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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왕이시며, 구원주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세 시간이 지난 제 육시부터 제 구시까지 이 땅에는 초자연적인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먼저는 제 육시부터 제 구시까지, 즉 오늘날의 정오부터 오후 세시까지 하루 중 태양 빛이 가장 밝고 강렬한 그 시간대에 해는 빛을 잃었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위해, 사람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것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슬픔이요, 세상의 빛만을 바라보고, 세상의 빛 아래에서 보여지는 것들만을 추구하는 탐욕과 욕심에 눈이 먼, 유대교지도자들과 빌라도 그리고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표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해가 빛을 잃은 것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 세상의 참 빛을 꺼뜨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초자연적인 현상은 성소의 휘장의 한 가운데가 찢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성소의 휘장이란, 일 년에 한 번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짓게 하는 휘장을 의미합니다. 당시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었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로 인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점으로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게 하는 휘장을 이처럼 완전히 둘로 찢어버리신 데에는, 앞으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단절을 가져왔고, 휘장은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을 상징하는 휘장이 찢겨진 것입니다. 이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구약 제사 제도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상징입니다. 구약 시대에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 제물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온전한 희생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단번에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 제사 없이도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우리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46절 말씀이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본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생애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자 기도입니다. 본절의 병행 구절에서 마태와 마가는 단지 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신 것으로만 기록하고 무슨 내용의 소리를 지르셨는지를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 달리 예수님이 지르신 큰 소리의 구체적 내용을 본절에서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건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려는 의사이자 역사가로서의 면모를 지닌 누가의 기록 습관 때문일 것입니다.
본절 속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은 원어상으로 ‘맡기다’, ‘위탁하다’는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당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곁에 있기를 원한다는 의미로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예수님의 이 기도문은 시편 31:5의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를 인용한 것으로 동사의 시제만을 조금 바꾼 형태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신 예수님은 성경 말씀으로 당신의 지상에서의 사역을 마치며,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앙을 마지막 기도에 담아 보여 주고 계십니다. 모든 기력을 잃고 숨을 거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혼신을 다하여 큰소리로 성경 말씀에 나온 기도문의 절규로 마지막을 장식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뢰와 신앙에 대한 모범을 보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성경 말씀으로 마지막 기도를 하신 후 숨지셨습니다. 본문 속 ‘숨지다’라는 우리말을 헬라어 원어 성경은 ‘영혼을 내주심으로 죽음을 맞이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숨지시다’라는 단어는 ‘숨을 밖으로 내쉬다’라는 뜻이며, 본절에서는 능동태로 사용되었습니다. 킹 제임스 버전 영어 성경은 ‘영혼을 내어 주었다’로 번역하였으며, 병행 구절의 원어적 의미를 살펴보면 마태는 ‘영혼을 양도하셨다’로 기록하였고, 요한은 ‘영혼을 포기하셨다’로 기록하여 예수님께서 자의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죽음의 길을 가셨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신의 생명을 기꺼이 포기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흠 없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인류 구원을 위한 대업을 완전히 이루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처럼 생애의 마지막을 하나님 말씀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믿음의 기도로 마치신 것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사도행전 7장59~60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신성모독죄로 거짓 모함을 받은 스데반 집사는 사람들로부터 즉결심판을 받고 돌에 맞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 주님과 많이 닮아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말을 예수님처럼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서 받아주시길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처럼 자신을 돌로 쳐 죽이는 자들의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의 마지막 순간이 이처럼 주님의 마지막 모습과 닮아 있다는 것은, 그가 생전에 얼마나 주님을 닮기 위해 노력해 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 성도님들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만, 2주 전 목요일 제주에는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저와 아내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또 눈은 많이 내렸지만 안전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 속에 차를 운전하여 애조로를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라수목원 인근 노형교차로를 지나자마자, 눈은 녹아 있지만 도로 위가 얼어 있는 일명 ‘블랙 아이스’에 차가 미끄러져 중앙 분리를 위해 조성해 놓은 화단과 충돌한 후 360도를 회전한 후에 차가 멈춰 섰습니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만일 차가 중앙선을 넘어 반대 차선으로 넘어갔더라면, 또 저희 차 뒤로 다른 차량이 뒤따라오고 있었더라면 대형사고가 일어날 수 있었던,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때의 몇 초가 지금도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저의 뇌리 속에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말씀, 마지막 기도를 묵상하던 가운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나는 그때 예수님처럼, 스데반처럼,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지 못했을까?”
