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시 경상우도의 의병조직(초계지역)
1. 全致遠과 李大期 군의 조직
임진왜란 시기에 경상우도의 草溪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한 全致遠과 李大期는 독자적으로 활동하다 후기에 金沔과 鄭仁弘의 휘하로 편제되었다. 초계에서 의병이 조직된 것은 1592년 5월 초였다. 그것은 초유사 金誠一이 通文을 돌려 의병을 장려하고 난 이후였다. 구체적으로 5월 8일 이대기가 李大約, 李胤緖와 함께 향병 모집을 모의하였다.8) 전치원은 5월 12일에 사저에서 아들 全雨 全雯 조카 全霽를 비릇 家僮과 동리인 수십명을 거느리고 기병하였으며, 장인 李精과 함께 外面人을 소모하였다.9)
그런데 초계에서 의병이 본격적으로 조직된 것은 5월 13일이었다. 이대기와 전치원이 지역의 士族들과 기무를 논의하자 수천명이 조직되었다. 이때 의병은 내군과 외군으로 편성되어 내군은 이대기, 외군은 전치원이 통솔하였다.10) 이처럼 의병 초기에는 전치원과 이대기 군도 각각의 지역적 기반을 이용하여 향병을 소모하였다. 때문에 초계의 의병은 초기의 성격이 향병이었으며, 의병 조직은 고을의 유력인사를 중심으로 한 향토방위군이었다. 그러나 의병의 구성과 조직력은 다소 취약하였다. 이에 동쪽 李海龍, 남쪽 卞玉希, 북쪽 全致遠, 서쪽 金瑛이 독려하여 의병의 토대를 마련하였다.11) 이러한 모습에서도 의병의 기반이 在地士族의 지역적 토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초계 의병은 1592년 6월 9일에 정식으로 조직되었다. 그것은 남명의 문도인 郭율 이 초유사 金誠一에 의해 6월 9일 假郡守로 부임하면서였다.12) 이때 곽율은 모든 軍律과 관 군기, 관수물을 내외 의병장에게 분속시켰다. 그리고 곽율 자신은 초계 의병장의 참모장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관군과 의병이 지역내에서 상호 지원과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은 경상우도 의병의 특징이었다.
한편 다수의 의병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군량은 자체 조달하거나 국가의 지원을 받았다. 邑吏들은 군자 조달 분야에서 활동하였으며, 全致遠은 가산을 군량으로 내놓았으며, 의병을 부양할 군량미가 부족하자 사비로 조달하였으며 관곡을 취하지 않았다.13) 이러한 모습은 의병 초기부터 초계의 의병이 관군과 대립적이지 않고 상호 협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로서 경상우도 의병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전체적으로 경상우도에서는 경상감사 金수와 의병장 郭再祐의 대립이 있었지만, 경상우도는 초유사 金誠一의 활동으로 의병과 관군의 협력이 이루어졌던 지역이었다.14)
먼저 초계의 의병장 전치원과 이대기의 의병 상층부 조직 문제이다. 초기의 향병 단계에 관의 지원이 더해지면서 늘어난 군사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정식으로 의병으로 조직되었다. 무엇보다도 의병의 군수물자는 관내 인사들의 소모로 충당되었으며, 의병의 지휘 통솔은 의병장들이 담당하였다.
8) 李大期, 『雪壑先生文集』 권2, 壬癸日記, 通諭境內文.
9) 全致遠, 『濯溪集』 권1, 壬癸別綠.
10) 『濯溪集』 권1, 年譜.
11) 『雪壑先生文集』 권2, 慰諭一方民文.
12) 李魯, 『龍蛇日記』.
13) 『濯溪集』 권1, 年譜.
14) 李魯, 『龍蛇日記』.
<표 1> 全致遠과 李大期 군의 의병 조직15)
직책 성명 참고사항
內義將 이대기(李大期) 李希顔 외손, 曺植·李希顔 문인, 鄭仁弘 문인
外義將 전치원(全致遠) 李精 壻, 조식·이희안 문인
參謀都總 곽율 (郭율) 假郡守, 조식 문인
造鍊將 노세기(盧世麒) 未就 萬戶
조련장 정석조(鄭錫祚)
奮擊將 이해룡(李海龍) 訓鍊主簿
防禦將 변옥희(卞玉希) 조식 문인
調護將 전제(全霽) 전치원 從子, 이대기와 강론
조호장 이대약(李大約) 이대기의 弟, 전치원의 壻·문인
左輔將 이?(李?)
