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기독교 예술사 기독교 문학에 나타난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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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09.08. 02:54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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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기독교 예술사
기독교 문학에 나타난 십자가
십자가에 대한 신학적 진술은 신약성경 외에도 2세기 초기 기독교 문학에서부터 나타난다. 『디다케(Didache)』, 『베드로의 묵시록』, 『엘리야의 묵시록』 같은 문서에서 십자가는 움직이면서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그리스도에 앞서 나타나는 표시이다.1) 『베드로 복음』은 예수가 무덤에서 나오는 것과 십자가가 나타난 것을 인상적으로 연결시킨다.2)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일요일이 시작되던 밤에 사람들은 하늘에서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고, 무덤을 지키던 두 젊은이가 빛에 싸인 채로 내려와 예수의 시신이 있는 무덤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무덤 문이 열렸고 빛에 싸인 두 인물은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세 명의 사람들이 나왔는데 두 명은 다른 한 명을 부축하고 있었으며, 제일 뒤에서 십자가가 뒤따랐다. 하늘에서 내려왔던 두 명의 머리는 하늘로 올라갔고, 그들이 인도했던 부활한 예수는 하늘들을 통과했다. “그대가 잠자는 자들에게 설교했었는가?”라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십자가로부터 “예”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이처럼 『베드로 복음』에서 십자가는 살아서 움직이며 말을 하기도 하는 등 의인화된 대상으로 나타난다.
1세기 말에서 2세기에 걸친 사도적 교부들이나 콘스탄티누스의 평화 이전까지의 교회의 교사들 중 십자가에 관한 신학적 의미나 해석을 남기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반경에 올림푸스의 메토디우스(Methodius)는, 신플라톤주의자로서 기독교를 반박하는 내용의 책을 저술했던 포르피리우스에 대항해서 『포르피리우스 반박』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남아 있는 내용 중에 십자가를 설명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이 표시(역주: 십자가)를 정의하자면 승리의 기초요,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내려오신 것이요, 세속적인 정신에 대한 승리요,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며, 진리의 날(日)을 향해 올라가는 출발점이요, 그곳에 있는 빛을 누리기 위해 열의를 갖는 자들의 사다리요, 여기 이곳에서 교회를 세우려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져 위로 들려져 올라가는 데에 초석과도 같이 사용되는 장치이다. 이런 이유로 지상의 왕들은, 나쁜 기운을 흩어 버리기 위해서 십자가의 모양을 의식적으로 채용하면서, 라틴어로 군기(uexilla)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었다. 이 표시 앞에서는 바다도 힘을 잃어 사람들이 항해할 수 있도록 잠잠해진다. 이 표시를 통해 피조물 전체가 자유를 옷 입었다. 왜냐하면 새들이 높이 날 때에 날개를 펴면서 십자가 모양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사람조차도 팔을 벌릴 때에는 십자가 모양 외에 다른 것을 보여 줄 수 없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창조 이래로 나타난 이 표시를 취하여 그것을 신성과 연합시켰으며, 장차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가 될 수 있었다.”4)
메토디우스는 그동안 교회의 교사들이 다양하게 언급했던 십자가에 관한 의미를 전체적으로 요약하듯 정리한다. 로마의 관습에서 십자가는 수치와 모멸의 상징이었으나, 여기에서 십자가는 승리의 상징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과 구원과 교회의 상징이 된다. 십자가는 신비 그 자체이다. 십자 모양보다는 타우(T) 형태에 가까운 이 표시는 여러 대상과 비교된다. 승리의 상징인 군기, 날개를 편 새,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사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교사들이 문학적인 방법으로 십자가에 대해서 이런 다양한 의미를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4세기 콘스탄티누스의 평화 이전에 십자가 상징이 시각적으로 보존된 예는 없다.
문학을 통해 십자가의 의미를 조명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십자가는 왜 시각적으로 표현되지 않았던 것일까? 250년경에 두라-에우로포스에 만들어졌던 기독교인들의 세례당에조차 십자가 형상의 흔적이 없다. 세례조 윗부분의 홍예식 궁륭에는 십자가 없이 별이 반짝이는 하늘만 표현되어 있으나, 5세기 초반경에 비슷한 모티브로 구성된 갈라 플라키디아의 묘당 천장에는 별이 반짝이는 우주의 한가운데에 빛나는 십자가가 표현되어 있다[도판 5-2]. 남아 있는 4세기 이전의 기독교적 시각예술 중에서 십자가가 표현된 것은 여태껏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십자가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 문학적으로 표현된 것과는 달리 회화적으로 표현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지표가 된다.
5-2. 우주의 중심에 있는 십자가
5세기 초반, 갈라 플라키디아의 기념당, 라벤나
반면 교회 예전에서는 일찍부터 십자가를 사용하였다. 2세기 중반 이후 3세기 초반에 살았던 테르툴리아누스는 예배를 드릴 때에 십자가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을 지나가듯 언급한다.5) 예배를 드릴 때에 들고 다니면서 사용하던 십자가를 후에 ‘성소(statio) 십자가’라고 불렀다. 성찬례가 있는 날 성직자가 십자가를 메고 성소(statio)까지 갈 때에 신자들은 그 뒤를 따라 들어온다. 로마에서는 십자가를 들고 들어가는 자를 ‘군기병(draconairus)’이라고 불렀다. 본래 군기병은 로마군에서 군기를 들고 다니던 자를 부르던 호칭이었고, 군기에는 자주 용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군기병은 크리스토그램을 달고 있는 라바룸을 들고 다녔고, 이런 이유로 교회 예배에서 십자가를 들고 들어가는 자도 습관적으로 ‘군기병’이라고 호칭했던 것이다. 그러나 4세기 이전의 ‘성소 십자가’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4세기 이후가 되어야 모자이크나 석관 등에 자주 ‘성소 십자가’의 모습이 등장한다. 도판 6-12는 아를르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 석관의 전면 중앙의 모습이다. 수염 없이 말끔한 얼굴을 한 예수 그리스도가 보석이 박힌 십자가를 오른손에 들고 서 있다. 왼손에는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가 들려 있으며, 양옆에는 그리스도의 인물 크기에 비해 3분의 1 정도로 축소된 여인이 그리스도의 무릎을 붙들고 간청한다.