사고가 나는 순간 저와 동승해 있던 아내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소리만 지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순간 믿음을 가진 성도요 목사인 제가 해야 할 마지막 말은 오직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는 것이어야 했지만, 그 순간 저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평소에 주님을 더욱 닮아가기 위해 노력했었더라면, 스데반 집사와 같이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드리고, 용서의 간구를 드렸을 것이지만, 주님을 닮아가기에 아직 한참 먼 사람이었기에 저는 그리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날 저를 그 사고로부터 데려가시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저의 온전하지 못한 믿음을 더 견고하게 세워가라는 엄중한 명령은 아니었을까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말씀을 하시게 될 것 같습니까? 또 어떤 기도를 드리실 것 같습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숨을 쉬는 운명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예수님이시기에 당연한 것 아닌가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과 영혼을 지니신 참 인간이심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과 똑같이 정신적, 감정적, 육체적 고통을 아시고 느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오랜 시간 견디기 힘든 수난을 겪으셨습니다.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며 심문을 당하셨고, 채찍질을 당하셨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셨고, 여러 시간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쏟으며 매달려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인류의 죄 짐을 대신 짊어지신 이유 때문에 죄에 대해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모두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 고통이 너무나 컸기에 예수님 역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고통을 다 겪으시고 급기야 운명하기 직전의 순간에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운명의 순간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바로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을 비롯한 초대 교회 성도들의 고귀한 순교의 모범이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잘 다니던 분이 마지막 운명의 순간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죽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신앙의 실제적인 체험 없이 지식과 습관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잠재되어 있던 불신이 표출되는 경우인 것 같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마지막 숨을 쉬는 그 순간이야말로 가장 진실하고도 간절한 신앙을 고백해야 할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육신의 숨을 멈추어도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받아 주실 것이라는, 그리하여 나의 영혼은 아침에 잠을 깨듯 하나님 품에서 다시 눈을 뜨리라는 소망을 가진 자에게는, 죽음의 순간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신앙의 순간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 살아 숨 쉬는 동안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고 섬길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길을 다가고, 운명의 순간을 맞을 그 때에 이르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순간 우리의 삶과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 매 순간순간 하나님께 우리의 삶과 영혼을 의탁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과 같이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습관에 따라 새벽마다 기도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당신을 모든 것을 부탁함으로 살아가신 것처럼, 우리 또한 습관처럼 아버지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부탁하는 삶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마지막 순간일지 모를 오늘 이 순간에 주님처럼, 스데반처럼 기도함으로 승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것처럼, 무고한 미움을 받고,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고,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경험함으로 정신적, 감정적, 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될 때도 있겠지만, 그 순간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순간, 마지막 기회일 수 있기에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우리를 부탁드리는 기도’를 함으로 승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무명의 성도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흑암의 골짜기를 다닐 때 주님과 그의 모범을 생각하라. 암울하고 깜깜한 절망 속에서, 심지어 인생의 최후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가 당신을 지켜 주실 것이며, 맞은 펀 세상에서 당신을 맞아주실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우리가 맞이할지 모를 우리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평생 지켜왔다고 믿었던 우리 신앙의 실체가 부끄러움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저와 여러분 모두가 매 순간 아버지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삶과 영혼을 부탁드리는, 믿음의 습관을 지님으로, 결국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들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영혼을 맡아주시고 사흘 째 되는 날 부활의 영광으로 응답해 주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은혜와 영광으로 응답되어지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