좌보장 안철(安喆) 判官
右輔將 이윤서(李胤緖) 이희안 종손, 이대기·全雨와 강론,
全雨의 壻
우보장 정석희(鄭錫禧)
收拾軍器將 류세온(柳世溫) 武科, 조식 문인, 이대기에 修學
수습군기장 김준(金俊) 사족
전치원(全致遠)은 와유헌(臥遊軒), 이대기는 설학재(雪壑齋)를 마련하여 학문의 전수와 함께 향권을 장악하고 있던 인물들이었다.16) 더욱이 전치원과 이대기는 黃江 李希顔을 배향하는 淸溪書院의 건립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나중에 여기에 배향되였다.17) 한편 군사를 이끌고 활동한 인사로 주목되는 李海龍과 盧世麒 등은 武에 뛰어난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전투력을 가질 수 있었다. 또 지역적으로 이들은 초계에 한정되고 있는데, 이것은 의병의 구성과 성격에 있어 인적 자원과 군수 마련을 지역에서 직접 해결하는 향병이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이대기·이대약은 형제 관계,
全致遠과 全霽은 숙질 관계, 전치원과 이대약, 전우와 이윤서는 사돈 관계였다.
이들은 학문적으로 연결되었는데, 조식과 이희안의 문인이 많았다. 이대기 전치원 변옥희 유세온은 조식 문인, 이대기 전치원은 이희안 문인, 이대약 김영은 전치원 문인, 전제 전우 유세온은 이대기와 교유하였다. 특히 이 지역의 대표적 사족인 황강 이희안의 문인이 다수였다. 이렇게 보면 이들은 대부분 중첩적 혼인과 학문적으로 연결되어 향촌사회를 강력하게 유지하고 있던 재지사족들이었다.
그러나 전치원과 이대기의 의병 조직은 의병 후기에 오면 경상우도 金沔 군과 정인홍의 휘하로 편제되었다. 이때 인근 합천의 정인홍 휘하로 전부가 편제되지 않은 것은 의병의 변화와 통제, 그리고 당시의 정국구도와 연계되어 이해해야 한다.19) 사실 경상우도에서 정인홍의 독자적인 의병 유지는 향촌사회에서 비난받기도 했지만, 난 후에 북인정권을 여는 명분이 되었다. 그렇지만 전쟁중에는 남인과 서인이 협력하여 국난을 극복하였는데, 남인의 초유사 金誠一과 金沔이 경상우도의 의병을 총괄하고 있었다.20) 이것은 국가의 의병통제책과 연계되어 있었는데, 全致遠은 金沔의 外方將으로 편제되었다.21)
다음으로 전치원과 이대기의 의병 하층부의 조직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사족들은 在地地主로서 민들을 家奴로서 직접 지배해왔으며, 향촌조직을 통해서 面里人들을 統制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직접 동원하였다. 한 예로 전치원과 변옥희는 가동과 동리인 수십명을 각각 동원하였다.22) 이 외에 각 지도부에 참여한 인사들도 각각 家僮을 동원하였다. 둘째, 자발적으로 의병군에 참여한 향민들도 있다. 이들은 일본군의 만행으로 민족적 적개심이 일어나자 자발적으로 의병군에 가담하였다. 셋째, 관군이 참여하였다. 초유사 金誠一에 의해 초계 가수로 임명된 郭율 은 邑屬과 邑軍을 의병에 이속시켰다.23) 아울러 수군들이 의병군에 가담하여 낙동강 전투에서 뛰어난 수전을 전개하였다.24) 이러한 모습은 임진왜란 초기에 민심을 얻지 못한 관찰사 金수와 관군이 도망하였지만, 도망한 관군들이 의병장의 휘하에서 활동하였음을 말해준다. 이 때문에 의병은 초기부터 상당한 전투력을 가질 수 있었다.
16) 『濯溪集』 권1, 年譜와 『雪壑先生文集』 권1 年譜.
17) 서원 건립과정과 서원의 주도권 장악에 대해서는 강상택, 「조선후기 경남지역의 서원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96∼100쪽 (『慶尙道輿地集成』 草溪邑誌).
18) 경상우도 의병장들의 중첩적인 혼인은 李魯, 『四姓綱目』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19) 졸고, 「松菴 金沔의 義兵活動과 役割」 『南冥學硏究』 2,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1992.
20) 졸저, 『壬辰倭亂과 慶尙右道의 義兵運動』, 혜안, 2001, 247∼258쪽.
21) 『濯溪集』 권1, 壬癸別錄.
22) 『濯溪集』 권1, 壬癸別錄.
23) 『濯溪集』 권1, 壬癸別錄.
24) 『濯溪集』 권1, 卞坪川實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