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한인들이 갖는 직업은 크게 <그로서리>라고 말하는 미니슈퍼와 직장생활의 두 직종이 주를 이뤘다.
나는 흔히들 영어를 몰라도 할 수 있다는 그로서리를 아예 염두에서 뺐었다. 남미에서 휴일도 없이 하루 열 다섯 시간씩 일하는 구멍가게에서 학을 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아이들 나이가 어려 노동력도 문제였다. 아이들이 좀 컸으면 아내가 틈틈이 도울 테니 노동력이 <1.5>라도 되련만 나는 완전히 <1> 이었다. 또 직장이라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최저 임금 근처의 불안정 된 잡일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음도 잘 알고 있었다. 설사, 어느 능력 있는 사람을 알아 아무 직장이든 마련해 줄 테니 마음대로 찍어 보라는 행운이 있다 한들 내 영어 실력으로 가질 수 있는 직장의 한계는 뻔했다.
결국 내가 찾아야 하는 직업은 대략 10만불 정도 투자해서 <밥걱정>이나 면 할 수 있는 <스몰 비지네스>라는 결론은 쉽게 나왔다. 단, 험하고 힘든 일은 괜찮지만 시간이 길다면 꺼려졌다. 문제는 이런 비지네스를 어떻게 찾느냐, 였다. 마구 설치고 다닌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지렁이 잡이도 시간이 지나며 익숙해져 갔다. 처음에는 밤을 꼬박 새우고 낮에 자야 하는 생활이 고통스러웠다. 피곤하고 졸려도 눈을 감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수면상태와 깨어 있는 사이의 꼭 중간에서 맴돌기가 일쑤였다. 집안의 움직임이 또렷이 감지되어 잠 속으로 빠져들지 못하면서도 희한하게, 사방에서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꿈은 계속되었다. 잔디밭이 아니라 머릿속에 굴을 뚫어 놓고 차량이 왕래하듯 벌건 지렁이들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마디 마디의 수축과 이완까지 확대되어 뚜렷이 보였다. 어떤 때는 지렁이들이 등을 떠받치고 올라와 괴로워하다 깨면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러나 밴 트럭의 덜컹거림이 자장가가 되어 단잠에 빠져 들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렁이는 주로 골프장에서 잡지만 가끔은 농장으로도 갔다. 토론토에는 어디고 잔디 있는 곳에는 지렁이가 있었다. 왕년에 한 가락 하던 아줌마들은 비가 오면 자기 집 정원이나 가까운 공원에서 대여섯 깡통씩 잡아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말하자면 후리랜서 인 셈이었다. 그런 날은 구 사장이 일일이 돌며 픽엎 하느라 시간이 배나 걸렸다.
먼 곳으로 갈 때는 세 시간도 걸리지만 보통은 두 시간 이내의 거리였다. 처음에는 서너 시간을 화물칸 같은 차 안에서 보내는 게 그렇게도 무료하더니 차의 율동이 자장가가 되면서 어느새 목적지에 와 있곤 했다. 그래도 가끔은 차 안에서 흥겨운 파티가 벌어 질 때도 있었다. 특히 아줌마 패거리들이 타는 날은 그렇다. 아줌마들이라고 하지만 환갑을 넘긴 사람들도 많은데, 그랬다고 우습게 보았다간 큰 코 다친다. 이들이 바로 뽑새의 원조 격인 빠끄미들이었다, 보통은 은퇴해 있지만 그야말로 심심풀이로 가끔씩 나오는데, 이들이 타면 우선 먹거리가 즐비했다. 떡도 인절미나 빈대떡 등 다양하고, 고소하참기름을 듬뿍 바른 참나물도 곁들인다. 물론 나물들은 직접 뜯어와 무친 것이라 더 맛있다. 그랬다고 아주 공짜는 아니었다.
“ 자, 참기름들 목구멍에 발랐음 노래부터 한 곡조씩 돌려!”
