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림(서천)이씨 대동보 편찬
갑진년(甲辰年) 서문(序文)
우리 삶의 근원(根源)을 탐색
시공(時空)의 존재인 인생은 나무에 뿌리가 있고 물은 원천이 있음을 일찍이 깨달았다. 서림(서천)이씨 대동보는 우리 삶의 근원(根源)을 탐색하여 우리의 때(時)와 곳(處)을 다시 각성케 한다. 그로서 우리의 나아갈 길을 또 가리키고 있어 희망의 깊은 가치를 일깨운다.
西川은 본래 백제의 설림군(舌林郡)이었다. 혹은 남양(南陽)이라고 한다. 신라 때 설리정(舌利停)을 두었고, 757년(경덕왕 16) 서림군으로 바꾸어 남포(藍浦)와 비인(庇仁)을 영현(領縣)으로 하였으며 웅주(熊州)에 예속시켰다. 1018년(현종 9) 가림현(嘉林縣)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에 서림이 지금의 西川으로 개칭되어 서림. 서천으로 병서하고 있다.
서림(서천)이씨는 이 땅에서 면면히 횃불을 들었고, 여러 인연(因緣)과의 결속으로 한국 민족의 수단(繡緞)을 곱게 수(繡)를 놓아 아름답게 짠 비단 직물(織物)처럼, 빛나는 명문(名門)이다.
서천이씨 대동보 편찬인들은 역사와 문화에 깊은 관심과 정열을 오래 쏟았다. 그 긴 씨족의 역사를 사방에 산재한 문헌과 자료들을 모아 정리하고 체계적으로 구성한 서천이씨의 훌륭한 씨족사(氏族史)를 빚어냈을 뿐만 아니라 그 연척(緣戚)들 사이의 관계까지도 신중히 살펴서 밝혔으니 그 노력이 참으로 빛나고 있다.
서림(서천)이씨는 고려 초기의 이익존(李益存)을 시조(始祖)로 삼고 있다.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시다. 가승에 따르면 뒤를 이어 대대로 고려조정에 출사, 명문(名門)으로 내려 왔다.
중시조가 되시는 이언충(李彦忠)은 고려 1314년(충숙왕 1) 때의 인물로 원나라에 4년 동안 억류돼 있던 충숙왕을 고려로 모셔와 복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에 따라 충숙왕으로부터 충경공(忠敬公) 시호를 하사받고 벽상공신이 되었으며, 서림(서천)을 본관으로 정하게 됐다. <고려사> 56권 ‘지제십편’에 기록돼 있다. 앞서 충선왕에 공이 있어 知西州事로 승차시킨 사실이 고려사에 기록이 보인다.
서림(서천)이씨 네를 따라 그 인연 중의 한 경우인데, 청주한씨(淸州韓氏) 시조 한란(韓蘭 853~916)은 고려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다.
이익존(李益存) 시조와 동년대이다. 내 외조부(李千榮)와 외숙, 외사촌들 그리고 부모님을 서천이씨 대동보에서 접하는 순간, 그 벅찬 감동은 전율감이었다. 끈끈한 혈연의식은 만대(萬代)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았다. 고려 초기부터 천년 세월 서천 고을에서 살아온 사실도 대동보에 밝혀져 있다.
새로운 문명 인터넷이 발달되어 씨족(氏族손)과 후손들이 쉽게 자기 계보(系
譜)와 조상들을 살펴보고 자긍심을 느낄 수 있도록 어려운 한자를 번역하여 한
글을 병기해서 웹, pc등을 통하여 어디서나 쉽게 찾아 볼 수 있도록 인터넷
족보를 간행하려 함에 대종회장 이 종성과 사무국장 이 종호가 서문(序文)를
청하니 이 집안의 외손인지라 글은 잘 못쓰지만 사양 할 수가 없다
서천이씨와 함께 이를 통하여 청주한씨 역시 손을 잡고 서천 고을의 빛나는 유산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그 조화(調和)를 모범으로 보여주면서 우리민족의 성씨문화(姓氏文化)를 창도하게 되지 않겠는가.
서기 이천이십사년(2004년 갑진년) 1월에
사) 우리역사교육원 교수 한 문수(韓文洙)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