아울러 아들처럼 보이는 사내아이는 ‘성소 십자가’의 끝 부분을 붙들고 간청한다. 라벤나의 갈라 플라키디아 묘실의 입구 위쪽에 있는 궁륭의 반월벽에는 선한 목자를 주제로 한 모자이크가 있다[도판 7-1]. 젊은 그리스도는 수염 없는 편안한 얼굴을 하고 황금색 옷을 걸치고 바위에 앉아 있다. 왼손은 황금색으로 된 기다란 십자가를 의지하고 있고 역시 황금색의 커다란 후광이 어깨 부분부터 감싼다. 여러 마리의 양이 바위와 풀 속에서 편히 쉬면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그리스도는 그중 한 마리 양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다. 반월벽의 궁륭은 갖가지 꽃과 식물들로 장식되어 아름답고 평화롭다. 입구 위쪽에 자리한 이 모자이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원한 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6)
6-12. 그리스도에게 간청하는 어머니와 아이
아를르의 레잘리스캉 부근, 4세기 말, 아를르 고대 박물관
7-1. 목자 그리스도
5세기 초반, 갈라 플라키디아의 기념당, 라벤나
라벤나의 성 미가엘 교회의 후진 모자이크에 묘사된 ‘성소 십자가’는 또 다른 관심의 대상이다. 미가엘 교회는 547년에 세워졌으나 후진 모자이크는 19세기에 독일 사람들에 의해 옮겨졌으며 복원을 거쳐 현재는 베를린의 보데(Bode)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후진 모자이크화에서 그리스도는 보석이 박힌 십자가를 왼손에 들고 서 있으며, 드리워진 후광에도 십자 형태의 보석이 박혀 있다. 오른손에 코덱스(CODEX)를 들고 있는데, 펼쳐진 부분에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도 보았다(QUI VIDIT ME VIDIT ET PATREM)”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EGO ET PATER UNUM SUMUS)”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성경 구절은 아들과 아버지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동일본질파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는 구절이다. 삼위일체논쟁은 교회회의의 관점에서는 318~381년까지 지속된 대논쟁으로 커다란 갈등과 분열을 낳았다. 381년 이후는 삼위일체 신학이 로마 제국의 유일한 정치 종교적 이념이 된다. 그런데 547년에 라벤나에 세워진 미가엘 교회에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본질(혹은 동일본질, homoousios)을 강조하는 신학적 입장을 모자이크를 통해 표현한 데에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다.
라벤나는 6세기 초반 고트족의 왕인 아리우스주의자 테오도릭(Theodoric)이 통치했다[도판 7-3]. 그의 치하에서 정통주의 교회들은 왕실의 호의를 입은 아리우스주의 계열의 교회들과 함께 평화롭게 공존했다. 라벤나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정복되는 것은 540년의 일이다[도판 7-4]. 정통주의 교회의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라벤나에 뿌리내렸던 아리우스주의를 근절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아리우스주의는 성자가 성부보다 열등하다는 관점을 갖고 있었는데, 정통주의자들의 눈에는 이런 교리적 모험은 신성모독이며 인간의 구원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비춰졌다. 성 미가엘 교회의 후진 모자이크는 이런 상황하에서 동일본질적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신학적이며 교육적인 목적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말씀을 한 손에 펼쳐들고 다른 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서 있다. 그리스도의 양 옆에는 미가엘 천사와 가브리엘 천사가 서서 호위하고 있다.
7-3. 테오도릭의 궁전 모자이크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교회, 527년경, 라벤나
7-4.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교회, 540-550년경, 라벤나
트리스탕(F. Tristan)은 ‘성소 십자가’를 들고 서 있는 그리스도의 시각적 표상이 315년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의 광장에 세웠던 그 자신의 조각상으로 소급된다고 생각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통치 10주년을 기념하여 로마에 와서 한 손에 십자가 표시를 새겨 넣은 커다란 창을 든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도록 하였다. 트리스탕은 성 미가엘 교회의 후진 모자이크에 나타난 십자가를 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실제로는 십자가를 새겨 넣은 창을 들고 서 있는 콘스탄티누스 조각상의 복사판이라고까지 생각한다.7)
콘스탄티누스의 군사적인 이미지는 성 미가엘 모자이크에 이르러서는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차원으로 변형되었다. 아를르의 석관에 양각된 그리스도의 모습은 보데 박물관의 십자가를 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유사성이 있다[도판 6-12, 7-2]. 석관에 표현된 예수 그리스도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다를 뿐 오른손에 십자가를 들고 왼손에 진리의 말씀을 들고 있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7-2. 예수 그리스도
라벤나의 성 미가엘 교회의 후진 모자이크, 547년, 베를린 보데 박물관
[네이버 지식백과] 기독교 문학에 나타난 십자가 (고대 기독교 예술사, 남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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