왕년에 <안 나오면 쳐들어 간다 쿵 짝>에서까지 버티던 사람도 이 아줌마들 앞에서는 용 쓸 재간이 없었다. 뛰어 봐야 발뒤축이라고, 좁은 차 안에서 슬그머니 변소를 간다며 일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은 둘 이상 모이면 노래 잘하는 사람이 하나는 있게 마련. 강춘이가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노래는 못하는 사람 당사자도 고역이지만, 못하는 노래 들어주기도 또한 고역인 법이다. 강춘이가 나타나면서 그런 고역은 말끔히 가셨다. 노래를 어찌 그렇게 구성지게 뽑는 지, 또 무슨 노래를 그리 많이 알고 있는 지…… 그의 노래는 세련미와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구성지게 꺾어 넘기기는 나훈아도 물럿거라, 정도였다. 원래, 유행가 가사라는 게 자신의 실연 얘기를 그대로 옮겨 쓴 것 같아 가슴 저려지는 속성이 있게 마련이지만, 강춘이야말로 그렇게 보였다. <…술에 타서 마시고…>, 라던가 <야윈 두 뺨에 흘러 내릴 때> 같은 구절을 뽑을 때는 그대로 울어 버릴 것 같았다. 스물 일곱의 펄펄한 청년이 무슨 한이 저리도 큰 것일까. 그런데 그랬다. 강춘이는 지금 한창 실연 중이었다. 그 대상이 의외로 미스 차였다. 장기와 까투리가 한 쌍일 것 같지 않은 외모처럼 미스 차와 강춘이는 외모도, 분위기도, 너무 달랐다. 세련된 여자와 성실한 남자의 불협화음 같은 게 둘 사이에는 한 눈에도 보였다.
구 사장도 아줌마들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 나이가 아니라 지렁이 잡이에서도 구 사장은 새까만 피라미에 불과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평범해 보이는 날인 데도 아줌마들이 타면 그 날은 호황이었다. 그 만큼 아줌마들은 하늘 한 번만 쳐다 봐도 제갈량처럼 그 날의 작황을 기막히게 알아 내는 도사들이었다. 아줌마들이 나오는 날은 그런 날이었다. 즐거운 관광여행이라도 떠나는 부녀회원처럼 먹고 마시며 시끄럽던 아줌마들이지만 아침에 돌아와 보면 우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돈에 연연하지는 않아 고생스레 빗속에서 잡아야 하는 날은 오히려 나오지 않았다.
“ 글쎄, 한 십 년 하니까 지렁이 냄새가 맡아지데. 붙구 있는 소리두 들리구.”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겠지만 그런 감각이 생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바꾸어 땅바닥을 기었을까 생각하니 숙연한 생각이 들었다.
1960년대 초반, 해외 인력시장이 개척되며 많은 젊은이들이 서독으로 외화 벌이를 떠났다. 남자는 광부로, 여자는 간호원이나 간호 보조원으로. 그들은 계약이 만료되자 고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제 3국으로 시선을 돌려 삶의 터전을 개척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캐나다로 흘러오게 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캐나다 이민의 개척자들인 것이다. 초창기 이민자들의 고생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말도 안 통하는 낯선 나라에서 영주 자격도 없이, 때로는 숨어까지 다니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제일 밑바닥 일 뿐이었다. 용하게 일을 잡아 직장이 있는 사람들도 한 푼의 돈을 더 벌기 위해 지렁이를 안 잡아 본 사람이 없을 정도란다. 직장이 있는 사람도 주말의 오버타임은 물론이고, 밤에는 지렁이의 두 쟙을 동시에 뛰다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단다.
“ 사람이나 지렁이나 하여튼 밝히는 놈들부터 작살난단 말야.”
짓궂은 남자 하나가 여자들 들으라고 슬쩍 음흉을 떨었다. 그 많은 지렁이가 왜 밤마다 밖으로 나오는지 의아했지만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유는 금방 알았다. 바로 교미를 붙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루살이나, 굼뱅이, 지렁이 같은 동물들을 하찮다고 우습게 보지만, 지렁이의 교미만큼은 그게 아니었다. 정력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앙반들도 직접 보고 나면 야코가 팍 죽을 판국이었다. 급한 놈은 날이 채 저물기도 전에 벌써 기어 나와 주둥이를 뾰족하게 뽑아서는 입질을 시작한다. 지렁이의 주둥이 끝은 바늘 구멍도 헤집을 만큼 가늘어 늘어난다. 그 주둥이 끝을 날름거리며 잔디 사이를 헤집는 모습은 캬바레에서 번득이는 꽃뱀이나 제비들의 눈초리와 다를 게 없을 정도다. 그러다 마침내 두 마리가 만나 주둥이를 맞대고 잘름거리는 솜씨는 더욱 가관이다. 바람께나 피워 본 남녀가 기막힌 짝패를 만나 현란한 혀 놀림을 하여도 지렁이 주둥이처럼 유연하지는 못할 것이다. 분명, 생물 시간에 지렁이는 자웅동체라고 배웠던 기억이 나는데,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암 수가 따로 있든, 한 몸이든간에, 교미를 붙는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지렁이가 인물 보고 궁합을 맞출 리도 없으련만 부루스에 녹아 흐믈거리면서도 진짜를 가늠질하는 꽃뱀이나 제비들보다 오히려 뜸을 더 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