찬탈은 못한 동탁을 빼고, 실제 찬탈을 도모한 동진의 권신이었던 환온(桓溫)을 추가하여 망조의온(莽操懿溫)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 외에 양기(梁冀), 홍공(弘恭), 석현(石顯) 등 한나라의 간신 이름을 적당히 배합해 기현망조(冀顯莽操), 망탁공현(莽卓恭顯)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고정된 경구가 아니고 단순히 인명을 나열하는 것이기에 문헌에 따라 구성이나 어순이 다양한 편이다.
그러나 홍공, 석현과 양기는 간신이였으며 황제의 권위를 우습게 보고 국정을 농단해 패악을 부린 것은 맞지만 최소한 역심을 품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망탁조의와 같이 엮기에는 어폐가 있긴 하다.
후세 사람들에게 이 '망탁조의' 4명은 역적에 대한 기준이자 대명사가 되었다.
이에 사문난적과 함께 왕조 시대 동아시아에서 정치적 욕설의 투탑을 이루기에 이르러, 맘에 안 드는 누군가를 역적이나 다름없다고 비난할 때 반드시 튀어나오는 말이 되었다.
중국의 4대 역적 망탁조의가 역사 속에만 존재했다면 좋았을 텐데,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에는 지금 살아있는 망탁조의가 득시글하다.
신문을 펴고 TV를 켜고 스마트폰을 열면 서푼도 안되는 권력으로 국민을 겁박하는 자, 번지르르한 세 치 혀로 국민을 속이는 자, 국민의 이름을 팔아 제 배 속만 채우는 자들이 판을 치고 있다.
입이 아플 정도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주며 신문을 접고 TV를 끄고 스마트폰을 닫는다.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는 위안으로 나를 달랜다
■ 斯文亂賊
주자의 가르침인 성리학의 해석을 벗어난 학설을 펼치는 사람을 비방할 때 사용되던 멸칭.
한자어 '사문(斯文)'은 풀이하면 '(바로) 이 학문'이라는 뜻인데, 이는 유교를 의미한다. 유교를 국시로 삼은 여러 나라에서 학문이라는 단어는 별도의 수식 없이 그 자체로 유학을 지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구체적 용례는 성리학이 확실하게 자리잡은 이후에 나타난다. 흔히 조선 후기 성리학이 교조화되면서 노론 치하에서 반대 세력의 인물들이 사문난적으로 몰려 매장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사문난적 논란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고, 실제로는 다 정치적인 이유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용한 것이지만 부작용으로 조선의 학풍을 더욱 보수적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